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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현대사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은 독립군의 학살극 때문에 죽었을까요?

작성자신룡기2|작성시간21.12.22|조회수305 목록 댓글 2

한국에서 최근 줄기차게 주장되는 '니항사건' 때문에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이 살해되었다는 주장은 과연 사실일까요 ?

러시아 역사학계에서도 사실로 인정하는 것일까요?

(답 : 전혀 아닙니다. 1920년 2월의 니항사건과 일제가 제2의 니항사건이라고 주장하는 1920년 10월초 간도 '훈춘사건'에서 일본인이 다수 죽은 것은 인정을 하지만, 원인은 일본의 침략 때문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최재형 선생

2021. 4. 9. 연해주 우수리스크시의 고려인문화센터에서 열린 101주년 1920년 4월 4일 ~ 4월 5일 일본 침략군의 4월 학살 추모식입니다.

일본군이 1920. 4. 4. 일 밤부터 극동의 대도시 하바로프스크, 블라디보스톡, 우쑤리스크, 스파스크, 이만 등지에서 대규모 공격을 가해서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을 비롯하여 한국계만 수천여명 이상 (러시아인 포함 7,000여명 이상) 학살한 슬픈 역사입니다.

매년 추모식이 열렸는데, 2021년 올해는 조금 규모가 작았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러시아에서는 니항사건 때문에 4월 참변이 일어나 최재형 선생 등이 살해되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은 아무리 찾아봐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 물론 친일? 학자 중에는 있을 수 있습니다.)

https://youtu.be/2mvQe1NYpYo

2021년 4월 참변 추모식

https://youtu.be/wrV_uRQma2s

과거의 4월 참변 추모식. 매년 연해주에서 추모식이 열린다. 그러나, 러시아에는 독립군의 학살극 때문에 최재형 선생이 살해되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을 찾을 수는 없다.

 

https://youtu.be/jvXkO-N6bts?t=14

​뉴스에도 자주 보도되는 연해주 고려인 권시장

 

https://www.adm-ussuriisk.ru/news/novosti/v-ussuriyske-pochtili-pamyat-geroev-pogibshikh-v-borbe-s-yaponskimi-interventami/]

전세계적으로 보기 드물게 한국의 일부 도서와 위키백과 작성자에게서만 사실로 인정받고 있는 A.Y.구트만의 책. 104쪽.

'니항에서의 죽음(Гибель Николаевска на Амуре)', 영문번역본 도서명 '니항의 파괴(The Destruction of Nikolaevsk-on-Amur)'

 

한국의 일부 도서와 내용이 동일하다.  일본에서도 파쇼주의자가 아닌한 이제는 사실로 인정되지 않는다.

 

 

A. Y. 구트만의 주장

아나톨리 야코블레비치 구트만 Гутман, Анатолий Яковлевич (Anatoly Yakovlevich Gutman. 여러개의 가명 사용, 친일 반공주의자, 파시스트 활동 가담)

A. Y. 구트만의 책 러시아명 '니항에서의 죽음(Гибель Николаевска на Амуре)', 영문번역본 도서명 '니항의 파괴(The Destruction of Nikolaevsk-on-Amur)' 를 살펴보면

트리피츤 부대가 일본인들과 평화롭게 거주하고 있던 니항(니콜라예프스크)을 포위하여

1920. 2. 29. 무력으로 강제 점령한 즉시 대규모 학살, 강간, 약탈, 강도짓을 한다.

즉시, 1500여명 이상을 체포해 감옥에 수감하고 온갖 방법의 고문, 강간, 살인을 저지른다.

참다못한 구세주 일본군과 백파군대, 니항에서 존경받는 사람들이

1920. 3. 12. 일 단순 무장해제만을 시키기 위해 궐기하자,

트리피츤 부대는 인류 역사에 없었던 무자비한 학살극을 저질렀다.

1920년 5. 22일, 5.23일, 5. 24일 니항 주민 3,000여명이 학살당했다.

최종 학살당한 사람은 공식적으로는 6,000여명이지만, 실제로는 10,000여명이 넘는다.

