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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현대사

볼셰비키 혁명과 만주 동청철도 문제

작성자신룡기2|작성시간23.10.15|조회수214 목록 댓글 4

1948년 요하강 (9)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과 만주 동청철도 문제

 

1916년 마적출신 장작림의 봉천성 장악

마적질, 제정 러시아군 앞잡이 노릇, 일본군 앞잡이 노릇, 북양정부 원세개(1859~1916)를 지지하며 권력을 확장했던 장작림(1875~1928)이 신해혁명 이후에도 혁명세력을 탄압하며 계속해 만주에서 권력을 확대하던 중,

 

1916년(중화민국 5년) 장작림은 동3성을 다스리던 (봉천순안사 겸 진무상장군) 단지귀(1869~1925)를 모략하여 쫓아내고 '봉천 사람이 봉천을 다스려야 한다.'는 여론을 조성합니다.

 

 

1916년 봉천순안사에서 봉천독군 겸 성장

1916년 (황제가 되었다가 물러난) 북양정부의 대총통 원세개가 죽을 때가 되어 정신이 오락가락했는지 장작림의 아첨에 결국 장작림을 성무장군으로 임명하여 봉천의 군무와 봉천순안사를 겸하게 합니다.

 

원세개가 같은 해 죽자,

여원홍이 북양정부 대총통이 됩니다.

장작림은 1916년 드디어 봉천독군 겸 성장이 됩니다.

 

1917년 장작림의 라이벌이었던 28사단장 풍덕린이 장훈의 선통제 복벽에 가담했다가 장작림에게 28사단을 빼앗깁니다.

이로써 장작림은 봉천성 군정을 완전 장악하게 됩니다.

이를 바탕으로 같은 해 흑룡강성을 겸병하고 포귀경을 흑룡강성 독군 겸 성장이 되게 합니다.

(※또한 길림성 독군 맹은원을 쫒아내기 위한 모략과 공작을 계속 합니다.)

 

 

1917년 세계 최초의 공산혁명 발생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무렵, 러시아에서 1917년 2월 혁명에 이어, 10월에 공산주의자 레닌이 집권하는 공산혁명이 발생합니다.

 

1917년 러시아 2월 혁명이후, 만주 동청철도의 임시 위원장이 된 사람은 한국 독립운동사에도 간혹 등장하는 하르바트(Дми́трий Леони́дович Хорва́т. 1858년 출생 ~ 1937년 베이징에서 사망) 제정 러시아 육군 중장입니다.

 

볼셰비키 혁명 이후인,

1917년 11월 29일(12월 12일) 북만주 하르빈의 러시아 노동자·병사 대표협의회(혹은 일명 로·병의회)는 기존의 모든 조직을 해산하고 중국 동청철도의 유일한 권위를 선언합니다.

그리고 12월 4일 백파 장성인 하르바트를 해임하고 다른 사람을 동청철도 감독관으로 임명합니다.

 

그러자 (러시아 백파군대 장성인) 하르바트는 만주군벌 장작림에게 구원을 요청합니다. (※아마 하르바트는 이 무렵 남만주의 일본군과도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일본 하르빈, 블라디보스토크, 봉천 총영사관 등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러시아 적백 내전기 시베리아·몽골 일대의 일본군 밀정 혹은 일본군 정보원은 총 4천여명 정도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저명 밀정은 한국 역사에도 자주 등장하며,

일제 시베리아 출병사에 조선인 여성들을 위안부(가라유키상, 창기)로 동원했던 ‘시마다 모토타로(島田元太郎,  Петр Николаевич Симада Мототаро)’가 있습니다.

 

시마다 모토타로는 조선인 ‘바실리 박(성명불상?)’ 등과도 밀접한 관계였다고 합니다.

일제의 시베리아 출병이 결국 실패하자 시마다는 조선 평안도 일대에서도 가라유키상 성매매업소를 운영했다고 합니다.

https://youtu.be/99OJ8nBY_dU?si=8ftOouCucpRH0qaD 

시마다 모토타로가 운영했던 성매매업소. 가라유키상 여성 90명 이상이 거주하였다. 상당수가 조선인 여성이었다.

