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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현대사

유명 작가 루빔 프라예르만 과 1920년 니항사건 (니콜라예프스크 사건)

작성자신룡기2|작성시간23.07.08|조회수222 목록 댓글 2

 

오늘날 한국 독립기념관 공식도서와 각종 백과사전, 박경리의 소설 <토지> 등에서

 

박일리야가 지휘하던 한국 독립군(일명 사할린의용대, 혹은 니항부대)이

1920년 동시베리아의 사할린주 주도였던 '니항(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의 무고한 주민중

 

'니항의 여성들을 모두 강간한 후 학살하였고, 어린이들도 모두 죽여버렸으며, 최종적으로 니항 주민 4천여명 이상 1만여명을 학살했다'

(A.Y.구트만이 쓴 '니항의 죽음'이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에서 발췌함)

 

정부의 지원을 받은 각종 공식도서와 백과사전에 기록된 '니항사건'에 대하여

저는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습니다.

 

한국 독립군 부대(일명 '사할린의용대')와 니항사건

전세계적으로

1920년 니항사건 (일명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은 청산리전투, 봉오동전투보다 훨씬 더 알려진 사건이며

야코프 트리피츤이 사령관으로 있던 파르티잔 부대 약 4천여명중 한국인 부대는 200여명이었으며

 

러시아 내전 시기

니항을 점령한 일제의 협력단체원이었다가 독립군에 가담하였거나

일제가 러일전쟁 이후인 1905년 할양받았던 북위 50도 이하 사할린섬 남부의 광산 등지에서 노예노동자 등으로 동원되었다가 니항사건 무렵 시베리아 등지로 이주했다가

 

니항해방 이후 파르티잔에 단순 가담한 자 등도

약 200여명 정도 되어

한국인 부대원은 총 400여명 정도로 추정되며,

 

한국 독립군(일명 사할린의용대 혹은 니항부대, 박일리야 부대)은

일본군과 일본 거류민들의 1920. 3. 12. 일의 반자이 기습공격을 격퇴하고,

극단적인 친일파 혹은 러시아 정교회 성직자로 추정되는 1~2명 이상을 실제 처형한 것으로 오늘날 확인됩니다.

 

(1920년 니항사건 당시 니항의 건물 90% 이상이 만들어진지 30년 미만이었고, 완전 파괴된 일본인 거주지는 10년 미만이 대부분이었으며,

니항 건설 초기 날림으로 만들어진 '러시아 정교회'건물은 재건축을 위해 철거되어 다시 건축중인 상태였습니다.

당시 니항에는 죄수 100여명을 수감할 만한 건물 자체가 없었고,

니항을 점령했던 일본군 병영이나 일본 영사관(나중에 일제는 사할린주에도 괴뢰국가를 세우기 위해 니항에 '대사관' 건설을 획책하였다)과 같이 큰 건물은 몇 채 되지도 않았습니다.)

 

 

국내 일부 도서의 문제점

한국 일부 도서는 대한민국 정부의 지원을 받은 공식 도서들이 분명하며,

야코프 트리피츤(Яков Тряпицын)은 소비에트 정부에 의해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고 기술하지만

이것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일제 밀정들이 주도한 103명 재판소

야코프 트리피츤과 동료는 암군강 중류에 있는 께르비(Керби) 에서 1920. 7월 초 반란을 일으킨 안드레예브(Иван Тихонович Андреев)바라비요프(Воробьёв Пётр Яковлевич)압친니코프(А.Овчинников), 박병길, 이지택 등에 의해 1920년 7월 7일경 체포되어 103명 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고 1920. 7. 9. 일경 총살되었습니다.

 

많은 지탄을 받던 '라프타'와 기타 몇몇 아나키스트들은 트리피츤이 처형된 후 탈출에 실패하였고,

재판 없이 사살되었습니다.

니항사건 관련 러시아 도서들과 자료들에서 박병길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1920년 일본의 국회의원 선거와 연관되어, 친일조선인, 황족, 수상, 장성 등이 대규모로 동원되어 국가적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조작되고 선전되었던 1920년 니항사건...

 

그리고

시베리아 침략과 1920년 연해주 4월 참변, 간도토벌의 근거로 제시되었던 니항사건.

1920. 3. 12. 일 반자이 기습이 실패하자 광기어린 집단자살을 한 후 '국가의 수치'라며 대대적으로 미화하였다.

 

또 1920년 니항사건은 당시 조선 서울에서도 친일조선인 등이 중심이 되어 국가적 차원에서 초혼제를 지낼 만큼 일제의 선전은 대단하였다.

니항사건에서 독립군들이 민간인을 학살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지금이라도 속이지 말고, '독립군이 몇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는지'를 명백히 밝히고 오늘날에서라도 보상과 사죄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러시아 니항에는 파르티잔 부대에게 학살당했다는 사람들의 후손은 없고, 일본군에게 학살당했다는 사람들의 후손은 많다고 합니다.

