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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현대사

[펌] ‘러시아 현대사’에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

작성자워라|작성시간22.01.12|조회수288 목록 댓글 0

http://www.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24&table=c_booking&uid=534

 

‘러시아 현대사’에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 ①

 

사회주의 국가 소련이 해체된 것은 1991년 크리스마스 날이었다. 이 날 고르바초프가 사임하고 러시아가 독립했다. 이로써 사회주의 연방 소련은 붕괴하였다. 소련 붕괴 이후 많은 사람들은 말을 아꼈다. 진보 지식인 특히 사회주의자들은 유구무언이었다.

 

 

『20세기 러시아 현대사』(존 M 톰슨, 사회평론, 2004)의 저자는, “이솝 우화와 달리 소련의 이야기에는 어떤 교훈도 없다”고 했지만 정말 그런 것일까? 왜 1917년의 눈부신 이상은 실현되지 않은 것인지,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라는 혁명의 꿈은 왜 악몽으로 변해버렸는지, 아무도 쉽게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 답은 어디에 있는가? 소련이 붕괴하고 4반세기가 지난 오늘 중국과 베트남과 조선에 그들의 엷은 흔적이 남아 있다. 그렇다면 중국, 베트남 조선과 소련이 다른 점은 무엇인지에 그 답이 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인지?

 

20세기 러시아 역사처럼 파란만장과 우여곡절로 점철된 현대사도 없을 것이다. 『20세기 러시아 현대사』가 깨알 같은 활자로 776쪽이나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책을 기본으로 하되 5,6권의 관련 서적을 추가하여 러시아 현대사를 최소한으로 압축해 보고자 한다. 최소 10회 이상의 글을 올려야 할 것 같다.

 

러시아가 우리 민족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미국과 중국 다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러시아는 우리의 큰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20세기 들어 러시아에서 전개된 두 차례의 대변혁, 즉 러시아혁명과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는 특히 중요하다. 게다가 러시아가 개입한 러일전쟁과 2차세계대전과 냉전체제와 6.25 전쟁 등은 우리의 역사와도 밀접히 관련된다.

 

우리는 러시아의 정치와 역사 외에도 문학과 음악에 대한 관심도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근세 이전까지만 해도 상대적으로 뒤져 있던 러시아의 문학과 음악은 18세기가 지나며 폭발적으로 성장하여 명실 공히 인류 최고 수준으로 자리 잡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관심은 1차적으로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을 성취한 러시아’에 있다. 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사회주의를 표방한 소련이라는 국가의 성격이다. 사실 레닌 사후 소련은 대내적으로는 사회주의였을지 몰라도 대외적으로는 이전 러시아 제국이 지녔던 국가주의와 제국주의적인 성격을 버리지 않았다. 이는 마치 구미제국이 대내적으로는 데모크라시를 실천했는지 몰라도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의 악성을 견지한 역사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20세기 초반 러일전쟁 때 러시아가 미국, 일본과 담합하여 자국의 이권을 취하는 대신 일본의 조선 독점을 용인한 사례를 우리는 선명히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또한 러시아는 1945년 조선(북) 정권의 수립과 분단 그리고 이후 최소 15년 이상 조선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또한 러시아는 1990년 수교 이후 한-소간 경제협력과 인적, 물적 교류가 활성화되면서 우리의 가까운 이웃으로 개방되었다.

 

한편 러시아의 문학과 음악은 우리에게 일정한 동경심을 자극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나는 푸시킨,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체호프, 고리키 같은 러시아 작가들과 무소르스키, 차이코프스키, 라흐마니노프 같은 음악가들에 대해서도 조금씩이나마 언급하려 한다.

 

동서로 1만 킬로, 남북으로 4,000킬로에 걸쳐 유라시아 대륙의 40%를 점하고 있는 러시아는 ‘거대한 대지’의 나라이다. 러시아의 영토는 남북을 합친 면적의 100배, 중국과 미국을 합친 것보다 넓다. 이 광활한 영토에 비해 러시아의 문화 수준은 근세 이전까지 열세였다.

 

고구려가 만주 벌판을 경영하고 백제가 황해를 중심으로 해상왕국을 건설할 무렵 러시아는 부족 단위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우리의 남북조시대, 즉 신라와 발해 시대 무렵에야 러시아는 최초의 국가다운 국가 키예프를 세울 수 있었다.

 

그들은 우리의 고려시대 때에서야 최초의 기록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이 러시아는 19세기 들어 문화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러시아는 문학, 음악뿐 아니라 회화, 무용, 연극, 오페라 등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룩했다. 이런 문화적 성장의 비결을 밝히는 것 역시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 든다.

 

또한 우리는 러시아의 ‘프라브다’와 ‘볼랴’의 꿈을 공유할 수가 있다. 프라브다는 진실, 진리, 볼랴는 자유, 의지의 뜻을 지닌다. 우리는 프라브다와 볼랴를 동시에 실현하고자 한 러시아 인민들의 미완의 희망에 연민과 공감을 갖는다.

 


소련과 러시아는 어떻게 다른가 ②

 

러시아에 국가다운 국가가 세워진 것은 9세기 때의 일이다. 이전의 러시아 땅은 여러 이민족이 번갈아가면서 들어와 지배했다. 전설적인 러시아 역사를 담고 있는 『원초연대기- 지나간 세월의 이야기』는 12세기 초 한 수도사의 의해 쓰였는데, 이에 따르면 노르만 족의 일파인 바랴기(바이킹)가 슬라브 인의 요청으로 러시아 땅에 내려와 키예프 루시를 건설했고 이로부터 러시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물론 러시아 땅에도 일찍부터 신석기와 토기와 청동기를 사용하는 농경문화가 형성되었다. 다만 기록상으로 존재하지 않을 따름이다. 고대 러시아에 형성된 최초의 문명은 스키타이 문명인데 그들의 주체는 이란계 유목민과 그리스-이란 문화 세력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AD 4~9세기 남러시아는 아시아 계 이민족의 지배를 받게 된다. 러시아의 대지는 크게 보아 북의 삼림지대와 남의 초원지대로 구분된다. 슬라브 인들은 언제나 남쪽의 광활한 초원지대에 마음이 끌렸다. 초원지대는 경관이 아름다웠고 땅이 기름졌다. 소설가 고골은 <타라스 불바>에서 남쪽 초원지대의 정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해 놓았다.

 

‘그 무렵 러시아 남부는 온통 푸른 잎으로 덮인 처녀지였다. 야생의 잡초가 끝없이 물결치는 토지는 한 번도 쟁기로 찍힌 일이 없다. 그곳에 숨어사는 말떼들이 높이 자란 풀들을 짓밟으며 지나간 자국이 군데군데 보일 뿐이다. 세상에 이토록 아름다운 곳이 또 있을까?’

 

슬라브 인들이 이 초원지대를 동경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비교적 강성했던 11세기 전후의 키예프 루시 시대를 제외하고 16세기에 이르기까지 초원지대의 주재자는 아시아 계 유목민족이었다.

 

러시아 국가 체제의 원형은 동슬라브 인이 주체가 된 ‘루시의 나라’였는데, 그 중심이 된 것이 키예프였기 때문에 ‘키예프 러시아’라고도 부른다. 이 키예프 러시아가 몰락한 후 짧은 기간의 블라디미르 대공국 시대를 거쳐 모스크바 대공국이 부상했다. 이 과정에서 동슬라브 인은 모스크바 중심의 대러시아 인, 키예프 중심의 소러시아 인, 서부 벨루시아 인의 셋으로 갈라졌다.

 

이후 더욱 강성해진 모스크바 대공국은 16세기부터 시베리아로 진출하면서 17세기에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우크라이나를 병합하면서 대제국의 기반을 닦았다. 이때까지 러시아라는 이름을 쓰지 않고 ‘루시’라는 옛 이름으로 국명을 사용했다.

 

‘러시아’가 정식 국명으로 채택된 것은 18세기 초 표트르 대제 때 제국이 형성되면서부터였다. 백, 청, 적의 삼색기가 국기로 사용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이제 러시아 제국은 유럽 방면의 발트 지방과 우크라이나, 아시아 방면의 시베리아까지 장악하게 되었다.

 

이후에도 러시아 제국은 급속도로 확장되어 핀란드와 폴란드의 일부, 중앙아시아, 극동 연해주 지방을 복속시켰다. 이렇게 하여 러시아 제국은 19세기 말부터 1차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까지 최대의 판도를 이룩했다.

 

러시아 제국은 1917년 혁명으로 붕괴되었다. 10월혁명 후 러시아에는 러시아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이를 기화로 핀란드, 폴란드, 발트 3국이 독립하여 떨어져 나갔다. 1922년 러시아 공산당이 지도하는 4개의 소비에트 공화국, 즉 러시아, 벨로루시, 우크라이나, 자카프카스 연방의 대표들이 모여 국명에서 러시아를 빼버리고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을 결성했는데 이것이 곧 소련이었다.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은 역설적으로 팽창주의 정책을 추구하여 중앙아시아를 소비에트로 만들었고 극동공화국을 병합했으며 1940년에는 발트 3국마저 병합했다. 또한 소련은 루마니아 령 베사라비아까지 점령하여 총 15개의 공화국 연방으로 확장되었다. 이에 따라 소련은 과거의 러시아 제국 최대 판도에서 폴란드와 핀란드를 제외한 광막한 영토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점에서 소련은 러시아 제국의 계승자였다고도 할 수 있다.

 

소련은 1980년대 말 페레스토로이카가 진행되는 중에 1991년 쿠데타와 대중봉기로 연방이 해체되었다. 발트 3국이 제일 먼저 분리해 나갔고 이후 나머지 11개국이 연쇄적으로 독립을 선언하면서 느슨한 형태의 독립국가 공동체(CIS)로 대체되었다.

 

물론 대내외적으로 소련을 계승한 것은 지금의 러시아연방공화국이다. 지금의 러시아는 옛 소련 영토의 80%,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국기는 혁명 전 러시아 제국의 삼색기를 사용한다. 지금 러시아연방공화국의 영토는 17세기 모스크바 대공국이 지배하던 땅에다 동 시베리아와 극동 연해주 지방을 합친 영역이다.

 

결국 오늘의 러시아는 루시 ⤍ 러시아제국 ⤍ 소련 ⤍ 러시아연방공화국으로 이어져 온 것이다. 소련에서 러시아로 단일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러시아연방공화국 인구의 20%는 많은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기에 러시아 공화국 내의 자치공화국만도 20개가 넘는다. 여전히 러시아는 소련에 버금가는 다민족 연방국가이다.

 


‘차르’, 폭군의 나라 러시아 ③

 

‘뇌제(雷帝)’는 러시아 황제 이반 4세의 별명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함께 들어 있다. 벼락처럼 두려운 황제이자 번개처럼 위광이 빛나는 황제라는 것이다. 그렇기는 해도 뇌제에는 아무래도 앞의 뜻의 더 우세한 것으로 보인다. 뇌제를 영어로 하면 ‘Ivan the Terrible’, 즉 ‘공포의 이반’이 된다. 요컨대 그는 폭군이라는 것이다.

 

이반 4세는 1533년 겨우 세 살의 나이로 보위에 올랐다. 그는 어려서부터 눈에 보이는 것은 뭐든지 다 읽었다고 한다. 두 귀족 가문이 번갈아가며 섭정한 끝에 이반이 17세가 되어 친정을 시작했다. 하지만 귀족들은 공개석상에서는 이반에게 경의를 표했지만 사적으로는 백안시했다.

