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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현대사

탑건은 실화였다? 1981 시드라 만 사건

작성자Neogul|작성시간22.06.25|조회수1,966 목록 댓글 3

 오랜만입니다. 이번에 쓸 사건은 1981년에 있던 시드라 만 사건입니다. 원래는 다른 글 쓰면서 배경 쪽 글감으로 남겨놨던 건데, 이번에 탑건 매버릭이 나왔길래 심심하던 참에 한 번 적어보자 하면서 시작하게 됐네요. 모쪼록 재밌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80년대까지의 미국-리비아 관계

 

 리비아 땅에 있던 국가가 "리비아"라는 이름을 갖고 하나의 국가가 된 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신생 독립국이 된 리비아 왕국이었습니다. 이전까지 이 땅을 통치하고 있던 것은 이탈리아였는데, 우리 킹탈리아가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연합국에게 신나게 줄건줘를 하면서 북아프리카 식민지를 남김없이 잃어버렸고, 1943년 이후로는 영국과 프랑스의 관리 하 시칠리아 진공의 병참기지 역할을 하다가, 1951년 리비아 왕국이라는 이름으로 독립을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 국기는 카다피 치하 리비아가 무너진 후 현재 리비아의 국기이기도 합니다

 무튼, 식민지가 되기 이전에도 오스만 제국의 일개 토후국이었고, 식민지로 삼켜진 나라도 하필 "선진국의 문턱" 이탈리아였던 탓에 독립 이후에도 최빈국 꼴을 면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도중 1959년 이 나라의 운명을 뒤바꿔놓은 사건이 있게 되니...

바로 석유의 발견입니다. 석유의 발견과 함께 리비아는 입에 풀칠할 수 있게 되었죠. 물론 이런 상황을 주시하던 나라가 있었으니 바로...

미국입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리비아의 Wheelus 공군기지를 임대하며 리비아와 인연을 맺게 된 미국은 리비아의 독립결의안을 지지했던 전적도 분명 있지만, 석유의 발견과 미국의 석유기업들이 리비아에 진출하면서 미국과 리비아 간의 관계는 더더욱 우호적이게 됩니다. 리비아 왕국도 Wheelus 공군기지와 미국 기업들의 석유단지를 기반으로 한 정책을 추구했거든요.

 

 다만 이러한 기조가 오래가지는 못했습니다. 1969년 무하마드 카다피가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리비아 왕국을 전복시키고 새로운 나라를 세웠거든요.

이번 글? 연재?의 만악의 근원 되시겠습니다. 한창때라 그런지 잘생기긴 했네요.

 기존의 부패했던 리비아 왕국을 대신해 사회주의 국가를 세운 카다피는 시작부터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게 됩니다. 바로 석유기업 국유화 카드를 꺼낸 것이었죠. 분명 석유기업은 돈 벌어다주는 황금알이 맞긴 했는데, 미국 기업의 시추 자산을 압류하고 국유화한 카다피의 행동은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기 안성맞춤이었죠. 미국은 이 때 리비아 내의 외교공관을 축소시키고, 최소한의 인력만 남긴 채 사실상 리비아에서 철수하게 됩니다.

 

 미국의 심기를 건드린 것은 이 하나뿐이 아니었으니 다름아닌 죽음의 선Line of Death 설정입니다. 이름만 보고 거창하고 대단한 것을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실 지 모르겠지만 사실 이건 영해와 관련한 갈등이었습니다. 카다피는 시드라 만Gulf of Sidra을 폐쇄된 만이자 영해의 일부로 주장하면서, 죽음의 선을 설정합니다.

솔직히 말합시다. 양심이 없네요.

허나 당시도, 지금도 영해는 기준이 되는 해안선 즉 영해기선으로부터 12해리(≒22km)까지만 인정이 되죠. UNCLOS는 없었지만 해당 국제관습법은 존재했었고, 그러니 당시 기준에서도 저런 주장은 받아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은 이러한 영유권 주장을 배격하고, 1972년부터 시드라 만에 대해서 항행의 자유Freedom of Navigation 작전을 시작합니다. 이 과정에서 미국과 리비아의 군용기가 서로 대치하기도 하고, 1973년과 1980년에는 미국의 수송기와 정찰기 등에 대하여 리비아의 군용기가 발포하는 등의 사건도 있었죠.

