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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현대사

민족주의: 다면성과 가능성

작성자이름짓기귀찮네|작성시간21.12.22|조회수322 목록 댓글 2

 이 글은 Europa Universalis 카페의 '대한민국의 민족주의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게시글에 대한 보론과 반론을 위해 작성되었습니다.

 

0. 들어가며

 

 고전이라 불리는 책을 읽거나 깊게 공부를 하다 보면 가끔 허탈해지곤 합니다. 학술 용어가, 원 저자의 의도나 학술적 정의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정치인 등에게 인용될 때가 바로 그 순간입니다. 공룡이 닭이 되는 '진화'를 능력을 업그레이드 해가는 과정으로 그린 포켓몬이나, 인간의 개선 가능성을 누구보다 강조한 순자의 성악설이 인간을 멸해야한다는 중2병 철학으로 쓰일 때가 그 얘가 될 겁니다. 이외에도 한 분야에 깊게 관심을 가져 보신 분이라면, 이런 오해가 비일비재함을 느낀 적이 있으실 것 같습니다.

 

 역사학에도 비슷한 용어나 경구가 많이 있는데, 하나가 베네딕트 앤더슨이 <상상의 공동체>에서 남긴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다'라는 문장 역시 대표적인 사례가 아닌가 싶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를 가지고 민족이 허구의 공동체라거나, 민족 개념 자체를 부정하는 식으로 이해하는 모습이 숱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앤더슨의 견해는 민족의 형성 과정을 낱낱이 추적해서 그 발생과 기능을 제시하는 관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앤더슨은 '민족'이 근대에 등장한 개념임을 적시합니다. 그리고 역사적인 측면에서 이전의 왕조와 종교 공동체를 대체하였다고 이야기하죠. 이런 전근대적인 연대의 해체는 당시 사람들에게 미중유의 충격이었습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남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이고, 스스로의 집단을 정의하면서 안정감을 찾는 한편 스스로를 보호해 왔죠. 예를 들어서 서유럽에서 종교는 오늘날의 종교와 달리 이념과 생활 양식, 가치관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의 행적을 들으며 공감하여 눈물을 흘렸고, 자신과 다른 방식으로 신앙 생활을 영유하는 통치자가 있다면 곧 폭군이자 악마와 동일시 했습니다. 내세에 대한 불안은 모든 이들이 공유하는 것이었고요. 그러나 근대 사회의 변동으로, 종교 공동체가 주가 되는 것은 불가능한 낙원이 되었습니다.

 

 민족은 바로 이러한 종교를 대체한 세속적 개념이 됩니다. 앤더슨의 주 연구 분야는 동남아시아였는데, 동남아시아는 서유럽이나 한중일에 비했을 때 응집력을 갖춘 전근대 왕조가 부재하였습니다. 특히 그가 애정을 보인 인도네시아란, 여러 제도들을 묶은 네덜란드 식민지의 산물이었죠. 그런데 어떻게 '인도네시아인'이라는 개념이 나올 수 있었을까요? 그는 근대 사회의 변화, 특히 출판물과 인쇄물에 주목합니다. 인쇄물과 출판물을 통해, 마을이나 종교 집회 이상의 상위 조직에 대해 무지했던 사람들까지, 동일한 주제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더불어서 활자매체는 단일한 언어를 매개로 하고, 이 과정에서 언어는 중요한 구심점이 됩니다.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역시 이러한 사회적 압력과 국가의 필요에 의해 비로소 만들어진 개념인 것이죠.

 

 앤더슨은 모든 사람이 면대면으로 접촉할 수 있는 작은 마을이 아니라면, 모든 공동체는 상상에 기반하였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민족'의 등장과 그 과정에 천착하죠. 따라서, 매우 단순한 요약이긴 하지만 앤더슨은 이전의 공동체를 대체하는 새로운 개념으로서 민족의 실재와 기능을 우호적으로 보았다고 해야할 것입니다.

 

1. 역사와 다면성

 

 물론 오늘날 서구에서 민족주의에 대한 인식은 좋지 않습니다. 서구는 민족주의의 발상지였지만, 두 차례의 세계대전, 그리고 유럽 대륙에서 벌어진 유고의 내전은 민족주의를 폭력적이고 끔찍한 유혈사태의 원동력으로 인식하게 만들었습니다. 마크롱 대통령이 1차대전 종전 100주년 기념 행사에서 "민족주의는 애국심의 적"이라 이야기한 것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죠.

