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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현대사

니항사건 (니콜라옙스크 사건, 니콜라예프스크 사건) 103주년

작성자신룡기2|작성시간23.03.11|조회수246 목록 댓글 2

한 때, '독립군 3대 승리의 신화'로 까지 알려졌으나,

2000년대이후부터 지속적으로 '대규모 민간인 학살극'으로 독립기념관 공식도서, 다음백과, 위키백과, 나무위키, 두산백과사전, '소설 토지' 등에 기재되기도 하는

니항사건(니콜라예프스크 사건, 니콜라옙스크 사건)이 일어난지 103주년 되는 날입니다.

오늘날 일본의 역사기록물들에서 한국 독립군이 처형한 민간인 수는

확인되는 것이 '1~2명'입니다....

일본측 기록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친일학자들의 일방적인 주장들이나....

나머지는 MSG가 좀 심하게 뻥쳐 들어간 것이죠..

근래 공개되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 베이스를 살펴보면

니항 조선인 민회의 간부중에는 1920년 니항 일본인거류민회 회장 시마다(조선 평안도, 평양, 사할린주, 니항 일대에서 금광, 광산,석유사업, 성매매업 등을 함)와 함께 위안부 공급에까지 관여된 자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의 만주, 시베리아 침략시기 일본군의 침략에 동참했던 '조선인회', '조선인 민회 (일명 '민회')'는 모두 친일단체로 2000년 이전에는 규정되었으나

오늘날 독립운동 단체라는 일부 주장도 있지만

국사편찬위원회의 거의 대부분의 기록물들 역시 '친일단체'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1920년 니항사건 연표=======

 

1917. 10.월경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 발생, 러시아 서부 모스크바 등에 공산당 집권

1917. 10. 월경 볼셰비키 지지자들이 아무르강 하류의 사할린주 주도였던 니항(니콜라예프스크)을 해방시킴

1918. 8. 2. 일경 일본군이 체코군단 구원 등을 내걸고서는 동시베리아의 니항과 사할린섬 북부 등을 공격하여, 볼셰비키들을 학살하고 니항을 점령.

니항, 연해주, 아무르주 일대에 백파계 괴뢰정부 수립 (일본 용어로는 '시베리아 출정', 혹은 '시베리아 출병')

니항의 지배층 102명 일본 천황에게 청원서 제출

일본군은 다른 시베리아 간섭국가들의 목적이 아닌 중국령 만주 및 만주 동청철도 일대, 간도, 동시베리아 사할린주 등을 침략하여, 잦은 민간인 학살을 감행

 

니항(니콜라예프스크 나 아무레)에 일본군 병영건물, 일본인 성매매업소, 일본인 집단거주지 등 건립

1919. 10. 월경 파르티잔들에 의해 하바로프스크와 니항간 통신선 차단

1919. 11. 2.~11.3. 일경 하바로프스크 인근 아나스타시요프카(Анастасьевка) 마을에서 파르티잔 회의

1919. 11. 20. 일경 하바로프스크 인근에서 트리피츤이 약 35명의 파르티잔들과 니항 해방을 위해 출발

1919. 12월~1920. 1월경 니항주변 백파 군대 1,400여명 트리피츤의 파르티잔 부대에 투항

1919. 12월경 니항에 있던 중국군과 일본군 중립선언

1920. 1월경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페트라파블로프스크 가 볼셰비키에 의해 해방

1920. 1월경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볼셰비키 러시아에 대한 간섭전쟁에서 철군, 미국도 곧이어 철군함

1920. 1. 20. 일경 트리피츤 부대가 니항과 츠니르라흐 요새 인근에 도착, 교전이 벌어져 니항 인근 백파군대 100여명 사상자 발생

1920. 2. 29. 트리피츤 부대에 의해 니항이 평화적으로 해방됨. 파르티잔 약 3천에서 4천명중 조선인부대는 약 200여명

1920. 3. 12. 일 밤중 일본군, 일본거류민, 백파가 합세해 파르티잔들을 기습공격(일명 반자이 야습), 볼셰비키 수백명 사망, 수백명 부상. 독립운동가 리흥진 선생 등 전사

1920. 3. 13. 일경 중화민국 함대가 니항의 일본 영사관 등에 함포 포격. (경고용 함포 포격 추정)

항복 대신 집단자살을 선택한 일본거류민들과 일본 영사관 직원들

1920. 3. 15. 일경 반자이 기습을 감행했던 니항의 일본군 상당수가 항복, 일본군 측 전사 약 600여명, 포로 약 132명 (포로수는 자료마다 다르다).

일본거류민중 상당수가 항복 대신 광기어린 집단자살 감행.

니항일본영사관의 이시다토라마츠 영사대리 부영사(石田虎松 領事代理 副領事, Исидо Торамац)가 처자식을 죽이고 방화후 자살.

반자이 기습에 동참하지도 않았고 포로가 되지도 않은 일본거류민들은 나중에 일본에 생환해서도 냉대를 받았다고 함.