 

심지어 귀족들은 이반에게 음식과 옷도 제대로 주지 않았고, 방자한 태도로 하인 다루듯이 했다. 이런 가운데 이반은 귀족들에 대한 증오심을 키우면서 포악하고 잔인한 성격으로 바뀌어 갔다. 1547년 그는 17세가 되어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렀다. 그는 이전의 군왕 칭호인 ‘대공’ 대신 ‘차르’(로마 황제 카이제르와 같은 말)라는 칭호를 공식으로 채택했다.

 

이반 4세는 귀족들을 향하여 포문을 열었다. 그는 전국회의를 소집하여 대귀족의 횡포를 비난하고 개혁 의지를 천명했다. 그는 중앙 귀족을 견제하면서 사족을 양성했다. 그는 군사력을 증강하여 볼가강변으로 진출하여 카잔 한국을 점령했다. 이로써 러시아는 시베리아를 넘볼 수 있게 되었다.

 

이후에도 이반은 수많은 정벌에서 성공했지만 날이 갈수록 사족이 늘어나 더욱 많은 토지가 필요하게 되었다. 때마침 1560년 왕비가 죽었는데, 이반은 귀족들이 독살한 것으로 믿었다. 공포정치는 이때부터 더욱 살기를 띠게 되었다. 그는 대귀족들의 지위를 박탈하고 토지를 몰수했으며 자기에게 충성을 바치는 사족만을 우대하면서 혹독한 전제권력을 휘둘렀다.

 

이반은 왕비를 죽인 귀족들을 응징한다는 구실로 수많은 귀족들을 재판도 없이 죽였다. 피를 말리는 공포정치가 계속되었다. 이즈음 리보니아 전쟁에 스웨덴, 리투아니아, 핀란드가 가세하면서 러시아는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이 와중에 대귀족 쿠르푸스키가 리투아니아로 탈주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반은 쿠르푸스키에게 15년 동안이나 협박편지를 보냈다.

 

이반은 권모술수적인 잠적 소동을 연출하면서 중앙 귀족들의 움직임을 체크했다. 모스크바로 돌아온 이반은 전 국토의 절반 이상을 황제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는 차르의 군대를 따로 양성하여 그들에게 과분한 특권을 주었다. 차르의 군대는 수없이 많은 테러를 자행했다. 이반은 자기에게 충고한 대주교 필리프를 감금했다가 살해하기도 했다.

 

1570년 차르의 군대는 노브고로트에 몰려가 적과 내통했다는 혐의로 도시 주민 1만 5,000명을 학살했다. 이것은 전체 주민의 반이 넘는 숫자였다. 그해 여름에는 역시 스파이 혐의로 모스크바 귀족과 시민 100여 명을 붉은광장에서 공개처형했다. 대규모의 테러가 계속되던 중, 1571년 크림 한국의 군대가 쳐들어 와 모스크바 시민 10만 명을 죽이는 참극이 빚어졌다. 모스크바 강이 핏빛으로 물들었고 수많은 시민이 노예로 끌려갔다.

 

이반의 권력도 누수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는 주변의 모든 사람을 의심하는 이상 증세를 나타냈다. 이반은 30세 황태자를 지팡이로 때려 죽였다. 설상가상으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와 스웨덴이 러시아에 압력을 가해 왔다. 이반은 이에 굴복하여 스웨덴과 불리한 협정을 체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협정으로 러시아는 리투아니아와 발트 연안을 포기해야 했다. 리보니아 전쟁은 성과도 없이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국토만 황폐화된 채 끝맺었다.

 

1584년 이반 뇌제는 며칠 동안 궁 안을 울부짖으며 헤매다가 죽었다. 후세에 소련에서 그의 시체를 검시했는데 독살로 판명 났다고 한다. 이반 뇌제는 러시아 역사상 최악의 군주다. 오늘날 ‘차르’는 폭군의 대명사처럼 쓰이기도 한다. 차르는 이반 말고도 여럿이 더 있으며 크게 보아 소련의 스탈린 역시 차르의 유전자를 이어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시베리아라는 ‘지표’에 대하여 ④

 

러시아의 시베리아 개척은 미국의 서부 개척과 비교된다. 사실 ‘개척’이라는 언어로 포장된 이 두 개척의 역사에는 무수한 침공과 약탈이 은폐되어 있다. 다만 러시아의 시베리아 개척은 미국의 서부 개척에 비해 그 속도가 훨씬 빨랐고 약탈이나 학살은 적은 편이었다. 러시아는 미국처럼 원주민에게 배타적이지 않았고 적극적인 동화정책을 구사했다.

 

시베리아는 워낙 넓어서 ‘대지’라는 말도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시베리아는 대지라기보다는 ’지구의 표면‘ 중 일부라고 해야 어울릴 정도이다. 시베리아에는 산맥다운 산맥이 없다. 유럽과 아시아를 가르는 우랄산맥의 평균 고도는 채 500미터밖에 되지 않는다. 이렇기 때문에 시베리아는 더욱 ‘광막한 지표’처럼 느껴진다. 16세기 중엽까지 러시아의 무대는 우랄산맥 서쪽에 한정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그때까지는 시베리아에 러시아의 영역이 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우랄산맥을 서에서 동으로 넘으면 시베리아인데 이 땅의 넓이는 이전 러시아 제국 영토의 두 배가 넘는다. 이 넓은 지표에 아주 듬성듬성 소수의 원주민이 살고 있었다.

 

1579년 카자흐의 한 소규모 부대가 우랄산맥을 넘었다. 그로부터 러시아 인이 5000킬로가 넘는 동쪽 끝 태평양 연안까지 도달하는 데 채 70년이 걸리지 않았다. 주인 없는 땅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기껏 해야 부족 수십 개가 있었고 시비르 한국 등 몇 개 부족을 제외하고는 아예 저항도 하지 않았다.

 

시베리아 진출의 선봉대는 카자흐 부대였다. 원래 카자흐란 러시아 변경에 거주하던 기마전사 집단을 일컫는 말이었는데 귀족, 지주의 탄압에 몰려 변경지방으로 탈출한 농민들도 이에 섞이게 되었다. 그들의 주업은 수렵과 어로 그리고 약탈이었다.

 

카자흐 부대의 수장은 에르마크 대장이었다. 그는 스토로가노프 가문의 지원을 받아 대대적인 시베리아 정벌에 나섰다. 스트로가노프 가문의 배경에는 러시아의 차르 이반 4세가 있었다. 카자흐 부대가 시비르 한국의 수도 시비리를 함락시킨 것은 1579년이었다. 카자흐 부대는 수적으로는 열세였지만 화승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대장 이르마크가 기습을 당해 전사한 후 러시아는 정규군을 보내 시베리아 전역을 장악하게 된다. 그들은 1630년 레나 강을 건넜고 1639년에는 태평양에 다다랐다. 동쪽 끝에 이른 러시아 인은 아무르 강(흑룡강 지류)에 이르러 중국인과 충돌한다. 이후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중러 국경선이 그어졌다.

 

초기 시베리아 최대의 관심사는 모피였다. 그곳에는 담비, 비버, 족제비들이 무수히 많았다. 얼마 안 가 금과 은이 발견되면서 광물자원이 관심을 받게 되었고 완만한 속도로 농경지가 확장되었다. 그러나 시베리아가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은 19세기에 이르러서였다.

 

러시아 인은 원주민에게 대체로 우호적으로 대했다. 원주민들은 모피 세금을 바치는 대신 각종 편의와 보호를 받았다. 러시아 정교로 개종하는 원주민에게는 러시아 인과 동등한 대우를 해 주었다. 물론 러시아 인의 전횡이 없지는 않았지만 지주 계급이 따로 없었던 데다 도망 공간이 무한정해서 원주민이 농노 신세로 전락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시베리아는 이민이 대폭 증가했고 적극적인 개발정책이 받쳐주면서 크게 발전했다. 이에 따라 오늘의 시베리아 사회는 우랄산맥 서쪽의 유럽러시아보다 더 자유롭고 민주적인 사회체제를 구축하게 되었다.

 


‘귀족 천국 농민 지옥’의 러시아 ⑤
조국전쟁과 <전쟁과 평화>

 

1584년 이반 뇌제 사후 러시아는 극도의 동요와 혼란에 빠진다. 가렴주구와 테러, 기근과 질병에 못이긴 농민들은 남부와 동부로 대거 도주해 갔다. 그러자 농민을 토지에 묶어두기 위한 이주 금지령이 발동되어 발이 묶인 농민들은 농사짓는 노예, 즉 농노의 신세로 전락해 갔다.

 

러시아는 한동안 반란과 폭압정치의 악순환이 반복되다가 1613년 전국회의가 소집되어 미하일 로마노프를 차르로 선출하게 됨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찾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농노들의 삶이 개선된 것은 아니었다.

 

러시아의 농노는 매매, 증여, 저당의 대상이 되는 데다 국가에 대해서는 납세, 징병의 의무까지 졌다. 하지만 그들은 국가로부터 어떤 보호도 받지 못했다. 폭압적인 전제정치도 여전해서 반란이 끊이지 않았고 농노들이 대거 반란 전쟁에 가담했다.

 

러시아는 18세기 초반 표트로 황제의 출현으로 다시 안정을 되찾고 제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른바 제정 러시아의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러시아는 ‘귀족 천국, 농민 지옥’의 나라였다.

 

한편 프랑스 혁명(1789년) 이후의 소용돌이 속에서 1804년 황제에 오른 나폴레옹은 유럽 전역을 장중에 넣기 위해 정복 전쟁에 몰두했다. 1805년 프랑스 대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이 맞붙은 아우스테를리츠 대전투가 벌어졌다. 여기에서 나폴레옹 군은 오·러 연합군을 궤멸시키면서 유럽 패권의 기반을 닦았다. 러시아는 프랑스의 대륙 봉쇄령에 가담하는 조건으로 프랑스와 화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1810년 영국과 무역 재개를 선언하며 프랑스와의 일전을 각오한다. 드디어 1812년 6월 나폴레옹은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로 침공해왔다. 전체 병력이 20만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러시아 군은 후퇴를 거듭했다. 그런데 러시아 군은 후퇴하면서 고육지책으로 초토화 작전을 썼다. 집과 가축과 식량을 모두 불태워 나폴레옹 군이 기식할 곳을 아예 없애버린 것이다.

 

그 해 8월 말 모스크바 근교 보로디노에서 결전이 벌어졌다. 새로 임명된 러시아 사령관 쿠투조프 군대는 혈전을 벌였지만 패배했다. 이로 인해 양군 각각 5만이 넘는 병력 손실을 입었다. 나폴레옹 군도 치명적인 타격을 당했다.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로 1세는 모스크바를 초토화시키고 후퇴하는 작전을 썼다.

 

9월 초 남은 11만의 나폴레옹 군은 텅 빈 모스크바에 입성했다. 그날 밤 갑자기 수십 군데에서 불길이 올라 모스크바는 4일 만에 거의 폐허로 변했다. 먹을 것도 없고 잠잘 곳도 없는 프랑스 군은 혹한 속에서 급속도로 사기가 떨어졌다.

 

1개월 만에 나폴레옹은 퇴각을 결정했다. 이때부터 러시아 군의 기습이 시작되었다. 나폴레옹 군이 러시아를 탈주했을 때 남은 병력은 고작 3만이었다. 러시아 군은 프랑스 군을 집요하게 추격했다. 끝내 러시아 군은 프랑스 군을 따라 1814년 3월 파리에 입성한다. 전황이 180도로 역전된 것이다. 결과 나폴레옹은 실각하여 엘바 섬으로 유배되었고 알렉산드로 1세의 대 유럽 발언권이 부쩍 커지게 되었다.

