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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현대사

청나라 보정군관학교 (3부)

작성자신룡기2|작성시간23.10.06|조회수199 목록 댓글 3

 

1948년 요하강 (6) 청나라 보정군관학교 3부

 

보정군관학교의 교육과정

보정군관학교는 청나라의 여러 사관학교를 통합한 성격의 정규 육군사관학교와 중화민국 수립후 북양정부 당시의 정규 육군사관학교 역할을 하였으며, 하급 장교를 양성하는 군관학교였다.

 

정규 과정의 학습기간은 2년이며 한 개 기수당 학생수는 대략 1,300여명이며, 보병, 기병, 포병, 공병, 치중의 5개과 구성되었고

-보병과 7개 중대, 각 중대 약 120명

-포병과 2개 중대, 각 중대 약 60여명.

-기병과 2개 중대, 각 중대에 약 100명

-공병과 1개 중대, 약 60여명

-치중과 1개 중대, 약 100여명

이었다.

 

각 학과에는 학부생 교육업무를 직접 관리하는 과장을 두고 있었다.

학생들은 약 120명 규모의 중대로 구성되며, 중대당 3개 소대, 소대당 3개 분대로 구성되었다.

중대장을 역임한 이들 중 대부분은 청나라 말기 육군특기과정을 수료한 사람들이었고, 전술, 축성, 병기, 교통의 4대 과목 교육을 담당하는 교관이 있었다.

교관의 상당수는 외국 군사관련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이었다.

 

교과목에는 군체계 연구, 각종 군종의 명령체계, 각종 외국어교육 등이 포함되었다.

운동과 체조와 측량과 지형 학습 및 구현 등도 있었다.

 

교육방식은 대부분 일본식과 독일식을 채택하고 있다.

(※아시아에서 거의 최초로 근대화된 일본의 사관학교도 유럽제국주의 국가와 미국 사관학교의 장점을 취한 형태였다.)

 

강좌는 매일 최소 반나절 이상 진행되었다.

군사 전술 외에도 무기, 측량 및 지도 작성, 요새화, 지휘훈련, 물리학, 화학, 수학, 역사, 지리 등도 추가되었다.

각 수업은 30분 정도였으며, 교육용 책자는 다양한 군사 행동을 지도하기 위한 지침이었다.

 

일반 지식과 ​​외국어는 보충교육이며 학생들의 군사관련 지식을 풍부하게 하고 다양한 종합적인 학습을 준비하기 위한 것으로 민간인 교사를 채용하였다.

 

군사기술 훈련은 먼저 연병장에서 다양한 교관들이 지도한 후, 현장에서 실습을 진행하였다.

 

현장 훈련은 먼저 간단한 훈련부터 복잡한 훈련으로 진행된 후, 점차적으로 종합적인 군사훈련으로 진행되었다.

실탄 사격을 위한 사격장, 승마훈련을 위한 승마장, 포병훈련을 위한 포사격장, 토목공학분야 및 공병을 위한 교량설치 및 폭파훈련 등이 있었다.

체조, 무술 등 보조과목은 전문 교관이 상주하며 교내에서 진행되었다.

장비훈련은 학교 후문 밖 장비 연병장에서 진행되었다.

각 교육은 최소 1시간 동안 진행된다.

공식적인 교육은 일반적으로 2시간 동안 진행되었고, 현장 실습은 최소 반나절 동안 진행되었다.

과목이 복잡하고 학교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 현장 실습은 1일에서 수일로 늘어난다.

주요 훈련을 텐트와 조리도구를 들고 다니며 연병장에서 하기도 하였다.

 

사관학교에 다니는 2년 동안 1년 반은 학교에서 공부하고, 나머지 절반은 장신점과 당호진(베이징과 보정 사이)에서 야영을 하며 실제 사격과 측량 실습을 했다.

견습기간이 끝난 후 졸업식은 군관학교에서 다시 개최되었다.

 

학교 졸업 후에는 각 지방군 부대에 배치되어 반년 동안 견습병(보통 상등병)으로 복무하게 된다.

 

견습기간이 끝나면 최하위 장교인 소위부터 시작해 각종 부대 간부로 배치된다.