 

 <희생자 민족주의>는 포스트 모던 사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임지현 선생님의 저서입니다. 따라서 특정한 공동체나 기획에 몰두하는 견해를 굉장히 비판적으로 보았고, 민족주의를 따라서 트랜스내셔널한 충돌 과정 속에서 발생하는 희생자 의식의 산물로 보게 된 것이죠.

 

 그러나 민족주의의 역사적 연원과 양상, 그리고 최근의 다양한 연구를 종합하면 민족주의의 다면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는 '진보적 이념'으로서 민족주의의 기능과 민족주의의 오래된 역사, 그리고 미래를 동시에 포괄하죠. 이를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사례를 병렬적으로 제시하도록 하겠습니다.

 

1) 민족주의 이전의 민족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근대의 기획으로서 민주주의를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의 여러 연구들은, 근대 민족주의에 입각한 억지적인 재조명(토이토부르크의 게르만인은 독일 제국의 조상, 앵글로색슨은 골상학적으로 우월한 두뇌를 가졌다)을 차용하지 않더라도 원초적 형태의 민족 감정이 지방 공동체 의식 및 정치 공동체에 대한 지향과 연계 되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중세 서유럽에서도 정치 공동체의 성장과 함께 지연에 입각한 원초적 형태의 민족주의가 나타났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은 본디 독일 이외에 전 서유럽 지역에 제권imperium을 행사하는 것이 맞으나, 현실적으로 독일과 이탈리아 일부만을 장악하고 교황과 대립을 이어갔습니다. 따라서 이웃한 프랑스인 등은 신성로마제국의 독일인들이 미묘한 열등감과 경쟁의식을 가지는 대상이었죠. 따라서 이 시기 독일인들이 튜튼인이라는 명칭을 따와 스스로를 정체화하고, 주변국에게 반감을 드러낸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로에스의 알렉산더는 독일인은 트로이에서 이어져 오는 혈통적 기원이 있기에 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민족이고, 서유럽의 대표적인 민족인 이탈리아인, 독일인, 프랑스인은 협력하여 독일의 제권 아래 제국을 경영하여야 함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민족 간의 천성이 존재하며, 특히 프랑스인은 로마인의 전통을 이은 독일인과 달리 여성적으로 부정적인 천성을 지니고 있음을 명시합니다.

 

 프랑스의 경우, 국가 시스템을 가장 먼저 건설한 국가답게 일찍이 국가와 프랑스인을 연관시키는 의식이 발달하였습니다. 예컨대 카페 왕조의 오랜 프로파간다는 프랑스인의 본성을 가진 카페 왕가는 신성한 능력을 지니며, 이들이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신민들을 설득하였습니다. 교황 및 기독교와 연대했던 중세 프랑스 답게, 피에르 뒤부아는 프랑스의 원초적 민족의식은 교회와도 연관이 있는데 프랑스 왕은 가장 기독교적인 왕으로 그를 사령관으로 하는 국제 기독교 연합군을 결성할 것을 역설합니다. 물론 그 의도는 프랑스 왕권을 추앙하는 것이었고, 실제로 프랑스 왕이 십자군을 목표로 양성한 해군은 잉글랜드와의 백년전쟁에 투입됩니다. 그렇지만 정당화는 별로 어렵지 않았는데, 프랑스 왕이 하는 전쟁은 어떻게 되었든 십자군이었거든요.

 

 이러한 사례는 한국사에서도 나타납니다. 유럽과 달리 국제 인구 이동이 굉장히 적었고, 중앙집권적인 행정망을 갖춘 국가가 하나의 언어를 공유하였으니 근대의 민족주의와는 다른 종족적 정체성ethnic group에 근거하는 민족 의식은 실존하였습니다. 임진왜란은 이를 확인하고 동시에 강화시키는 계기였죠. 결론적으로 민족은, 근대적 의미에서 기획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하더라도 전근대 시대에도 그 원초적 형태가 존재하였습니다. 그리고 단선적인 발전사관을 따를 수는 없겠습니다만, 국가의 출현과 같은 서구의 역사적 전철과 함께하였죠.

