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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현대사

로만 트메툴(Roman Tmetchul)의 일제시대 회상

작성자너클|작성시간23.07.18|조회수235 목록 댓글 2


로만 트메툴(Roman TmetChul, 1926.02.11 ~ 1999.07.01)은 팔라우의 저명한 정치인이자 사업가이다.

그는 1926년, 일본이 통치하던 팔라우에서 태어났다. 일본 시대에 로만은 남양신문에서 일했으며 전쟁이 시작된 후에는 켄페이타이(헌병대)에서 활동했다.

종전 후 그는 괌에서 교육을 받았고 1951년 팔라우인 최초로 미국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았다. 이후 그는 1978년까지 태평양제도 신탁통치령 의회에서 일했으며 팔라우가 미크로네시아의 다른 지역과 분리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세 차례나 팔라우 대선에 도전했고 끝내 당선되지는 못했으나, 팔라우 역사에 가장 중요한 정치인 중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어린 시절

내가 학교에 갈 나이가 됐을 쯤부터 신(God)을 싫어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열 살 쯤부터, 신이 있다면 정말 불공평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팔라우는 외국인들에게 지배당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저는 "신이 있다면, 불공평해."라고 생각했어요. 물론 나중에는 신을 다시 생각했고 신이 공평하단 걸 깨달았습니다.

제가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을 때, 저는 일본인들은 저희와는 다른 학교를 다니는 걸 봤고, 전 그걸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엄청난 모범생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공부는 잘했지만, 일본인을 싫어했습니다. 저는 어떤 외국인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일본 시대 팔라우에는 마리아나 제도에서 온 차모로인도 많았는데 저는 차모로인이 팔라우에 있는 것도 달갑지 않았습니다. 저는 스스로 "차모로인이 여기서 뭘하는 거야?"라고 물었습니다. 우리는 같은 학교를 다녔지만 친한 차모로인 친구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저는 항상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저는 지역의 아이들과 써클을 만들고 일본 아이들과 싸움을 일으켰습니다. 저는 그 당시에도 혁명적이었네요. 처벌도 많이 받았죠. 일본인들은 우리를 심하게 때리진 않았고, 화장실 청소나 교실 청소를 시켰습니다.

오늘날 팔라우에는 일본 시대의 삶이 더 좋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 걸 알지만, 저는 그게 사실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본인들은 우리를 지배했습니다. 제 아버지는 독일 시대에 자랐는데요. 아버지는 일본인보다 독일인을 더 좋아하셨습니다. 제 생각 중 많은 부분이 아버지로부터 배운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라디오도, 텔레비전도 없었습니다. 팔라우에는 세 달에 한 번 배가 왔는데 6개월이 걸릴 수도 있었습니다.

팔라우에는 한국인도 있었습니다. 일본인은 한국인을 팔라우인보다 아래로 취급했습니다. 저는 팔라우인이 일본인보다 하위 계층이라고 생각했지만, 일본인은 한국인에게도 전혀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전쟁

저는 일본이 진주만 공습을 일으켰을 때를 기억합니다. 일본인은 큰 승전을 거두면 항상 거리를 행진했습니다. 일본인은 미국이 악마이고, 미국인을 모두 죽여야 된다고 말했습니다. 또 일본은 미국이 팔라우에 상륙하면 여자는 모조리 강간당하고 남자들은 모조리 살육당할 거라고 말했지만 저는 그걸 믿지 않았습니다.

제 아버지는 제가 믿는 몇몇 이야기를 제게 해주셨는데 그것들은 모두 사실이 되었습니다. 먼저 미국은 너무 대국이라 일본은 절대로 미국을 이길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어요. "일본에서, 일본인이 쌀을 먹을 때, 미국에서, 미국인은 쌀을 닭 모이로 준다."

저는 전쟁 중에도 항상 충분히 먹어서, 전쟁이 제 삶을 바꾸었다고 말할 순 없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전쟁 중 잘 먹은 건 아니죠. 미국이 폭격을 시작한 후 많은 일본인과 팔라우인들이 아사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켄페이타이(헌병)에서 일했고 하루 세 끼를 다 먹었습니다. 저는 전쟁이 그렇게 무섭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전쟁이 흥미진진했습니다. 제 여동생은 절 미친 놈이라 생각했죠. "너는 팔라우에서 전쟁을 즐기는 유일한 놈이야."