 

러시아 인들은 1812년의 프랑스 군 격퇴전쟁을 ‘조국전쟁’이라고 부른다. 이 전쟁의 과정에서 러시아 인의 민족의식은 한껏 고양되었다. 러시아의 예술가들은 조국전쟁을 기리는 작품들을 양산했다. 차이콥스키의 기악곡 <1812년 서곡>이 작곡되었고, 톨스토이의 세계적인 대작 <전쟁과 평화>가 집필되었다.

 

<1812년 서곡>은 프랑스군이 러시아군을 만나 격렬하게 싸우는 모습이 두 개의 국가(國歌), 즉 ‘라 마르세예즈’(프랑스 국가)와 러시아 국가의 각축으로 표현되었으며, 결국 러시아군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참고로 프랑스 악단이나 지휘자가 이 곡을 녹음한 사례는 거의 없다고 한다. 마라톤 전쟁에서 패한 이란(페르시아)에 마라톤 선수가 없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전쟁과 평화>는 톨스토이가 창작을 위해 데카브리스트(1825년의 12월 혁명)에 대해 조사하다가, 이 혁명의 주체가 1812년 나폴레옹 군대의 침공에 맞서 싸운 세대의 후손들임을 알게 되었다. 톨스토이는 데카브리스트 혁명보다 그것의 원인이었던 1812년의 조국전쟁을 다루기로 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조국전쟁은 1805년에 있었던 아우스테를리츠 대접전, 즉 러시아가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고 나폴레옹 군대와 맞서 싸우다 패전한 전쟁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이런 이유로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를 1805년에서 시작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전쟁과 평화>는 1805년에서 1820년까지를 다루고 혁명은 미완으로 남겨 놓았다.

 

<전쟁과 평화>에서 데카브리스트의 부모 세대가 되는 주인공들은 안드레이, 피예르, 니콜라이 등이다. 특히 작가는 피예르의 사상을 데카브리스트 혁명의 출발점으로 보고 있다.

 

피예르는 <전쟁과 평화>에서 작가가 제시하고 있는 도덕적 완성의 길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리고 죽은 안드레이의 아들인 니콜루쉬카가 미래의 데카브리스트로 성장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이 소설은 모두 4권으로 되어 있는데, 제1권은 1805년의 시기를, 제2권은 1806년부터 1812년 조국전쟁 전야까지의 시기를, 제3권과 제4권은 1812년 조국전쟁을, 에필로그는 1813년에서 1820년까지의 시기를 다루고 있다. 또한 이 소설에는 역사상의 실제 인물인 나폴레옹,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I세, 러시아 총사령관 쿠투조프, 모스크바 총독이었던 라스토프친 백작 등이 사실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데카브리스트’와 러시아의 문호 푸쉬킨 ⑥

 

‘조국전쟁’에서 나폴레옹을 격퇴한 알렉산드르 1세로부터 국내정치를 일임 받은 전 육군장관 아락체예프는 수구적인 반동정치로 일관하여 러시아 국민들의 원성을 샀다. 유럽 원정에서 자유 분위기를 체험하고 돌아온 젊은 장교와 일부 귀족들은 조국의 미래를 위해 수구적인 반동정치를 끝내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들은 농노제를 폐지하고 입헌제 또는 공화정을 실현하기 위한 거사에 착수했다. 유명한 ‘데카브리스트(12월이라는 뜻)’가 바로 그것이었다.

 

1825년 11월 19일 신비주의에 탐닉하여 흑해 연안의 요양지에 가 있던 알렉산드르 1세가 급서했다. 그에게는 후사가 없었다. 3주 동안 황제 자리가 비어 있었다. 이로 인해 혼란이 빚어진 틈을 타 그들은 봉기하기로 했다. 황제 자리는 우여곡절 끝에 알렉산드르의 둘째 동생 니콜라이에게 주어지도록 결정되었다.

 

젊은 혁명 장교들은 일단 3개 연대를 동원하여 이것을 6개 연대로 늘려 군사행동에 돌입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신임황제 니콜라이를 체포하고 정부기관을 장악한 다음 임시정부를 수립한다는 혁명 공정을 짰지만 이 공정은 처음 단계부터 차질을 빚고 말았다. 이견이 속출하여 완전 합의에 이르지 못한 데다 한 장교의 배신으로 거사 계획이 탄로 났던 것이다.

 

“어차피 죽을 것이니 앉아서 당하느니보다 무기를 들고 나가 싸우다가 죽자.”
“우린 죽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영광스러운 죽음이 될 것이다.”

 

젊은 혁명가들은 3,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페테르부르크의 원로원 광장에 집결했다. 소수의 다른 군대와 민간인이 합류했다. 그들은 전제정치 타도와 농노제 폐지 주장을 담은 선언문을 발표하려 했다. 이 사이에 벌써 수만 명의 정부군이 그들을 포위했다.

 

신임 황제는 일단 대주교를 보내 반란군을 설득했다. 하지만 혁명군은 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진무에 나선 장군이 민간인의 총에 맞아 죽는 일이 벌어졌다. 이윽고 황제 니콜라이는 발포 명령을 내렸고 거사는 한 시간 만에 진압되었다.

 

황제는 반란 관련자 600명을 체포하여 5명을 교수형에 처하고 120명을 시베리아에 유배했다.

 

시 / 시베리아에 보낸다

시베리아의 광산 저 깊숙한 곳에서
의연히 견디어 주게
참혹한 그대들의 노동도
드높은 사색의 노력도 헛되지 않을 것이네
불우하지만 지조 높은 연인도
어두운 지하에 숨어 있는 희망도
용기와 기쁨을 일깨우나니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은 오게 될 것이네
사랑과 우정은 그대들이 있는 곳까지
암울한 철문을 넘어 다다를 것이네
그대들 고역의 동굴에
내 자유의 목소리가 다다르듯이
무거운 쇠사슬에 떨어지고
감옥은 무너질 것이네 그리고 자유가 
기꺼이 그대들을 입구에서 맞이하고
동지들도 그대들에게 검을 돌려줄 것이네

 

이것은 러시아의 문호 푸쉬킨(1799~1837)이 쓴 시이다. 나는 재작년 시베리아에 갔을 때 안내를 맡은 한인 2세 여대생에게 러시아 인민이 제일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인지 물었다. 그는 예상대로 푸쉬킨이라고 답했다. 푸쉬킨은 러시아 인민들에게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보다 단연 우위에 있다.

 

푸쉬킨은 러시아의 문어와 구어를 일치시킨 작가이다. 그의 언어는 단순하고 적확하다. 요컨대 그는 ‘말하듯이 글을 쓴’ 작가였다. 그는 운문과 산문, 시와 소설, 서정과 서사를 가리지 않고 창작하여 다양한 장르에서 괄목할 만한 대작들을 남겼다. 그의 최고 유명 대표작은 장편 서사시 <예브게니 오네긴>인데, 차이콥스키에 의해 오페라로 만들어져 지금도 세계 각지에서 공연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글린카의 <루슬란과 류드밀라>, 무소르그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 림스키코르사코프의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차이콥스키의 <스페이드의 여왕> 등 오페라가 모두 푸쉬킨의 서사시, 운문소설, 희곡 등을 원작으로 삼은 작품이다.

 

게다가 푸쉬킨은 자유의 신봉자였다. 그는 10대 소년 시절부터 전제황제를 비판하고 자유와 평등을 예찬하는 시들을 발표했다. 그러다 그는 19세의 나이에 쓴 시 <자유> 때문에 남부 캅카스 지방으로 유배되었다. 때문에 그는 데카브리스트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다.

 

그의 문학적 역량을 주목한 황제가 그를 불러 데카브리스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내가 유배 가지 않고 페테르부르크에 있었더라면 가담했을 것’이라고 당차게 대답했다.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푸쉬킨의 시가 있다. (옛날 이발소 같은 데에 붙어 있던 시인데, 시인이 26세 때 쓴 것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픔의 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늘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다시 그리워지나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하거나 서러워하지 말라 
절망의 나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 반드시 찾아오리라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언제나 슬픈 법 
모든 것은 한 순간에 사라지지만 가버린 것은 마음에 소중하리라

 

 

http://www.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24&table=c_booking&uid=535

 

이단아 스트라빈스키와 인민의 아들 막심 고리키 ⑦

“그들이 보기에 이것은 예술로서의 음악을 파괴하려는 불경스러운 행동이었다. 그들은 휘파람을 불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이게 무슨 음악이냐, 의사를 불러와라, 발레는 이러이러해야 한다고 외쳐댔다. 이에 반해 음악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표현의 자유를 중시하는 사람들은 난동자들에게 반발하여 맞고함을 질러댔다. 아무튼 그것은 저녁의 휴식을 위한 예술에 대한 반란이었다.”

 

스트라빈스키(1882~1971)의 <봄의 제전>이 첫선을 보인 것은 1913년 5월 파리의 상젤리제 극장에서였다. 청중의 대부분은 아름다운 음악과 우아한 발레를 기대하고 온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기대했던 음악과 발레는 19세기까지의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20세기에 새로이 출현한 음악이 귀에 거슬렸던 것이다. 마침내 객석에서 야유가 터져 나왔다. 모르는 것에 대한 야유는 예나 지금이나 ‘모르는 자’들이 곧잘 행사하는 특권(?)인 것 같다.

 

불협화음의 음악과, 봄의 부활을 환영하기 위해 이교도 농민들이 처녀를 제물로 바친다는 야만적인 줄거리.....당시 세련을 자부하던 파리시민은 함성과 야유의 보냈고 결국 본격적으로 주먹다짐이 벌어졌다. 소동 속에서 음악은 묻혔으며 스트라빈스키는 극장에서 도망쳤고, 공연은 혼란으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봄의 제전>이 인정을 받는 데는 1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다음 해에는 공연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으며 짧은 시간에 고전의 반열에 올라 불멸의 명성을 얻었다. 유럽 세계에 충격파를 선사한 러시아 작곡가 스트라빈스키에게는 ‘현대음악의 창시자 중 하나’라는 평가가 매겨졌다.

 

당연히 그의 초기 작품들에는 불안한 시대의 공기와 긴박한 혁명 전야의 공기가 배어 있다. 혁명 전야의 러시아 문화는 부르주아 사회와 인민의 사회로 갈라져 있었다. 이 둘은 각각 형식주의를 강조하는 모더니즘과 인민의 정서를 고양하는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런 대비가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 분야는 음악보다는 문학이었다.

 

막심 고리키(1868~1936), 오늘날 그는 ‘인민의 아들’ 또는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의 창시자로 기림을 받는다. 그는 혁명에 직접 가담하여 고초를 겪었고, 줄곧 러시아 사회의 부조리를 사납게 공격하면서 인민의 삶을 옹호했다. 그는 인민으로 하여금 문학을 소유하게 만든 작가였다.

 

그의 대표작에는 <밑바닥에서>와 <어머니>가 꼽힌다. 두 작품 모두 부르주아 사회 저변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격렬한 사회고발의 어조로 말한 문학이다. 특히 <어머니>는 혁명적 노동자를 등장시켜 노동운동의 발전 양상을 생동감 있게 묘사함으로써, 아직까지도 노동운동의 주요한 참고 저작물로 우대되고 있다.