 

2) 혁명과 민족 - 진보성과 다면성

 

 절대왕정이 추구하던 군사와 재정의 독점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을 무너뜨린 혁명정부에 의해 완성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강대하고 흉포한 국가의 주권을 누리는 주체는 - 기획된 '민족nation'이라는 개념이었지요. 이는 상당한 진보 그 자체였습니다. 왕권이 독점하던 주권은 백인 부르주아지 남성에게 개방되었습니다. 한편 민족 개념은 일반 민중들에게도 수용되어서, 그들은 비록 참정권이 공식적으로 부여되지 않았더라도 적극적으로 정치의 장에서 의사를 개진하였습니다. 예컨대 루이 16세를 구중궁궐인 베르사유에서 파리로 데려온 베르사유 궁 행진의 주역들은 부녀자들이었습니다. 혁명의 급진화를 이끈 것은 파리의 상퀼로트들로, 그들은 자발적으로 코뮌을 조직하여 정치 의사 결정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외국으로 도주하던 국왕을 발각한 역참장 드루에는, 지폐에 있는 왕의 얼굴 덕에 그 자가 왕인 줄 알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민족(혹은 국가)은 드디어 개별적인 봉건적 굴레에서 인간을 해방시키고, 자유와 평등을 구현하는 틀이 된 것입니다.

 

 1848년 독일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독일의 개별 자유시, 공국, 왕국들은 억압적인 체제를 유지하였습니다. 세습령은 군주의 것이었으니까요. 그렇기에 독일의 혁명가들은 독일 지역의 사람들이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그리고 보다 거대한 정치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입헌군주정이 됐든, 공화정이 됐든 자유로운 독일 국가를 명목상 하나였던 프랑스보다 어려울지언정, 반드시 통일하고자 했던 것이지요.

 

 마르크스 역시 큰 틀에서 이러한 관점을 수용하였습니다. 초기에 국제주의와 보편성을 강조한 마르크스는, 영국의 인도 식민 지배가 사회 진보에 기여할 수 있기에 긍정적이라는 평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부에 접어들며 제국주의가 본격화되고, 다양한 현상을 목도하면서 마르크스는 점차 자신의 견해를 수정했습니다. 폴란드와 아일랜드의 사례처럼, 민족주의는 계급해방과 대치되지 않으며 최종적으로 자본주의를 아래에서 압박하는 전략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물론 프랑스와 독일, 폴란드의 민족주의가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하물며 프랑스의 경우도 자코뱅과 오를레앙파, 보나파르트파의 민족주의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사회주의 정당의 경우 초기 공화국과 민족을 완전히 거부하였다가 후일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죠. 브라이언 젠킨스의 <프랑스 민족주의 - 1789년 이후의 계급과 민족>은 이러한 양상을 하나씩 추적해가며, nationalism이 아니라 복수의 nationalisms가 더 적절하다는 평을 서문에서 제시합니다. 

 

3) 현대의 민족과 가능성

 

 상술한 바와 같이 현대 서구에서 민족주의의 취급은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고, 특히 일부 정치철학자들은 새로운 형태의 민족주의를 제안하곤 합니다. 대표적으로 토머스 밀러는 90년대 <민족성에 관하여>라는 책을 펴내며 당시 서구 학계의 통념에 정면으로 도전하였습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일전에 영국에서 영국인 인종(백인)과 종교(국교도)로 정의되었으나, 최근에는 이러한 구분은 의미를 잃고 개인의 자유와 정치적 전통에 대한 존중이 중대한 기준이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더 나아가서, 그는 이주자와 토착민의 관계가 공정한 계약이며 일방이 다른 일방을 이용한다는 잘못된 인식이 퍼지지 않기를 주문합니다. 이주자에 대한 통합과 동화는 구분되어야 하며, 공통의 가치로 이들을 하나의 민족으로 묶는 지속적인 nation-building이 이루어진다면 민족이 공통의 정치적 충성의 대상으로 보편적 가치의 실현에도 기여할 것이라 전망합니다.

 

2. 민족주의가 정책을 지배할 수 있을까?

 

 원 게시글은 민족주의에 따른 여론이 한국의 외교 정책에 제약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어갈 것이라 경고하였습니다. 19세기 말부터, 외교는 국내 정치에 책임을 지는 하나의 정책이 되었습니다. 여론을 무시하는 외교는 장기적으로 오래 갈 수 없음이 모두 증명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외교 정책을 결정하는, 대중과 구분된 이들이 존재하며 이들은 때때로 민족주의를 의도적으로 조장하기도 하지만 이를 교묘하게 파회하기도 합니다.