제가 아직 어렸을 때 일본 광고에서 증기선 조종을 가르쳐 주기 위해 인도네시아로 가는 사람을 모집하고 있었습니다. 지원자들은 시험을 치뤘습니다. 저는 지원자 중 가장 높은 성적을 거두었는데, 가기 전에 이미 켐페이타이에 징집된 상태였습니다. 제게는 선택권이 없었습니다. 징병될 때와 같은 빨간 종이를 받았습니다.

제 상관은 미야자키 중령이었습니다. 늙은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켐페이타이에 가기 싫었지만,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처음 켐페이타이에서 일할 때, 일본인들은 제게 자전거 닦기를 시켰습니다. 이틀 동안 자전거를 닦았죠. 그 후 설거지, 사무실 청소 등을 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는데 그 후 일본인들은 제게 승진해서 미야자키 씨를 직접 도울 거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단지 그의 필요에 맞춰 일했고 미야자키 씨가 부재중이면 주변을 감시했습니다.

가끔 늦은 오후에 그는 제게 노 젓는 배를 타고 석호로 데려가 달라고 했습니다. 아마 그에게는 그저 휴식의 한 형태였던 것 같습니다. 그는 책을 챙겨 가 읽었습니다. 또 그는 제게 말을 걸거나 질문을 하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그는 매우 빠른 쾌속정을 얻었는데, 팔라우에서 가장 빨랐습니다. 그는 저를 신뢰했고 가끔은 저 혼자 쾌속정을 타게 해주었습니다. 사실 그랬으면 안됐지만, 저는 가끔 중령의 페넌트를 날린 채 보트를 꺼낼 때도 있었고, 지나가면서 다른 배들의 경례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 일을 하면서 정말 좋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미야자키 중령은 저를 켄페이타이의 조장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저를 무척이나 믿었습니다. 저는 제 아래로 20명의 일본인 병사들을 두었고 , 그들과 함께 허락받은 지역 어디든지 다닐 수 있었습니다. 저는 간첩을 수색하기 위해 마을로 파견되었습니다. 저는 간첩을 한 명도 찾지 못했습니다. 저는 미국이 일본계 미국인을 간첩으로 썼다고 생각합니다. 한 번은 수색하다가 럭키스트라이크라는 상표의 담배[미국 담배]를 찾기도 했습니다. 가끔은 특이한 억양의 일본어를 구사하는 일본군을 보기도 했지만, 그런 사람들도 항상 다른 그룹과 같이 있었고, 미국의 스파이인지 증명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일본에는 군인들을 위한 위안부가 있었습니다. 위안부는 어디에나 있었습니다. 모든 일본 공무원은 한 명쯤 위안부를 데리고 있었고 대부분의 위안부는 일본인이었습니다. 한국인이나 대만인 위안부도 있었는데 모두 매우 어렸습니다.

1944년부터 미군이 팔라우를 폭격하기 시작했을 때, 몇몇 미국인 조종사들은 격추되어 포로가 되었습니다. 미국인들은 일본 음식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국과 쌀밥이었지요. 그래서 저는 비스킷을 주머니에 넣고 미국인 포로들을 씻기러 갈 때 비스킷을 주었습니다. 저는 그들을 계속 감시했지만, 일본인들은 미국 포로를 오래 수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미국인 포로들을 꺼낸 후 처형했습니다. 총살인지 참수형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처형된 지 보지는 못했습니다.

제가 켐페이타이에서 일하는 동안 지역 주민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도 있었습니다. 일본군의 몇몇 고위직들은 일본군의 식량을 아끼기 위해 지역 주민들을 없애고자 했습니다. 또 그런 사람들은 지역 주민들이 미국에 협력할까봐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의 계획은 모든 원주민들을 한 구역에 모은 후 총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저를 신뢰했기 때문에 저는 대화를 엿들었습니다. 물론 저는 이런 일에 반대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우리 팔라우인들은 친일파이고 천황을 위해 싸울 거라고 말했습니다. '모리카와 요시야스'라는 일본군의 하급 장교(대위)가 있었는데 그는 팔라우인들과 적극적으로 협력해 일하고 지역 주민들의 처형을 막는 데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또 그 당시에 6명의 가톨릭 선교사와 얍에서 온 차모로인 가족이 일본군에게 처형당했습니다. 선교사 중 세 명(Elias Fernandez 신부, Marino Dehoaz 신부, Emilio Villar 사제)은 팔라우 출신이었는데 저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나머지 선교사(Bernardo de la Espriella 신부, Luis Blanco y Suares 신부, Francisco Hernandez 사제, Agaptio Hondonero와 그의 아내인 Filomena Untalan, 그리고 부부의 자식 두 명)들은 얍에서 왔습니다.

