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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현대사

[펌] 우크라이나 시리즈2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같은 민족인가

작성자워라|작성시간22.02.16|조회수902 목록 댓글 0

https://www.clien.net/service/board/park/16968857 

 

얼마전 재미있는  기사가 났습니다.

러시아 대변인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지 않을 거라고 말하면서 그 이유로, 같은 국민(?)끼리 서로 죽이는 전쟁을 원치 않기 때문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침략 의도 없어..우리 국민 사이 전쟁 용납 못해" - 뉴스1,  2022. 1. 28https://news.v.daum.net/v/20220128081454601

 

 

같은 국민?

 

저는 놀라서 기사 영어 원문을 찾아보았습니다.   "our people"이라는 워딩을 썼더군요.  

같은 국민이라기 보다는 같은 민족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https://www.reuters.com/world/europe/russia-sees-some-room-dialogue-after-us-security-response-2022-01-27/

 

"We have already repeatedly stated that our country does not intend to attack anyone," said Alexei Zaitsev, a Russian foreign ministry spokesman. "We consider even the thought of a war between our people to be unacceptable."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현재 엄연히 서로 다른 나라입니다. 그런데 러시아는 대놓고 같은 민족이라고 말을 합니다.

과연 그런 걸까요.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같은 민족일까요. 

미국과 영국은 이것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병합하여 대러시아 제국을 세우려고 하는 침략 야욕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다른 민족인가. 

 

오늘 글은 이 주제를 파고 들어보겠습니다.

 

아래 위키 링크에는 슬라브 민족의 계통도가 있습니다.

https://ko.wikipedia.org/wiki/%EC%8A%AC%EB%9D%BC%EB%B8%8C%EC%A1%B1#%EB%B6%84%EB%A5%98

 

슬라브족은 동슬라브, 서슬라브, 남슬라브족으로 나뉘는 데, 

동슬라브족은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세 나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풀어서 설명하는 것이 더 이해하기 쉬운데요. 본래 동슬라브족들은 현재 우크라이나의 수도인 키예프 근처에 몰려 살고 있었습니다. Kiev Rus(키예프 루스)가 그것입니다.  우크라이나, 러시아, 벨라루스 세 나라는 모두 키예프 루스를 자신들의 시초로 보고 있습니다. 

 

 

1. 우크라이나의 역사

키예프 루스는 AD 882-1240년. 우리나라의 고려 시대에 존재했던 나라입니다. 

키예프 루스가 분화하게 된 계기는 칭기스칸 몽골의 침입(1222)이었습니다. 

몽골의 침공에 키예프에서 북서쪽으로 도망간 일부 슬라브족들은 모스크바에 정착합니다. 모스크바도 몽골에게 정복되어 킵차크 칸국의 영토가 되지만, 몽골은 의외로 자지체(?)를 허용해주었기에, 공물과 세금만 내면 슬라브인끼리 자치제를 하면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모스크바 대공국이라고 정식으로 나라를 설립합니다.

 

반면에 키예프에 남았던 이들(우크라이나 지방)은 몽골이 쓸고 간 후에 자체적으로 두개의 작은 공국을 세웠다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게 정복되어 식민지가 됩니다(1392). 

이후 우크라이나 서부는 오랜 식민지배를 겪게 됩니다.

우선 사백년 가까이 폴란드 귀족 밑에서 슬라브족들이 피지배계층으로 살아가다가, 나중에 보흐단-흐멜니츠키란 코사크족 지도자가 반란을 일으키고, 러시아측 (루스 차르국)에 개입을 요청합니다 (보흐단 흐멜츠키는 오늘날 우크라이나 지폐에 그려진 인물입니다).  이에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는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와 함께 개입하여 폴란드를 쪼개서 나눠 먹습니다. 이것을 폴란드 대분할이라고 부릅니다(1772, 1793, 1795 세번에 걸쳐 분할됩니다), 이때 우크라이나 동부와 벨라루스 지방이 러시아 영토가 됩니다.