 

 민족주의에 따른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국제정치학에서 볼 때 국가의 정치 체제를 중요시 여기는 자유주의와의 유사점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떠한 국제정치이론도 한 국가의 외교 정책 결정 과정에 대한 절대적인 메커니즘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민족주의가 국가를 이끌 수는 있으나, 원론적이지만 국가의 국력과 국제정치 문화, 다른 국가와의 관계, 그리고 정치체제 등은 이를 얼마든 역행할 수 있는 요인이 됩니다.

 

 한편 민족주의는 상황에 따라 변할 수도 있습니다. 1차대전 직전 영국의 여론은 건함경쟁을 벌이던 독일을 상대적으로 같은 게르만인 문명국가, 동맹인 러시아를 야만 국가로 보는 시각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세력 균형과 동맹의 연루가 복잡하게 얽히며 영국은 독일과 전쟁에 나서게 되었고, 전쟁이 진행되자 1년만에 독일인을 아이를 잡아먹는 식인종이라 묘사하는 팜플렛이 퍼졌습니다. 한국에서 일본에 대한 적개감이 기성세대에서는 문화 영역에 나타났다가, 최근에는 문화 영역을 긍정하되 정치적 우경화를 분리하여 경계하는 방향으로 변모하였습니다. 이처럼 민족주의는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끝으로 원 게시글에서 짚어주신 중요한 부분은 한국의 민족주의가 혈연과 언어로 연결된 조선족을 배제하는 방향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원 게시글은 이를 한국 민족주의의 폐쇄성이라 이야기하셨지만, 저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상술한 '복수의 민족주의'의 양상이라고 봅니다. 저는 보다 협소한 관점에서, 오늘날 한국 우파의 민족주의는 '남한의 내셔널리즘'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한국의 우파 민족주의는 남한의 국익과 조선족 등에 대한 차별을 내세우면서, 동시에 북한을 타자화하여 적대적 세력으로 묘사합니다. 반면 한국 좌파 진영은 북한을 로맨티시즘적인 관점에서 자주 국가로 치켜세우기도 했고, 북한과 한 겨례라는 인식을 기본적으로 공유합니다. 이는 박정희식 민족주의에 대항하여, 권력 수단이 부재한데도 학생 운동의 엘리트가 만들어낸 또다른 복수의 민족주의라 할 수 있겠지요.  조선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좋지 않으나, 이를 긍정하는 형태의 민족주의가 출현할 가능성도 열려 있습니다. 더불어서 민족주의의 다양성은, 단일한 민족주의가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함을 방증합니다.

 

3. 결론

 

 이상의 논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희생자 민족주의>의 주장 이외에도 사학계는 다양한 형태의 민족주의가 존재하였음을 밝혀냈다.

2. 단일한 요소가 대외정책 전반을 지배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힘든 일이다.

3. 따라서, 복수의 민족주의가 존재하는 한국에서 이른바 희생자 민족주의가 모든 대외정책 결정 과정에 영향을 미치기는 어렵다. 동시에 역사적 및 정치철학적 관점에서 민족주의가 보편적인 가치의 실현에 긍정적으로 기여할 가능성 또한 부정할 수 없다.

 

4. 기타

 

 여러 문헌과 강의 등으로 가지고 있었던 지식을 적당히 섞어서 글을 썼는데, 참고서적이 일일이 다 기억나지는 않고..ㅎ; 혹시 추가적인 사항이 알고 싶으신 분이 계시다면 다음 서적들을 추천드립니다.

 

 1999 임지현 <민족주의는 반역이다 - 신화와 허무의 민족주의 담론을 넘어서>

임지현 선생님의 초기 논문을 묶은 책으로 민족주의 전반과 마르크스, 앵겔스의 민족주의 인식 등이 주요 주제입니다. 상대적으로 개설서의 입장에서 보기에는 <희생자의식 민족족주의>보다 낫다고 봅니다.

 2011 브라이언 젠킨스 <프랑스 민족주의 - 1789년 이후의 계급과 민족>

글에서 소개한 것보다 훨씬 상세하고 풍부한 서술로 대혁명 이후 프랑스 민족주의의 기능과 다양성, 변천을 제시합니다.

 2011 John A. Armstrong <Nations Before Nationalism>

민족주의의 본격적 도래 이전 원초적 형태의 민족 감정에 대해 다룹니다. 근래 서양 사학계의 논의를 충실히 담고 있습니다.

 2016 박찬승 <민족. 민족주의>

한국의 다양한 민족주의 양상을 소개하는 최근의 서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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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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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우라 | 작성시간 21.12.22 우와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작성자드랍 | 작성시간 21.12.22 오...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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