 

“러시아의 민중은 자신들의 삶, 억압 받고 학대당하고 추방당하는 삶을 인류 전체에게로 알리기 위해 ‘자신들의 살’로 고리키의 ‘입’을 만들었다.”(오스트리아 익명의 노동자 작가의 말) 이것은 러시아 민중과 작가 고리키의 관계를 비유한 말이다. 러시아 민중과 작가 고리키는 ‘살과 입의 관계’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고리키는 노동자의 살을 입으로 말해주는 작가였으니 그는 명실 공히 ‘노동운동작가’였다.

 


4월 테제, 볼셰비키와 레닌의 등장 ⑧

 

러시아의 마지막 차르 니콜라이 2세는 퇴위를 결정하는 동안에는 차분했지만 일기장에는, “러시아를 위해, 전장의 군을 유지하기 위해, 나는 이 조치를 내리기로 결정하였다......나는 내 주위의 모든 반역과 비겁과 기만을 보았다.”라고 썼다.

 

차르를 타도한 러시아는 왜 레닌을 필요로 했던가? 혁명대가 승리하고 차르가 물러났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원래 진짜 혁명은 혁명의 대상이 타도된 시점에서 시작되는 법이다.

 

자본가와 자유주의자들의 임시정부 하에서는 되는 일도 없었고 안 되는 일도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그들은 문제를 해결할 의사가 없었다. 그들 생각에, 전쟁은 계속돼야 했다. 그러나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자는 민중일 뿐 다수의 자본가는 오히려 이득을 보고 있었다. 연합국의 제국주의자들도 임시정부를 지지하면서 전쟁 계속 수행을 종용했다.

 

임시정부는 대중에게 빵도 줄 수 없었다. 지금 상태에서 대중들에게 빵을 준다는 것은 곧 자기들의 이윤감소를 의미했다. 토지도 물론 줄 수 없었다. 농민에게 토지를 준다는 것은 권력 지주의 파산, 나아가 자본주의적 소유의 파괴를 뜻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토지는 은행에 저당 잡혀 있었다.

 

자유도 줄 수 없었다. 전제가 타도되고 ‘민주정부’가 들어선 이 마당에 대중들에게 더 이상의 자유와 권리를 주면 자기들의 권력이 유지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오히려 소비에트를 무력화시켜 임시정부의 권력을 강화하려 했다. 또한 임시정부는 소수민족 억압정책을 고수했다.

 

대중들의 열망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민중의 권력기관인 소비에트뿐이었다. 그러나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가 주축을 이룬 소비에트의 지도부는 자신의 임무를 저버리고 임시정부의 정책을 사실상 지지했다.

 

그러나 인민들의 생각은 달랐다. 전국 각지에 노동자와 병사와 농민의 소비에트가 만들어졌다. 소비에트와 별개로, 병사들은 부대마다 군위원회를, 노동자들은 공장위원회와 노동조합을, 농민들은 농민위원회를 만들었다. 병사들과 민중들 사이에 반전기운이 더욱 높아갔고, 노동자와 농민들은 공장과 토지의 접수를 시작했다.

 

3개 사회주의 정당 중 당시 가장 소수였던 볼셰비키만이 이 흐름을 읽었다. 그들은 임시정부와의 협력에 반대하고, 전쟁반대와 즉각 평화 실현, 혁명의 계속 수행을 외쳤다.

 

레닌은 4월 3일 저녁 페테르부르크에 도착, 볼셰비키와 러시아 인민들로부터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진짜 혁명은 레닌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그는 대중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는 핀란드역 광장의 장갑차에 올라 열변을 토했다.

 

“사랑하는 동지, 병사, 노동자 여러분! 러시아 혁명을 승리로 이끈 여러분을 보니 기쁩니다. 여러분은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 군대의 전위입니다. 강도들의 제국주의 전쟁은 전 유럽 내전의 시작입니다. 머지않아 유럽 자본주의는 깡그리 무너질 것입니다. 러시아 혁명은 그 시작입니다. 전 세계의 사회주의 혁명 만세!”

 

레닌의 외침은 ‘부르주아 혁명’이나 ‘러시아 혁명’이 아니라 ‘사회주의 혁명’ 만세였다. 다음 말 레닌은 볼셰비키 집회와 사회민주당 연합집회에서 연이어 ‘당면 혁명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를 발표했다. 이것이 이른바 ‘4월 테제’라는 것이었다.

 

1. 계속되고 있는 제국주의 전쟁에 단호히 반대하고 즉각 평화를 실현해야 한다.
2. 부르주아지에게 권력을 넘긴 혁명 1단계에서 프롤레타리아트와 빈농이 권력을 장악하는 혁명 2단계로 이행해가야 한다.
3. 임시정부를 지지해서는 안 된다.
4. 소비에트의 권력을 확대해야 한다.
5. 의회제 공화국에 반대하고 소비에트 공화국을 수립해야 한다.
6.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국유화해야 한다.
7. 모든 은행을 소비에트의 통제를 받는 국립은행으로 통합해야 한다.
8. 생산과 분배를 소비에트가 통제해야 한다.
9. 당 대회를 소집하여 강령을 바꾸고 당명을 공산당으로 바꿔야 한다.
10. 새로운 국제혁명조직으로 제3인터내셔널을 창설해야 한다.

 

요컨대 레닌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이전시켜 부르주아 혁명을 사회주의 혁명으로 발전시켜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4월 테제’는 러시아 사회를 흔들어 놓았다. 그때까지는 어느 누구도 분명하게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전화를 외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르주아지는 레닌을 독일의 첩자라고 중상 모략했고, 멘셰비키는 레닌이 ‘반동에 봉사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레닌은 3주 동안 당원들을 이해시켰다. 마침내 4월 말, 볼셰비키 협의회는 레닌의 '4월 테제'를 공식입장으로 채택했다. 이후 사태는 레닌이 옳았음을 입증해주었다. 러시아 민중들의 움직임은 자유주의 정치인이나 타협주의 진보 지식인들의 의식을 앞지르고 있었고, 레닌에게는 그 추세를 읽어낸 날카로운 통찰력이 있었던 것이다.

 


레닌, “스탈린은 안 된다” ⑨
레닌의 서거와 스탈린 사회주의의 이중성

 

“스탈린을 그 지위에서 해임하고, 다른 모든 점에서 그보다 못하더라도, 더 참을성 있고 신실하며, 동지들에게 친절하고 그만큼 흥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보다 뛰어난 인물을 그 자리에 임명하는 방법을 고려해보자. 이것은 사소한 문제로 보일지 모르지만, 어쩌면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 사소한 문제일지도 모른다.”(사후 공개된 레닌의 편지 중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혁혁한 지도자 레닌이 서거한 것은 1924년 1월 21일이었다. 망명생활과 혁명투쟁 그리고 사회주의 건설에 몸을 혹사한데다 1918년 사회혁명당 테러리스트에게 당한 총격의 후유증 때문이었다. 이미 세 차례나 뇌졸중으로 쓰러진 적이 있었지만 그의 이른 죽음은 러시아는 물론 전 세계 약소민족들에게도 커다란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레닌은 1922년 12월 병상에서 여러 편의 논문과 편지들을 구술하여 사회주의 소련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혁명의 진전과 사회주의 건설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불꽃처럼 쏟아낸 것이다.

 

흔히 레닌의 ‘정치 유언’이라고 불리는 ‘당 대회에 보낸 편지’가 있다. 편지에서 그는 당 지도자들을 하나하나 열거하면서 그들의 장단점을 지적했다. 레닌은 또한 당의 단결과 중앙위원회의 확대 강화 등을 제안했다. 이 편지는 레닌이 죽은 후 중앙위원회에서 낭독되어 큰 파장을 일으킨다.

 

레닌은 트로츠키에 대하여, 그의 ‘비 볼셰비즘’을 지적하고 ‘멘셰비즘’ 재발 위험을 경고하면서, “당 중앙위원 중에서 가장 유능하나 자신과잉에 빠져 있고 사업을 순행정적 측면에서 접근하는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레닌은 스탈린에 대해서는, 당의 뛰어난 활동가임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그의 결정적인 결격사유를 지적했다. 레닌은 말하기를, “스탈린이 서기장이 되어 무한한 권력을 손에 쥐게 되면 그 권력을 신중하게 행사할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이 글 앞에서 보았듯이 레닌은 스탈린이 차기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1923년 4월에 열린 당 대회에서부터 이미 레닌의 우려는 곧 현실로 드러나고 있었다. 당 지도자들은 레닌이 해 놓은 인물 평가를 그대로 노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레닌이 편지에서 말한 핵심은 대중과 더 긴밀하게 결합하기 위해 당이 변화를 보이면서도 당이 단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회에서는 오히려 당의 권한이 강화되었고 ‘당의 단합’을 명목으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이 배척되었다.

 

트로츠키는 1923년 10월 중앙위원회로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서 그는 당의 경제정책을 날카롭게 비판한 후 ‘서기국 관료주의’를 ‘당내 민주주의’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트로츠키 지지자 ‘46인의 성명’이 뒤따랐다.

 

당 중앙위는 이에 맞서 곧 분파행동을 비난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1924년 1월 레닌이 죽기 며칠 전, 트로츠키가 요양 차 카프카스로 떠난 뒤 열린 당 협의회는 트로츠키를 맹공격하고 그들 일파를 탄핵했다. 결과 요양지에서 레닌의 죽음을 맞은 트로츠키는 레닌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레닌이 죽은 후 노동자들이 대거 공산당에 가입했다. 레닌에 대한 추모 열기 적분에 2년 사이에 당원이 35만에서 60만으로 늘어났다. 이 과정에서 당 기구를 관장하는 서기국의 권한이 강화되고 서기장 스탈린에게 권력이 모아지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자기 스스로 레닌 이후의 지도자임을 공공연히 자처하기 시작했다.

 

궁지에 몰린 트로츠키는 날카로운 필봉으로 이에 저항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직접 공격하지 않는 대신 다른 사람을 통해 그를 공격하도록 만들었다. 이른바 이이제이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트로츠키 공격의 선봉에 나선 것은 스탈린이 아니라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였다. 1927년 이후 스탈린은 유일한 최고지도자로 부상한다. 1927년 12월 27일 제15차 당대회는 ‘당의 일반노선으로부터의 이탈’을 철저하게 비판하면서 스탈린의 권위를 굳혀주었다.

 

아주 단순화해서 말한다면, 트로츠키는 국제사회주의자였고 스탈린은 일국사회주의자였다. 하지만 이것은 노선의 차이라기보다는 권력 투쟁의 결과 나타난 현상이었을 따름이다. 스탈린은 레닌을 계승하겠다고 하고 권력을 장악했지만, 엄밀히 말해서 그는 레닌의 계승자가 아니라 레닌의 훼손자 또는 레닌의 배반자 같은 길을 걸었다.

 

스탈린은 레닌과 확연히 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사회주의자에 앞서 제국주의자였으며 정도(正道)가 아닌 사도(邪道)를 추구한 마키아벨리스트였다. 그는 미국에 지나치게 겁을 집어먹고 있었고 중국 마오쩌둥이 사회주의 세계의 지도자가 되는 것을 경멸적으로 질투했다. 그는 보이지 않게 미국에 협조하여 조선과 중국의 민족 분단 정책을 지지했다.