(우크라이나 서부가 아니라 동부입니다.  이 구분은 매우 중요한 데, 제가 나중글에서 지도로 표시해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추가로 러시아는 밑에서 올라오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과 수차례 전쟁을 벌인 끝에, 우크라이나 남부와 크림 반도를 획득합니다. (1783년)

 

https://ko.wikipedia.org/wiki/%ED%8F%B4%EB%9E%80%EB%93%9C_%EB%B6%84%ED%95%A0

 

 

한편 우크라이나 동부는 러시아제국에 편입되었갔지만, 서부는 다른 역사를 걷게 됩니다. 폴란드 치하에서 벗어나자마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밑에서 다시 120년간 식민지배를 겪게 됩니다.  그러다가 1917년 러시아에서 공산 혁명이 일어나고 혼란기가 오자 그때를 틈타  독립을 선언했다가(1917), 다시 2년만에 폴란드에게 점렴당했다가, 소련이 거기마저 점령하면서 소련 휘하의 우크라이나로 동-서 지역이 통합됩니다.

 

그래서 아래와 같은 우크라이나 지도가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죠.

동부지역이 우크라이나가 된 것은 1922년 소련연방시절입니다. 그 이전까지 동부 지역은 우크라이나가 아니었습니다.

남쪽의 크림반도가 우크라이나 땅이 된  것은  그보다 더 늦은 1954년입니다. 무슨 이유로 이 땅들을 우크라이나에 주었던 것일까요.

 

 

 

2.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같은 민족인가?

기본적으로 러시아인들은 우크라이나를 같은 민족으로 보았습니다. 폴란드와 오스트리아에게 식민지배를 겪고 돌아온 동족으로 보았지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인중에서 일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크라이나 서부지역은 폴란드 지배하에서 사백년이나 있으면서, 언어에 폴란드 어휘가 끼어들어왔으며, 문법 마저도 일부 달라졌습니다.  이것이 우크라이나어입니다.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가 얼마나 다른가. 이것은 얘기하는 사람들 마다 다르던데, 어떤 이는 러시아인이 우크라이나 어를 못알아듣는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듬성 듬성 알아들을 수 있다 라고 말합니다. 제가 예전에 읽었던 기사에서는 두 언어가 70%의 어휘가 같다고 하더군요. 위키에서는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는 어휘가 70%정도 동일하고, 러시아어와 벨라루스어는 85%정도 동일해서, 벨라루스 사람들은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 양쪽을 둘 다 그냥 알아듣지만,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들은 서로의 말을 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되묻거나 일단 들은 다음에 좀 더 생각을 해야 알아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  내친 김에 제가 호기심에 찾아봤는 데, 우리나라 말과 북한 말은 어휘의 80-90%가 동일하다고 하고, 우리나라 말과 제주 방언 정도의 차이가 러시아-우크라이나어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 

언어외에 종교도 약간 달라졌습니다. 폴란드는 식민지배를 하면서 우크라이나 인들 사이에 분열을 일으키기 위해 우크라이나인들의 종교를 러시아 정교회에서 그리스 카톨릭 정교회 라는 것으로 바꿉니다. 아래 링크 글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https://namu.wiki/w/%EC%9A%B0%ED%81%AC%EB%9D%BC%EC%9D%B4%EB%82%98%20%EA%B7%B8%EB%A6%AC%EC%8A%A4%20%EA%B0%80%ED%86%A8%EB%A6%AD

 

"당시 우크라이나인들은 대부분 정교회 신자였으나 영토 대부분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영토였기 때문에 가톨릭의 영향권 하에 있었다. 폴란드 왕이 폴란드-리투아니아 내의 정교회 인사권을 거의 장악하고, 가장 높은 액수의 상납금을 내는 사람에게 고위 성직을 수여하는 상황이 되면서 정교회 성직자들이 가톨릭에게 밀리는 상황이었다. 폴란드인들은 루테니아인 정교도들이 서로 욕하고 싸우게 만들 목적으로, 리비우 형제단에게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면 리비우 형제단 전원을 리비우 시에서 추방하겠다.'고 엄포를 놓아 새로 동방 가톨릭 교회 하나를 만들어낸 것.

