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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현대사

근대 한국인 시베리아 이주 약사(略史) 통합본

작성자신룡기2|작성시간24.01.25|조회수255 목록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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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한국인들의 만주·시베리아 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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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쇠락

자급자족의 농촌이 기반이었던 조선은 후기에 들어서서도 사회의 모순은 줄어들지 않았고, 민중들의 삶은 여전히 힘들었습니다.

서구의 산업혁명과 민주주의의 시작은 조선에게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압록강과 두만강 등의 국경주대 주민들은 일찍이 중국, 몽골 등과 교류가 있었고 잦은 흉년과 세도정치, 부정부패가 이어지자 많은 사람들이 강을 건너 만주 혹은 연해주로 몰래 이주하는 사람이 생겨났습니다.

 

 

아무르강(흑룡강)의 명칭

조선 초기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 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 등을 보면 두만강·압록강 건너편인 북쪽에 몽고 흑수로 표기된 강이 흑강, 흑룡강, 아무르강이라고 부르는 강이며, 평안도·함경도·만주 주민들은 까만강, 혹은 까망강, 몽고 까망강 등으로 부르고 있었습니다.

 

이 강은 오늘날의 몽골 공화국에 있는 강이 아니고, 현재에는 흑룡강 혹은 아무르강이라고 널리 불려지지만 삼국시대 혹은 고대시대의 “흑수”라고 불려졌던 강의 다른 명칭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러한 명칭은 한국어 명칭을 한문으로 표현함에 따라 발생하는 문제로, 조선 세종대왕 때 한글이 창제되었음에도 문맹률이 높고 널리 보급되지 않아 발생한 문제들이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두만강변 녹둔도에서 둔전관을 하던 시대나 조선후기 연암 박지원 등이 중국을 다녀오며 연행록을 쓰던 시대에 사용되는 명칭을 조선시대 후기에도 여전히 사용하였습니다.

이 명칭 역시 고려시대에 쓰던 명칭을 그대로 써 온 것이며, 발해 부여 시대에 사용하던 명칭이었으나, 중국에서 요동지방은 「만주」로, 흑수 혹은 흑강은 「흑룡강」으로 바꿔서 사용함에 따라 바뀐 이름이 오늘날 사용되게 된 것 뿐입니다.

 

 

자연자원이 풍부했던 과거

산업혁명 이전의 한국내의 산과 들은 미개간 된 곳이 있었고, 화전민도 있었습니다.

생산력이 떨어진 농경지를 휴작하여 돌려짓기 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또 산에는 호랑이, 표범, 멧돼지, 늑대 등의 덩치 큰 동물이 광범위하게 살고 있었고, 낙동강 상류지역에 까지 “뚜구리” 등으로 불려지는 메기와 비슷하게 생긴 물고기 혹은 철갑상어류 혹은 돌고래, 바다사자 종류로 불리워지는 거대한 물고기가 존재하여 송아지까지 잡아먹는 경우가 있다는 전설이 전해져 올 정도였습니다.

 

실제 큰 강이 아님에도 석기시대에 만들어진 울주군 반구대에는 작은강 하구에도 큰물고기와 고래와 돌고래 등이 드나드는 풍족한 자연환경이 그려져 있습니다.

농경기술의 부족으로 가뭄, 홍수에 취약하였으나 상대적으로 산, 들, 강에는 당시 사람들이 먹고살 수 있을 정도의 농업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서구문명과 중국의 충돌

1839년 아편전쟁 등은 중국에 섬기던 조선에게는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각종 호란을 일으킨 만주족을 멸하자는 생각은 사라지고, 청나라를 배우자는 실학운동까지 광범위하게 발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국과 러시아 등의 중국 국경 침입으로 1860년 북경조약(北京條約, 베이징조약)이 체결되면서 홍콩섬 등이 영국에 넘어가고, 연해주 지방이 러시아로 할양됩니다.

그리고 조선은 제정 러시아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직접 국경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러시아령 연해주로의 이주 시작

1860년 북경조약과 연해주의 할양

1858년 애혼조약(愛琿條約, 아이훈조약)으로 아무르강(흑룡강, 흑수강) 이북지역을 중국(청나라)이 러시아에 넘겨준 데 이어. 1860년 러시아 외교관들은 중국 정부가 북경조약(露淸北京條約)에 서명하도록 강요함으로써 제2차 아편 전쟁에서 영국⦁프랑스 군이 중국에 가한 패배를 이용합니다.