 

1917년 12월 13일경 장작림 군벌 휘하의 중국군이 하르빈에 입성하여 하르빈 로·병의회를 해산시킵니다.

동청철도는 러시아 적백내전에서 1920년 3월경까지 백파 러시아군이 일부 주둔합니다.

 

 

(※===========참고자료=========================================

일제의 만주 동청철도 점령과 시베리아 간섭국들의 반발

나중에 백파 군대 대신 일본군이 동청철도를 점령해 활용, 간도의 조선인들을 토벌하고, 아무르주의 블라가베셴스크, 자유시, 바이칼호 인근의 치타, 이르쿠츠크를 공격합니다.

 

이 일본군의 동청철도를 활용한 흑룡강성 흑하시(애혼 : 아이훈)와 아무르주 주도였던 블라가베셴스크와 자유시 침략 방향은 1921. 6. 28. 자유시참변 이후 간도계 독립군이 만주·간도로 생환하는 방향과 유사합니다.

 

즉 일본군의 적백내전을 틈 탄 동청철도 점령이 없었더라면 일본군이 바이칼호까지 쉽게 진출하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단순 거리만으로도 수천 킬로미터로, 시베리아 타이가 숲의 도로 사정상 걸어서는 수개월이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일본군의 만주 동청철도 무단 점령은 결국 남만주 철도와 요동반도에 이어 북만주까지 일제가 장악하겠다는 것으로써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뿐만이 아니라 북양정부, 친일 장작림 군벌의 반발까지 불러 일으킵니다.

즉 세계적인 반발을 불러오는 대사건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조선내의 신문들은 만주 동청철도와 사할린 주 문제를 수백차례 이상 보도하면서,

 

<동아일보 1920. 7. 7. 자 보도에 따르면>

중국 중의원 의원 진가상씨는 일제의 동청철도 점령에 대한 불만을 표시합니다.

(1) 니항에 있던 중국 군함을 강제적으로 억류하고 선원을 감시한 건 (영대장은 니항사건에서 기습공격을 가한 일본군을 전멸시키는 데 일조한 진세영 장군)

(2) 조선인을 체포하고 이름을 기재하여 동청철도의 주권을 침해한 건

(3) 산동철도에 일본이 증병한 건

(4) 외무성 폭탄사건에 관하여 어떤 증거가 없음에도 요리사를 체포한 건

 

<동아일보 1920. 8. 5. 자 보도에 따르면>

워싱턴의 미국 국무장관과 영국 대사는 극동의 형세에 대하여 동청철도에 대한 국제적 성질을 보류하기를 희망하며, 일본의 사할린주 점령을 승인하지 않는다.

 

⁕일제의 만주 동청철도 점령과 사할린 섬 유전과 광산, 어장 점령은 시베리아 간섭국들의 체코군단 구원, 러시아 백파구원 등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당시에는 알려졌으나, 근래 독립기념관 공식도서 등은 A. Y. 구트만의 책을 인용하여 1920년 3월 12일 발생한 니항사건이 연해주 4월 참변, 자유시 참변,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의 원인이 되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카라한 선언

볼셰비키 레닌 정권의 간부였던

카라한은 일본군의 동청철도 활용을 막고, 중국 (러시아 시베리아를 점령할 능력이 있기는 있었는지 의문이 약간 있는) 북양정부의 러시아 내전 간섭을 저지할 목적으로 짜르 러시아가 중국에 강압했던 제국주의 불평등 조약을 해소하고 동청철도를 포기하겠다는 ‘카라한 선언’을 합니다.

 

결국 1920년 만주 동청철도 감독관 하르바트는 그 직책을 그만두고 베이징으로 떠납니다.

