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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현대사

[펌]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 의외로 잘 모르는 사실

작성자워라|작성시간22.01.21|조회수296 목록 댓글 1

https://www.clien.net/service/board/park/14974007

 

1. 88년에 첫 청문회를 했다.  

어린분들이 특히 잘 모르시는데 

의외로 광주 민주화운동의 진상 규명이 시작된 건 88년부터였습니다.

 

5공 비리 청산 청문회에 포함되어 있던 

당시에는 '광주 사태' 청문회였죠. 

 

하지만 노태우 정권에서 했던 만큼 진상 조사보다는 일종에 정권의 탈출구 형식에 가까웠습니다. 

이때 거둔 거의 유일한 성과라면 빨갱이들의 폭동이 아니었다는 걸 밝혔다는 것 정도였습니다. 

 

실제 제대로 된 조사가 시작되고 진상 규명의 움직임이 있던 건 

김영삼 정권에 와서였습니다. 

 

하지만 3당 합당으로 태어난 정권에 광주에 직간접적인 책임자들이 당내 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당시 여당의 한계로 실질적으로 이뤄진 건 대략적인 피해자의 조사와 광주사태를 민주화 운동으로 복권 시킨 정도였습니다. 

 

제대로된 복권과 피해 보상이 있었던 건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서였습니다. 

하지만 앞서 두 차례의 미흡한 조사로 뒤에 많은 문제들이 남게 됩니다. 

 

 

2. 피해자, 사망자들의 통계가 실은 매우 부실하다. 

 

그러니까 김대중 정권 이전의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조사는 

이를테면 가해자가 자신의 치부를 조사하는 격이었습니다. 

 

물론 이후 당시 피해자들이 모여 정부와 협상하고 조사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이 드러나기도 했습니다만, 영영 밝혀지지 않은 것들도 있죠. 

 

첫째 사망자 통계입니다. 

사망자 조사를 하는 건 의외로 쉽습니다. 

당시 매장을 하려면 의사의 검안서가 첨부된 사망증명서가 필요했으니까요. 

주로 전남대 의대에서 파견되어 진행한 이 업무에 따라 광주 사망자에게는 제대로 된 검안서가 

첨부되어 민주화 운동의 피해자라는 걸 입증하기 쉬웠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게 문제였습니다. 

 

당시 광주에서 일어난 일은 그 때의 언론과 정부에 의하면 북괴의 사주를 받은 빨갱이들의 폭동이었습니다. 

80년대 빨갱이의 가족은 대기업 취직은 고사하고 면서기도 못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때문에 많은 피해자들이 검시의를 찾아가 울며 불며 사인을 바꿔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이는 피해자를 최대한 줄이고 싶은 군부의 계산과도 맞아 떨어졌습니다. 

때문에 폭도가 아닌 폭도에 의한 피해자들에게는 소정의 장례비를 지급했고, 

주로 광주외각에 못배운 농민분들이나, 가족들이 대기업, 혹은 공무원에서 일하고 있는 많는 사람들이 사인을 위조해 (검시의도 좋은 뜻에서 고쳐주고 군부는 그걸 눈감아주죠.) 광주 민주화 운동의 사망자에서 빠졌습니다. 

유감스럽게 이들은 민주화운동으로 복권된 이후 유공자 선정이나 사망자 통계에서 빠집니다. 

 

그나마  주로 전남대 병원에서 사망한  운좋은 분들만 이 통계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광주 시내에서 사망한 분들은 계엄군들이 트럭에 시신을 실어  광주 교도소로  갔습니다. 

당시 광주 교도소의 소각로 굴뚝에서는 불이 꺼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자연스럽게 두 번째 문제를 지적할 수 밖에 없는데 

실종자 통계입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실종자 통계가 진행되었던 

김영삼 정권 때는 민정당 출신 군인들이 요직에 있던 시절입니다. 

실종자 조사가 매우 까다로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광주에서 80년대 내내 지배했던 빨갱이 가족이라는 꼬리표의  여파로 

실종자로 등록하는 것 자체가 큰 용기를 필요로 했습니다. 

 

따라서 현재 광주 민주화 운동의 공식적인 실종자는 200여명 전후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를 자세히 조사했던 전문가들은 400명에서 최대 800여명이 실종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현재 하고 있는 암매장 조사에 대해 잠깐 말하자면 

시신들이 실려갔던 광주교도소 일대를 조사하고 있습니다. 