 

북경조약으로 중국은 우수리강 일대의 연해주지방과 남부 하바로프스크 지방의 광대하고 인구 밀도가 낮은 영토를 러시아에 할양했습니다.

 

그 결과 러시아가 한국과 약 14km의 짧은 국경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러시아는 1861년경부터 연해주 개발을 위해 인두세와 토지세를 면제해주는 등의 정책을 실시하여 이주를 장려하였습니다.

 

한국인의 러시아 영토로의 이주는 1863년 9월 21일자 러시아 국경감시소에서 작성한 문서에 한국인 13가구가 연해주에 있다는 기록 등에서부터 나타납니다.

 

동학란, 강화도 조약

외세에 대한 위기의식과 세도정치의 폐단과 생활의 궁핍으로 국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자 경주의 수운 최제우가 동학을 창도한 이래,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여 그 세를 떨치게 되었습니다.

1864년 혹세무민 등의 이유로 창도자 수운 최제우 처형후에도 제자들을 중심으로 교조신원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1894년 동학운동과 1919년 동학교도의 3·1운동 주도 등은 과거의 악습을 폐지하고 새로운 시대로 가려는 의지의 결과물이었습니다.

 

 

그리고 1876년 2월 27일(고종13년 음력 2월 3일)경 강화도조약으로 불려지는 조선과 일본과의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만주에서 발흥한 청나라

조선시대에 세워진 청나라는 만주에서 발흥한 왕조였습니다.

조선중기 이후에 명나라 대신 만주족·몽고족의 청나라에 사대를 하게 된 조선왕조는, 사신을 보낼 때 몽고족의 원나라 시대부터 요동지방의 대도회였던 봉천(오늘날의 심양)을 거쳐 연경(북경)으로 이동하였고, 조선 사신들은 연행기라는 기록들을 작성하여 놓았습니다.

 

그리고 만주족이 중국까지 장악하고 중국 본토로 이주하게 되자, 간도지방과 오늘날의 길림성과 흑룡강성의 인구는 매우 적었습니다.

 

1658년경 청나라는 자신들의 발상지인 만주 등에 대한 봉금령을 내려 만주로의 한족 이주를 억제하였으나, 러시아가 동시베리아로 진출할 무렵부터 순차적으로 해제하였습니다.

 

 

간도·만주·러시아로의 이주 시작

한국인의 국외 이주가 활발히 시작되던 시기는 세도 정치(勢道政治) 아래 삼정(三政)의 문란이 극심해졌고 전국에서 민란(民亂)이 일어나던 때였습니다.

 

이리하여 고종(高宗) 4년(1867)경에는 간도 지방에서는 이미 한국인에 의한 토지 개간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1870년경부터 1910년경 동안 만주의 여러 지역에서 황무지 개간과 벼농사를 위해 조선인의 이주를 환영했습니다.

 

(시간부족 등의 문제로 높임말과 평문을 섞어쓰게 되었습니다. ㅎㅎ)

 

청나라(만주족)의 만주 이민 정책

청나라 초기 만주지역에는 중국 내부와 같이 수십에서 수백여개의 현(縣) 단위 행정구역 위에 성 등의 행정구역이 있는 것이 아니라, 봉천부라는 관청을 중심으로 행정조직이 운영되다가, 조선시대 후반부터는 길림성, 봉천성(오늘날의 요령성), 흑룡강성 등이 생겨나고 그 아래에 수십에서 ~ 수백여개의 현(縣) 단위 행정구역이 생겼다.

 

이성량(李成梁. 1526년경 출생 ~ 1615년경 사망) 등은 명나라 시기 조선을 깔보던 자라고 예전 자료에 가끔 나오며,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공부상서 김간(金簡. ?~1794년경 사망) 등과 같이 조선과 관련된 인물은 조선이 중국을 섬기던 시기에는 매우 드물었다.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된 이후에도 1912년 청왕조 멸망할 때까지 일제에 적극 협조하거나, 고려인의 만주·간도 이주를 강하게 저지하지는 않았다.

 

 

1884년 조선·러시아(아라사)의 조약체결

1884년에는 조·로수호통상조약(朝露修好通商條約)이 체결되어 조선과 러시아는 정치⦁경제적으로 더욱 깊은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연해주 첫 이민자의 대부분은 한국 북부지방의 가난한 농민들이었다.

그들의 고향 생활은 먹고살기 힘들었다.

땅이 충분하지 않았고, 비료가 필요 없는 비옥한 토지는 더 적었다.

 

부패한 탐관오리들과 양반·지주들은 피지배계층인 농민들로부터 엄청난 세금을 징수했고 때로는 수확량의 50%에 달했다.