 

이후 소련에서 스탈린의 한계를 극복하는 지도자가 나오지도 않았다. 사회주의의 정도를 상실한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는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다.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는 기실은 사회주의의 얼굴로 제국주의와 패권주의를 음험하게 추구한 가짜 사회주의의 해체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소련의 해체와 동구권 위성국들의 정권 몰락을 사회주의의 패배, 자본주의의 승리로 보는 역사관에는 성급한 오류가 있다. 오늘날 소련은 해체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사회주의는 중국, 조선, 베트남, 쿠바, 이란 등지에서 그 나름 전통성과 조화를 이루면서 대책 없이 타락한 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서 그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


반파쇼전쟁 승리의 주역 소련, 그러나 아시아는…⑩

 

2차세계대전에서 반파쇼전쟁을 주도한 나라는 단연 소련이었다. 전쟁 초기 미영불 등은 히틀러의 파쇼 독일과 사회주의 혁명국 소련 사이에서 눈치보기에 급급했다. 그들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독일과의 화해정책을 펼쳤다가 가혹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과 동맹국들은 무려 190개 사단을 동원하여 일제히 소련의 서부 국경을 침공했다. 이로부터 6개월 만에 소련 영토의 절반이 독일군에게 잠식되었고 레닌그라드(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까지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러시아 인 특유의 민족정신이 되살아났다. 그들은 앞 다투어 전선 출정을 지원했다. 러시아 인들은 19세기 초 나폴레옹 군과 벌인 전쟁을 조국전쟁이라고 했는데, 2차대전 히틀러의 독일과의 전쟁을 한 격 높여서 ‘대조국전쟁’이라고 불렀다.

 

소련이 초전에서 독일에 참패한 데에는 스탈린의 오판이 결정적이었다. 그는 소-독 불가침조약만을 지나치게 믿고 있다가 당한 것이다. 그는 독일군이 러시아 도시를 폭격하기 시작했는데도 가급적이면 독일군과 직접 충돌을 피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소련의 연대 제의에 소극적인 반응을 보이던 영불 등 유럽 국가들은 히틀러 군에게 호된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반파쇼전쟁에 합류하게 된다. 사실 그들은 반파쇼전쟁에서 뒤늦게 숟가락 하나 얹은 것에 불과했다. 시종일관 반파쇼 전쟁을 주도한 것은 소련이었고, 그만큼 소련은 희생과 공로 양면에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했다.

 

한편 대서양 너머에서 세계대전의 특수를 누리면서 관망만 하고 있던 미국은 1941년 말 파쇼 추축국 일본에게 진주만을 기습당하게 되자 부랴부랴 영국과 함께 소련 편에 가담했다. 하지만 그들은 유럽 전선에 전력투구를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소련이 기력을 회복하여 잃었던 영토의 거의 전부를 회복해 갈 무렵인 1944년 6월이 되어서야 미영 연합군이 도버해협을 건너 노르망디에 상륙한다.

 

그들은 오늘날까지 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독일군에게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으로 과장선전하고 있으며 독일을 항복시킨 것은 거의 전적으로 미영 연합군인 양 왜곡하고 있다.

 

그러나 독일 국경을 넘어 베를린을 압박해 들어간 것은 소련군이었다. 1945년 5월 2일 소련의 적기가 독일 국회의사당에 꽂혔고 히틀러는 자살했으며 독일은 무조건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이로써 4년 간의 소-독 전쟁은 소련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소련은 세계 지배를 꿈꾸던 히틀러의 야망을 꺾고 파쇼 책동을 잠재운 제1 주역이었다. 소련과 소련 인민은 반파쇼 전쟁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영웅적인 투쟁을 벌인 것이다.

 

2차대전 후 제1 전승국 소련의 국제적 위상은 당연히 높아졌다. 유럽전선에서의 스탈린은 거침없고 당당했다. 그러나 소련의 태도는 아시아에서는 달랐다. 그들은 1945년 8월 8일이 되어서야 중국 동북전선에서 대일본 전에 본격 참전하는 늑장을 부렸다.

 

스탈린은 중국전선에서는 벌써부터 중국의 마오쩌둥을 견제하여 미국이 지원하는 장제스 편에 양다리를 걸치는 보험 투자를 하고 있었다. 특히 그는 미국의 원자폭탄 위력 앞에서 겁을 먹은 나머지 미국의 요구를 거의 들어주었다.

 

스탈린은 패전국 일본을 분할하는 대신 애꿎은 조선을 희생시키려는 미국의 조선 분단 제안에 선뜻 동의했으며, 심지어 중국 국공내전에서도 중국의 양자강 선 분단을 지지하기도 했다. 조선은 미-소 협잡으로 인해 남북이 분단되었지만 마오는 이런 미-소의 야합적인 기도를 인민의 힘으로 분쇄하여 마침내 1949년 10월 통일 중국을 건설하는 데 성공했다.

 


우리는 미소냉전의 와중에 휩쓸린 유일 분단국 ⑪
영국, 미국의 푸들이 되다

 

1947년 미국의 정치학자 W.리프먼은 ‘냉전 The Cold War’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보다 한 해 전인 1946년 3월, 처칠은 미국 웨스트민스터 대학 연설에서 유럽대륙에 ‘철의 장막’이 생겼다고 경고하면서 미국과 영국이 단결하여 소련의 공산주의 확산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이 연설이 사전에 미국과 짜고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왜냐하면 정작 소련을 ‘철의 장막’으로 내몰면서 냉전을 주도한 것은 영국이 아닌 미국이었기 때문이다.

 

1980년 6월 25일, 영국의 마거릿 대처 수상은 언론 인터뷰에서 자유시장과 자유경제를 옹호하며, “선택의 대안은 없다(There is no alternative).”라고 잘라 말했다. 이 발언은 신자유주의만이 진리라는 입장을 표명한 발언으로 곧잘 인용된다.

 

나는 대처의 이 발언 역시 사전에 미국과 짜고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다음 해인 1981년 들어 미국 대통령 레이건은 본격적으로 신자유주의 몰이에 나섰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영국은 미국의 ‘주구 국가’라고 할 수 있다.

 

연합국의 지도자였던 처칠의 발언은 이제 막 전쟁에서 벗어난 세계의 인민들에게 적이 실망을 안겨주었다. 특히 소련의 스탈린은 처칠을 히틀러에 비유하면서 전쟁광이라고 비난했다. 미국과 교감하던 처칠은 2차대전 종반부터 소련의 영향력 증대를 경계했다. 독일을 무너뜨리는 데는 소련과 연합하여 함께 싸웠으나, 소련의 세력이 확장되는 것은 미국과 영국이 하등 원하던 바가 아니었다.

 

게다가 동유럽 인민들은 소련군을 해방자로 환영했다. 동유럽 각국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사회주의 체제로 발전해갔다. 아시아에서도 조선과 베트남이 같은 길을 걸었고, 중국에서도 혁명이 성공하고 있었다. 이른바 사회주의의 세계 체제가 구축되고 있었던 것이다.

 

처칠은 영국보다 오히려 미국에서 많은 동조자를 얻었다. 이어서 1947년 마셜 미 국무장관이 유럽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원조를 제공하겠다는 '마셜 플랜'을 발표했다. 곧 영국을 중심으로 유럽 경제 부흥회의가 열렸고, 유럽 16개국으로 구성된 기구가 구성되었다.

 

미국을 기축으로 하여 서유럽 국가들이 반공정책을 노골화하자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도 이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이런 노력은 ‘몰로토프 플랜', ’코민포름(공산당 정보국)‘, ’코메콘‘ 등으로 연이어 표면화되었다.

 

미소간의 양극 체제 대결은 갈수록 첨예해졌다. 이 냉전은 소련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미국과 영국이 조장한 면이 다분했다. 동서냉전 상태는 군사적인 대결체제로까지 치달았다.

 

1949년 4월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은 NATO(북대서양 조약기구)를 결성했고, 1955년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은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결성해 대응했다. 1949년에 소련은 미국에 이어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1950년에는 한국에서 6.25전쟁이 터졌다. 이 전쟁은 내전이자 냉전의 산물이었다. 아무튼 이 전쟁은 냉전이 열전으로 비화한 것이었다. 베트남의 대 제국주의 투쟁도 냉전 속의 열전으로 비화되었다.

 

한편 동서냉전의 두 주체인 미국과 소련에서는 반대자를 적으로 몰아쳐 탄압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미국에서는 1948년 ‘히스 사건’으로 공산주의자 색출 공정이 시작되었다. 히스는 국무부의 고위 관리로 오랫동안 근무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국가 기밀을 소련에 넘겨준 혐의로 기소되어 징역을 살았다.

 

1950년에는 미 연방 수사국(FBI)이 미국인 간첩들이 1945년과 1946년에 원자 폭탄 관련 자료를 소련에 넘겨주었다고 발표했다. 이 사건으로 많은 사람이 기소되었는데, 이 중 줄리어스 로젠버그 부부는 1953년에 사형 당했다. 또한 1950년부터 5년 동안 상원의원 매카시에 의해 도발된 ‘매카시즘’ 광풍이 미 전역을 휩쓸었다. 이로 인해 관료 · 정치가 · 교수 · 문인 · 예술가들이 대거 희생당했다.

 

소련에서도 ‘스탈린주의’와 ‘개인숭배’가 나타났고, 문화와 예술의 이데올로기 통제가 시작됐다. 레닌그라드 사건, 의사단 음모사건 등의 반체제 사건이 발생했다. 한편 대외적으로는 1948년 독자노선을 추구하던 유고슬라비아가 코민포름에서 제명되었다.

 

동서냉전의 대표적인 산물은 3개의 분단국이었다. 베트남은 1975년 월맹이 승리하여 자주독립국이 되었다. 독일은 1990년 서독의 주도로 통일을 이루었다. 우리만 냉전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치욕의 분단 역사가 지속되고 있다.

 

 

 

 

쿠바 미사일 핵전 위기와 미-소 타협 ⑫
“흐루쇼프 동지, 당신은 스탈린 때 뭐하고 있었습니까?”

 

스탈린 치하에서 전쟁(2,700만)과 학살(1,100만) 등으로 인하여 소련 인구의 5분의 1이 죽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1556년 2월 소련의 새 지도자 니키타 흐루쇼프가 제 20차 당 대회에서 유명한 연설 ‘스탈린 시대의 범죄에 관해’를 거의 끝내가고 있을 때였다. 강연장 말석에서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흐루쇼프 동지, 스탈린이 그 모든 범죄를 저지르고 있을 때 고급 당 관리인 당신은 무얼 하고 있었습니까?”

 

흐루쇼프는 연설을 중단하고 1,500명의 열성당원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지금 말한 사람 누구입니까?”라고 물었다. 강연장에는 침묵이 흘렀다. 흐루쇼프는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연단에 놓았다.

 

“정확히 1분의 시간을 주겠습니다. 말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밝히시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나서지 않은 가운데 1분이 지나갔다. 그러자 흐루쇼프는 시계를 호주머니에 도로 집어넣으며 말했다.

 

“내가 기꺼이 대답하겠습니다. 스탈린이 모든 범죄를 저지르고 있을 때 나는 방금 전 질문을 한 동지와 똑같은 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1945년 미국이 원폭을 개발하자 4년 뒤인 1949년 소련도 원폭을 개발했다. 미국이 수소폭탄을 만든 것은 1952년인데 바로 1년 뒤인 소련도 수소폭탄을 만들었다. 이처럼 핵을 포함한 무력 경쟁은 미국이 앞서나가고 소련이 곧바로 추격하는 형세로 이루어졌다.

 

이와 별도로 소련은 고성능 미사일 개발을 추진하여 1955년 IRBM(중거리 탄도탄)과 1957년 ICBM(대륙간 탄도탄)의 개발에 연속으로 성공하여 미사일 경쟁에서 미국을 앞서게 된다. 이렇게 되자 미국은 SLBM(잠수함 발사 미사일)을 개발하여 미사일 판세를 역전시켰다. 참고로 오늘날 조선은 IRBM, ICBM, SLBM 셋을 다 보유하고 있다.