 

중화민국 시기 보정군관학교 제1기 졸업생의 군사교육 기간은 약 7년 정도

육군소학부터 육군중학, 보정군관학교까지 총 7년 이상을 공부한 보정군관학교 졸업생들은 전국 각지의 육군 및 군대에 파견되어 전반적으로 큰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중화민국초기의 정치상황은 극도로 혼란스러웠고, 원세개의 제국 수립은 많은 지방에서 반대하였고, 군관학교 졸업생들은 각 성(省)에서 서로 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광서(廣西) 출신 학생들은 귀국한 뒤에는 하급 관직만 맡을 수 있고, 할 일도 없고 역할도 거의 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신강성 독군 양증신은 운남과 광서의 학생들을 동원하기 위해 베이징에 특별 인력을 파견했고, 대대장직을 약속하였지만 그곳에 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교관단

학교의 교육장과 교관은 대부분 사관학교 출신이다.

대위와 소대장 대부분은 과거 청나라의 북양속성무비학당 등을 졸업한 사람들이다.

조교는 뛰어난 군인 중에서 선발되었다.

학교의 모든 시스템은 기본적으로 일본과 독일을 모델로 하였고, 대부분의 교육 장비와 총, 대포, 탄약과 같은 군사 장비는 일본에서 구입되었지만. (독일)크루프 사의 산포, 야포 등 독일에서 구입한 것도 있었다.

당시 모든 자금과 장비는 군부에서 지원되었다.

각 학생의 무기, 장비, 의복, 서적, 음식 등은 모두 무료였고, 학생에게는 월 2원(위안)의 수당이 제공되었다.

 

군관학교의 기여

보정군관학교가 국내외적으로 유명한 이유는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것과 중국 현대사에 끼친 영향 때문이다.

 

중화민국 이후 11년간의 졸업생 수는 대략 6,553여명이다.

많은 졸업생들이 중국현대사에서 이름난 인물이 되었으며, 오늘날 중국 대륙을 차지한 중국인민공화국 수립에도 불멸의 공헌을 한 사람이 많다고 한다.

 

졸업생중 저명 인사

청나라 때의 보정무비학당이나 중화민국시기 보정군관학교와 관련되어 한국에 상당히 이름이 알려진 인물들을 살펴보면

 

-장개석(입학은 한 적 있다고 하며, 일본에서도 군사교육을 받았다고 함)

-풍옥상, 오패부, 이종인(전직 중화민국 부총통 및 대리총통 역임), 당생지, 백숭희, 이제심

-위립황(동북초비사령 역임), 부작의, 진성, 손전방, 장치중, 엽정, 진명추, 하주국, 왕이철, 소병문, 주복성, 조개옥, 동진당, 하기양, 이업생, 등연달, 경의, 류활서, 오예오, 류여현, 주계전, 이경용, 주사성, 상진, 왕법근, 황희, 심도, 왕자재, 류건번, 조보성, 김무정(?), 송호성(?전직 육군 총사령관 역임), 오광선

등등이 있다.

 

 

군관학교 부지

학교는 보정의 옛성에서 북동쪽으로 5화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총 면적은 약 1,500여무 정도이다.

길이는 동서로 2km가 넘고,

남쪽으로는 오늘날의 동풍동로, 북쪽으로는 오늘날의 오사동로의 양쪽 길이가 2km가 넘고,

남북으로의 길이는 1km가 넘는다.

 

이곳은 원래 천 무 면적의 사찰이었으나, 군영으로 개조되었다가 광서 26년(서력1900년)에 팔국 연합군에 의해 불타버렸다.

군관학교 건립 당시 과거의 사찰을 활용하고 인근 토지를 징발하여 건립하였다. 학교는 본교, 분교(소형 교습장 포함), 대형 연병장, 사격장의 네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학교 본부는 180여무가 넘는 면적을 차지하는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건축 배치는 일본의 육군사관학교를 모델로 하여 소박한 외관을 지닌 벽돌과 타일 구조의 복합 건물이었다.

 

사방에는 높은 성벽이 있고 성벽 바깥쪽은 강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강 양쪽에는 오래된 버드나무가 늘어서 있다.