 

폴란드 정부의 의도대로 그리스 가톨릭교회가 성립된 이후 루테니아인들은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전역에서 서로 대판 싸움을 벌였다. 그리스 가톨릭교회로 개종한 사람들은 배신자라고 비난을 듣는 와중에, 폴란드 정부의 힘을 빌어서 정교회를 믿는 동포들과 싸움을 벌이게 되는 등 처음 시작은 대략 좋지 않았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교회와 벨라루스 그리스 가톨릭 교회가 루테니아인들에게 기여하게 되는 바도 적지 않았다. 대부분의 교육 시설들이 종교 기관에 종속되어 있었던 당시, 정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는 중세 시대에서 더 진보하지 못하고 정체되었던 데 비해, 가톨릭 계열 학교들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화 및 프랑스의 최신 학문들을 가르칠 수 있었던 것. 원래의 나쁜 의도와는 다르게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교회는 우크라이나에 서유럽의 학문이 좀 더 원활하게 유입되는 통로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예수회 선교사들이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사람들에게 우크라이나어, 벨라루스어 성경을 보급하고 문해율을 신장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저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여기서 마지막 문단이 뽀.인.트.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우크라이나 서부의 언어와 문화, 종교가 종래와는 달라졌기 때문에,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 다르다 라는 말을 합니다만,

우크라이나 서부인들이 '우리들은 서유럽 문명의 혜택을 받아서 좀 더 문명화 되었으며, 러시아인들은 문명적으로 뒤처져있다. 미개하다 '는 서유럽의 관념을 내재화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우크라이나 서부인들의 우월감 vs. 러시아인들이 이제는 자기가 본가 라고 생각하는 우월감. 이게 두 나라간의 충돌 밑에 깔려있는 기본 감정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도, 언어가 좀 달라지고 종교가 좀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같은 민족 아니겠습니까. 

타 민족에게 식민지배 당하는 것보다는 낫지요. 라고 생각하는 우크라이나 인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얼마뒤, 차라리 타 민족에게 식민지배 당하는 것보다도 못하다 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대삽질을 러시아가 저지릅니다. 스탈린의 대기근 (홀로도모르) 입니다. 

 

 

3. 홀로도모르 (1932-1933)

우크라이나가 소련에 편입되고 난 다음에, 1932-1933년에 걸쳐 우크라이나 대기근(Holodomor)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스탈린의 농업정책 실패로 인한 것이었는 데, 1931년에 대풍작 (평소보다 35% 더 수확됨)이 있었고 이에 고무된 소련은 식량증산 목표를 대폭 높이고 세금수확량도 높였는 데, 다음해에 곡물생산량이 대폭 감소했습니다(=평년작 수준으로 되돌아옴). 

 

우크라이나 농부들이 스탈린식 집단농장체제에 반발하여 근로의욕이 대폭 저하된 영향도 있었지만, 스탈린은 인정사정 없이 목표치만큼 세금 징수-식량을 긁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농부들이 식량을 감추고 속이는 거 아니냐고 의심하면서, 세금량을 채우라고 다음해에 쓸 종자조차 남겨주지 않고 긁어갔죠. 그렇게 긁어간 식량을 해외에 수출했습니다. 서류상 보고받은 바로는 식량이 남아도니까요.

 

그 결과 우크라이나에서 수백만명이 굶어죽는, 인간에 의한(!) 대 기근이 발생하였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인육사건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사망자수 추정치는 백오십만명부터 천이백만명까지 다양합니다. 정확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사망자수 추정 기준이 달라서 그렇기도 합니다. 영어 위키는 7백만에서 1천만으로 추정한다고 어림잡고 있고, 한국 나무위키는 2백4십만에서 7백50만명 사이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정부는 이걸 7백만에서 1천만명으로 어림잡고 있는 데, 굶어 죽은 사람 4백만명에 영양실조로 인해 출생시 결함이 있었던 birth deficit 6백만명을 추가해서 그리 계산합니다. 

 

이 홀로도모르 사건을 두고서, 여러가지 설이 있습니다만, 크게 보아서 두가지 견해로 나뉩니다.

ㄱ. 우크라이나인들을 인종학살하기 위해서 저지른 사건이다.