이는 근거가 있는데 80년 6월, 국보위에서는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암매장한 위치를 각 진압부대를 통해 조사했습니다. 

 

-물론 전두환 이하 군부에서는 이 암매장이 정식 매장전 가매장이었다 주장하지만 사망 증명서가 누락되어 있고 문서 내에도 암매장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암매장이 확실합니다.- 

 

약 200여구로 추정되는 이 실종된 시신들의 위치를 광주 교도소 인근에서 기록과 증언을 토대로 찾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찾을 가능성이 희박하다 봅니다. 

 

이는 아주 간단하게 유추해볼 수 있는 것으로 왜 국보위에서 암매장 위치를 조사했겠습니까?

이후 문제가 생길 경우 이장이나 합장을 해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서겠죠. 

따라서 이미 이장해서 원 위치에 있지 않을 겁니다. 

이 경우 이장에 참여했던 당사자가 나와 증언하지 않는한 영영 찾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리고 광주 교도소에서 소각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신들 역시 영영 찾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3. 보상받지 못한 누락된 피해자들이 의외로 있다. 

 

유감스럽게 광주 민주화운동의 생존자들 중 상당수는 5공 정권 내내 교화 대상으로 

각종 치안 기관과 정보기관의 감시 대상이었습니다. 

 

이 그럴듯한 말은 거의 84년까지 감옥에서 감금되어 있거나 

안기부, 보안사, 대공분실등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시거나

기타 등등의 일을 당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들 중 일부는 심한 경우 김영삼 정권에서 복권되기 전까지 이런 집단들에게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생존자분들은 생존했던 것 자체로 죄책감을 갖거나 PTSD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 와중에 대공 용의자로 정부에 시달렸죠. 

가정이 파탄나고, 버티지 못하고 돌아가신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이를 입증할 증거가 있고 가족들이 이후 피해자로 신청했다면 복권되거나 보상받을 수 있었지만, 

이 엄혹한 5, 6공 시기를 잘 넘기지 못한 분들이 다수이고,

가정이 완전히 붕괴되면서 신청해줄 사람도, 증언해줄 사람도 남지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실제로 복권된 친구들이 수소문해 행려병자로 정신병원에 수감되어 있는 민주화운동 열사분을 찾아내는 등의 일이 있었습니다. 

 

5, 6공 시절을 버티지 못해 통계에 잡히지 않는 자살이나, 알코올 중독, 자의에 가까운 사고사로 마무리 하고 복권되지 못한 채 스러져간 분들이 많습니다. 

 

 

4. 이런데도 5.18 유공자 명단을 공개하라는 인간 말종들이 있습니다. 

뭐, 그렇습니다. 

 

 

5. 경상도 지방에서는 꽤 오랫동안 빨갱이들의 폭동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5월 21일경 첫 광주에 대한 신문기사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경상도에서는 다음날 바로 규탄대회를 하는 등 빠른 언론 작업 및 프레임 작업에 들어갑니다. 

이 프레임은 놀랍게도 2000년대 초반까지 그 지역에선 일반적인 상식에 가까웠고, (지역감정과 함께) 아직도 일베나 보수진영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죠. 

 

 

6. 조갑제 기자는 국제일보 기자로 당시 현장에 있었다. 

흑화하기 이전 조갑제 기자는 당시 부산지역의  대표적인 르포 기자였고, 

광주에 직접 가 현지 상황을 기록하지만 보도되는 일은 없었습니다. 

따라서 보수 진영에서 북파 간첩설을 밀 때 혼자 무쌍을 찍기도 했습니다. 

 

 

7. 헬기 사격이 있었다. 

88년 당시 청문회에서 처음 나왔던 증언이었습니다. 

현장에 있던 신부님의 증언과 도청에 남은 총격 자국등의 증거가 있었지만 무시됐죠.

군부 축에서는 아에 헬기의 출동 자체를 부정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당시 해당 헬기 부대에 있던 군인들의 양심선언으로  

헬기가 무장한 채 출격했다는 증언은 확보했습니다. 

 

이미 헬기 사격의 증거는 차고 넘치지만 

방아쇠를 당긴 분이 나타나지 않는 한 보수진영에서는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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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young026 | 작성시간 22.01.21 전두환 때 나왔던 사망자 통계는 200명이 채 안 됐던 걸로 기억합니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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