 

흐루쇼프의 평화공존론은 일단 핵전쟁이 일어나면 승패의 의미가 없이 모든 인류가 공멸한다는 위기 상황을 변화시켰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특히 대조국전쟁에서 엄청난 피해를 겪은 나머지 이제는 누구보다 평화를 갈망하게 된 소련인들에게 그의 평화공존 주장은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흐루쇼프는 직접 미국을 방문하여 군축을 제안하는 등 다각도로 평화공존 외교를 펴나갔다. 그러나 1960년 5월 미국 첩보기 U-2기의 소련 영공침입 격추사건이 일어나면서 그의 평화공존 노선은 난관에 부닥쳤다. 이는 역시 미국은 평화공존만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시사한 사건이었다.

 

미- 소간 긴장이 높아진 가운데 1961년 8월 동서 베를린을 가르는 장벽이 설치되었다. 이어서 군비확대경쟁이 재개됐고, 일시 중단되었던 양국의 핵실험도 대규모로 감행되었다.

 

소련 공산당 내부에서 흐루쇼프가 미국과의 대결에서 번번이 밀린다는 불만이 표출되었다. 이러던 중 1962년 가을 갑자기 쿠바의 카리브 해에서 미소 간 무력대결이 표면화되었다. 소련이 쿠바에 건설 중인 미사일기지가 미국 항공 첩보기의 항공사진에 포착된 것이다. 또한 쿠바는 1962년 9월 소련제 IRBM 42기를 배치한다는 무기원조협정을 체결한 사실이 드러났다.

 

쿠바는 미국의 옆구리를 겨누는 ‘붉은 칼’과 같은 존재였다. 1961년 미국의 지원을 받은 반혁명군의 ‘피그(돼지) 만 침입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후, 미국은 마치 방귀 뀐 놈이 성낸다는 식으로 대 쿠바 수출금지, 미주기구에서의 쿠바 제명 등, 쿠바 압박 작전을 전개했다. 쿠바는 미국의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구책으로 소련의 지원을 받아 소련의 전략 핵 미사일을 들여오고자 했다.

 

한편 소련의 흐루쇼프는 쿠바에 전략무기의 선제 배치를 통해 미국과의 군비교섭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미 대통령 케네디는 예상과 달리 강경책을 구사했다.

 

그는 즉각 국가안전보장위원회를 소집했다. 그리고 전국 TV 방송을 통해 이 사실을 알리면서 “해상봉쇄로 쿠바를 격리시켜 소련 미사일의 반입을 막고, 쿠바의 핵미사일이 서방국가를 공격할 경우 이를 소련의 미국 공격으로 간주하여 소련에 상응하는 핵 보복 조치를 가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것은 핵전쟁의 공포가 현실화되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미국은 183척의 함정과 1,190대의 전투기를 동원하여 2,400㎞의 카리브 해를 봉쇄한 채 미사일을 실은 소련 선단의 도착을 기다렸다. 미국은 소련 선박이 정지명령에 불응할 경우 격침시킬 용의가 있다고 발표했다. 바야흐로 세계의 이목이 카리브 해에 집중되었다.

 

흐루쇼프는 케네디의 초강경책에 한발 물러났다. 대신 그는 쿠바를 절대 침공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라는 조건을 제시했다. 이에 부응하여 미국이 쿠바 불가침을 약속하자 소련은 쿠바에 건설 중인 미사일 기지를 파괴하고 미사일 배치 계획을 철회했다.

 

소련에서는 군부를 중심으로 흐루쇼프의 소극적인 대응에 대한 비난이 일면서 그의 입지가 약화되었다. 하지만, 쿠바 타협을 계기로 소련과 미국 관계는 호전되었다. 반면 소련과 중국 사이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미 소련을 제국주의 세력과 타협한 ‘수정주의’로 규정한 바 있는 중국은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을 설치한 것은 모험주의이며 미국의 압력에 굴복한 것은 ‘투항주의’라고 비난했다. 소련은 중국에 대해 ‘교조주의’라고 맞비난했다. 이제 사회주의권에서도 소련과 중국의 양극화 현상이 일어날 조짐이 나타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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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소련의 내부 절정과 외부 위기 ⑬

 

1964년 10월 흐루쇼프가 은퇴한 후 ‘브레즈네프(서기장) - 코시킨(수상)’의 양두체제가 성립되었다. 브레즈네프는 복지 향상에 힘을 쏟았다.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이 새로운 연금법으로 혜택을 입게 되었고 주 2일 휴일제가 전면 시행되었다.(1967년) 과학기술이 진보하면서 산업이 성장하여 미국과의 산업생산 격차가 1950년의 3.6 : 1에서 1970년의 1.2 : 1로 줄어들었다.

 

이때가 바로 소련 경제의 전성기였다. 노동자 비율이 전 국민의 60%에 이르렀고 농민에 대한 지원정책도 활발히 이루어져 농민들은 도시 지식인층에 못지않은 생활과 교육혜택을 받게 되었다. 자본주의 국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수한 연금, 보험제도가 시행되었고 12년 무상의무교육과 무료진료체제가 자리를 잡았다.

 

소련인은 책을 가장 많이 읽는 국민이 되었다. 그러나 경제적 풍요와 사회 안정은 정체와 부패를 낳았다. 소련 사회는 급속히 개인주의적인 폐쇄성을 띠어갔다. 무엇보다도 폐쇄적인 관료체제가 문제였다.

 

비교적 순탄하게 진행되던 미국과의 전략무기제한협상이 1979년 아프가니스탄 파병으로 균열되기 시작했다. 1969년 체코에서 개혁파 두브체크가 집권하면서 자유화운동이 일어났다. 소련은 무력진압을 결정했고 사태 확산을 두려워한 다른 동구권 권력자들이 이에 동조했다. 이에 따라 소련과 동유럽 4개국 군대로 구성된 진압군이 프라하에 진공하여 자유화운동을 진압하고 두브체크 정권을 붕괴시켰다.

 

이에 대해 알바니아,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등의 동유럽 국가들은 주권침해라고 소련을 비판했고 서유럽 국가들 역시 일제히 소련을 비난했다. 중국은 이보다 더욱 심한 비난을 퍼부었다.

 

중국은 소련을 사회주의의 외피만 썼을 뿐 실제로는 서방제국주의 국가와 다를 바 없는 사회제국주의국가라고 규정했다. 중소분쟁은 국경문제로까지 비화하여 1969년 우수리 강의 다만스키 섬에서 양국의 무력 충돌이 발발했다. 이로써 중소관계는 적대관계가 되었다. 중국은 미국과 화해하면서 소련을 제1의 적으로 돌렸다.

 

소련은 쿠바, 베트남 등의 국가와는 친선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베트남 전에서 소련은 중국과 함께 북베트남을 지원했다. 체코 개입이 소련의 실책이라면 베트남 전 개입은 미국의 실책이었다. 1975년 베트남에서는 통일인민정부가 들어섰고 라오스와 캄보디아에도 독재정권을 물리치고 인민정부가 수립되었다. 한편 칠레와 니카라과에서는 반제혁명이 성공했지만 미국의 집요한 공작과 개입으로 단명으로 끝나고 말았다.

 

1979년 이루어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출병은 전쟁이 장기전으로 이어지면서 소련의 국제적 입지와 경제 사정을 악화시켰다. 소련은 1970년대 들어 사회주의체제가 세계적으로 확산된 것과는 달리 차츰 곤경과 위기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역시 폐쇄적인 관료체제가 문제였다. 소련은 경제성장이 눈이 띄게 둔화되었지만 특권층은 오히려 늘어났다. 1982년 브레즈네프는 소련의 위기를 방치한 채 7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후임에 68세의 안드로포프 전 국가안보위원회(KGB) 의장이 서기장에 취임했다. 그는 개혁과 세대교체에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젊은 고르바초프의 능력을 인정하여 그를 지도자급으로 끌어올렸다. 하지만 안도르포프는 개혁의 청사진을 펼치지도 못한 채 15개월 만에 병사했다. 이어서 74세의 체르넨코가 서기장에 올랐지만 그 역시 1년도 안 되어 죽고 말았다.

 



페레스트로이카’, 고르바초프의 좌절 ⑭

 

최소 4반세기 동안 미국과 양극체제를 구축하며 세계 사회주의체제의 정점에 있었던 소련은 왜 그리고 어떻게 해체되었을까? 소련이 해체되자 동구권 사회주의 정권들도 연달아 붕괴되었다. 세간의 평가대로 소련과 동구권 정권들의 붕괴는 과연 사회주의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일까?

 

그런데 소련과 동구권은 몰락했는데 어째서 중국과 조선, 베트남, 쿠바 등은 여전히 건재하고 있는 것일까? 사실 러시아 역사를 공부하는 데 여기처럼 긴요한 대목은 없다.

 

원래 소련은 인구의 20%를 점하는 소수민족을 포함, 무려 120개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국가였다. 소련 인구의 절반은 러시아 인이고 여기에 우크라이나 인과 벨로루시 인을 포함한 인구 중 70%가 슬라브 인이다. 소련은 15개 공화국이 연합한 국가였다.

 

이 많은 민족을 하나로 묶은 것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이데올로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소련의 해체는 바로 이데올로기의 해체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념을 변화시키는 것은 경제이다. 소련이 해체된 것은 경제적 요인이 야기한 이념적 변화 때문이었다. 이념은 일부의 인간에게만 중요하지만 경제는 모든 인간에게 중요한 것이다.

 

소련 경제를 침체시킨 주요인은 폐쇄적인 관료체제였다.(관료체제의 폐쇄성만큼 나쁜 것이 또 어디 있으랴? 결과 소련에는 ‘노멘클라투’(원래는 유명인사 명단이라는 뜻)라는 특권층이 형성되었다.

 

그것은 부패한 관료주의를 파생시켰다. 그들은 사회의 요구에 자신을 적용시키려 하지 않고 자신의 위치와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방어벽을 쌓았다. 아이러니 하게도 계급 타파의 주역들이 또 다른 특권계급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특권계급의 형성은 상대적으로 소외계급을 만들어냈고, 이것이 옆으로 새어 지역 소외를 심화시켰다. 당연히 소외 지역민들은 불만을 가졌고, 우대 지역민들은 소외 지역 때문에 자기들의 이익이 침해된다고 여기게 되었다. 이에 따라 부유한 지역이었던 발트 3국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인들의 불만이 가장 높았고, 제일 먼저 연방에서 탈퇴한 것도 그들이었다.

 

1980년대 들어 소련은 실질경제성장률이 제로 수준으로 떨어졌다. 관료주의로 인한 물자의 낭비와 비효율성이 극명하게 나타났다. 경제적인 위기를 민감하게 느낀 국민들은 국가와 사회보다는 자기와 자기 가족 챙기기에 급급하게 되었다.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범죄와 알코올 중독이 늘어나면서 사회 기강이 급속도로 이완되었다. 이른바 사회 붕괴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서 1985년 3월 젊은 고르바초프(54세)가 당 서기장에 부임했다. 그는 부임 일성으로 ‘글라스노스트(개방, 공개, 자유)를 내놓았다. 한 달 후 그는 ’사회경제 발전의 가속화‘를 강조하고 대외적으로는 미국을 방문하여 대통령 레이건을 만났다. 러시아 국민뿐 아니라 온 세계가 그의 언행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련이 가진 모순의 골은 깊었다. 고르바초프는 글라스노스트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페레스토로이카(총체적 개혁 재건)’을 제창했다. 그는 시베리아 극동 권에 있는 하바로프스크에서 ‘페레스토로이카는 혁명’이라고 선언하여 세계를 다시 한 번 놀라게 했다.