=====구트만의 책 요약 =====
1920년 3월경 붉은 파르티잔 야코프 트리피츤 일당에 의해 아무르강 하류의 니콜라예프스크(Nikolayevsk) 시가 함락됨.
이후 일본군 수비대를 파괴함.
주민 학살 및 지역 약탈.
그리고 결국에는 완전한 파괴에 대해 이야기하는 희귀한 책.
일본의 보복 위협으로 타이가 숲으로 철수.


(1) 서문에서:
“사할린주 지역은 1920년 3월 1일부터 ~ 6월 2일까지 3개월 동안 러시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이름으로 통치되었습니다.
(구트만이 주장한 날짜는 한국 독립기념관 공식도서의 날짜와 동일하다. 독립기념관도 구트만 주장을 그대로 베껴서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이 기간 동안 이 지역의 볼셰비키 파르티잔 대표자들은 실수로 탈출한 한 명을 제외한 모든 백파 장교들을 총살하고, 찌르고, 익사시킨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파르티잔들은 농민과 노동자, 노인, 여성과 어린이, 일본 영사관과 함께 일본인 거주지 전체를 파괴했다.
파르티잔들은 전체 니콜라예프스크 시내를 불태우고 파괴했습니다. "

이 책은 1920년 8월 16일 이 지역의 인구 밀집 지역(니콜라예프스크 시내)에서 71명의 대표로 구성된 사할린 지역 의회에서 통과된 결의안으로 시작합니다.
이 문서는 이 책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2) 니콜라예프스크의 비극을 세상에 알림
짧고 독창적인 표현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재산을 잃은 니콜라예스프의 유골 위에 모인 러시아 사람들은 그들의 끔찍한 비극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습니다.

지금까지 볼셰비키 정권 창출자들의 잔학 행위는
인류의 암흑기 역사에서 나온 다른 유혈 에피소드에 대해 읽어야 했던 모든 것보다,
아무르 지역의 니콜라예프스크에서 일어났던 공포 앞에서는 창백해졌습니다.

3/4세기 동안 러시아 사람들의 여러 세대에 걸친 노력으로 만들어진 도시 니콜라예프스크(니항)는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도시의 인구는 거의 완전히 학살되었다.

학살 당시 사망한 사람들의 수는 공식적으로 약 6,000명으로 추산되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습니다.
(※ 구트만은 책 본문에서 니항 주민 1만여명 이상 학살되었다고 씀)

1920년 6월 초에 도시에 진입한 일본군은 거리에서 타버린 재와 썩어가는 사람들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러시아 트리피츤과 볼셰비키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공산주의자, 소비에트 정권의 대리인은 제 3 인터내셔널(코민테른)의 피 묻은 슬로건은
부르주아지, 지식인, 장교의 살해와 머나먼 버려진 땅을 만들었습니다.


(3) 트리피츤 부대와 학살자들의 만행
슬프게도 러시아 노동자와 농민, 죄수 폭도, 반 야만적인 외국인, 조선인, 중국인도 학살에 가담했다.
피가 개울에 쏟아졌고 번성했던 부유한 도시는 말 그대로 폐허로 변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과 단절된 우리의 머나먼 변두리에서 3개월 동안 계속되었던 지옥의 모습을 제대로 그릴 수 있는 것은 펜의 힘이 아니다.

폼페이우스를 멸망시킨 베수비오 화산조차도 니콜라예스크의 붉은 파르티잔의 만행보다 더 자비롭습니다.
로마 폼페이의 인구는 탈출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4) 구트만의 책에 등장하는 백파측 33명의 증인
나(구트만)는 이 작업에서 기적적으로 죽음에서 살아남은 유혈 범죄의 목격자와 희생자에 대한 33명의 증언을 포함하여 수많은 문서를 수집했습니다.
(※구트만의 이 자료는 오늘날 미국의 저명학자 존 J 스테판의 여러 저작물과 한국의 공식적인 도서들에서 사실로 인정받았다. 구트만의 책에 나오는 백파장교의 주장은 한국 인터넷에서 사실이라고 주장되기도 한다.)

