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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현대사

청산리 전투 참가자 이종학 수기

작성자신룡기2|작성시간24.01.26|조회수116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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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靑山里)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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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시베리아 침략 시기, 일본군의 만주 동청철도 장악 및 만주 친일군벌 장작림 군대의 공격으로 독립군들은 근거지 유지가 어렵게 된다.

 

일제가  ‘제2의 니항사건’이라고 선전하던 1920년 10월초의 간도 훈춘사건 이후 일본군이 1920년 10월 7일경 또 국경을 넘어 간도의 독립군을 공격해 오자, 독립군 부대들은 백두산 일대의 만주 산악 지대로 대피하였다.

 

이때 동원된 일본군의 병력은 조선 나남 주둔 19사단 병력과 서울용산 주둔 제20사단 병력 일부, 시베리아 침략 제14사단 일부 등 많게는 1만 5천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을 위시하여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국민회군, 신민단, 의군부, 광복단, 의민단 등의 부대가 근거지를 이동하여 1920년 10월 초순에는 화룡현(和龍縣) 이도구(二道溝), 삼도구(三道溝)의 청산리(靑山里) 일대로 모이게 되었다.

 

청산리전투는 1920년 10월 21일경부터 10월 26일경까지 백운평(白雲坪), 완루구(完樓溝), 천수평(泉水坪), 어랑촌(漁郎村) 등에서 벌어졌다. 김좌진, 홍범도, 안무 장군 등이 주도하여 일본군을 격파하였다고 한다.

 

(※ 한국과 북한을 비롯한 주변 국가들과 한국내 독립운동사를 다룬 대부분의 책에서 언급되고 있음으로 자세히 다루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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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인섭 작성 「회상기(아령과 중령에서 진행되던 조선민족해방운동)」 중 청산리전투 참가자 이종학의 수기부분을 살펴보면

 

이종학의 수기

 

하루는 행군 명령이 내리였다. 때는 1920년 5월경이였다. 우리 군대는 행군하여 노투거우를 몇 10리 두고 가로막힌 산 이쪽에 가서 휴식하라는 명령이 내리였다.

얼마 동안 휴식한 후에 다시 행군하라는 명령이 내리였다.

 

앞으로 행군할 길은 두 가지로 갈라졌다. 왼쪽으로 가면 길이 탄탄대로이고 한 2~30리 질러가니 어둡기 전에 노투거우에 당도 할 수 있고, 右(우측)쪽으로 가면 험한 산협이고 또는 밤중에야 신지에 당도하게 될 것이었다.

그런데 오른쪽 험한 길로 행군하라는 것이다.

 

대대장⦁중대장들이 번갈아 홍범도 앞에 가서 기척하고 경례를 하고 서서 왼쪽 길로 행군하자고 성화를 쳤다. 각 부대는 모두 정돈되고 행군 준비를 모두 하였다.

홍범도 장군은 왼쪽으로 가는 것이 좋다는 대대장에게 향하여 아무 설명도 없이 명령하고 답변하자 전군은 말없이 오른쪽 길에 대들었다.

 

우거진 산림, 길에 깔린 조약돌, 이따금 떠러진 낭, 요리조리 돌아치는 산꼴비탈, 사면에서 흘러내리는 샘물소리는 우리 행군을 포위하였다.

한곳을 당도하니 앞에는 절터 밭이 보이고 산허리가 널찍하고 앞에는 봉이 두루뭉실하고 사면에는 샘물이 많이 있는데 우리 앞 경리부대는 자봉침, 인씨기 기타를 말에 당나귀⦁노새에다 싣고서 두루뭉실한 봉 아래 산길을 지나서 행진하고 있었다.

 

홍범도 장군은 휴식명령을 주더니 오늘 우리 군대가 행진하는 것을 유심히 보는 놈이 있으면 모두 체포하여 오라는 명령을 내리고 자기는 단지 총 잘 놓는 포수로만 조직한 보호대(헌병대)를 거느리고 두루뭉실한 산봉(山峰)에 올라가 은신하고서 망원경으로 사면을 살피였다.

 

우리는 모두 샘물에 들어가서 세수하고 물 마시고 하는데 샘물마다 물 바가지, 심지어 밥감주까지 있었다.

모두 좋다고 쉬는데 모두 산허리에 올라서 쉬라는 명령이 전달되었다. 우리는 모두 산허리에 올랐다.

이때였다.

즐펄밭에서 「따꿍」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홍범도 장군은 앞에서 일어나는 흙은 홍범도 곁에 있는 군인의 얼굴에 뿌리우면서 정신을 혼미케 하였다.

 

홍범도 장군의 기병 총 소리가 「따꿍」 하자 아차 처지였구나 하고 흙에 쓰러져 눈을 비비는 (헌병)이 어깨에 멘 총을 꽉 잡아 당기니 총 혁대가 끊어지며 잡히는 일본식 장총소리가 따꿍 하자 왜놈이 자빠지는 것을 발견하였다. 왜놈들은 기관포 사격을 치는 대로 산봉우리에다 대고 하였다.