공식적인 세율은 훨씬 낮았지만 징수된 것의 상당 부분이 탐관오리의 주머니에 들어갔고 농민들은 각종 민란 등에 가담하면서 잘못된 지배체제에 저항을 강화하였다.

 

한국 북부지방 농민 가족은 강과 산으로 이루어진 국경을 넘어 거의 자유롭게 만주, 간도나 러시아 영토로 이동할 수 있었고, 만주, 간도, 러시아 극동 지역의 한국 마을 수가 증가했다.

 

 

러시아의 한국인 이민 환영

처음 러시아 관리들은 한국인 이민을 환영했다.

한국인 정착민들은 사람이 거의 살지 않던 광막한 땅을 개간하고 많은 수확을 거두어 식량 문제를 해결하고, 시베리아와 만주라는 거대한 무인지경의 원시림 지역을 개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한국인의 이주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아직 건설되지 않은 1900년까지 특히 중요했으며 극동 지역에는 러시아 서부지역이나 유럽지역에서 온 농민이 거의 없었다.

 

제정 러시아 관리들은 한국 농민들의 노고와 그들이 개간한 땅의 엄청난 수확량, 새로운 한국 정착민들의 정직성과 준법성을 보고서에 열정적으로 기록하였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이 있었다.

제정 러시아 정부는 「한국인」의 영토내 정착이 결국 한국인으로부터 러시아 영토에 대한 한국 고대시대 영토 회복의 기초가 될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한국 이민자들은 중국에서 온 이민자들과 거의 같은 방식으로 대우 받았다.

그 결과 중국계 혹은 한국계 이민자에 대한 정책은 일관성이 없었다.

 

시베리아 지역의 최고 군사⦁행정 책임자인 총독의 개인적인 견해에 따라 좌우되기도 하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시베리아 지역의 한인 사회는 빠르게 성장했다.

풍부한 토지와 한국보다 상대적으로 정직한 행정으로 간도·만주·연해주의 매력이 너무 강했고 당시의 기술로 국경을 봉쇄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그리고 국경봉쇄를 시도하지 않았다.)

 

 

연해주 지방의 한인 사회

한국 이민자 정착의 주요 중심지는 한국과 경계에 있는 블라디보스토크(해삼) 지역과 연해주, 아무르주 지역이었다.

연해주 지방의 도시중에는 한국 정착민은 전체 인구의 90%를 가까이 차지하는 곳도 있었다.

1900년대 초에는 극동 지역에서 많은 한국 학교가 운영되고 한국인 신문이 출판되고 출판사가 운영되었다.

 

또한 독립군들에게 러시아는 간도·만주와 더불어 정치적 이민의 중심지가 되었다.

1905년 이후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이 사실상 한국을 장악했을 때에는, 러시아령내의 홍범도 등 독립군들이 한국의 독립운동을 위해서 러시아 영토를 떠나, 간도⦁만주⦁한국 땅으로 이동했다.

 

그후 일본군에 의해 패배한 독립군의 일부가 러시아 영토로 피신했다.

 

대한제국의 정규군 일부도 1907년 일제의 군대해산에 반대하고 러시아 영내로 왔다.

러시아는 간도·만주처럼 독립운동과 반일운동의 중심이 되었을 뿐 아니라 한국 문화의 중요한 중심이 되었다.

 

1910년 이후 한국에서 일제에 의한 토지약탈과 한국인의 해외 추방, 일본어와 일본인을 우선시하는 교육 등을 실시되었고, 다수 일본인들이 한국내 쓸만한 땅을 약탈하고 한국내로 이주하자 한국인 소작농들의 간도·만주·연해주 이주는 더욱 심화되었다.

 

 

중국령 만주의 혼란상과 친일파의 등장

그러나 간도·만주 일대에는 청나라(1636년경부터 1912년까지 존속) 말기부터 한족(漢族)이 쇄도하였고, 만주에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후 일본군(관동군)이 일부 주둔하고, 중국계 친일파(장작림, 장종창 등)와 마적단이 서서히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하여, 만주의 혼란상은 한마디로 말하면

 

“폭력이 우선이고, 주먹 센 놈이 법이고 진리다” 였으며

한국인 사회의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1895년 청일전쟁 무렵의 만주 인구

1895년경 만주 인구 대략 500만여명중 한족(漢族)은 이미 200만여명에 달했다.