이 냉담한 문서는 어떤 예술적 색채보다 더 멀리 사할린주의 중세 시대 공포를 서술합니다.

이 문서들을 읽으면 숨이 가빠지고 피가 차가워집니다 ...
이성은 피에 굶주린 짐승으로 변한 도덕적 기초, 양심 및 인간 의식이 없는 행동,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으로 믿어지지 않습니다........
러시아 내전 비극의 이례적인 행위가 사할린주 지역에서 펼쳐졌다.

사탄 자신이 이 땅에 내려와 그의 피의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는 인간과 그의 모든 제도, 그의 문화, 도덕 및 양심에 화를 냈다.

사탄은 보여주었다.
"분노에 찬 사람이 짐승보다 더 무섭다"는 것을 보여준다.

-A. Y. 구트만-

한국 일부 도서의 주장 (구트만, 이오키료조의 주장을 복사한 내용을 반복해서 주장)

세계적으로 니항사건을 러시아 민간인 학살극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많지 않으며,

대부분 한국에 많다. (러시아, 중국에는 찾기가 힘든다. 아직도 일본군이 구세주라는 사람이 있기는 있다.)

2000년대 초반부터,

구트만, 이오키료조의 주장을 그대로 인정하여, 독립기념관 공식도서를 비롯한 각종 도서를 작성하여 왔다. (존 J 스테판 교수의 주장을 인용하였으나, 존 J 스테판이 인용하는 책이 A.Y.구트만의 책과 일본 침략주의- 파쇼주의자의 책이다.)

니항사건 때문에 최재형 선생과 고려인 들이 학살당했다고 주장하는 최근 발행 도서들

한국의 일부 도서들 중에서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 (A) History of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 49; 1920년대 전반 만주 러시아지역 항일무장투쟁》.  25쪽.

이에 일본정부는 "일본인민의 생명을 보호한다"는 구실하에 원동 무장간섭을 더욱 강화하였다.
아무르강의 통행을 가로막고 있던 얼음이 풀리기 시작하는 1920년 5월말 일본원정군의 입성에 임박하여 러시아빨치산부대는 니콜라예프스크항을 철수하면서 136명의 일본인 죄수들과 약 4천명의 러시아인어른, 아이들을 학살하였고, 도시를 완전히 불태웠다.

니콜라예프스크항에 입성한 후 일본은 7월 3일 북위 51도 이북 사할린섬을 점령하고 '니항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철수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1920년 4월 4~5일 밤에 일본군에 의한 연해주 각지에서 러시아혁명세력과 한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과 공격은 니항사건에 대한 일본군의 보복적 반격의 성격이 강하다.
(이 내용은 이오키료조 등 파쇼주의자들과 A.Y.구트만의 주장과 완벽하게 동일하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 (A) History of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 49; 1920년대 전반 만주 러시아지역 항일무장투쟁》.  26쪽.

트랴삐친은 브라고베시첸스크로 들어가 이 지역의 막시말리스트들과 합류하여 원동공화국(완충국안)을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하기로 계획하였다. 철수직전인 5월 하순 트리야삐친은 엄청난 규모의 테러를 자행하여 3천여명에 달하는 주민들을 처형하였으며, 5월 24일 ~25일 감옥에 남아 있던 130명의 일본인들을 처형하였다. (거류민은 12명, 나머지는 군인)
이어 5월 30일, 6월 1일~2일 니콜라예프스크 시를 방화하였다.

6월 3일 니콜라예프스크항에 도착한 일본 구원대에 의하여 이 트랴피친의 만행소식이 일본에 알려져 크게 보도되어 러시아혁명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하였다.

'니항사건'은 일본침략군에 대한 철병 여론을 되돌리고 이에 더하여 사할린북부를 점령하는 명분을 제공한 결정적 전환점이 되고 말았다.