니항사건 추모공원

 

오늘날 러시아에 있는 니항사건 추모비

주로 러시아계 친일파가 조직했던

이 103명 재판소는

소련이 만들어지기 전에

안드레예브(Иван Тихонович Андреев), 바라비요프(Воробьёв Пётр Яковлевич), 압친니코프(А.Овчинников) 등 나중에 일본으로 도주한 친일파 혹은 일제 밀정들이 만든 것으로,

트리피츤 처형후 일본으로 도주한 자들은 <소비에트의 적, 반역자, 일제 밀정, 백파> 등으로 밝혀진 자들이었습니다.

 

독립유공자 박병길도 <니항 조선인 민회 주무>로 일본 니항영사관의 이시다(石田虎松) 영사대리 부영사, 니항거류민회 회장 시마다모토타로(島田元太郎) 등의 기록 등에도 명백히 친일단체 조직자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니항사건 당시 처자식을 먼저 죽이고 자살을 선택한 이시다 영사대리(부영사)와 성매매업을 하던 시마다

 

야코프 트리피츤을 재판한 이 103명 법원은 제정 러시아, 소련, 혹은 잠시 존재했던 꼭두각시 국가 '극동공화국' 어디에도 소속된 법원이 아니었으며

 

러시아 내전시기 방첩을 담당하던 체카 대원들도 야코프 트리피츤과 함께 재판 받은 사람이 있기 때문에

체카(오늘날의 FSB, 한때 내무인민위원회, KGB 등으로 불려짐)의 기록 등에도 야코프 트리피츤은 소련 혹은 그 이전의 러시아 정부 관련 공식 기관에 의해 재판받고 처형된 사람이 전혀 아닙니다

 

즉,

쿠데타를 일으킨 일제 밀정들에 의해 체포되어 그들이 만든 103명 법원에서 재판받고 처형된 사람인 것입니다.

 

따라서 소련이나 과거 제정 러시아에 의해서 박해받고 죽은 사람들이 전혀 아닙니다.

 

한국, 미국, 일본의 일부 자료들이 하나 같이 '소련에 의해 재판받고 처형되었다'고 말하지만, 소련 정부의 공식적인 기록에는 없고, 소련으로부터는 아무런 박해나 재판을 받은 바도 없어 복권이 불가능합니다.

 

다만 한국의 공식적인 책자들이

니항사건을 '민간인 학살극'으로 규정하고, 한국정부의 지원을 받은 공식적인 도서들이

파르티잔과 독립군의 승리 대신에

 

친일학자들인 존 스테판, A.Y. 구트만, 예밀야노프 등의 백파 혹은 친일 파시스트의 주장만을 골라 모았기 때문에

한국 정부의 공식견해는 '민간인 학살극'이 맞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러시아 정부의 니항사건에 대한 공식견해는 '민간인 학살극'은 전혀 아니며,

일제 침략자와 간섭자들에 대항하여 승리한 '극동 내전의 승리'일 뿐입니다.

니항사건 추모공원, 트리피츤이 지휘하던 유격대 본부터에 설치되어 있다.

오늘날 니항사건 추모비들 중 일부는 외곽으로 이동되었다.

 

독립유공자 이지택의 거짓말

오늘날 독립유공자 이지택의 주장, 독립유공자 최호림의 주장, 독립유공자 김낙현의 주장은 사실과 다른 것이 많으며

 

독립유공자 이지택의 경우에는 독립유공자 서훈을 위해 다른 독립군을 '무정부주의 강도떼' 등으로 무고하고

학살에 직접 관여한 내용부터,

사할린 섬과 사할린 주 일대에서 이지택의 행적을 추측할 수 있는 여러 자료가 나오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이지택의 거짓말은 박병길이 니항의 한인 교사였다고 하였는데..

 

일본으로 도주한 A.Y.구트만과 일본기록, 러시아 기록에 등장하는 유명한 한인교사 박은

'박일리야'입니다.

박병길은 니항일본인 거류민회 회장이며 위안소,유곽,기생집 영업을 수십년간을 하였던 시마다모토타로(島田元太郎) 등과 관련된 자였습니다.

 

또 자신들이 니항에서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하였다고 하지만, 러시아 일본 기록에 전혀 없는 내용이며, 러시아의 유명 인사중 독립유공자 이지택의 거짓말에 똥을 끼얹고

반박을 하는 러시아측 인물들은 상당히 많습니다.

 

그들도 니항사건 참여자입니다.

니항사건 당시 이지택보다 더 높은 지위에 있었습니다.