청나라의 1895년경 청일전쟁 패배 후, 청나라와 러시아의 협의에 따라 1897년 만주를 횡단하는 중동로 철도(동청철도)가 건설되기 시작했고, 요동반도로도 남만주 철도(1898~1903, 하르빈과 여순간)가 개통되었다.

 

조선과 만주를 놓고 일본과 러시아 벌인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후, 제정 러시아는 1908년경부터 60만명 극동이주 계획 등을 추진하였고, 청나라는 일본, 러시아, 미국,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등의 만주 진출에 대응해 자신들의 영토를 지키고자 만주로의 한족 이주를 장려할 수밖에 없었다.

 

한족의 만주 이주 초기에는 산동, 하북, 하남 출신들이 많이 이주하였다.

그 결과 만주의 인구수는 청나라 말엽에 이미 조선의 인구수를 추월하였다.

 

 

1905년경 러일전쟁 종전 직후의 만주 상황

러일전쟁이 지속되던 시기, 1905년 1월. 시민들의 평화적인 시위를 용납하지 못한 짜르 러시아는 비무장 시위대에 무차별 발포하여 수백여명을 사살하는 「피의 일요일 사건」이 발생되어 황제 지배체제가 위기에 빠진다.

러시아 내부에서는 볼셰비키, 멘세비키 등의 혁명세력이 강화되고 있었다.

(※일설에 의하면 러시아 혁명세력의 일부가 러일전쟁 기간중 일본의 돈까지 받아 먹었고, 1차 대전 때는 적국인 독일의 지원도 받았다는 소리가 분명 있다.)

러시아 극동에 위치하여 죄수들이나 유배 오거나, 혹은 농노에서 해방된 사람들, 우크라이나 지역 하층민들, 조선에서 일제를 피해 살기위해 탈출한 사람들이 이주해 오던 시베리아, 사할린섬에서도 혁명 운동에 동조하는 자들이 나타난다.

그러나 당시 시베리아의 특성상 광활한 대지에 사람이 드물게 존재하는 지역인지라, 짜르 러시아는 못살아서 두만강을 넘어 연해주로 이주한 조선인들까지 받아들여 타이가 개간에 나서야 하는 상황이었다.

 

 

1905년 포츠모스 조약으로 러일전쟁은 종전

러일전쟁은 결국 1905년 9월경 미국의 중재로 종전된다. 1905년 9월 5일경에 합의된 포츠머스 조약(Treaty of Portsmouth : Портсмутский мирный договор)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포츠머스 조약 주요 내용......

1. 러시아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영향권을 인정한다.

(※1905년 11월의 을사늑약(乙巳勒約) 이후 한국을 일본의 식민지 상태가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대략적으로 미국, 중국, 러시아, 영국 등이 모두 한국에 대한 일본의 권리를 인정한 것이다.)

2. 러시아의 요동반도의 관동주 조차지와 남만주철도의 일부(장춘 여순간 철도)를 일본에 양도한다. 당시 만주의 핵심 철도중 하나인 동청철도(블라디보스토크와 만주리 간의 철도)와 북만주의 대도회가 된 하르빈 일대에 대한 짜르 러시아의 지배권은 인정된다.

3. 회담 무렵 일본이 무력 점령한 사할린섬의 북위 50도 이남과 인근 섬들을 일본에 할양한다.

(※북위 50도 이하 사할린섬 남부의 주민에 대한 추방과 학살이 있었다고 한다. 동해의 독도만 이 때 일제로 넘어간 것은 아니다.)

4. 어디까지나 일본측 주장에 따르면 러시아는 동해, 오호츠크해 및 베링해 일대의 어업권을 일본에 양도한다.

(※동해, 오호츠크해, 베링해의 어업권과 쿠릴 열도, 각종 도서 등에 대한 소유권을 놓고는 이후에도 여러차례 다툼이 있었다. 오호츠크해 어장과 베링해 어장, 사할린섬 일대의 가스전 등은 오늘날 한국 어민과 기업들까지 진출하고 있는 세계 최대 규모의 어장과 자원의 보물섬이다.

아무르강(과거명칭은 흑수강 혹은 몽고 흑수) 하구에는 무게 수십톤에 이르는 범고래까지 출몰하는 지역이다.)

5. 양측 모두 만주지역 도로의 상업적 사용을 인정한다.

6. 전쟁 포로를 교환한다.

......포츠머스 조약 주요 내용 끝......

 

우리가 만주라고 부르는 곳은 과거 부여, 요, 금, 원, 후금이 있던 지역인데,

청나라 말엽의 잦은 영토 분쟁에 이어

서구 제국주의 국가중 일본과 러시아의 이권다툼은 러일전쟁으로 일단 정리가 된 것이다.

