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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현대사

동북아시아 지역의 '가라유키상' 중 1920년 '니항사건 순난자 재고'라는 것은 또 도대체 무엇인가?

작성자신룡기2|작성시간23.07.22|조회수262 목록 댓글 0

동북아시아 지역의 '가라유키상' 중 1920년 '니항사건 순난자 재고(尼港事件「殉難者」再考)' 라는 것은 또 도대체 무엇인가?

1920년 니항사건에 대한 각종 글을  쓰고 있는 필자입니다. 

중세 및 근대 일본에서 인신매매를 당한 성매매 여성 가라유키상 (Караюки-Сан)

일본인 여성 매춘부 '가라유키상'을 다루는 책자는 일본에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1920년 니항사건이라 하면

일본의 각종 공식도서와 각종 백과사전에 '트리피츤이 지휘하던 과격파가 여자들은 모두 강간후 학살하였고, 어린이들은 남김 없이 학살했다. (일본으로 도주해 자칭 친일을 한 적 없다는 A.Y.구트만이 쓴 '니항의 죽음' : 영문 번역본은 '니항의 파괴'에 나오는 내용임)

니항주민 4천여명 이상 1만여명을 학살해,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이 연해주 4월 참변을 일으키게 되었고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도 독립군의 학살극에 대한 보복 때문에 죽게 되었다.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도 니항사건 때문이었다. 사할린섬 북위 51도 이북도 니항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점령한 것이다'고

공식도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러시아 정부측의 공식견해는

위의 '일본측 주장은 전부 허위이고 니항사건은 극동내전에서 일본군의 기습공격과 백파와 반역자를 격파한 혁명세력의 승리이다.'라고 오늘날 니항(니콜라예프스크 나 아무레)시에 각종 기념물까지 만들어가면서 선전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1920년 니항사건에 동원된 조선인 위안부 이야기는 왜 공론화 되지 못하는가?

오늘날 일본에 설치되어 있는 니항사건 순난자비석에 이름이 적혀 있는 일본인은 약 680여명이며,

일본에 있는 니항 순난자비석에 적힌 사망자 명단은 약 680여명이다.

일본이 국가적 차원에서 친일조선인, 황족, 수상, 장성 등까지 동원해 대대적으로 선전전을 감행했던 1920년 니항사건

 

이 비석은 1920년 니항사건 이후, 조선 평양으로 이주하여 성매매업소를 수십년간 운영했던 시마다모토타로(Симада Мототаро Петр Николаевич) 가 주도하여 세운 것입니다.

이 사망자 명단중에 가라유키상(성매매여성)이 다수 있다는 것입니다.

(러시아측이 주장하는 일본인 사망자는 약 850여명이다. 1917년경 제작된 니항시내 지도에 따르면 일본군 병영과 위안소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으며, 일본인 집단 거주지도 없었다.

오늘날보다 면적은 1/3도 안되고 건물의 90%이상은 단층이었다.

물론 '테플랴코프'라고 오늘날보다 2배 이상에 가까운 3만여명 이상이 거주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런 공식을 대입하면 당시 서울인구는 4천만명이 넘어야 한다.

당시 니항의 인구조사 결과로는 등록되지 않은 중국인 조선인까지 포함해 대략 1만 5천여명 이상이 거주했고, 도심 건물 2천여채 이상에 도심거주자는 8천여명 수준으로 보여진다.

니항의 일본군 병영은 1917년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에도 오늘날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겨울철에는 러시아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가고 여름철에는 세계 각지에서 어민들까지 니항 일대로 몰려왔으며,

그 무렵 러시아 내전과 기근으로 피난민들이 수두룩해서 정확한 니항 일대의 인구를 추정하기는 힘든다. 민간인 처형도 분명 있었다고 한다.)

(※참고인물 : 시마다모토타로, 島田元太郎, Симада Мототаро Петр Николаевич) 일본인. 1870년경 일본 나가사키현 출생 ~ 1945년경 조선 평양에서 사망. 1920년 니항사건 당시 니항 일본인 거류민회 회장이었다.