 

<루빔 프라예르만(Фраерман Р.И.)>과 니항사건

일제침략군에 협조한 러시아 내전 백파 중에는

본인 스스로는 '일제에 협조하였으나 친일파는 아니다'고 주장하는 A.Y. 구트만 등이 있고,

그리고 오늘날 친일학자 존 스테판 교수 등이 있다면

 

현재의 러시아에는 '루빔 프라예르만'이 있습니다.

일제와 친일파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프라예르만의 책자들

 

유태계 러시아의 유명작가
루빔 프라예르만

니항사건 당시 한국 독립군과 파르티잔의 활약상

니항사건 당시 파르티잔들의 활약

황금색 수레국화

나치 독일에 의해 박해받은 유태인들

 

루빔 프라예르만은

(1) 아나키스트였던 야코프 트리피츤 의 동료였으나, 운좋게 처형을 모면한 사람이다.

(2) 야코프 트리피츤 을 배신하고 누명을 씌웠으며 소련 공산당원증을 노렸던 사람이다

라는 등등의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저의 개인적 의견으로 볼 때

니항사건의 직접 참가자였던 프라예르만이 거짓말을 했다고 볼 만한 것은 없었습니다.

 

프라예르만은

일본군의 공격에도 질서정연하게 행동했던 조선인 사할린의용대(일명 니항부대, 혹은 박일리야 부대)에 대한 진술을 남겼으며,

 

이와 반대편에서

일제 식민지배를 받던 민족을 사할린섬 일대의 강제노동의 노예로 동원하고, 평양기생도 위안부로 동원했던 앞잡이들의 거짓말들에 반박하는 의견도 남겼습니다.

 

루빔 프라예르만은

독립유공자 이지택, 김낙현, 독립유공자 최호림의 거짓 주장에 대해서는

'그런 조직은 니항에 없었습니다.'라고 진술합니다.

 

<1920년 프라예르만이 본 니항 주민>

프라예르만이 시베리아 아무르강 하구의 니항에서 본 주민들은

대체로 중립적인 인물들이었습니다.

 

제정 러시아, 일본, 중국, 길야츠크 민족, 각종 시베리아민족, 조선인, 볼셰비키, 멘셰비키, 아나키스트, 최대주의자 등에게 극단적으로 적대적이지 않았습니다.

 

이미 제1차 세계대전과 러일전쟁, 사할린섬 학살, 러시아 적백내전을 경험한

다수의 니항 주민이 중립적인 자세를 지키려고 했다는 데 필자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1918년 니항을 일본군과 백파 군대가 점령하고,

시베리아에서 반일 파르티잔 활동이 활발해질 때도 니항에는 대규모 유혈사태가 없었습니다.

 

야코프 트리피츤과 박일리야 부대가 접근했을 때도

니항의 백파군대는 거의 대부분 무기를 가진채 무혈 투항했습니다.

즉 평화적 해방이었습니다.

 

일본군의 1920. 3. 12. 반자이 기습공격과

1920. 4. 5. 연해주와 사할린주의 학살극이 없었다면

어쩌면 일본인 포로 처형은 없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러시아의 유명 작가 루빔 프라예르만은

최근 한국의 공식적인 주장들에

의문을 제기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러시아의 역사학자들이 무려 103년 가까이 니항에서 살해되었다는

민간인들을 조사하고 있지만,

오늘날까지 수십여명 밖에 찾지 못했습니다.

 

일본으로 도주해 반소비에트 활동을 전개하던 A.Y.구트만 등도

1920년 이후 일본군이 점령했던 니항에 일대에 와서 잔류 주민 등등 1천여명 이상을 인터뷰했지만

실제 죽은 사람을 수십명 이상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러시아에는

친일학자들이 주장하듯이 1920. 4월 참변 당시 일본군이 2천여명밖에 살상 안했고,

일본군은 사할린주 츠니르라흐, 마가, 마리인스크, 소피이스크, 데카스트리, 알렉산드라프스크 일대에서 민간인 처형을 안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일본군이 야코프 트리피츤 보다 덜 죽였다고 생각합니까?

 

 

야코프 트리피츤 오늘날 러시아에 의해 복권될 것인가?

야코프 트리피츤에 연해주의 파르티잔 <세르게이 라조> 처럼 평가되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왜냐하면

아나키스트였던 트리피츤은 소련에서 인정받지 못했던 아나키스트였으며,

 

어디까지나 소련의 적인 친일파의 반란에 의해 살해된 사람으로

소련이나 제정 러시아에 의해 죽은 사람이 전혀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권 조건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죽었다는 것이 과거 소련의 공식입장'이었던 셈입니다.

 

 

야코프 트리피츤이 러시아 현대사에서 잊혀지지 않는 이유

그러나

일본과 러시아의 관계가 악화되고

쿠릴 열도, 사할린 섬 자원, 어장 문제, 어업권 문제, 석유 천연가스 개발문제, 영토 문제 등이 있을 때마다

'일본인은 모두 죽여버려라'고 명령했던

 

야코프 트리피츤 은 러시아 현대사 속에서 잊혀지지 않고 다시 언급됩니다.