 

만주에 대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 지속과 일본의 독점 견재

물론,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이 남만주의 일본 지배권을 인정한 것은 아니다.

그들의 관심은 러시아가 청나라 혼란기 차지했던 만주를 최소한 나눠 갖자는 것이지 일본이 독점하게 하자는 것은 아니었다.

광대한 면적과 비옥한 토지, 석탄, 삼림, 오호츠크해의 어장, 사할린섬의 석유와 석탄 등을 일본에게 일방적으로 양보할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가 아니었다.

 

 

당시 기술부족으로 석유를 제외한 천연가스의 활용도는 낮았다.

그 무렵 기술의 부족으로 중동 산유국뿐만이 아니라 시베리아와 사할린주에서도 그냥 버렸던 천연가스는 주요 자원이 아니었고, 활용도도 낮았다.

사할린섬과 만주의 석탄, 철광석, 삼림, 어류의 활용도가 더 높았다.

 

사할린섬의 유전을 활용했던 일제 역시 대동아전쟁시기에도 사할린섬의 천연가스를 액화, 비료화, 플라스틱 원료화, 화약으로 제조하는 기술 등이 부족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메탄가스를 주성분으로 하는 천연가스의 활용도는 원유 못지 않다.)

 

 

한국인 이민자 수

1880년까지 러시아령 연해주 지방에는 21개의 한인 마을이 있었고, 이 지역의 한인 인구는 6,700여명에 이르렀다.

(※ 이 무렵 연해주의 러시아 농민은 8,300여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1901년까지 약 3만명의 한국인이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 살게 되었다.

(※인구수는 자료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조선총독부 등의 자료에 따르면) 1910년경 만주 거주 한국인은 대략 10만 9천여명이었다.

 

연해주(프리모르스키) 지방에서는 1910년 러시아인 17,000여명일 때, 한국인이 52,000여명 이었다.

러시아측 자료에 따르면 1917년경 러시아 영토에는 10만여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었는데 대부분은 농민이었다고 한다.

 

1921년경 간도에는 30만 7천명 이상이 거주중이었다.

 

그들중 대다수는 일제와 친일파들의 침략정책으로 말미암아 보다 나은 삶을 찾아왔거나 아니면 살해와 투옥을 피해 탈출해온 사람들이었다.

(※ 1945년 해방 전까지 일본인의 한국 내로의 이주가 증가하자 한국인의 간도·만주·러시아·일본·아메리카 등지로의 반강제적 이주는 더욱 증가하였다.)

※ 대략적인 수치이며, 일제와 러시아의 기록 등을 주로 참고하여 사실과 다를 수 있음연해주·러시아령만주·간도
1880년6,700여명

1894년

만주 65,000여명
1898년23,000여명

1901년30,000여명

1907년46,000여명71,000여명
1910년52,000여명만주 109,000여명
1917년8만~10만여명220,000여명
1921년

간도 307,000여명
1924년15만여명330,000여명
1937년17만~23만여명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일본 제국주의의 친일파 육성과 만주·시베리아 침략 시도

일본 역시 대만, 조선, 만주, 중국, 남양군도, 쿠릴열도, 사할린섬은 국력을 기울인 그들의 침략 방향이었고 양보하기 쉬운 곳이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은 러일전쟁부터 1918년 러시아 적백내전, 1931년 만주사변까지 이어지게 된다.

1907년 1월 11일경 청나라 농공상부 상서인 재진, 민정부 상서인 서세창은 동3성의 정세를 보고한다.

당시 만주에서는 장춘 남부와 북부를 경계로 일본 세력권과 러시아 세력권으로 나눠지고 있었다. 또 잦은 전쟁과 마적 및 비적 떼의 출현으로 황폐화된 지역도 많았다.

 

아무르강, 우수리강, 두만강 등을 경계로 하는 국경지역의 분쟁도 끊임이 없었고, 그것은 현재도 마찬가지이다.

 

1907년 4월 20일경 청나라는 성경(봉천)장군이 동3성 총독 겸 동3성 장군사무를 맡게 하였고, 서세창이 처음으로 동3성의 총독 겸 장군사무를 담당하게 된다.

당시 중국 동북지방은 일본과 러시아 등의 패권 다툼이 한창이었고, 만주 역시 계속해 침식당하고 있었다.

 

4월 29일경, 동3성 총독 서세창은 육군 3개 진이 동3성에 있고, 2진, 4진, 5진에서 보병, 포병, 기마대를 동원해 2개의 혼성여단을 구성하고 있다고 보고한다.