 

 이런 양국 간 감정의 골을 깊게 하는 사건들도 있었죠. 리비아가 이스라엘애 저항하는 팔레스타인이나 반 이스라엘 성향의 아랍 국가들을 지지하고, 욤 키푸르 전쟁과 석유파동 당시 아랍 국가들을 지원한 것 등이 그것일 겁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쩌리로 만드는 큰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트리폴리 미 대사관 사건입니다.

 

이슬람교 최고의 성지 중 하나인 메카의 대 모스크

 1979년 11월 20일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에 있는 대 모스크에서 극단주의 반군에 의한 인질극이 있었습니다. 사우디 왕가의 전복을 요구한 인질극이었는데, 수백의 인질이 사망한 것과 함께 무기 반입이 금지된 모스크에서 일어난 테러라는 점에서 전 이슬람 세계가 충격을 받았었죠. 그런데 여기서 극단주의 반군의 배후에 미국이 연루되어 있었다는 소문이 퍼지게 됩니다. 이란, 파키스탄과 같은 곳에서 성난 군중에 의해 미국 대사관이 불타고, 리비아도 이런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파키스탄의 이슬라바마드에서 미국 대사관이 불탄 모습. 트리폴리 쪽 사진은 최근 것밖에 없길래 부득이 이걸로 갈음합니다.

12월 2일 트리폴리의 미국 대사관이 불타자, 미국은 리비아를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해버리고 석유회사 국영화 때에도 남아있던 최소한의 인원들마저 철수시켰습니다. 이후 25년이 지난 2004년이 될 때까지 리비아 내 미국 외교공관은 단 하나도 세워지지 않았죠.

 

 무튼 이런 상황 속에서 카터를 대신해서 레이건이 집권하게 되고, 꾸준히 진행되고 있던 항행의 자유의 강도를 높여버립니다. 사건은 이런 배경 속에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1981 시드라 만 사건

 

 사건 당시 항행의 자유에 참가했던 미 해군의 전력은 이랬습니다; 항공모함 USS Nimitz와 USS Forrestal, 순양함 4척, 프리깃 4척, 구축함 4척과 호위함 2척.

1976년 지중해에서 작전하는 USS Nimitz(오른쪽)

1981년 8월 12일과 14일, 휘하 승조원들에게 8월 18~19일에 시드라 만에서 해상 기동과 미사일 훈련이 있을 것이라는 예고가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훈련 첫 날인 8월 18일, 리비아군 소속 전투기가 수 차례 훈련 지역 확인을 위하여 발진하였고,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미 해군 함재기에 의해 제지되었습니다.

1981 시드라 만 사건의 지도. 해안선 따라 그어진 줄은 영해를 나타내는 12해리 선, 두 개의 선 중 아래 선이 리비아가 주장한 "죽음의 선", 비행기 모양은 리비아 Su-22가 발진한 Ghurdabiyah 공군기지, 망망대해 안 배 모양은 USS Nimitz, 그리고 INCIDENT라고 적힌 곳이 사건이 일어난 좌표입니다.

 운명의 8월 19일, VF-41 "Black Aces" 비행단 소속 F-14 Fast Eagle 102와 F-14 Fast Eagle 107은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12해리 영해 밖에서 전투공중초계Combat Air Patrol를 할 것을 명령받았습니다. 물론 대외적으로 알려진 것은 미사일 훈련이었죠.

VF-41 "Black Aces" 소속 F-14 톰캣. 저 아름다운 가변익을 보십쇼.

 한편, 리비아 쪽도 가만있지는 않았죠. 시르테Sirte 시 근처에 있던 Ghurdabiyah 공군기지에서 Su-22 두 대가 발진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미 해군  E-2C Hawkeye 조기경보기에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발각되고 있었죠.