조선 출생 기생 등을 앞세워 시베리아에 출정한 일본군을 위해 니항의 성매매업소인 유곽도 운영한 것으로 알려졌다. 니항사건 이후 재산을 잃었고, 일본 본토에 니항사건 순난자비 건립을 주도하였다.

독립유공자 박병길 선생과도 아시는 사이였다고 한다(박병길 선생은 니항 조선인 민회의 주무였음).

북사할린섬 등지에서 석유개발업 어업 등을 하였고, 북사할린섬이 소련에 반환되자, 조선 평안도에 와서 광산업을 하였으나 신통치 않았고, 평양에서도 황군을 위해 가라유키상 (Караюки-Сан) 을 모집해 위안소를 운영하였으나 1945년 소련군이 평양에 진주할 무렵 소식이 두절되었다.

일본으로 미귀환한 것으로 봐서 75세의 고령으로 인해 조선 평양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니항의 이시다토라마츠(石田虎松 : Исидо Торамац  영사대리 부영사 및 부인과 딸, 일본군 간부와 니항 일본영사관 앞에서 사진촬영한 (니항일본인회 회장) 시마다(Симада Мототаро Петр Николаевич). 시마다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니항사건 무렵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은 니항일대에도 대사관을 설립하고 괴뢰국가를 건국하려고 하였으나, 미국 영국 등의 반대 등으로 결국 북사할린섬과 사할린주 연해주 일대에서는 철군하였다.

 

러시아 기록에 등장하는 조선인 광산 노동자 혹은 현대판 노예 노동자?에도 관심을

1905년 러일전쟁 무렵 북위 50도 이하의 사할린섬 남부를 점령한 일본은 일본에서도 가장 척박한 사할린섬의 석탄 금광 유전 개발을 위해 조선인 노동자를 대규모로 동원했는데

확인되는 것이

이미 그 수가 수백여명을 넘어 수천여명 이상으로 보여집니다.

당시 사할린섬은 기후 환경이 시베리아에서도 가장 좋지 못한 축에 들어갔고

가장 열악한 막장에만 조선인들이 주로 투입되어 인간이 견디기 힘든 노동환경에서 사망자가 속출하였다고 하며

러시아측 자료에는

'일본은 1905년 이후부터 식민지배를 하던 조선인들을 노예노동자로 강제동원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물론 돈벌로 간 조선인들도 있었고, 돈벌기 위해서 간 평양기생도 있었을 것입니다. 밀정도 당연히 있었을 것으로 보여지며.....)

착취와 학살은 너무나 흔한 일이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1920년 니항사건 무렵 조선인 위안부(기생) 수도 현재 파악이 힘든데...

일본인 가라유키상 연구에 너무 관심을 기울이지 말고

조선인 여성 '가라유키상'과 (러시아가 주장하는 조선인 현대판)노예노동자? 와 사망자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면.......

1920년 니항사건 당시 사할린주일대에서 파르티잔을 토벌한다고 무차별적으로 민간인 학살극을 벌여,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인 포로 130여명이 처형되었다는 러시아측 공식 주장도 있습니다.

<아래 : 1920년 니항사건에서 사망한 일본인 여성 가라유키상 자료들>

타케모토 니이나

 

1920년 일본의 국회의원 선거와 연관되어, 친일조선인, 황족, 수상, 장성 등이 대규모로 동원되어 국가적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조작되고 선전되었던 1920년 니항사건...

 

그리고

시베리아 침략과 1920년 연해주 4월 참변, 간도토벌의 근거로 제시되었던 니항사건.

1920. 3. 12. 일 반자이 기습이 실패하자 광기어린 집단자살을 한 후 '국가의 수치'라며 대대적으로 미화하였다.

 

또 1920년 니항사건은 당시 조선 서울에서도 친일조선인 등이 중심이 되어 국가적 차원에서 초혼제를 지낼 만큼 일제의 선전은 대단하였다.