저는 그들에 대해 들은 적도 본 적도 없지만, 그들의 처형이 논의되고 있을 때 본부에 있었고, 담당 장교가 사람을 보내어 그들을 처형시켰습니다. 처형이 집행되고 집행인이 돌아왔을 때 그들은 말이 없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미군이 팔라우의 나머지 섬에 상륙했을 때 우리는 행복했습니다. 우리는 전쟁이 끝난 걸 알게 됐으니까요. 미국인들은 아주 좋았습니다. 그 누구도 학대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어쨋든 미국인들은 제 이름이 켐페이타이 명단에 있는 걸 확인하고 제가 켐페이타이에서 일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격추되어 생포된 미국 조종사들, 가톨릭 선교사들, Hondonero 가족(혼도네로는 필리핀인이었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내기 위해 저를 심문했습니다.

1946년, 미국인들은 괌에서 열린 전쟁범죄 재판의 증언을 위해 저를 데려갔습니다. 제 간증은 반나절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간증하려고 일어섰을 때 너무 무서워서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곳은 무장한 미군들이 가득했습니다. 그 곳에 앉아 있던 일본군 포로들을 보면서 안쓰러움을 느꼈습니다. 저는 그들 중 일부가 악행을 저지른 걸 알았지만, 일본군들도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면 죽었을 것입니다. 판사는 제가 너무 겁에 질려 말을 할 수 없자 휴식 시간을 주었습니다. 그 시간 동안 저는 진정할 수 있었습니다. 저를 심문한 미국인은 유창한 일본어를 구사했습니다. 그는 일본어로 제게 질문하고 제 대답을 영어로 번역해 말했습니다.

저는 많은 질문들을 받았지만, 그들은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그들은 질문을 하기 전에 이미 많은 조사를 마쳤습니다.

전쟁 후에 저는 한가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영어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죠. 미국인들은 여기 팔라우에도 학교를 세웠지만, 저는 괌으로 가서 2년 동안 공부했습니다. 저는 다른 미크로네시아인들과 같은 막사에서 지냈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최초의 팔라우인이 되었습니다. 1954년에 저는 유엔 장학금으로 필리핀에 유학을 떠났습니다. 저는 팔라우로 돌아와 신탁통치 정부에서 일했습니다.

저는 항상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에 미국 당국의 호감을 얻지 못했습니다. 일본 치하에서 우리 팔라우인들은 동일한 일을 해도 일본인들보다 낮은 봉급을 받았습니다. 미국 통치 하에서는 급여 수준이 세 가지로 나뉘었습니다. 미국인들이 가장 높은 월급을 받았고, 그 다음은 유럽인, 그리고 팔라우인이 가장 낮은 월급을 받았습니다. 저는 지역 주민들이 이것에 대해 불평하는 것을 듣고 파업을 조직해 승리했습니다. 미국인들은 우리가 불평하는 이유를 이해했기 때문에 파업을 오래 지속하지 않았습니다.

1994년에 팔라우는 처음으로 독립했습니다. 저는 항상 팔라우의 독립을 갈망해 왔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독립은 실수였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팔라우가 독립 국가가 될 만한 능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가 커먼 웰스, 주, 하다 못해 식민지 상태로라도 미국의 아래에 남았어야 됐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미국이 태평양에서 완전히 철수한다면 우리는 아메리카 원주민, 아니면 뉴질랜드의 마오리족처럼 될 것입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중국에 점령될지도 모르죠.

출처

Saipan: Oral Histories Of The Pacific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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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전근대적이었고, 미국은 절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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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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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신룡기2 | 작성시간 23.07.18 좋은 글 감사합니다.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3.07.18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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