 

홍범도 장군은 일본 총으로 무장한 중대 최상만 2中-소隊를 자기를 따르라고 명령하고 앞을 향하였다. 소대는 뒤를 따라서 일본 놈들이 매복한 즐펄밭 오른편 산곡에 가서 은신하고서 그 바른편 산위에 있는 왜놈 부대를 향하여 몰 사격을 개시하였다.

놈들도 대응하였다. 바로 이때였다.

 

질펄밭 웅덩이에 매복하였던 왜놈들은 홍범도 장군 있는 데로 기여들며 기관총질을 하였다. 우리 군대는 일제 사격을 계속하니 마치 기관총 사격인 듯 하였다. 날은 흐리고 안개가 또 끼기 시작하였다.

 

홍범도 장군은 사격을 그치고 슬그머니 본지로 돌아왔다. 그러나 전투는 왜놈끼리 계속되었다. 얼마 후에 전투는 끝이 나고 전투하던 마당에는 사무라이의 개죽음 밖에 없었다. 왜놈들은 갈 곳이 없었다. 우리 소대장 김상만은 왼쪽 귀 뿌리에서 피가 흘렀다. 홍범도 장군은 그의 귀에 약을 발라 주고 나서 “참 내 군인들은 모두 왜놈 잘 잡는 용사들이야. 참 감사합니다. 또 승리입니다.”

 

여러 장관들은 또 다시 장군 앞에 가서 경례하고 전투하던 마당을 수색하고 전획물을 거두자고 의견을 올렸다. 장군은 거절하였다. “아니되오 또 말하오. 우리는 파르티잔이요 그리고 지대와 시기를 알아야 되오. 우리가 전투하는 어간에 왜놈들은 용정 수비대요, 천보산 수비대요 우리는 죽지 말고 독립하여야 되오. 통지하여서 이 산을 사면으로 올라 살 것이요. 그리고 우리는 지금 무기가 남아서 땅에다 장치하지 아니하였소. 그리고 우리가 이전에 전투한 장소를 수색하다가 부상한 놈들에게 우리 군인들이 상하던 일이 아니 생각나오.”

 

그러나 다시금 여러 장교들은 수색을 요구하였다. 그러니 장군은 정색하고 「명령」이요 하니 모두 잠잠하였다.

산을 넘어서 명월구(明月溝)로 행진하게 준비하라는 명령이 내렸다. 또 장교들은 노투거우 조선(예수교)촌에 가서 소와 도야지를 잡고 연회를 차린 것을 먹고 가자고 청들었다. 그러니 또 정색하고 “명령이요 행군하오.”

모두 말이 없었다. 오던 길로 돌아섰다. 그곳에서 명월거우는 산길로 170리라고도 하고 130리라고도 한다. 그 후에 알아보니 앞서가던 치중 경리부는 우리를 따라왔다.

 

그곳에서 살며 포수 노릇하던 동지들이 앞을 서서 행진한다. 밤은 캄캄한데다가 안개까지 자욱하였다. 그러나 계속하여 행진하다가 새벽녘에야 좀 산간(間)에서 휴식하였다.

 

홍범도 장군은 언제든지 그러한 때에는 쉬지 아니하고 돌아다니면서 자비로 순회하였다. 한 곳에 가니 젊은 군인 2명이 누워서 자지 아니하고 “에구 쌀쌀해서 못 견디겠다. 빨리 어느 촌에 가서 토장에다가 도투고기를 넣고 북실북실 끓이고 조밥을 한 그릇 먹었으면 좋겠다.” 장군은 못들은 것처럼 가만히 다른 곳으로 갔다.

 

조금 있다 행군하여 그 산 밑 조선촌에 들어갔다. 금방 들어서자 그 촌 주민들은 우리를 뜨겁게 환영하였다.

장군은 지방 주민들을 청해 놓고서 자비로 돈을 내여 놓으면서 이 돈으로 도야지를 몇 놈 잡고 조밥을 하고 토장에다가 도야지 고기를 내고서 부실부실 끓여서 군인들을 먹이라고 명령하였다. 보통 어느촌에 가면 지방 주민들이 집집이서 각 집에서 자기네 소원대로 음식을 하여 주어서 먹던 것이 그 날 아침은 일제하게도 토장에 도투고기를 부실부실 끓이고 조밥이였다.

 

벌써 오래전부터 홍(홍범도) 장군과 같이 파르티잔에 다니던 사람들은 조밥을 먹으면서 “또 어느 청년이 장군이 못 듣는가 하고 토장에 도투고기를 끓이고 조밥을 먹고 싶다.”고 한 모양이라고 하였다.

홍범도 장군 듣기에는 군인들이 무엇을 먹겠다고 하나 가지고 싶다고 하지 아니하였다. 만일 그런 말만 하면 꼭 소원 성취를 시켜주는 까닭이었다. 그리고 그를 누구든지 엄하다고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너무 친절한데서 감복하여 무조건 복종하였다.

 

그리고 우리 장군은 하루 앞일을 내다본다고 모두 숭배하였다.