8월 7일경, 동3성 총독 서세창, 봉천순무 당소의, 봉천 주재 미국 총영사가 양해각서에 서명했으며 해리만은 새로운 신민둔(신민툰) 철도 건설에 투자하기로 했다.

그러나 미국의 금융공황으로 인해 영국 기업인들이 대신 투자하도록 초청되었다.

 

8월 12일경 아베 모리타로 일본 대리공사는 이 사실을 외무부에 통보하고 항의했다.

청나라는 만주에 대한 개방 정책을 가속화하고, 이곳을 여러 나라의 중요한 무역 중심지로 만들기 위해 은행, 철도, 도로, 토지개간, 광업 등에 막대한 외채를 빌리기로 한다.

 

1907년 10월 13일경, 청 정부는 동3성 총독인 서세창이 동3성에 대한 새로운 정책을 처리하기 위해 수천만 달러의 외채를 빌릴 수 있도록 허용한다.

10월 26일경, 호북 안찰사 양정분이 원세개와 혁광이 사익을 탐하고 나라를 해친다는 이유로 탄핵했고, 청 정부는 서세창, 양사양, 진기룡 등의 공허한 말과 명성을 얻으려는 시도를 질책했다.

 

서세창 등은 만주의 상업항 개항, 국채 차입, 타국과의 연결, 철도 건설 등의 조치를 취했으며, 명목상으로는(뒤로는 일본 돈을 받아 먹었는지는 지는 알 수 없지만) 일본과 러시아의 중국 동북 지배에 저항하기 위해 중국 동북 지역 진흥 정책을 시행한다.

 

 

1909년 원세개는 (청나라 마지막 임금인 선통제의 아버지인) 섭정왕 재풍에 의해 파직되었다.

서태후가 죽은후, 1909년부터 1911년까지 청나라의 실권자는 선통제의 생부인 섭정왕 재풍이었다.

 

 

만주에 친일 마적 출신 군벌의 등장

그러나 이 무렵 만주에는 마적출신들이 혼란한 만주정세를 활용하고, 일제의 만주침략에 협조하며 폭력과 술수를 앞세워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한다.

그들이 바로 중국의 혼세 말세에 등장한다는 「혼세마왕」 혹은 「일제의 개」였다.

(※이 무렵 만주에서 문제가 된 인물들은 「미제의 개」, 혹은 「영국의 주구」, 「볼셰비키의 앞잡이」는 아니다.)

그들 역시 만주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군사력을 강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러시아 극동 지역은 한국인들이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한국어로 문학을 출판하고 교육 활동을 수행하고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곳 중 하나였다.

 

 

제정 러시아의 한인 정책 변화

그러나 1907년 이후 차르 러시아 당국은 일본과 우호 관계를 구축하는 과정을 밟았고 러시아 영토에서 너무 격렬한 반일 활동을 억제했기 때문에 대놓고 일제와 무장투쟁을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 니항, 사할린섬 등지에는 한국인외에도 일본인, 중국인, 미국인, 유럽인, 시베리아 민족 등 다양한 사람들이 살게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은 1904년에서~1905년의 러일전쟁의 패전을 잊지 않았고, 당시 많은 한국인들이 러시아편을 들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한국인들의 반일활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 1909년 안중근은 러시아에 거주하는 한인의 도움을 받아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사살하였다.

 

이러한 상대적인 자유는 러시아에 대한 반일 저항의 많은 지도자들을 끌어 들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민자들은 대부분 빈곤과 일제의 억압에 의해 러시아로 쫓겨 난 한국 동북부지방 빈곤한 농민이었다.

정착민들은 주로 북동부 (함경도, 평안도) 사투리 등을 사용했는데, 이는 서울의 언어와 약간 달랐다.

그리고 남부 지방에서 동학교도 토벌, 일제의 의병 토벌, 사살령 등을 피해 탈출해 온 사람 등 다양한 한국인들이 연해주에 거주하게 된다.

 

 

제정 러시아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

1914년 7월경 제국주의 국가 사이에 패권을 놓고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1914년 8월경에는 제정 러시아가 독일과의 전쟁에 참전하였다.

제정 러시아의 참전 초기 전국적인 동원령에도 불구하고 전선에 배치되는 군인들에게 줄 소총까지 부족하였고, 시베리아의 소수민족인 고려인까지 동원하였다.

 

그 넓은 농토에도 정치가 엉터리라서 식량부족과 인플레이션이 발생해 국민생활이 곤궁해졌다.