ㄴ. 인종학살은 아니고, 공산주의의 행정능력 부족과 엉터리 보고서, 계산착오가 일으킨 재난이다.  

 

일단 다수설은 ㄴ입니다.  저도 후자를 믿는 쪽입니다.

판단 근거는, 

- 1932년 당시 우크라이나 인들만 굶어죽은 게 아니라, 본토 러시아인들도 같이 대량으로 굶어죽었습니다.  

- 이보다 10년전인 1922년에 러시아는 이미 식량분배 실패로 러시아인 120만명을 굶어죽인 경험이 있었습니다. 

- 20년뒤 중국에서 모택동의 '참새를 잡아라' 대기근 (대약진운동)으로 3천만명을 굶겨 죽이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이 대기근들은 공산주의 계획경제 특유의 병폐로 보는 해석이 다수설입니다.

 

 

아래 링크는 당시 얼마나 굶어죽어갔나 빈도표를 표시한 지도입니다.

 

 

 

하지만, 러시아인들이 같이 굶어죽어갔다고 해서, 당장 내 가족이 굶어죽은 원한이 잊혀지겠습니까. 

아니지요.  

우크라이나인들 사이에는 반소련 의식이 번져가기 시작합니다. 특히 우크라이나 서부지역에.

 

여기에는 문화적인 배경도 있었습니다. 

우크라이나 서부는 폴란드와 오스트리아의 식민지배를 거치며, 서유럽식 자영농 및 소작제도가 들어와 있었습니다.

반면에 우크라이나 동부와  러시아 본토에서는 러시아 전통의 집단농장 미르 시스템이 있었습니다. 

미르는 농민들의 자치 공동체인 데, 마을 원로들/유지들이 자체적으로 촌락의 농토를 주민들에게 분배해서 경작을 시키고, 세금을 거두어 국가에 납부하는 공동체였습니다. 마을 누군가가 세금을 빵꾸내면 연대책임을 묻기도 했습니다. 이런 집단 농장의 전통이 있다보니까, 우크라이나 동부는 공산당의 집단농장 시스템을 받아들이는 데 저항이 덜했던  반면에, 우크라이나 서부는 반발이 심했습니다. 

 

 

4. 스테판 반데라와 2차 세계대전

 

홀로도모르를 겪고나서 우크라이나 서부에서는 반소련 정서가 번져갑니다.

이것을 틈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가 탄생하는 데...  

그 기치를 들었던 스테판 반데라 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스테판 반데라는 우크라이나 서쪽끝 갈리치아 지방에서 태어난 우크라이나인이었습니다. 갈리치아는 오스트리아 치하에 있었고, 그래서 스테판 반데라는 독일 문화에 친숙했죠.  그는 스무살때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Organization of Ukrainian Nationalists OUN)에 가입을 하고, 나중에는 OUN의 수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나무위키에 설명된 이 사람의 행적을 보자면...

 

"이 극우민족주의 조직인 OUN은 퇴역군인과 가난한 농민, 폴란드에서 일자리를 찾지 못한 교육받은 우크라이나의 젊은이들이 가담했는데, 의회민주제도를 불신하는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이 지하 OUN 조직의 선봉이 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동족에 대한 테러행위도 서슴지 않았는데, 대표적으로 1934년 내무장관 피에라츠키(Brinislaw Pieracki)를 암살하고, 학생들의 OUN 가입을 금지시켰다는 이유로 존경받는 고등학교 교장 바비(Іван Бабій)를 살해하기도 했다.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반데라는 감옥에서 풀려나 당시 독일의 점령 아래 있던 크라쿠프로 이동했고, 반데라는 자신을 지지하는 조직원을 데리고 우크라이나 혁명 민족주의자 조직(OUNR, 통칭 OUN-B)을 설립한다. 1941년 독일군이 소련침공을 준비하면서 소련 내 공작을 위해 반데라와 접촉했고, 1941년 6월 30일 독일군이 키예프를 점령하자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선포하기도 했는데 독립을 선포하여 설립된 정부가 바로 우크라이나 국민정부이다.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서부 우크라이나의 상당한 지역이 나치 독일 점령하에 들어갔으나, 적잖은 우크라이나인들이 독일군을 해방자로 받아들였다. 반데라를 비롯한 서부 우크라이나측의 협력으로 SS 갈리시아 부대 등이 창설되었는데, 이 군대의 규모가 대략 8만 명 정도 되었다. 이 과정에서 적잖은 폴란드인 유대인 그리고 러시아인들이 큰 피해를 보았고 학살까지 당했다. 특히 앞서 설명한 SS 갈리시아의 경우 대다수 인원들의 출신이 스테판 반데라가 창설한 OUN이었다. 1929년에 창설된 이 조직은 인종적으로 우크라이나인 위주의 우크라이나 독립 국가를 창설하는 것이 목표였다. 당시 반데라의 조직인 OUN은 1941년 기간 동안만 20만 이상의 유대인을 학살했다. 나치의 인종청소 정책에 협력했고 직접 자행할 때도 많았다.