=================참고자료 끝================※)

만주 동청철도(중동로철도 위치)

1920년경 일제의 시베리아, 만주 일대 공격로

 

 

1918년경 볼셰비키의 곤란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 직후에도 식량 문제인 ‘빵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러시아의 1차 세계대전 참전이 계속되고 있었고,

권력을 장악한 볼셰비키 정부가 자본가•귀족 계급의 대토지와 재산을 무상몰수, 균등분배, 무상분배, 평등한 생존권, 공정한 기회 보장과 같은 공산주의 이념에 부합하는 개혁을 이룩하지 못하자 반볼셰비키 진영은 레닌정부의 약점을 파고들기 시작하였다.

 

1918년 1월 12일 일본 군함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입항합니다.

 

이 무렵 시베리아의 일본인 밀정수는 최소 수천여명 이상이었고, 만주와 시베리아의 조선인 친일단체 가입자도 최소 수천여명에서 ~ 수만여명 이상이었습니다.

 

 

​볼셰비키와 독일의 타협, 러시아의 1차 세계대전 철수

1918년 3월 3일 레닌의 볼셰비키 정부는 전쟁중이었던 독일과 휴전 및 영토일부 할양을 포함하는 브레스트 조약을 맺었고 3월 15일 조약이 비준되자, 러시아는 1차 세계대전에서 철수합니다.

 

1차 세계대전에 연합군의 중요한 일원이었던 러시아가 볼셰비키 혁명 성공 이후 독일과의 사실상 평화조약을 맺고, 독일 등에게 영토할양과 이익을 보장하자,

 

러시아내에서는 좌•우를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은 러시아의 영토상실과 배상금 등으로 러시아의 권리가 침해된 것으로 느끼기 시작합니다.

 

1918년 반볼셰비키 운동과 러시아 내전 발발

이들은 외국의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이탈리아, 캐나다 등의 지원을 받아 반볼셰비키 운동을 강화하기 시작합니다.

 

1차 세계대전 참전 후유증을 전혀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경작지는 급감합니다.

잦은 전쟁과 적백내전으로 농사지을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볼셰비키 정부는 1918년 여름부터 당면한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한 일부 토지의 재분배와 식량 조달계획을 시행하자 러시아 전역에서 볼셰비키에 반대하는 운동이 격화됩니다.

 

러시아 같이 농토가 넓은 나라에서의 식량부족 현상은 잘못된 정치가 한 원인임이 분명합니다.

 

 

연합군들의 러시아 간섭 전쟁

연합국들은 러시아가 1차 세계대전에서 완전히 철수하고, 사할린주•흑해 등의 유전•광산•산림•공장•농장 등의 국유화, 러시아내 외국인 재산 국유화, 차르 정부의 외국 채무 승계 거부 등으로 경제적 손해까지 발생하자,

 

볼셰비키의 이러한 행동을 세계 공산화 방지 등을 위해서 러시아 내전에 간섭해야만 하는 것으로 인식합니다.

그리고 지배계급과 자본가 타도를 부르짖는 공산주의자를 기본적으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연합국들의 무르만스크 점령

1918년 3월 6일 영국군, 프랑스군이 러시아 서부지역의 중요 항구인 무르만스크에 도착하였고 미국 윌슨 대통령은 러시아의 1차 세계대전 참전을 도울 수 있다고 발표하자 러시아는 식량과 무기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연합국은 곧 무르만스크를 점령합니다.

 

러시아 내부의 볼셰비키 적대 세력(백파)과 연합군에 의해 러시아 내전 간섭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나 미국, 영국, 프랑스는 당장 프랑스와 독일 국경지역의 서부전선에 배치된 군대를 러시아 백파를 지원하기 위해 한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던 니항,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스파스크, 캄챠카, 이만, 하바로프스크, 블라가베셴스크, 치타, 이르쿠츠크, 만주 하르빈, 동청철도 등의 동시베리아 지역에 동원할 수는 없었습니다.

 

 

간섭국들의 일본 간섭 요청

그들은 1918년 3월 15일경 연합국의 일원이었고 동지였던 일본, 중국 등에 러시아 간섭 전쟁 참전을 요청합니다.