 

니항사건에서 독립군들이 민간인을 학살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지금이라도 속이지 말고, '독립군이 몇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는지'를 명백히 밝히고 오늘날에서라도 보상과 사죄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러시아 니항에는 파르티잔 부대에게 학살당했다는 사람들의 후손은 없고, 일본군에게 학살당했다는 사람들의 후손은 많다고 합니다.

 

일제는 나중에는 정신대라는 명목으로도 위안부를 공출하였다.

파괴된 니항 일본영사관 터. 현재도 그 자리에 공터로 남아 있다.

니항 유곽과 유사한 일본의 가라유키상

니항 일본인 거류민회 회장 시마다가 운영하던 니항 유곽과 유사한 일본의 가라유키상

 

https://youtu.be/99OJ8nBY_dU?si=KXKG3pBDovVjOkq1 

南樺太北部油田調査に関する御報告 島田元太郎

南樺太北部油田調査に関する御報告 島田元太郎

가라유키상 성매매업 외에도 석유개발, 금광업, 광산업도 했던 시마다 모토타로

1918년 9월경 니항을 점령하고 행군하는 일본해군 육전대와 마차를 탄 일본해군 장교

일본인 여성과 조선인 여성들을 동원해 가라유키상 성매매 위안소를 운영했던 시마다 모토타로의 상회 인근으로 보여진다.

1919년경 니항에서 화폐까지 발행했던 니항 일본인 거류민회 회장 시마다 모토타로가 경영했던

시마다 상회와 일본군의 니항점령 이후 건립된 일본군 병영 건물

일본군의 반자이 기습공격 실패후 집단자살로 불타버린 니항 일본영사관

 

1920년 니항사건 당시 이시다 토라마츠 영사대리 부영사는 처자식을 먼저 죽이고 방화하였고 영사관에 머무르던 일본 거류민 상당수도 광기어린 집단자살을 감행했다고 한다.

니항의 일본인 거류민중 집단 자살에 동참하지 않은 사람들은 일본에 생환해서도 자살을 강요받고 사회에서 냉대 받았다고 한다.

사할린 섬 및 사할린주 일대의 일본인들. 남성의 상당수가 군사훈련을 받은 의용 자경단원 등이었다.

무역을 빙자하여 만주, 시베리아, 조선 일대에서 밀정 혹은 간첩활동을 한 자들도 많다.

사할린섬 남부의 일본인

1920년 니항사건 무렵 사할린주 일대

1920년 니항사건 당시 파괴된 도심. 일제와 친일 학자들의 사기 주장과는 달리 1500여명을 수용할만한 감옥이 그 때도 없었고, 인구가 훨씬 더 많은 현재에도 없다.

사할린섬 일대의 일본인. 일본인 남성의 상당수는 자경단원 등으로 군사교육을 받은 자들이다.

무역을 빙자하여 밀정활동을 하며, 파르티잔과 독립군들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사할린 섬 일대의 일본인 여성 가라유키상 추정 사진.

가라유키상 여성 상당수는 군사훈련을 받고 일제의 시베리아 침략에 동참하였다.

최소 높이 15미터가 넘는 일제의 거대 니항충혼탑

1920년 4월경부터 시작된 일제의 니항 재공격 작전. 일본 민간인과 포로구출이 목표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1920년 4월 일제의 북사할린섬 공격과 연해주 4월 학살 이후에서야, 니항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일본군 포로가 처형되었다. 국경인 북위 50도를 넘어 공격했으면 명백히 공격을 한 것이다.

일제가 1920년 7월에서야 니항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사할린 섬 북부를 공격했다는 주장은 친일파시스트들이나 하는 허위 주장이다. 오늘날 러시아, 일본 등지에서 이렇게 까지 조작을 하는 자들은 거의 없다.

1918년경 니콜라예스크의 일본인 수 추정 자료는 세르게이 치마피예프 의 자료에서 참고함.

Сергей Тимофеев, Санкт-Петербург. («Нижнеамурская голгофа. Поиски истины» )

1918년경 니콜라예프스크 항구의 여성 가라유키상 은 최소 90명 이상이었으며

1920년 니항사건 무렵에는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상당수가 조선인 여성 가라유키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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