1920. 4. 1. 파르티잔 장례식 실시, 독립운동가 리흥진 선생 등 매장. 니항사건 추모비 건립됨 (파르티잔 전사자 124명 이상, 부상자 수백명)

1920. 4. 4. ~ 4. 5. 일경 일본군이 연해주 일대에서 4월 참변을 일으켜 조선인, 러시아인 수천명 이상 살해

-일본의 하라 테루유키(原暉之) 주장 2,000여명 살해, 러시아측 주장 7,000여명 이상 살해

-저명 친일학자 존 스테판 (존 J. 스테판)은 일본군측 1,000명 사상, 볼셰비키측 3,000명 사상이라고 주장

일본의 지원으로 저술 활동을 한 미국의 존 스테판 교수

존 스테판 등이 주장하는 1920년 6월이후의 북화태(북사할린섬) 보장점령설이나 북위51도 이북 점령설은 조작극임

1920. 4. 21.~ 4. 22. 일경 사할린주 사할린섬 북부의 알렉산드라프스크 항구를 일본군이 공격하여 사할린섬 북부 유전 등 장악하고 괴뢰정권 수립

(※미국의 유명 친일학자 존 스테판 교수(존 J. 스테판)는 일본이 1920년 7월 니항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북사할린섬을 공격했다고 조작함)

1920. 4. 22. 트리피츤이 오호츠크 전선 사령관 임명됨

1920. 5. 23. 일경 니항거주 중국인 2,000여명 상류로 대피, 니항거주 러시아계 주민들 상류 께르비 등으로 대피 시작

1920. 5. 24. 니항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일본군 등 약 122명 처형 (136명 이라는 설도 있다.)

1920. 5. 25. 일경부터 일본군 니항에 접근

1920. 5. 28. 일경부터 트리피츤 부대 니항에 방화. 일본군의 포격에 의한 파괴도 있었음

1920. 6. 3. 일경 일본군 니항 재점령. 일부 파르티잔 일본군에 항복

1920. 6. 23. 한국내의 신문인 동아일보 등이 제1면 특별 보도로 니항의 일본군 참살 사건과 일제의 침략주의 야욕을 보도함

1920. 7. 7. 일경 과거 니항에서 백파 포병 부대원으로 근무했던 안드레예브 등이 일본군의 감시지역을 방조아래 통과하여 께르비의 트리피츤과 동료들을 기습하여 체포함. 김낙현, 박병길, 이지택 등이 안드레예브 측에 가담

(독립유공자 박병길의 동료인 안드레예브는 1921년 스바보드니에서 발생한 자유시참변 당시 독립군 처형에 관여하였고, 나중에는 일본군편으로 도주함)

1920. 7. 9. 께르비에서 트리피츤, 레비제바, 사소프 등 체포되어 처형됨. 일부 파르티잔이 재판받지 않았음에도 처형당함

1920. 7월경 중화민국, 미국, 영국 등이 일제의 만주 동청철도 점령과 북사할린섬 점령을 인정하지 않음을 발표

1920. 8월경 미국은 일본군의 북사할린섬 점령을 비난하고, 캘리포니아주내에 일본인 토지 소유를 금지

1920. 9. 5. 일경 아무르주에서 온 베즈드닌 등에 의해 트리피츤 부대가 아무르주 자유시로 이동하여 보병 제19연대에 편입되기로 결정됨

1920. 10. 12일경부터 과거 트리피츤 부대가 걸어서 아무르주 자유시 도착하여 보병 제19연대로 편입. (민간인들은 배를 타고 상류 도시로 일부 이동)

1920. 10. 22.일경 극동공화국 2군단과 한인 보병자유대대 등이 합세하여 과거 트리피츤 부대였던 제19연대 무력으로 강제 해산함, 제19연대에 편입되었던 박일리야의 한인 니항부대는 오하묵의 한인 자유대대로 편입됨.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의 대결 노골화

1920년 ~ 1921. 8. 21. 일경까지 대련회의 시작되어 일제 시베리아 간섭군의 철군조건 등을 검토, 일제는 한국독립군의 무장해제와 니항사건 등의 보상 등을 요구함

일제는 북위50도 이북의 북사할린섬과 사할린주 일대에도 괴뢰국가 건국과 일본대사관 설치를 획책함

1922. 10. 2. 일경 일본군 니항에서 철수

1925. 1. 20일경 일소기본조약(日蘇基本條約) 체결. 일본이 사할린섬 북부에서 삼림•석유•석탄 채굴권 등 획득

1925. 5. 14.일경 사할린섬 북부의 일본 군인은 철군

1944. 3. 30일경 일본이 사할린섬 북부의 유전 및 석탄지대에서 철수 결정

1945. 8. 15. 2차세계대전 일본 항복후, 소련이 사할린섬 전부와 쿠릴열도까지 획득

 

니항일대의 백파와 일본인

 

니항을 침략한 일본군

니항과 사할린섬 북부를 재공격한 일본 침략군

니항사건에서 사망한 일본군 충혼탑,

니항일본인회 회장 시마다가 주도하여 세웠으나 오늘날 파괴되었다. 높이 20미터 이상의 거대 충혼탑이다.

니항사건에서 일본군의 반자이 기습공격으로 사망한 '나우모프' 등의 묘비

니항사건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추모식

니항사건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추모식

니항사건 추모비

니항사건 추모비

러시아에 있는 니항사건 추모비들, 한국독립군들도 묻혀 있다.

일본 침략군과의 전투에 참여한 파르티잔

오늘날 러시아에 있는 니항사건 추모비

오늘날 러시아에 있는 니항사건 추모비

한국 어민, 천연가스 업체도 진출하고 있는 오늘날의 니항일대

니항사건에서 사망한 한국 독립군들도 묻혀 있다

니항사건 추모공원

니항사건 추모공원, 일본이 세운 '충혼탑', '초혼비'는 모두 파괴되었다.

니항사건 추모비

파르티잔 대장 트리피츤이 지휘하던 유격대 본부터에 설치되어 있다.

오늘날 러시아에 있는 니항사건 추모비들

니항사건 과 러시아의 유명작가 프라예르만

https://youtu.be/99OJ8nBY_dU?si=qFhAYz4Mjve9Dapy 

https://youtu.be/k65qeJzyiss?si=dv0GhL-whSgDOpak 

시베리아에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와 여성 위안부 (가라유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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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3.03.11 니항사건 연표 잘 보고 갑니다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3.03.13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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