군관학교의 정문은 남쪽에 있다.

 

군관학교 내에서의 폭동

보정 군관학교에서는 두 차례의 큰 폭동이 있었는데, 이는 교육의 질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첫 번째는 민국 5년(서기 1916년)에 원세개가 자신을 황제로 선포하자, 황제 체제 복원의 공범이었던 제6기의 모범단이 원세개 편을 들었다. 이것은 5기 학생들의 반대를 불러일으켜 양측의 싸움이 벌어졌다.

그들은 주먹과 벽돌, 나무 몽둥이를 사용하여 싸우기 시작했고, 이후 칼과 총을 사용하여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학교 당국은 협상에 최선을 다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후 베이징 정부는 육군 상장 인창을 보정군관학교에 파견해 양측을 설득하고 마침내 갈등을 진정시켰다.

 

두 번째는 민국 9년(서기 1920년) 여름, 직환 전쟁이 발발한 때였다. 환계군벌 장성(학교 교장)이 송림점에서 포로가 되었고, 환군 제15사단이 직예군에 항복했다.

여름방학 동안 군관학교는 임시 군대막사로 활용됐다.

환군 15사단은 수개월 동안 급여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하급 장교들이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고, 군관학교가 약탈되고 건물이 불타는 바람에 학교는 운영을 중단해야 했다.

 

 

폭력의 만연과 학교 내의 부정부패

군관학교에서는 일부 상관들이 학생들을 때리는 등의 야만적인 강제교육을 시행하고 있었다. 이에 견디지 못하는 학생들도 많았다.

 

청나라와 중화민국 시기 전국의 수재들이 모인 국가의 주요 교육기관이었음에도 각종 부정부패가 만연하였고, 혼란한 사회와 마찬가지로 비리가 난무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학교에 대한 평가

보정군관학교는 말년에 약간의 문제가 있었지만 전반적인 학습의 질은 여전히 ​​높으며 전중국내에서 군사교육의 정통성을 인정받고 있었다.

학생들은 군사적 자질이 우수하여 군사교육 및 참모사업 측면에서 각 지방의 군사당국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군사교육체계로 자리 잡았다.

 

손문 박사가 황포군관학교를 설립했을 때 보정군관학교 졸업생들을 군사교육의 중추로 활용하기도 했다.

 

1911년 신해혁명부터 7·7사변까지 보정군관학교 졸업생 중 상당수가 고위 사령관을 맡았다.

대만으로 쫓겨난 장개석은 자신의 체제인 황포군관학교계열를 육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보정군관학교 졸업생들의 경력은 여전히 ​​중국 현대사에서 군사교육의 가장 확실한 보장이었다.

 

중화민국 초기 대표적인 군관학교 중의 하나인 보정군관학교는 창립 이래 '군인은 가족과 나라를 보호하고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본분으로 삼아야 한다', '군인이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숭고한 일이다'라고 표방했으며,

이것이 직업 군인의 특징을 형성해 왔다.

 

 

보정군관학교 졸업생 수

중화민국 원년(1912년)부터 계산하면 보정군관학교는 9기수를 거쳐 6,000명 이상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보정군관학교를 청나라 북양무비학당으로부터 계산하면 약 10,000여명의 장교를 양성했으며, 그 중에서 1,600명 이상이 장군 계급을 취득했다.

이들은 당시 군부와 정계에 널리 퍼져 있었고, 중국 현대 정치무대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중국현대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대만의 지도자 장개석이다.

 

 

 

참고문헌

권성욱 저, <중국군벌전쟁>

신불해 저, <최강의 군벌>, <이야기 중국사>

쉬처 저, <만주군벌 장작림>

동아일보, 조선일보 보도내용

백도백과 https://baike.baidu.com/item/%E4%BF%9D%E5%AE%9A%E9%99%86%E5%86%9B%E5%86%9B%E5%AE%98%E5%AD%A6%E6%A0%A1/1645249?fr=ge_a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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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나아가는자 | 작성시간 23.10.07 재밌는 내용이 많네요. 잘 읽었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3.10.07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당. ㅎㅎ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3.10.07 유명한 인물들을 배출했군요 하지만 그럼에도 내부적인 문제점도 많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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