결국 같은 연합군의 일원이 된 일제로부터 대량의 군수물자와 식량 등을 극동에서 수입하여야만 했고, 중국으로부터도 50만여명의 노동력을 지원받았다.(영국과 프랑스에는 중국인 약 14만여명 이상이 지원되었다. 그중 약 2만여명이 죽었다고 한다.)

 

 

1차 세계대전 발발과 미국·일본의 경제발전 그리고 중국 경공업·식품산업의 호황

원세개의 북양정부는 처음에는 중립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중국 북양정부는 1917년 8월경 독일에 선전포고한다.)

그러나 제국주의 국가간의 세계적인 전쟁으로 중국 역시 어부지리를 기대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중국으로 수출되는 외국 상품과 자본은 급감하였으며, 전쟁 당사자들은 중국의 인력과 경공업 제품, 생활용품 등을 필요로 하기 시작한다.

비록 1차 세계대전 기간중 중국의 중공업 발전은 더뎠지만, 새로운 공장과 광산이 설립되었으며, 수출이 급증하였고 특히 제사, 제분, 성냥, 제지, 담배, 시멘트, 착유, 설탕정제의 경공업부터 석탄채굴, 철강, 안티몬, 텅스텐 등의 중공업도 1차세계대전 기간에 크게 성장하였다.

(※물론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 되자마자 수입은 급증하고 수출이 급감하였고, 외국의 경제 침략이 지속되자 1922년경부터 중국 경제는 불황에 다시 빠지기 시작한다.)

1차 대전 동안, 북양정부는 유럽에 대한 노동자 지원외에도 러시아 적백내전에 소수의 군대를 파견하였고 러시아 볼셰비키에 대한 경제봉쇄 동참, 일본군의 만주 동청철도·시베리아 출병과 점령, 조선인토벌 방관 등 일제와 연합국에 적극 협조하였다.

그러나 전쟁기간중 경제호황으로 세계1위의 경제대국이 된 미국의 대통령 윌슨은 14개조의 제안을 하였으나, 결국에는 제국주의 국가의 이권 보장에만 그치게 되었다.

제1차 대전이 종전된 후에도 독일이 점유했던 산동반도의 교주만, 교주철도, 청도, 광물, 해저케이블은 중국에 반환되지 않았고 일본에 넘어갔다.

이것은 결국 중국에 침입한 제국주의자와 친일 매국노에 대항하기 위한 1919년 5.4 운동이 일어나는 한 원인이 된다.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러시아와 일본의 관계 개선

러일전쟁 패전이후 일본과 러시아의 사이는 좋지 못했으나 1907년경부터 관계가 개선되기 시작하여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생하여 제정 러시아와 일본이 같은 연합군이 되자 관계가 급격히 개선되었다.

 

러시아의 니항(니콜라예프스크), 블라디보스토크, 사할린섬, 만주 하르빈 등에는 식량과 전쟁물자를 공급하려는 일본인들의 거주가 늘어나고 영사관 등이 개설되어 러시아내 반일세력인 독립군의 활동이 제약을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1917년 2월경 「2월 혁명」이 발생하여 로마노프 왕조가 망하고, 임시정부가 조직되었다.

그러나 그해 10월 공산주의자인 레닌이 주도한 「볼셰비키 혁명」이 발생하며, 제1차 대전 연합국에서 이탈한다.

 

1919년 제1차 대전이 종전된 후 베르사이유 조약에 러시아 볼셰비키 정권은 초청되지 못했으며, 연합국의 볼셰비키 봉쇄와 러시아 적백 내전 간섭은 강화되고 있었다.

 

 

1916년 원세개 사망후 만주상황

1917년 손문은 광주 일대에서 군사정부를 세웠고, 곽송령은 손문에게 귀순하여 이후 광동성·감숙성 변방독판참모, 광동성 경위군 영장(대대장)으로 임명됐다. 나중에는 소관 강무당의 교관으로 옮겨졌다.

 

손문이 이끄는 호법운동이 실패하자 곽송령은 광주에 머무를 수 없게 되었으며, 봉천으로 돌아가 동3성 육군강무당에서 전술교관으로 복무했다.

이 무렵 만주의 대도회 봉천은 군벌이 된 장작림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 기간 동안 강무당에서 공부하고 있던 (장작림의 아들인) 장학량을 만난다.

장학량의 추천으로 곽송령은 장작림에 의해 참모장 겸 제2연대장(단장)으로 임명된다.