 

야코프 트리피츤은 러시아와 일본에서도 잊혀지기 힘든 인물이며

아마 1921년 자유시 참변과의 관련성 때문에 한국 역사에서도 잊혀지기 힘든 인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일본의 니항영사관, 나중에는 괴뢰국가 건국과 대사관까지 계획했던 일제의 역사기록물이 공개된다면

 

아마

<니항 조선인 민회> 가담자는 수십여명이 아닐 가능성도 큽니다.

 

러시아 내전기 시베리아, 만주에서 밀정활동을 했다는 배정자의 경우에도

그들과 일제가 조직했던 '조선인회', '조선인 민회'의 가담자만 수천~수만여명이었습니다.

 

니항 일본영사관의 정식 직원이 6명 정도 밖에 안되는 데

수백여명의 협조자들은 어디에서 올 수 있었겠습니까?

 

일제가 '제2의 니항사건' 이라고 떠들던 간도 훈춘사건의 일본영사관 관련 건물의 사망자는 어디에서 왔겠습니까?

 

왜 독립유공자 이지택이 야코프 트리피츤이 '포병장교로 동시베리아에서 일했다'고 거짓말했겠습니까?

바로 이지택의 동료였던

'안드레예브' 일당이 백파였다가 트리피츤을 처형하고, 자유시 참변을 일으키고, 일제로 도주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역덕들에 의해 간혹 다루어지는 '니항사건'이라는 것이 연구될수록

루빔 프라예르만과 같은 사람들은 조작질을 하지 않고

 

볼셰비키 공산당원증이나 독립유공자 서훈을 노리고,

혁명가와 독립군의 얼굴에 똥을 뿌리고 다니지 않았음이 증명될 것입니다.

 

러시아의 유명 작가 루빔 프라예르만(Р.И.Фраерман)의 작품들

비록 푸쉬킨,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체호프, 예카테리나, 표트르, 레닌, 스탈린, 푸틴 등과 비교할 수 없는 작가라 할 지라도 1920년 니항사건과 직접 관련된 저명한 작가임에 틀림없다.

 

 

(※작가 : 루빔 프라예르만 (Фраерман, Рувим Исаевич) 의 생애

1891년 벨라루스아의 유태인 가정에서 출생

극동 철도에서 일하던 중 러시아 적백 내전 발생

1920년 니항사건 (니콜라예프스크 사건 : Николае́вский инциде́нт) 참가

2차 세계대전에 자원하여 참가

그의 작품중 다수가 영화와 라디오 방송으로 만들어짐

아동문학, 언론인, 종군기자, 단편소설 창작활동

시베리아의 길야츠크 민족, 조선인과 독립군에 대한 진술도 일부 남김

1972년 모스크바에서 사망)

 

 

※ 기타 주의 사항 : 루빔 프라예르만, 잭 런던, 시이튼 등의 책에 나오는 야생 개의 강아지, 호랭이 새끼, 곰 새끼, 멧돼지 새끼, 늑대 새끼 등이 야생에서 사람들을 졸졸~ 따른다고 해서 함부로 접근하거나 만지는 것은

어미에게 물려죽을 수도 있는 절대 해서는 안되는 위험한 행동입니다.

( Дикая собака динго. Цвет. 4К. 1962 год)

 

https://youtu.be/vTOXAJ09O7Y

 

https://youtu.be/42grt0P4jg0

 

https://youtu.be/egysworg3dg

 

루빔 프라예르만의 국내 번역본

https://www.nl.go.kr/NL/contents/search.do?srchTarget=total&pageNum=1&pageSize=10&insiteschStr=&schQuery=&mainSrchField=1&kwd=%EB%A3%A8%EB%B9%94+%ED%94%84%EB%9D%BC%EC%98%88%EB%A5%B4%EB%A7%8C

 

https://youtu.be/4UXltPGpaEw

 

https://youtu.be/oNgTONQpQpk

https://youtu.be/qYVz-dxkN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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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3.07.09 루빔 프라예르만이 이지택, 김낙현, 최호림의 거짓주장을 반박하는 진술을 했군요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3.07.10 예,
    당시 러시아 영토에서 일어난 일이고, 조선인들은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던 상태였고,
    사할린주 일대에서 경제권을 상당부분 장악하고 있던
    일본인들에게 협조하는 경우가 많았고, 1905년 이후부터는 일본령 남부 사할린섬 석탄광산 등에도 일하러간 조선인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이지택은 6.10만세운동 참여로 교도소에서 복역한 것은 맞지만
    니항사건에 대해서는 거짓말을 많이 했습니다.

    소련시대에는 살기 위해서 동료를 밀고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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