 

그는 직접 <페레스트로이카>라는 제목의 책을 쓰기도 했다. 그는 이 책에서 ‘페레스토로이카는 사회주의를 강화시키는 것이며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님’을 특별히 언급했다. 그가 추구한 것은 ‘민주적 사회주의’였다. 그는 민주적인 계획경제에서 시장이 부차적인 역할을 하는 체제를 원했던 것이다. 그의 주장에는 기업을 비롯한 ‘국유재산의 사유화’ 같은 것은 없었다.

 

앞질러 말해서 불세출의 개혁가 고르바초프의 ‘민주적 사회주의 건설’은 왜 실패했을까? 나는 여기에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을 하나만 말하라고 하면 ‘보리스 옐친’이라고 답하겠다. 옐친을 급진개혁파라고 부르는 데에는 어폐가 있다. 이런 칭호를 먼저 붙인 것은 미국과 유럽의 서방세계 언론이었다. 엄밀히 말해서 옐친은 보수파 리가초프보다 퇴행적인 인물이었다.

 


자질 부족의 옐친, 고르바초프를 허수아비로 ⑮

 

페레스트로이카가 진행되면서 소련의 정치세력은 다시 분화하기 시작했다. 크게 보아 그들은 고르바초프의 개혁파, 리가초프의 보수파, 옐친의 급진파, 세 부파로 갈라졌다. 페레스트로이카 이전 이 세 부파는 비슷한 정치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그들은 페레스트로이카 자체에는 모두 찬성했다.

 

다른 것이 있다면 개혁의 속도일 뿐이었다. 그러나 정말 다른 것은 권력을 자기가 가져야 한다는 각자의 욕망이 아니었을까? 옐친은 1987년 10월 당 중앙위원회에서 개혁속도가 너무 느리다고 비난의 포문을 열었다. 옐친은 보수파 리가초프를 특정하면서, 그가 페레스트로이카에 소극적인 데다 당 서기국을 비민주적으로 운영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에 리가초프의 보수파는 1988년 3월, 안드레예바로 하여금, 스탈린의 공적과 사회주의의 전통을 옹호하고 개혁의 과도한 진전을 공격하는 반박 논문 ‘원칙을 포기할 수는 없다’를 발표하게 하는 것으로 맞대응했다. 이렇게 되자 고르바초프는 급진파와 보수파 사이에서 양편으로부터 동시에 압박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옐친의 급진파가 사회주의의 울타리를 일탈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급진파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자체 법칙에 따라 병행 발전해갈 수 있다는 개혁파의 견해를 문제 삼으며 경제정책에서 가장 효율적인 방식은 주식회사제이며 자본주의적 시장요소를 대폭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다당제를 수용하고 사유재산을 인정하며 완전한 자유시장경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내면서 사회주의 자체를 부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문제는 당시의 러시아 여론이 심하게 선동되고 왜곡되었다는 점에 있었다. 미국과 유렵의 권력자들과 언론들은 사회주의를 부정하려는 세력을 민주세력으로 규정하면서 음과 양으로 줄기차게 지원했다. 결과 1989년 3월 인민대의원 선거에서 옐친 등 급진개혁파의 지도자들이 대부분 압승을 거두며 부상했다.

 

반면 보수파 지도자를 비롯한 고위 당 관료들은 대거 낙선했다. 페레스트로이카가 가시적인 효과를 내지 못하고 경제가 활력을 되찾지 못하는 가운데, 성급한 인민대중이 개혁파와 보수파에 등을 돌리면서 급진파에게 쏠리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권력 다툼은 이념의 간격을 극단적으로 벌려 놓았다. 개혁의 속도를 놓고 벌이던 다툼이 이제는 아예 사회주의 원리를 지킬 것인가, 자본주의로 전환할 것인가의 문제로 양분된 것이다. 양편 극단론의 사이에서 고르바초프의 입지는 날로 좁혀지고 있었다.

 

페레스트로이카에 또 다른 위기가 닥쳤다. 쿠즈바스, 돈바스 탄전지대에서 광업 노동자들의 대규모 파업이 일어났고, 그루지야와 발트 연안 3개 공화국에서 탈연방 독립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게다가 소수민족들의 독립욕구까지 격한 양상으로 분출되고 있었다.

 

1990년 고르바초프는 급진적인 정치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대통령제 도입, 공산당의 권력독점 포기와 다당제 도입, 사적 소유권 인정'을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통과시켰고, 이에 따른 새 헌법 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옐친은 러시아 공화국 최고회의 의장에 선출되어 사실상의 러시아 대통령이 됐고, 결과 급진파가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등의 대도시 시정을 장악했다. 공산당은 이제 러시아 공화국에서는 야당이 됐다. 설상가상으로 옐친이 러시아 공화국 단독의 주권선언을 하면서 모스크바에 소련과 러시아의 이중권력 사태가 빚어졌다. 이것은 연방을 위기로 몰고 간 가장 결정적인 사태 변화였다.

 

리가초프가 은퇴하면서 보수파는 무력화됐고, 옐친 등의 급진파는 개혁 부진을 이유로 공산당에서 탈당했다. 페레스트로이카의 설계자들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급진파는 하루빨리 시장경제를 도입하라고 압박했다.

 

이에 개혁주도 세력도 급진파의 요구대로 시장 요소를 대폭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빈부격차, 경쟁의 독점화, 주기적 공황에 따른 대규모 실업, 범죄의 증가 등,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폐해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여론의 힘을 배경으로 몰아붙이는 급진파의 공격 앞에서 개혁파는 속수무책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급진파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미국과 서독, 북유럽 일본 등을 선망했다. 그들은 자유시장 경제의 환상에 사로잡혔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폐해가 가져다줄지도 모르는 파멸적인 결과에는 점점 눈이 멀어져갔다. 개혁 개방으로 새롭게 부상한 기업인들, 글라스노스트로 사회적 위치가 급상승한 각종 전문 지식인과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근거 없는 호감이 날로 확산되고 있었다.

 

옐친의 러시아 공화국은 고르바초프와 소련 최고회의를 무시하고 독자적인 개혁을 벌여나갔다. 덩달아 그루지아와 발트 3국 등의 분리독립운동도 갈수록 더 치열해졌다. 고르바초프는 각 공화국의 권력을 연방 권력보다 우위에 두는 신연방안을 제시했으나, 대부분의 공화국으로부터 거부당했다.

 

옐친을 비롯한 러시아 공화국 지도자들을 필두로 하여 친자본주의 세력으로 변한 급진파와 각 공화국의 분리독립주의자들은 소련과 고르바초프를 점점 허수아비로 만들어갔다. 아이러니 하게도 고르바초프가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된 것이 바로 이 시점이었다.

 


3일천하 보수파 쿠데타와 옐친의 돌출 ⑯

 

혁명을 성공시킨 소련은 사회주의의 실현과 더불어 민족문제는 해결됐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해결된 게 아니라 숨어 있었다. 페레스트로이카가 시작되고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민족문제는 폭발적인 양상으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1986년 카자흐 공화국 공산당 제1서기가 러시아인으로 교체되면서 일어난 폭동은 민족문제의 해소 주장이 얼마나 근거 없는 것인지를 알려주었다. 카자흐 인들의 주장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요구는 이민족인 러시아 인의 지배를 원치 않는다는 것뿐이었다.

 

발트 연안 3국에서는 ‘민족우선주의’를 표방하는 ‘인민전선’이 조직되었다. 1989년 7월 발트 3국은 사실상 독립을 의미하는 주권선언을 했다. 몇 달 후 리투아니아 공산당마저도 소련 공산당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아제르바이잔에서는 민족 간 유혈투쟁으로 수백 명이 죽었다.

 

1990년 3월 11일 리투아니아의 독립선언을 계기로 발트 3국은 1940년 병합의 무효를 선언하고 독립의 길로 달음질쳤다. 소련 중앙정부는 거의 100% 연방에 의지하고 있던 에너지 공급을 차단하며 리투아니아를 비롯한 발트 3국의 독립운동을 저지하려 했다. 그러나 발트 3국은 2차대전 이전의 발트 위원회를 복원하고 소련에서 이탈했다. 이어 몰도바와 우즈베크 공화국의 주권선언이 있었다.

 

연방 구성 15개 공화국이 제각기 실질적인 국가권력을 가지게 되면서 소비에트 연방은 해체를 시작했다. 고르바초프는 설득과 협박을 병행하면서 연방을 유지해야 페레스트로이카가 성공하고 모두가 잘살 수 있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이미 가출을 결심한 공화국들에게는 마이동풍이었다.

 

고르바초프는 마침내 공화국들의 요구를 대폭 수용한 신연방안을 내놓았다. 새 연방조약안은 “각 공화국은 주권국가로서 자신의 영토 내에서 최고의 권력을 가지며, 연방은 조약 가맹국이 위임하는 범위 내에서 권력을 집행한다”고 규정해, 연방보다 공화국의 권력이 우선함을 인정했다. 연방의 권한은 국방, 대외정책, 전략자원관리, 재정 · 통화정책으로 축소 조정되었다.

 

하지만 사태는 악화일로를 치달아갔다. 옐친은 고르바초프가 소련을 독재국가로 몰아가고 있다고 맹비난하면서, 마침내 고르바초프의 대통령 직 사임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후 옐친을 지지하는 대규모 시위와 보수파의 맞불시위가 동시에 벌어지면서 소련의 정정은 더욱 불확실성이 짙어져 갔다.

 

1991년 8월 19일 이른 아침, 세계는 소련의 쿠데타 발생을 알리는 긴급뉴스를 접했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와병으로 사임하고 전국에 6개월 간 비상사태가 선포됐다고 했다. 모스크바 시내에 전차와 장갑차가 진주했고, 국가 비상사태위원회가 전권을 장악했음을 알리는 담화문이 발표됐다.


8인 비상사태위원회 위원의 면면이 드러났다. 그들은 야나예프 부통령, 파블로프 총리, 바클라노프 국방위원회 제1부의장, 크류츠코프 KGB(국가보안위원회) 의장, 야조프 국방장관, 푸고 내무장관, 스타로두부체프 농민연맹 위원장, 티지야코프 국가기업협의회 의장 등 체제유지를 적극 옹호하던 보수파 일색이었다.

 

이들은 전 날 크림 반도의 별장에서 고르바초프에게 비상사태선언 동조냐 사임이냐의 양자택일을 요구했다. 고르바초프는 이들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고르바초프는 별장에 감금됐고, 다음 날 쿠데타가 결행된 것이었다.

 

최고 권력을 눈앞에 둔 옐친은 누구보다도 기민하게 행동했다. 그는 쿠데타의 공포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과감하게 러시아 공화국의 통제권을 자신이 전면 장악한다고 선언하고 불법 쿠데타에 대한 시민항쟁과 총파업을 촉구했다.

 

비상사태위원회는 옐친과 러시아 공화국 지도자들을 검거하려 했으나, 이들은 이미 러시아 공화국 의사당으로 피신해 있었고, 의사당 주변에는 옐친 지지자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주요 도시들에서 대규모의 반 쿠데타 집회와 시위가 벌어졌다. 군대는 집회와 시위를 적극 봉쇄하지 않았고, 아예 일부 병사들은 시위에 호의적인 눈길을 보냈다.