 

그러나 애초부터 우크라이나 독립에는 관심이 없었을 뿐더러, 우크라이나인들이 열등인종으로 본 나치스 좌파 국가판무관 코흐는 반데라의 이런 행위를 두고 볼 리가 없었고, 9월 5일 반데라와 OUN-B의 주요 간부들을 체포해 부헨발트(Buchenbald) 수용소로 보냈다. 

 

이후 지도부를 잃은 OUN-B는 극단주의적으로 치달아 독일군과 소련군 모두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무장투쟁 전개 과정에서 루치크 학살, 볼린 학살 등을 자행, 5만에서 10만 혹은 12만에 이르는 폴란드인들이 학살당하고 수십만 명이 고향을 등져야 했다. 또한, 1944년 소련 장군이었던 니콜라이 바투틴을 암살하는 등 우크라이나 내 극우성향의 파르티잔 반소투쟁의 한 축을 담당했다.

 

하지만 1944년부터 1945년, 그러니까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쿠르스크 전투 이후 소련이 전쟁에서 승기를 잡으면서 이들의 운명도 비관적으로 전개됐다. 이에 따라 한때 나치에 협력했던 이들은 나치와 소련군 둘다 대항에 싸우기도 했으나, 1944년 겨울부터 1945년까지 소련군은 서부 우크라이나 농촌 산악 지역을 대대적으로 수색하며 저항군을 소탕해 나갔다. 이러던 와중에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시작됐고, 이들은 또 다른 동맹세력을 찾게 되는데, 그게 바로 미국 CIA였다.

 

미국 CIA는 스테판 반데라를 포함하여, 소련을 피해 도망친 우크라이나 극우 민족주의자들의 서유럽이나 미국 이주를 도왔다. 우크라이나 지역에 남아있던 일부 잔존세력들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가며 1946년과 1947년에 여러 작전들을 개시했다. 이런 작전의 목적은 소련의 동유럽 지배력을 약화시키려는 차원의 목적이 강했으나, 소련은 침투자 대부분을 신속히 처리했다.

반데라는 나치 독일이 패망한 이후 소련을 피해 서독에 남았으며, 우크라이나 독립운동 등을 전개하다가 1959년 뮌헨에서 KGB 요원인 보그단 스타신스키에 의해 암살되었다. "

 

 

 

5. 스테판 반데라 사후의 우크라이나 - 흐루시쵸프와 브레즈네프

 

우크라이나인은 러시아와 다르다 는 민족주의를 내세웠던 OUN은 나치를 지지하다가 2차 대전에서 패망했습니다. 

나치는 전쟁에 졌고, 소련이 승리했죠.

스테판 반데라와  OUN이 우크라이나 서부에서 자원자들을 받아 수만명의 군대를 만들어 나치 SS에 상납했었지만, 나치를 이를 숙청해버렸습니다.  그럼 우크라이나는 2차 대전에서 나치를 편든 전범국이 되었는가.

아닙니다.

소련은 우크라이나에서 그 이상의 인원을 동원했습니다. 수십만명의 우크라이나 인들을 징병하여 소련군 소속으로 나치와 싸우게 했습니다.  대다수 우크라이나 인들은 소련군 소속으로 싸우다 죽어갔고, 살아남은 가족 구성원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크라이나는 소련 연방하에 2차 대전의 승전국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는 물밑으로 사라집니다.

