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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현대사

니항사건 순난자비 란 무엇인가 ?

작성자신룡기2|작성시간24.02.09|조회수191 목록 댓글 3

니항사건 순난자비 란 무엇인가 ?

니항사건 순난자 비 라는 것은 오늘날 일본 본토에 여러개 세워져 있는, 1920년 3월 12일 러시아 아무르강 하류 니항(니콜라예프스크)에서 발생한 니항사건에서 반자이 기습공격을 감행했다가 패퇴하여 집단 자살하거나 사망한 일본인 약 680여명의 명단이 적혀 있는 비석이다.​

니항사건 순난자비 뭘까요 ?

니항사건은 2차 세계대전 이전 일본의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사건중 하나로 조작되면서 일제에 의해서 대대적으로 선전되었다.

물론 친일 조선인중에도 맞다고 북치는 자들이 수두룩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며 당시 시베리아에만 친일 조선인 단체 가담자가 최소 수천여명 이상이었다.

그렇지만 일제의 러시아 적백내전을 틈탄 시베리아 만주침략 시기 가라유키상 위안부로 강제동원되거나 사할린섬 일대의 노예 노동자로 동원된 사람이 친일단체 가입자라 할지라도 친일파로 볼 수 없다.

러시아측에서는

니항사건 당시 시베리아를 침략한 일본군 1개대대 병력과 일본인 자경단원, 가라유키상 여성과 밀정, 일본인 본처 등 대략 900여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일본에서는 사망자 명단이 부실해 750여명 정도 사망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 비석은 그 무렵 니항 일본인 거류민회 회장으로 일본인들의 사할린주 진출을 이끌었던 시마다 모토타로가 주도해 건립하였으며,

시마다 모토타로는 니항사건 이후 일본에 생환해서 자살을 강요받고, 냉대 받던 생존자들을 대신해 보상소송과 구제에 나서는 바람에 생환자들 사이에서는 '생명의 은인'으로 불려지기도 합니다.

시마다 모토타로는 위안소 혹은 성매매업을 전문으로 하던 자로 일제의 1918년 시베리아 침략 당시, 조선인 밀정 '배정자'를 능가하는 활약을 한 사람이었으며, 니항사건에서 죽지 않고, 조선 평안도와 평양으로 이주하여 역시 위안소 혹은 성매매 업소도 운영하였고 조선인 노예노동자와 위안부를 동원하기도 한 사람이다.

독립유공자 박병길, 이지택, 김낙현 등과도 한 때 사할린주에서 일본인을 위해 일했으며, 니항에서 일제 해군과 참모부의 지원으로 최대 규모의 무역회사를 운영하였다.

일뽕의 기망

그러나,

오늘날 일본의 몰지각한 사람은 1920년 니항사건이 일본 시베리아 침략군과 일본인 거류민 자경단원, 가라유키상 밀정, 러시아 백파 잔존 병력의 반자이 기습공격으로 발생하였고,​

파르티잔 부대와 혁명세력의 반격에 3일만에 패퇴하자, 일본인 부녀자들까지 광기어린 집단 자살을 해놓고서는

혁명세력이 '인류 역사에 없었던 폼페이 대학살극'을 저질렀다고 조작하기도 합니다.

당시 일본은 조선 경성에도 초혼제장을 만들어 놓고 전국적으로 친일 조선인들을 동원해 대대적으로 니항사건을 선전하였고, 오늘날에도 일제의 선전이 맞다고 북치고, 짜깁고, 복사 붙여넣기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금이라도

철저한 진상 조사를 해서, 한국 독립군이 단 한명의 무고한 민간인을 학살했다면 사죄와 보상을 해야 겠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러시아 니항 거주 주민중 조상이나 이웃 주민의 조상중에 한국 독립군이나 파르티잔에 의해 죽었다는 사람은 전혀 없습니다. 물론 조상이 일본군에게 집단 학살되었거나 살해되었다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일뽕 학자들의 왜곡 조작된 자료는 철저히 걸러서 들어야 겠습니다.