 

명월구에 도착

촌중에 들어서니 그 촌이 예수교 촌이었다. 일반 주민들이 모두 나와 환영하는데 여학생들이 대열을 지여서 우리 행진하는 좌우에 서서 “언제나 언제나 두만강 건너가 만나리” 하고 우리를 환영하였다.

 

우리는 천지가 진동하게 독립만세를 불렀다.

주민들도 독립만세, 학생들도 독립만세, 군인들도 독립만세, 독립만세 천지였다.

 

태극기는 펄펄 날리었고, 양고라파에 발을 맞춰 행진하는 각 부대는 배가 고프고 곤한 태도가 없었다.

점심을 먹고 퍽 쉬여서 그 이튿날에는 각 근방 지방의 주민들이 모두 와서 大연을 배설하고 여러 가지 체조를 각 부대에서 거행하였다.

 

2~3일 간 명월거우에서 유하다가 행군 준비하라는 명령이 내렸다. 지방주민들은 가지 말고 그곳에서 유하면서 쉬라고 만류하였다.

우리는 떠나서 8월에 왈니거우에 당도하였다. 그곳에서 김좌진 군대가 합하자고 왔다가 아니 합하고 다른 곳으로 가 버렸다.

 

그 후 장군은 청산리로 가자고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행진하다가 「샘물꾸팡」에서 전투가 터졌다는 급보를 들었다. 대포소리와 기관총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무슨 싸움인 것은 알 수 없었다. 급히 정찰병을 보내고 우리는 전투를 준비하고 휴식하였다.

 

홍범도 장군은 이제는 속히 독립하겠다고 하면서 반기였다. 총소리를 들으니 필경 왜놈들과 중국 관병들과 싸우는 모양이니 우리는 중국 군대와 합하여서 전쟁을 하여 승리하면 빨리 독립한다고 말하니 군인들도 활기를 펴고 기다리었다. 이윽고 왜놈과 전투하는데서 한복판에 들었던 군정서 군대가 전투에서 요행 빠져서 찾아왔다. 이것은 4중대였다. 그리하여 그 중대는 우리와 합하였다. 우리는 퇴진하였다.

 

왈리거우 산중에 들어서니 눈비가 퍼붓는다. 의복이 또 흠뻑 젖었다. 모두 춥다고 하니 이천호 중대장이 말하기를 비가 아무리 와도 뼈는 아니 젖으니 관계치 아니하라고 하여서 모두 웃었다.

일군이 청산리는 퇴진하였으니 주의하라는 명령이 내리었다.

 

 

우대영창 전투

9월 14일 달밤이었다. (※아마 음력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물을 건너고, 산을 넘고 넘어서 대목이 무성하고 청암절벽이 하늘에 걸린 산간 바위산 가운데 들었다. 마른 나무를 어디서 사방에다 우둥불을 질러 놓고서 젖은 의복들을 말리었다.

가지고 오던 감자를 구어서 대강 요기를 하였다. 우둥불 자리에서 하루 종일 얼던 몸이 훈훈하니 잠들이 들었다. 그날 밤 당번은 조한명이였다.

 

깊은 산꼴이라고 마음 놓고서 당번도 잠이 들었다. 나도 잠들었다.

잠결에 「따꿍」 하는 소리가 적막한 산간을 요란하게 굴었다.

 

나는 놀래 깨였다. 우리들도 누구인가 총을 놓았다. 일전 사격을 그치라는 장군의 명령이 내리자 기관총 소리가 요란하고 우둥불자리에 우뚜둑 우뚜둑하고 귀밑이 씽씽 하고 지나가는 탄환에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이윽고 적군들 있는 후방에서 일제 사격소리가 들리었다.

왜놈들은 그곳을 향하여 사격하노라고 발광을 하였다.

 

이것을 장군께서 빨리 자기 보호(헌병대)를 거느리고 적군을 그곳으로 유인하고 산간에 있는 군인들을 구원하려는 전술이였다. 왜놈들은 그곳을 향하여 기관총 사격을 하느라고 정신을 잃었다. 이때에 산골 강물에 감태가 낀 돌을 디디고 건너다가 절칵절칵 하고 넘어져서 물 병아리 되는 군인들은 부지기수였다.

 

큰 부대가 장군을 따라서 떠나 안도현을 경유하여 장군은 아령(俄領, 러시아령)으로 들어갔다.

 

이 전투에서 우리 군인 6명이 죽었다.

나는 산봉우리로 올라서 날을 밝히고 나니 본진을 잃었다. 그 근방에서 나 같은 2~3십명이 모여서 내가 영솔하고 안도현으로 향하였다.

 

6명이 죽은 시체는 6일후에 그 근방 주민들이 가서 묻었는데 쥐란 놈들이 귀를 뜯어 먹었다고 한다.

......이종학의 수기 하략......

이상은 리인섭 작성 「회상기(아령과 중령에서 진행되던 조선민족해방운동)」 중 이종학의 수기부분 인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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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전투 참가 이종학 선생 회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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