 

물론 연합국의 요청은 일본군에게 만주·간도·사할린주·연해주·아무르주를 공격해 조선인들을 몰살시키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제의 시베리아 침략 개시

1918년 4월 5일 일제(日帝) 시베리아 침략군(일본의 용어로는 ‘시베리아 출정군’)의 시베리아 파견 선발대 1백여명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합니다.

 

1918년 5월경 일본 군함들이 아무르강 하구에 정박하여 볼셰비키가 장악하고 있던 사할린주의 사할린섬과 니항(尼港, Николаевск, 니콜라예프스크)까지 위협합니다.

중화민국 군대의 시베리아 간섭로

 

일본군 점령지

 

중화민국 북양정부와 일본의 연합

1918년 5월 16일경에서 ~ 5월 19일 사이 중화민국 북양정부와 일본간에 독일•오스트리아 등 공동의 적에 대응하기 위해 공동 군사협정이 체결됩니다.

 

체코 군단의 반볼셰비키 반란

1918년 5월 26일경 볼셰비키가 무장해제 시킨후 대륙횡단철도를 통해 블라디보스토크을 통해 프랑스로 귀국시키려고 시도하였던 (포로였던) 체코군이 반란을 일으켜 첼랴빈스크를 점령합니다.

 

체코군의 반란은 시베리아 지역과 볼가강 지역에서 반볼셰비키 세력인 약칭 ‘백군(백파)’의 통합에 기여하였습니다.

 

 

한국 독립운동과도 연관된 체코군단의 반란과 귀국

1918년 6월 29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일시적으로 권력을 장악했던 볼셰비키들이 체코군과 백파의 공격으로 전복됩니다.

 

간섭군의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점령

1918년 8월경에는 일본군(시베리아에만 많을 때는 약 7만 3천여명)과, 미국군 약 5천명, 영국군 8백여명, 이탈리아군 1천4백여명, 1백여명의 프랑스군 등의 연합군이 대륙횡단철도로 귀국하려는 체코군단을 구원하고 러시아내전에 간섭하기 위해 두만강 너머의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항(해삼항) 점령합니다.

 

중화민국 북경정부 군대 일부도 러시아 적백내전 간섭에 참가하였습니다.

 

(※물론 러시아내에 거주하던 중국인들 일부는 볼셰비키 측에도 가담하였습니다.)

 

 

제정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처형

1918년 7월 16일에서 ~ 7월 17일경 볼셰비키 지지자에 의해 예까쩨린부르크에서 러시아 전황제 니콜라이 2세가 가족과 함께 처형되었습니다.

(한국의 이승만, 의자왕, 선조, 연산군, 진성여왕 등이 생각나는) 황제 처형은 납득이 가는 점이 있지만, 자식의 처형은 문제가 상당히 많았습니다.

 

적군과 백군 모두 피에 대한 보복을 주저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볼셰비키도 반격을 위해 대대적으로 병력을 모집합니다.

이러니 농사 지을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러시아 혼란을 틈탄 일제의 만주 동청철도 점령과 간도토벌의 목적

다른 연합군은 러시아 레닌정부와 강화조약을 맺은 독일이 서부 전선에만 집중하지 못하게 하고 볼셰비키(공산당)가 주장하는 세계혁명을 막아보는 것에서 출발했지만, 1918년 말 독일은 내부에서부터 무너지며 연합군과 휴전 협정을 체결하였고 체코슬로바키아도 독립국이 되면서 체코 군단을 구출한다는 명분도 없었습니다.