 

 

북만주의 대도회 하르빈에 중국 군벌군도 일부 입성

1917년 12월경에는 러시아 혁명으로 쫓겨날 위기에 처한 (만주 동청철도의 러시아 백파 장령) 하르바트(Д. Л. Хорват)의 요청으로 만주 군벌군이 북만주의 대도회이며 동청철도의 거점인 하르빈에 입성합니다.

 

(※ 이 무렵 북만주 최대의 도시가 된 하르빈에서 1909년 일본의 거물 정치인 이등박문이 사살되기도 하였다.

중국은 1922년 12월경 중동로(동청철도) 연선을 별도 행정단위인 동3성 특별행정구로 지정한다. 그러나 그후에도 수십년간 동청철도를 둘러싼 분쟁은 계속된다.)

 

 

일제의 지원을 등에 업은 장작림의 만주 장악

1919년 7월 19일경 관성자사건이 발생하였고, 1919년 8월 5일경 장작림과의 권력투쟁에서 패한 길림성 독군 맹은원(孟恩遠, 1856~1933)이 물러납니다.

이제 만주의 동북3성은 사실상 일본을 등에 업은 장작림이 완전 장악하게 됩니다.

 

1921년 장작림은 곽송령을 제8여 여장으로 임명하고, 장학량이 이끄는 제3여단과 함께 사령부를 조성했습니다.

 

 

러시아 시민권 혹은 중국 국적 획득 시도

일제가 한국을 침략하고 민족말살 정책을 펼치자 더 많은 한국인들이 간도·만주·러시아 지역 등으로 이주하였다.

 

상당수는 가족과 함께 러시아로 떠났다.

이민자들은 러시아 시민권을 얻으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러시아 시민권을 더 쉽게 얻을 수 있도록 상당수 한국계 이민자들은 기꺼이 러시아 정교회(로마 카톨릭교와 유사한 종교)를 신앙으로 채택했다.

러시아 시민권을 얻은 사람들은 자녀 교육, 땅을 얻고, 상업 등 사업을 하는 것이 더 쉬웠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러시아인들의 농토를 임대해 농사를 짓거나 노동자로 일해야 했다.

 

부유한 한국인들은 러시아어를 배우려고 노력했고 가능하면 아이들을 러시아 학교에 보냈다. 1917년까지 러시아 대학 졸업생들은 이미 한국인 정착민들 사이에서 나타났다.

 

그러나 이러한 러시아의 교육을 받은 한국인들은 한국 사회의 극히 일부에 불과했으며 대부분의 한국인은 러시아 극동지방에서 농업과 상업에 종사하며 고립된 방식으로 계속 살았다.

 

 

일제의 친일파와 밀정 양성

그리고 일제는 일본영사관 설치지역에 「○○조선인회」, 「조선인 민회」 등을 조직하여 수천여명 이상의 친일파를 양성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의 관계계선 목적은 어디까지나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하여 수도인 모스크바에서도 「빵과 우유를 달라」는 시위가 연이어 일어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한 곡물, 수산물 등의 수입과 전쟁물자 조달이었지,

일본의 만주지역 이권 보장, 어업권 보장, 사할린섬 남부와 쿠릴열도의 영구적 할양 등은 아니었다.

 

일본은 이러한 기회를 활용하여 만주와 러시아령에 친일파를 양성하여 독립운동가를 탄압하였고, 일본 상인의 무역활동 등을 빙자하여 이와 함께 대규모 간첩·밀정 파견 등을 감행하고 있었다.

 

그 결과 러시아 영토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동휘, 홍범도, 최재형, 안중근 등에 대한 자료가 일본 기록에 남게 되었다.

1915년경 동시베리아 지도

사할린주의 고려인 리흥진 선생 무덤

1920년대 만주의 대도회 '하르빈',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을 사살한 동청철도의 거점이다.

블라디보스토크의 고려인들

아무르주의 고려인 마을

연해주의 고려인 마을

아무르주의 고려인 마을 인근

연해주의 고려인들

연해주의 고려인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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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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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분단극복 | 작성시간 24.01.26 어떠한 혹독한 조건이라도 적응하여 살아나가는 식민국 조선의 모습을 다시 보게되는군요 감사드리며 환절기 건강하시길,,,,,,,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1.26 옛 감사합니다 ~~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4.01.27 당시의 동아시아 정세가 한국인을 이주하게끔 했군요 때로는 부패한 탐관오리들과 양반.지주들을 피해서 때로는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1.26 예. 그렇습니다.
    요즘도 한국인들은 여러가지 이유 때문에 세계로 이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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