 

 

 

 

하지만... 그래도 홀로도모르로 가족들이 굶어죽은 원한은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십년뒤, 뜻밖의 일을 통해서 한풀이가 이뤄집니다. 

우크라이나인들이 소련을 장악하게 된 것입니다. 자그마치 삼십년간. 

 

소련의 지도자를 간단히 살펴보자면 레닌 > 스탈린(1922-1952) > 흐루시쵸프 (1953-1964) > 브레즈네프(1964-1982) > 안드로포프, 체르넨코 (1983-1985) > 고르바쵸프(1985-1991) 로 이어지는 데, 

흐루시쵸프와 브레즈네프가 우크라이나 공산당 출신이었거든요. 흐루시쵸프는 집권기간중에 우크라이나에게 크림반도를 줍니다. 

 

(재미있는 것은, 러시아인은 정작 우크라이나보다도 서기장직을 차지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레닌은 혁명후 바로 죽었고, 스탈린은 그루지아(조지아) 출신이어서 러시아인이 아니었고, 흐루시쵸프와 브레즈네프는 우크라이나 공산당 출신이었고, 안드로포프, 체르넨코, 고르바쵸프만 러시아인이었습니다. 러시아인이 소련 서기장직을 차지한 기간이 합쳐서 십년도 안됩니다)

 

우크라이나에서 아내까지 얻은 흐루쇼프, 現地지지세력 강화 위해 크림반도 '선물' - 조선일보, 2014. 3. 4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3/04/2014030400147.html

 

"러시아 영토였던 크림 반도는 1954년 우크라이나로 편입됐다. 니키타 흐루쇼프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뜻이었다. 흑해 함대가 주둔하는 전략적 요충지를 왜 넘겨줬을까.

 

Q. 편입은 흐루쇼프의 단독 의사 결정이었나.

A. 그렇다. 당시 소련 헌법에 따르면 영토 문제는 최고 소비에트 회의의 동의와 국민투표를 거쳐야 한다. 하지만 1953년 서기장에 취임한 흐루쇼프는 절차를 생략하고 이듬해 편입을 일방적으로 지시했다. 크림 반도가 우크라이나에 주는 '흐루쇼프의 선물'이라 불릴 정도였다.

 

Q. 크림 반도를 왜 우크라이나에 줬나.

A. 흐루쇼프를 소련 최고 지도자로 키워준 건 8할이 우크라이나였다. 애정과 정치적 야심이 배경이 됐다. 흐루쇼프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국경 마을 칼리노프카에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4세 때 가족이 우크라이나 도네츠로 이사한 뒤, 광산을 전전하며 잡일을 했다. 1916년 결혼한 첫째 아내 예프로시냐는 우크라이나 현지 광산 엘리베이터 작동공의 딸이었다. 결혼 3년 만에 대기근으로 아내가 사망하자 우크라이나계 소작농 딸 니나 페트로브나와 재혼했다.

 

정치적으로도 우크라이나 계파에 힘입어 성장했다. 1918년 공산당(볼셰비키)에 가입한 후, 라자르 카가노비치 우크라이나 공산당 서기장의 눈에 들어 중앙 무대에 진출했다.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를 거치기도 했다. 이후 우크라이나 식량 문제를 해결한 공을 인정받아 1949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국원이 됐다. 스탈린 사후 정적을 제거하고, 우크라이나 출신을 요직에 배치시켜 권력을 잡았다. 크림 반도 할양도 지지 세력 강화를 위한 포석이었다."

 

 

흐루시쵸프는 우크라이나에서 자라고 우크라이나 여자와 결혼했고, 우크라이나에서 광산 기사로 일하면서 공산당에 가입하여 간부로 성장했습니다. 흐루시쵸프는 우크라이나 대기근 당시에, 스탈린에게 식량 수탈을 멈춰달라고 요청하고, 직접 모스크바로 찾아가 식량을 일부 되찾아오는 용기를 보이기도 했지만, 이 일로 스탈린에게 미움을 사서 자리를 뺐겼다가 나중에 복권되었습니다.