 

 

일제의 목적은

북만주까지 영구 점령하거나, 연해주 일대의 한국 독립운동 세력 몰살,

동시베리아 만주 몽골 일대에 괴뢰국가 수립, 사할린 주와 관련 도서 할양,

우랄산맥 혹은 바이칼호 일대까지 영토 확장, 몽골과 만주의 장악,

중국내 일본지 식민지 확충과 친일세력 양성이었으나

 

겉으로 내세운 시베리아 침략 이유는

동양평화 유지,

제정 러시아에 포로가 되었던 체코군단의 안전한 귀국 보장,

러시아내 백파들의 요청에 따른 구원(일본 용어로는 러시아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들의 요청),

시베리아 거주 일본인 및 친일 조선인의 안전 확보와 재산권 보호,

공산주의 확산 방지,

1차 세계대전 동맹국인 중국·미국·영국 등의 요청 등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의 철군

그러나 연해주 일대에 간섭해 러시아 백파계 괴뢰정부까지 세웠던 중국·미국·영국 등은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되고, 포로가 되었던 체코군단의 귀국이 완료되자 1920년 1월경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3국은 볼셰비키에 대한 간섭전쟁과 봉쇄를 중단하였고,

 

곧 이어 미국도 시베리아 간섭전쟁에서 철군하였습니다.

(※참고자료 : 미국 시베리아 간섭군 사령관 윌리엄 시드니 그레이브스(William Sidney Graves) 저, 『아메리카의 시베리아에서의 모험 1918-1920(America's Siberian Adventure 1918-1920)』)

 

1920년 초 러시아 적백내전이 볼셰비키에게 유리하게 되기 전까지

일제는 치열하게 시베리아 주민 학살과 파르티잔 토벌, 영토 확장, 자원 확보, 조선인 독립운동세력 몰살에 열중합니다.

 

그리고 1920년 초 러시아 내전이 사실상 볼셰비키의 승리로 기울어가자 갑자기 ‘중립’을 선언하고 어떻게든 시베리아 주둔을 계속하려고 하였습니다.

 

 

일제의 마지막 발악 : 자원의 보고 사할린 주 할양 시도

그리고 마지막까지도

사할린 주만큼은 점령하거나 괴뢰국가를 건국하여 석유, 석탄, 삼림, 어장 등을 확보하고자 합니다.

 

오늘날 세계 최대 규모의 어장과 풍부한 천연가스, 석탄, 석유가 있는 보물섬. 사할린섬 일대

사할린섬 일대 가스전

 

그 이전에는 일본 시베리아 침략군과 볼셰비키 및 파르티잔 간의 교전은 지속되었습니다.

 

만주의 지하자원과 석유, 석탄

 

 

참고자료

윌리엄 시드니 그레이브스(William Sidney Graves) 저, 『아메리카의 시베리아에서의 모험 1918-1920(America's Siberian Adventure 1918-1920)』 - 미국 시베리아 간섭군 사령관으로 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대규모 민간인 학살을 했다고 주장함.

신불해 저, <최강의 군벌>, <이야기 중국사>

쉬처 저, <만주군벌 장작림>

동아일보, 조선일보 보도내용

 

백도백과 : 장작림 https://baike.baidu.com/item/%E5%BC%A0%E4%BD%9C%E9%9C%96/136370?lemmaFrom=lemma_starMap&fromModule=lemma_starMap&structureId=4cc6a4b8435d0dce09f960e7&structureClickId=136370&structureItemId=954bc47ea005f88666d5a031

 

장종창https://baike.baidu.com/item/%E5%BC%A0%E5%AE%97%E6%98%8C/345722?lemmaFrom=lemma_starMap&fromModule=lemma_starMap&structureId=75a62f41e5ed73d3466e6c12&structureClickId=345722&structureItemId=adba76106e509009361bede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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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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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나아가는자 | 작성시간 23.10.16 잘 읽었습니다. 소련의 동청철도 포기가 이런 배경이 있었는지 잘 몰랐네요. 사회주의자들의 반제국주의 정신때문인줄 알았는데 치열한 전쟁의 한 복판에서 내린 결정임을 잘 보았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3.10.16 항상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3.10.16 시베리아 출병사에 조선인 여성들을 위안부로 동원했군요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3.10.16 그 무렵 국내에도 일본인들이 집창촌을 많이 만들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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