일본과 친일파의 주장을 살펴보면

니항사건에 대한 일본측 주장

◆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몰살을 당했어요. 계획적이었지요. 얼음이 얼면 교통이 막혀서 쳐들어갈 수도 없는 시기를 잡아서, 러시아 적위군의 두목이 조선놈이었으니까, 조선놈의 두목이 바로 그 박엘리야였으니까.

◆ 혁명정권은 백위파군 장교와 자본가들을 체포 처형했는데, 처음 며칠 동안에 체포된 자가 400명 이상이었다.

◆ 아무르강의 통행을 가로막고 있던 얼음이 풀리기 시작하는 1920년 5월말 일본 원정군이 니항 입성이 임박하자, 5월 24일부터 5월 25일 사이 러시아 빨치산 부대는 니콜라옙스크항을 철수하면서 136명의 일본인 죄수들과 약 4,000명의 러시아인 어른 어린이들을 학살했고 , 5월 30일 도시를 완전히 불태웠다.

◆ 니콜라옙스크항에 입성한 후 일본은 7월 3일 북위 51도 이북 사할린을 점령하고 ‘니항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철수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 1920년 4월 4일부터 5일 밤에 일본군에 의해 연해주 각지에서 러시아 혁명 세력과 한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과 공격이 단행되었는데, 이는 니항사건에 대한 일본군의 보복적 만행이었다.

◆ 학살 당시 사망한 사람들의 수는 공식적으로 약 6,000명으로 추산되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은 1만여명 이상의 사람들이 학살되었다.

◆ (버스 만한) 감옥에 한꺼번에 1,500여명을 수감하여, 3일동안에만 3천명 이상을 학살했다.

◆ 영하 30도라는 혹한의 기온에, 한 조각의 천조차 주지 않고, 빨가벗겨 철사로 손을 뒤로해 묶어, 엉망으로 찔러 죽이고, 도려내고, 참살했다.

◆ 손가락을 하나씩 잘라내고, 팔을 자르고, 안구를 뽑아내고, 코를 부수고, 목을 자르고, 다리를 자르고, 보는 것도 무참한 나체의 시체가 있었다.

◆ 남녀를 달리게 하고, 갑자기 무릎 아래를 도끼로 자르고, 빨가 벗기고, 단말마의 고통에도 사로잡은 인간을 불에 던진다

◆ 가랑이를 찢어 죽이겠다며, 두 마리의 말에 한 발씩 묶고, 힘차게 달리게 함으로써 몸을 두동강냈다.

◆ 몇 명이 누르고 산채로 머리 껍데기와 다리 피부를 벗긴다.

◆ 양눈깔을 도려내 나무 가지에 꽂는다.

◆ 집단으로 능욕하고 국부를 찢어 촛불을 세운다.

◆ 남녀의 목을 잘라내고, 남자의 목을 여자의 목에, 여자의 목을 남자의 목에 연결한다.

◆ 아무르강의 얼음 위에 산채로 빨가벗겨 자게 해 동사시킨다.

◆ 남자의 입을 강제로 벌리고, 피가 떨어지는 인육을 먹게 한다.

◆ 여자를 강간한 후, 술에 취하게 한 후 벌거벗은 채 춤을 추게 하고, 그 후 항문을 칼로 찔러 네 발로 기어가게 하며 학살하였다.

◆ 참살한 사망자의 손가락을 자르고 반지를 도둑질하고, 치아를 부수고 금이빨을 빼앗았다. 또 임산부의 배를 째고 태아를 꺼냈다.

◆ 니항의 여자들은 모두 강간후 학살하였다. 어린이도 한명 남김 없이 무참히 죽였다.