출처 : https://search.i815.or.kr/data2/ebook/history/049/index.html?startpage=27
《 존경받는 지도자 최재형 》, 2020년, page 99

캄차카 반도의 페트로 파블롭스크 일본영사관은 3월 18일 니콜라옙스크항으로부터 온 전보를 다음 날인 3월 19일 외무성 본부에 타전하였다. "3월 18일 내전에 의하면 동시에서 일본군과 과격파간에 2주야에 걸친 격전이 있었고, 그 결과 당지 주둔 군대 및 재류민 약 700여명이 살해되고 남은 약 100명이 부상해 사령부 영사관 기타 방인 가옥은 전부 불타버렸다."라는 내용이었다. 3월 19일 외무성이 접수한 이 전보의 내용이 일본 국내의 각 신문에 보도되어 "니항의 참극"에 관한 비보가 알려지면서 일본 대중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고, 1~2월에 분분했던 철병론이 가라앉으면서 "과격파의 폭학"에 분개하는 여론이 팽배해졌다.

이에 일본 정부는 "일본 인민의 생명을 보호한다"라는 구실하에 원동의 무장 간섭을 더욱 강화했다. 아무르강의 통행을 가로막고 있던 얼음이 풀리기 시작한 1920년 5월 말 일본 원정군이 입성에 임박하자 러시아 빨치산 부대는 니콜라옙스크항에서 철수하면서 136명의 일본인 죄수와 약 4,000명의 러시아인(어른과 아이를 포함해) 을 학살했고 도시를 완전히 불태웠다. 니콜라옙스크항에 입성한 후 일본은 7월 3일 북위 51도 이북 사할린을 점령하고 '니항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철수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중략)

(한국에서 이러한 책자들이 계속 출판되기 이전에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니항사건은 독립군이 기습공격을 가한 일본 침략자를 격파한 승리로 알려져왔다. 오늘날 러시아 역사학계에서 '니항사건'을 민간인 학살로 규정하는 한국의 몇명, A.Y.구트만(Гутман Анатолий Яковлевич), 이오키료조(五百木良三)의 이론을 동의하는 사람은 찾을 수 없다.)

<A.Y. 구트만의 주장을 그대로 인용하는 도서들 : 항일 혁명가 최호림과 러시아 지역 독립운동의 역사, 한울아카데미>

 

한국의 일부 도서는 A.Y.구트만(Гутман Анатолий Яковлевич)의 책보다 더 심하게

날짜를 짜깁기하여...  (보통 날짜를 허위로 고치면, 조작으로 간주된다.)

          1920년 니항사건 연표

1917. 10.월경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 발생, 러시아 서부 모스크바 등에 공산당 집권
1917. 10. 월경 볼셰비키 지지자들이 아무르강 하류의 사할린주 주도였던 니항(니콜라예프스크)을 해방시킴
1918. 8. 2. 일경 일본군이 체코군단 구원 등을 내걸고서는 동시베리아의 니항과 사할린섬 북부 등을 공격하여, 볼셰비키들을 학살하고 니항을 점령.
니항, 연해주, 아무르주 일대에 백파계 괴뢰정부 수립 (일본 용어로는 '시베리아 출정', 혹은 '시베리아 출병')
니항의 지배층 102명 일본 천황에게 청원서 제출
일본군은 다른 시베리아 간섭국가들의 목적이 아닌 중국령 만주 및 만주 동청철도 일대, 간도, 동시베리아 사할린주 등을 침략하여, 잦은 민간인 학살을 감행
니항(니콜라예프스크 나 아무레)에 일본군 병영건물, 일본인 성매매업소, 일본인 집단거주지 등 건립



1919. 10. 월경 파르티잔들에 의해 하바로프스크와 니항간 통신선 차단
1919. 11. 2.~11.3. 일경 하바로프스크 인근 아나스타시요프카(Анастасьевка) 마을에서 파르티잔 회의