리비아군 소속 Su-22

 E-2C Hawkeye 측에서는 F-14 쪽에 Su-22를 요격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F-14 측에서는 Su-22에 교신을 시도해보았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이 Su-22 한 대가 F-14 편대 쪽으로 다가올 뿐이었습니다. 접근한 Su-22에서 F-14를 향해서 AA-2 단거리 미사일을 발사했지만 빗나갔고, 반격으로 F-14에서 쏜 AlM-9L에 오히려 리비아측 Su-22 두 대 모두 격추당했을 뿐이었죠. Fast Eagle 102와 Fast Eagle 107 모두 한 대씩 잡았고, 이 교전은 1분을 채 넘기지 않았습니다.

1981 시드라 만 사건 상상도. 8년 뒤 교전에선 미군 측 영상이 있는데, 이 교전의 경우엔 없네요.

 리비아 측 조종사들은 탈출 자체는 성공했으나, 조종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한 대의 경우 낙하산이 펴지지 않았다는 증언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후로 Su-22 조종사들의 운명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미 해군 측 F-14들은 모두 USS Nimitz로 성공적으로 귀환하는데 성공했구요.

 

 교전 1시간이 지나지 않아, 리비아 측에서 이번엔 MiG-25 두 기를 발진시켰습니다. 이번 목적은 조종사 수색 및 구조였죠. 다만 이번에도 항모전단 쪽에 깔짝대려는 시도는 있었으나, 항모에서 발진한 함재기의 위협에 따라 추가적인 교전 없이 미 해군 측 작전은 표준시간대 오후 5시에 종료하게 됩니다.

 

 이날 늦게 미국은 안전보장이사회에 리비아의 행위는 어느 나라도 영공을 주장할 수 없는 공역에서 이루어진 훈련에 참여한 군용기에 부당한 공격이라 주장하며 항의했습니다. 리비아 역시 다음날 영공 상에서 정찰 임무를 수행하던 리비아 항공기에 대한 미국의 공격으로 "도발적인 테러 행위"라고 공식 대응했습니다. 이런 의견의 차이는 위에 올려놨던 지도에 있는 각 국가가 바라본 영해/영공의 차이에서 비롯한 것이고, 다만 당시 국제관습법에 따르면 미국 쪽 항의가 훨씬 국제법에 합치하긴 합니다. 주권론까지 가게되면 조금 더 복잡해지지만요.

 

 다만 이 사건은 쌍방간 공격무기가 오간 양국간 첫 교전이라는 의의를 지니지만, 어떤 크나큰 변화를 이루어내지는 못했습니다. 미국은 항행의 자유 작전을 지속했고, 리비아는 말라죽어가며 고난의 행군을 이어갔습니다. 아마 공부의 압박과 귀차니즘을 탈피해내서 다음 글을 쓰게 된다면 이후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적게 될 것 같네요.

 

아.. 톰아저씨 개쩐다.. 매버릭 보러가야 하는데..

 마지막으로 작전에 참가했던 두 F-14의 최후에 대해서 적어보도록 하지요. Fast Eagle 102의 경우 항공모함이 동물원에서 말벌집으로 변모하던 시절까지 잘 버티며 무사히 퇴역했고, 현재는 박물관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습니다. Fast Eagle 107의 경우에는 그러지 못했죠. 1994년 10월 25일 항공모함 착함 도중 바다에 빠지는 사고를 당하며 파괴당했으며, 파일럿 Kara Hultgreen은 이 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Kara Hurtgreen(1965~1994). 최초의 여성 F-14 조종사, 최초로 항공모함에서 이착륙한 여성 파일럿.

 

이번 글은 여기까지입니다. 재밌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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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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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만주족 | 작성시간 22.06.25 잘 봤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Neogul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06.25 오랜만의 글이라 스스로도 걱정이 많이 됐는데,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만주족 | 작성시간 22.06.25 Neogul 탑건에 꽂혀서 항공전 글들 찾아보는데 마침 양질의 글을 써주셔서 제가 감사드리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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