그는 머리가 아주 좋았고, 악명높은 스탈린의 숙청에서도 살아남아 우크라이나 공산당 서기장까지 진급하였으며, 스탈린 사후에 베리야와 권력대결을 벌여서 베리야를 숙청하고 주석으로 등극합니다. 집권후 흐루시쵸프는 우크라이나 대기근 등의 정책 실패를 비판하면서 스탈린 격하운동을 벌였고, 우크라이나 공산당에서 측근들을 불러와 등용합니다. 그의 정치적 기반은 우크라이나 였습니다. 그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한 민족이라는 주장을 펼치며 우크라이나의 젊은 인재 수만명을 러시아에 유학시키기도 했었습니다. 최대한 두 민족을 섞어서 화합시키겠다는 거였죠.

  

흐루시쵸프가 53년부터 64년까지 11년간 통치한 후에는, 그가 밀어준 브레즈네프가 소련의 최고지도자가 됩니다. 브레즈네프 역시 우크라이나 공산당 출신인 데, 우크라니아 카미얀스케에서 태어나서 거기서 자라서 우크라니아 공산당내에서 승진을 거듭해서 올라가다가 나중에 소련 연방 고위직이 되어서 모스크바로 올라갑니다.  

브레즈네프는 자기 인종을 우크라이나인이라고 기재했었는 데, 소련 연방 당 서기장 직에 가까워지자 러시아인이라고 바꿔 기재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미 다들 우크라이나인이라고 인식하고 있었죠. 19년간 집권했습니다. 

 

브레즈네프와 흐루시쵸프의 지역기반.  (#러시아 지도가 아닙니다. 우크라이나 지도입니다)

 

 

 

 

소련의 스탈린에게 대학살 당했다고 원한에 불탔던 우크라이나인들은 삼십년 동안 소련 연방을 장악하면서 분이 풀렸습니다. 그래서 1991년 소련연방 해체 시점에서는 러시아에 대한 우크라이나의 여론은 못해도 중립에서 약간 우호 정도로 되돌아와 있었습니다.

 

미국의  Pew Resarch Center는 2010년 우크라이나인들에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여론조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러시아에 대해 긍정적이라고 답한 비율이 46%, 부정적이라고 답한 비율이 25%였습니다. 

긍정적이라는 비율이 부정비율의 두배 정도였습니다. 

 

Ukraine’s National Election – a Problem of Democracy? - Pew Research Center, 2010. 1. 14 

https://www.pewresearch.org/global/2010/01/14/ukraines-national-election-a-problem-of-democracy/

 

  

 

 

1991년 독립이후 우크라이나 내에서 민족주의 바람이 불고,  

선거를 통해 친서방 진영 vs 친러시아 진영이 번갈아가며 정권을 잡는 부침이 있었지만, 

보편적인 우크라이나 국민 정서가 반러시아로 치우쳐 있지는 않았었다는 이야기지요. 오히려 중립에서 약간 우호쪽으로 가 있었다고 저는 판단합니다.  

 

그러나 2014년 2월 터진 우크라이나 내전으로 러시아와 총부리를 겨누고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이 벌어지자, 우크라이나의 반러 감정은 급속도로 치솟습니다.  러시아에 대해 부정적으로 응답한 비율이 67%가 되었습니다.

 

우크라이나 인구가 4천만인데, 그중에 1천만명 (25%) 정도가 러시아계입니다.  

여론조사에서 67%가 반러라고 응답했다는 이야기는, 우크라이나계는 거의 다 반러로 돌아섰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서로 총을 겨누고 전투를 벌여 사망자가 나오게 되면, 형제국가 사이에도 국민감정은 순식간에 악화됩니다. 우리나라가 6.25때 한번 겪어봤던 것 처럼 말이죠.

 

 

Despite Concerns about Governance, Ukrainians Want to Remain One Country - Pew Research Center, 2014. 3. 8

https://www.pewresearch.org/global/2014/05/08/despite-concerns-about-governance-ukrainians-want-to-remain-one-country/

 

 

 

...글이 너무 길어져서 여기서 끊습니다.

바로 이어서 우크라이나 3 글을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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