1919. 11. 20. 일경 하바로프스크 인근에서 트리피츤이 약 35명의 파르티잔들과 니항 해방을 위해 출발

1919. 12월~1920. 1월경 니항주변 백파 군대 1,400여명 트리피츤의 파르티잔 부대에 투항
1919. 12월경 니항에 있던 중국군과 일본군 중립선언
1920. 1월경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페트라파블로프스크 가 볼셰비키에 의해 해방

1920. 1월경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볼셰비키 러시아에 대한 간섭전쟁에서 철군, 미국도 곧이어 철군함
1920. 1. 20. 일경 트리피츤 부대가 니항과 츠니르라흐 요새 인근에 도착, 교전이 벌어져 니항 인근 백파군대 100여명 사상자 발생

1920. 2. 29. 트리피츤 부대에 의해 니항이 평화적으로 해방됨. 파르티잔 약 3천에서 4천명중 조선인부대는 약 200여명
1920. 3. 12. 일 밤중 일본군, 일본거류민, 백파가 합세해 파르티잔들을 기습공격(일명 반자이 야습), 볼셰비키 수백명 사망, 수백명 부상. 독립운동가 리흥진 선생 등 전사
1920. 3. 13. 일경 중화민국 함대가 니항의 일본 영사관 등에 함포 포격. 일본인 이시다 영사의 부인과 딸이 사망(파르티잔에게 항복하는 대신 방화후 집단 자살 추정)

<항복 대신 집단자살을 선택한 일본거류민들과 일본 영사관 직원들>

1920. 3. 15. 일경 반자이 기습을 감행했던 니항의 일본군 상당수가 항복, 일본군 측 전사 약 600여명, 포로 약 132명 (포로수는 자료마다 다르다).
일본거류민중 상당수가 항복 대신 광기어린 집단자살 감행.
반자이 기습에 동참하지도 않았고 포로가 되지도 않은 일본거류민들은 나중에 일본에 생환해서도 냉대를 받았다고 함.

1920. 4. 1. 파르티잔 장례식 실시, 독립운동가 리흥진 선생 등 매장. 니항사건 추모비 건립됨 (파르티잔 전사자 124명 이상, 부상자 수백명)


1920. 4. 4. ~ 4. 5. 일경 일본군이 연해주 일대에서 4월 참변을 일으켜 조선인, 러시아인 수천명 이상 살해
-일본의 하라 테루유키(原暉之) 주장 2,000여명 살해, 러시아측 주장 7,000여명 이상 살해
-저명 친일학자 존 스테판 (존 J. 스테판)은 일본군측 1,000명 사상, 볼셰비키측 3,000명 사상이라고 주장

<일본의 지원으로 저술 활동을 한 미국의 존 스테판 교수>
<존 스테판 등이 주장하는 1920년 6월이후의 북화태(북사할린섬) 보장점령설이나 북위 51도 이북 점령설은 조작극임>

1920. 4. 21.~ 4. 22. 일경 사할린주 사할린섬 북부의 알렉산드라프스크 항구를 일본군이 공격하여 사할린섬 북부 유전 등 장악하고 괴뢰정권 수립
(※미국의 유명 친일학자 존 스테판 교수(존 J. 스테판)는 일본이 1920년 7월 니항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북사할린섬을 공격했다고 조작함)



1920. 4. 22. 트리피츤이 오호츠크 전선 사령관 임명됨
1920. 5. 23. 일경 니항거주 중국인 2,000여명 상류로 대피, 니항거주 러시아계 주민들 상류 께르비 등으로 대피 시작
1920. 5. 24. 니항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일본군 등 약 122명 처형 (136명 이라는 설도 있다.)
1920. 5. 25. 일경부터 일본군 니항에 접근
1920. 5. 28. 일경부터 트리피츤 부대 니항에 방화. 일본군의 포격에 의한 파괴도 있었음
1920. 6. 3. 일경 일본군 니항 재점령. 일부 파르티잔 일본군에 항복
1920. 6. 23. 한국내의 신문인 동아일보 등이 제1면 특별 보도로 니항의 일본군 참살 사건과 일제의 침략주의 야욕을 보도함