 

그날 밤, KGB 특수부대에 러시아 공화국 의사당을 공격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의사당 앞의 시민들은 인간사슬을 만들어 탱크를 막았다. 시민과 군대의 충돌로 5명의 시민이 사망했다. 그럼에도 시민들이 굽히지 않자, 군대는 진압을 포기했다.

 

비상사태위원회 위원들 사이에 자중지란이 일어났다. 미국의 정보기관은 이들의 움직임을 낱낱이 탐지, 옐친에게 알려주었다. 옐친은 반 쿠데타 저항을 총지휘했다. 8월 21일 오후, 비상사태위원회 위원 7명이 모스크바 탈출을 기도하고, 푸고 내무장관이 자살하면서 쿠데타는 실패로 막을 내렸다. 소련의 보수 쿠데타는 이른바 ‘3일천하’로 끝난 실패작이었다.

 

쿠데타는 옐친을 영웅으로 탄생시켰다. 쿠데타 군의 탱크 위에서 연설하는 그의 모습은 러시아 인들의 뇌리에 새로운 지도자 상으로 각인되었다. 옐친의 인기가 급상승했다. 반면에, 쿠데타 주모자들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민주적인 방법을 지키려 한 고르바초프의 인기는 급강하했다.

 

참담한 파멸을 맞은 것은 공산당이었다. 8월 23일 옐친은 러시아 공산당의 활동정지 명령을 내렸고, 고르바초프는 소련 공산당 서기장 직을 사임하고 당 중앙위원회에 자진 해산을 요청했다. 이에 소련 공산당은 해산했고, 당의 재산은 국가에 몰수됐으며, 저항하는 당원들은 체포됐다. 이제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와 자본주의 체제로의 전환은 기정사실로 굳어졌다.

 


동유럽 정권의 몰락과 단독 패권 미국의 횡포 ⑰

 

페레스트로이카는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헝가리와 폴란드를 선두로 동독,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등 모든 동유럽 국가에서 국가사회주의를 개혁하여 민주적 사회주의로 나아가려는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동유럽 국가들은 사회주의 건설의 역사가 짧았다. 사회주의 체제 성립 과정에서도 소련의 지원을 받았고, 건설 과정에서도 소련의 것이 이식되었다. 결과 대부분의 국가에 스탈린 편향의 왜곡된 사회주의 체제가 자리를 잡았다. 요컨대 동유럽 국가들의 사회주의는 안정된 체제를 구축하지도 못했을 뿐더러 사회주의 본연의 것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그들에게는 이른바 ‘자주’가 없었던 것이다.

 

이미 ‘브레즈네프 독트린’(다른 국가의 사회주의 건설을 독려하고 지원)을 폐기한 고르바초프는 동유럽에 대한 불간섭 원칙을 천명했다. 그는 1989년 8월, 최고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하나의 완벽한 사회주의 모델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 누구도 진리를 독점할 수 없다. 한 국가의 장래와 그 체제는 그 나라 국민만이 정할 수 있다. 어느 나라고 타국의 국내 상황에 간섭하거나 압력을 가해서는 안 된다.”

 

폴란드에서는 연대노조를 근간으로 하는 비 공산계열 연립정부가 구성되었다. 헝가리에서도 ‘민주광장'이 정당으로 발전하여, 집권당인 헝가리 사회당의 개혁을 압박했다.

 

관료주의가 완강했던 동독에서는 서독을 향한 시민들의 집단탈출이 시작됐고 각 도시에서 민주화와 여행의 자유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전개됐다. 위기에 처한 동독 정부가 여행의 자유화를 발표하면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집권 사회주의통일당의 지도부가 전원 사퇴했다.

 

이미 1968년에 자유화 운동이 일어났던 체코에서도 개혁 요구 시위가 잇따랐고 ‘시민광장’ 세력이 팽창한 가운데 급기야 공산당 정부가 붕괴되었다. 불가리아에서도 부패와 권력남용으로 지탄을 받던 공산당 지도부가 퇴진하고 개혁파로 전면 교체됐다.

 

1989년 동유럽 변화의 마지막은 루마니아가 장식했다. 끝까지 스탈린 식 관료주의 통치방식을 고수하며 개혁 요구 세력을 탄압해 온 차우세스쿠 정권이 대중봉기로 무너져버린 것이다. 차우세스쿠는 전격 처형됐고, 구국전선이 새 정부를 구성했다.

 

하지만, 동유럽 국가들은 원래의 목표였던 ‘민주주의의 확대’와 ‘민주적 사회주의’ 건설보다는 시장경제의 전면 도입, 사회주의의 폐기 방향으로 일주(逸走)했다. 1990년 동독이 서독에 흡수 통합됐고, 다민족 국가였던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유혈 낭자한 내전이 시작됐다. 대부분의 나라가 경제적 혼란과 정치적 불안 속에 휘말렸다.

 

소련이 대외적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자 미국은 유일 초강대국으로서 세계의 경찰을 자임하고 나섰다. 미국에 저항하는 나라들은 무자비하게 응징되었다. 미국은 리비아, 그레나다, 파나마에 무력을 행사했고 니카라과 정권을 정보전으로 와해시켰다.

 

1991년의 ‘걸프 전쟁’은 패권 미국의 횡포를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아랍 민족주의로 미국에 맞선 이라크의 후세인은 세계평화를 훼절하는 현대판 마녀사냥의 제물이 되었다. 미국은 11개국의 다국적 ‘십자군’을 조직해 수백 만의 생명을 좌우지하는 ‘전자도박게임’을 벌였다. 그러나 전과 달리 소련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미국의 패권 시위는 경제 분야에서도 가속화됐다. 1986년 시작된 ‘우루과이 라운드’는 철저하게 미국의 이익을 우선하는 기조 하에 진전됐다. 미국 권력자들에게 약소국들의 생명줄은 안중에도 없었다. 이처럼 단극화한 세계에서 미국의 횡포는 정치 경제 양면에서 거칠 것이 없었다.

 


소련 붕괴가 우리에게 주는 치명적인 교훈 ⑱

“그동안의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볼 때, 이 땅에서 생겨난 공산주의 모델은 실패했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고르바초프)
“우리 땅에서 그런 실험이 있었다는 사실이 우리 국민들에게 큰 비극이었습니다.” (옐친)

 

보수파의 쿠데타를 제압한 옐친은 고르바초프에게서 연방 권력을 하나하나 빼앗으며 자신의 권력을 확대해갔다. 이제 앉아 있다가는 연방이 아니라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될 상황에 놓였다고 판단한 다른 공화국들도 우크라이나를 시작으로 차례로 독립을 결의했다.

 

이미 발트 3국의 독립을 승인해 준 고르바초프는 소련 대통령 직을 사임하고 크렘린을 떠났다. 크렘린의 국기 게양대에서 소련의 적기가 내려지고 러시아 삼색기가 펄럭이게 되었다.

 

소비에트 연방을 구성했던 15개 공화국은 모두 독립국가가 됐고, 그중 11개국이 북부 유라시아에 독립국가공동체(CIS)를 구성했다. 이로써 소련은 74년 만에 와해되었고, 옛 소련 사람들은 사회주의 체제의 보호막에서 나와 자본주의 생존경쟁의 길로 들어섰다.

 

전체 인민의 소유였던 국가의 부가 이익과 욕망에 민첩한 개인들에게 넘어가면서 졸부들이 출현하고 빈부격차가 심해졌다. 페레스토로이카에서 10년쯤 지난 2000년대 들어 시장이 조금씩 제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 체제가 갑작스럽게 자유주의 체제로 전환되긴 했으나, 일찍이 이를 경험한 적이 없는 러시아인들은 한동안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오늘날 러시아는 2000년 이후 ‘위대한 러시아’의 재건을 추구하는 푸틴 체제 하에서 안정을 되찾고 있다. 소련 해체 후 옛 소련의 지위는 독립국가공동체의 중심인 러시아가 계승했다. UN 안보리의 상임이사국을 비롯한 국제적 지위도 러시아가 모두 이어받았다.

 

옐친은 경제가 어려워지고 민족 갈등이 첨예화되는 가운데 반대파의 결속이 강화되면서 지지도가 추락했다. 위기에 몰린 옐친은 초헌법적인 비상조치를 취했다. 그는 의회를 해산하고 선거를 실시해 양원제 새 의회를 구성한다는 포고령을 내렸다.

 

의원들이 이에 항거하여 의사당 점거농성에 들어갔다. 군대가 의회를 포위한 가운데, 반 옐친 시위가 벌어져 62명이 사망했다. 옐친은 모스크바에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마침내 군대가 의회를 유혈 점령하고 이 과정에서 다시 50여 명이 죽었으며 반정부 지도자들은 체포됐다. 일찍이 1991년 8월 진압군의 탱크 위에서 쿠데타를 저지한 옐친이 불과 2년 후 이제 탱크를 앞세우고 반대자들을 유혈 진압한 것이다.

 

1993년 새 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총선거가 실시됐다. 옐친과 급진개혁파는 새 선거에서도 안정 다수를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옐친의 급진개혁을 지지하는 '러시아의 선택'은 15%를 득표하는 데 그쳤고, 다소 온건한 개혁을 표방하는 3개 정파가 20%를 약간 밑도는 득표율을 기록했다. 따라서 옐친 정부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정파의 득표율은 많게 잡아도 35%가 채 안 되었다.

 

1995년을 전후하여, 자본주의로 전환된 경제가 마침내 성장 추세로 돌아서긴 했으나 그 기간은 오래 가지 못했다. 1997년 말의 동아시아 경제위기가 러시아의 취약한 경제를 타격하면서, 러시아는 1988년 모라토리움(채무 불이행)을 선언했다.

 

경제 위기에 따른 국민들의 불만이 쌓이면서 정치적 위기에 몰린 옐친은 건강까지 악화되어 1999년 말 임기를 조금 남겨둔 시점에서 전 KGB 출신의 블라디미르 푸틴에게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기고 사임했다. 체첸 반란을 강경 진압하여 대중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던 푸틴은 2000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압도적인 지지로 공산당과 자유민주당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푸틴은 2000년 ~ 2008년 대통령 두 번, 2008년 ~ 2012년 총리, 2012년부터 6년 임기의 대통령을 하면서 16년 넘게 정권을 장악하고 있다. 이처럼 21세기의 러시아는 ‘푸틴의 러시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푸틴은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으며 러시아를 무난히 이끌어가고 있다.

 

러시아 인들은 옛 소련과 표트르 치세 러시아의 혼합형을 위대한 러시아의 전형으로 인식하고 있다. 푸틴은 국가주의와 중도 성향의 정당들을 폭넓게 합친 ‘통합 러시아당’을 만들어 자신의 정치적 기반으로 삼고 있다. 러시아는 소련 해체 후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차츰 급격한 변혁이 초래한 질곡에서 벗어나고 있다.

 

다른 소련 공화국들의 사정도 그리 좋은 것은 아니다. 그토록 바라던 독립과 자본주의가 가져다준 것은 경제적 침체와 빈부격차, 대량실업, 위축된 자존심뿐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많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다시 옛날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는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가 바람직하다는 것은 알지만 관료주의와 제국주의로 왜곡된 사회주의에는 향수가 없다.

 

소비에트 연방 해체의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실로 적지 않다. 서둘러 통합하면 해체도 빨리 온다는 사실, 이념은 짧지만 민족은 길다는 사실, 좋은 것(사회주의)이 왜곡되면 보통 것보다 나빠진다는 사실, 한 번 환상을 품으면 반대되는 환상을 다시 품게 된다는 사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역사와 경험을 무시하고 타인의 것을 부러워하여 추구하는 국민은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게 된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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