1920. 7. 7. 일경 과거 니항에서 백파 포병 부대원으로 근무했던 안드레예브 등이 일본군의 감시지역을 방조아래 통과하여 께르비의 트리피츤과 동료들을 기습하여 체포함. 김낙현, 박병길, 이지택 등이 안드레예브 측에 가담
(독립유공자 박병길의 동료인 안드레예브는 1921년 스바보드니에서 발생한 자유시참변 당시 독립군 처형에 관여하였고, 나중에는 일본군편으로 도주함)

1920. 7. 9. 께르비에서 트리피츤, 레비제바, 사소프 등 체포되어 처형됨. 일부 파르티잔이 재판받지 않았음에도 처형당함
1920. 7월경 중화민국, 미국, 영국 등이 일제의 만주 동청철도 점령과 북사할린섬 점령을 인정하지 않음을 발표

1920. 8월경 미국은 일본군의 북사할린섬 점령을 비난하고, 캘리포니아주내에 일본인 토지 소유를 금지
1920. 9. 5. 일경 아무르주에서 온 베즈드닌 등에 의해 트리피츤 부대가 아무르주 자유시로 이동하여 보병 제19연대에 편입되기로 결정됨
1920. 10. 12일경부터 과거 트리피츤 부대가 걸어서 아무르주 자유시 도착하여 보병 제19연대로 편입. (민간인들은 배를 타고 상류 도시로 일부 이동)

1920. 10. 22.일경 극동공화국 2군단과 한인 보병자유대대 등이 합세하여 과거 트리피츤 부대였던 제19연대 무력으로 강제 해산함, 제19연대에 편입되었던 박일리야의 한인 니항부대는 오하묵의 한인 자유대대로 편입됨.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의 대결 노골화

1920년 ~ 1921. 8. 21. 일경까지 대련회의 시작되어 일제 시베리아 간섭군의 철군조건 등을 검토, 일제는 한국독립군의 무장해제와 니항사건 등의 보상 등을 요구함
일제는 북위50도 이북의 북사할린섬과 사할린주 일대에도 괴뢰국가 건국과 일본대사관 설치를 획책함


1922. 10. 2. 일경 일본군 니항에서 철수
1925. 1. 20일경 일소기본조약(日蘇基本條約) 체결. 일본이 사할린섬 북부에서 삼림•석유•석탄 채굴권 등 획득
1925. 5. 14.일경 사할린섬 북부의 일본 군인은 철군
1944. 3. 30일경 일본이 사할린섬 북부의 유전 및 석탄지대에서 철수 결정
1945. 8. 15. 2차세계대전 일본 항복후, 소련이 사할린섬 전부와 쿠릴열도까지 획득

(수정중입니다.)

트리피츤 부대에 의해 처형된 사람들은 주로 극단적인 친일파와 살인자, 식량분배에 반대한 자들로

불과 수십여명밖에 안된다는

러시아 역사학계의 주장과는 완전히 정반대되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일본군 포로 처형은 1920. 5. 24일 발생하였으며,

4월 참변은 4.4.일에서 ~ 4.5일 일어나,

일본군이 기울어져가던 시베리아 침략전쟁을 뒤집기 위해 '4월 참변'이라는 대규모 학살극을 감행해 무고한 민간인 수천여명을 학살했기 때문에

니항의 일본군 포로가 보복 살해되었다는 러시아 역사학계의 주장과는 정반대 되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군이 사할린 섬 북부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은 1920년 7월이 아니며, 1920년 4. 21.경부터 사할린섬 북부의 알렉산드라프스크 항구를 공격하여

사할린섬 북부 유전과 광산 일대의 파르티잔 토벌과 민간인 학살에만 몰두하고 일본인 포로구출에는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일본군 포로가 처형된 것이다.  (이것이 러시아, 중국, 미국 역사학계의 정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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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1.12.22 니항사건과 훈춘사건의 원인은 일본의 침략때문이고 최재형 선생 은 일본 침략군의 4월 학살 때문이군요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12.22 예, 러시아 - 중국 -북한 - 한국의 주류 이론이 그러했습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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