위의 내용은 일일이 반박하기도 힘든 황당무개한 내용으로

소설가 박경리 선생, 반공학자 김창순 선생 등에 의해 역사적 사실로 인정되어 독립기념관 공식 도서, 각종 백과사전 등에도 기록되어 있으나

여자가 모두 죽으면 번식을 할 수 없고, 어린이를 모두 죽이면 후손이 남을 수 없고, 포유류도 20명 이상 가족을 이뤄 사는 경우가 역사적으로 거의 없다는 사실조차 망각하고,

현란한 글솜씨로 한명도 안죽인 사람을 인류 역사에 없었던 희대의 살인마로 몰아 붙이기 위한 상술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믿으라고 하는 소리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 하 하

1918년 9월경 니항을 점령하고 행군하는 일본해군 육전대와 마차를 탄 일본해군 장교

일본인 여성과 조선인 여성들을 동원해 가라유키상 성매매 위안소를 운영했던 시마다 모토타로의 상회 인근으로 보여진다.

1919년경 니항에서 화폐까지 발행했던 니항 일본인 거류민회 회장 시마다 모토타로가 경영했던

시마다 상회와 일본군의 니항점령 이후 건립된 일본군 병영 건물

일본군의 반자이 기습공격 실패후 집단자살로 불타버린 니항 일본영사관

1920년 니항사건 당시 이시다 토라마츠 영사대리 부영사는 처자식을 먼저 죽이고 방화하였고 영사관에 머무르던 일본 거류민 상당수도 광기어린 집단자살을 감행했다고 한다.

니항의 일본인 거류민중 집단 자살에 동참하지 않은 사람들은 일본에 생환해서도 자살을 강요받고 사회에서 냉대 받았다고 한다.

사할린 섬 및 사할린주 일대의 일본인들. 남성의 상당수가 군사훈련을 받은 의용 자경단원 등이었다.

러일전쟁이후 북위 50도 이하 일본땅이 된 사할린섬 남부의 일본인

1920년 니항사건 무렵 사할린주 일대

1920년 니항사건 당시 파괴된 도심. 수백여명을 수용할만한 건물도 없었고

1500여명 이상을 수용할만한 감옥이 존재하지 않았다.

노예 노동자를 동원해 건설한 일본군 병영건물이 가장 큰 건물이었다.

사할린섬 일대의 일본인. 일본인 남성의 상당수는 자경단원 등으로 군사교육을 받은 자들이다.

또 무역을 빙자하여 밀정활동을 하며 일제의 시베리아, 만주, 조선 침략에 동참하였다.

사할린 섬 일대의 일본인 여성 가라유키상 추정 사진.

가라유키상 여성 상당수는 군사훈련을 받고 일제의 시베리아 침략에 동참하였다.

일제의 시베리아 만주 침략시기 연해주의 일본인 여성 가라유키상과 러시아 여성 추정 사진

연해주의 일본인 여성 가라유키상 추정 사진

러시아인 나치 동조자.

1920년대 독일과 중국 상해가 러시아계 파시스트들의 거점중 하나였다.

만주국의 러시아 이민국 설립 기념 연회. 1934년 12월 북만주 하르빈.

러시아계 파시스트당 당수와 백파계 러시아인들이 보인다. 나치 독일의 표식도 보인다.... 러시아 파시스트의 일부는 독일 나치당의 이념을 공유하였다.

Destruction of Nikolaevsk on Amur: An Episode in the Russian Civil War in the Far East, 1920 (Russia and Asia, No 2) Hardcover – 1 Mar. 1993

친일파 굿맨 (이명 : 아나톨리 야코블레비치 구트만)의 니항사건 관련 도서

니항에서도 조선인 여성을 동원해 위안소나 성매매 업소를 운영했던 니항 일본인 거류민회 회장 시마다의 기록물들

친일 조선인, 황족, 일본 수상, 일본군 장성, 정치인 등이 대대적으로 동원되어 국가적으로 선전된 니항사건,

1920. 3. 12. 감행한 반자이 야습 실패와 광기어린 집단자살도 모두 미화하였고 오늘날 러시아에도 이를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간혹 있다. 그러나 러시아 일본보다 한국에 더 많을 수 있습니다.

일본에 여러개 세워져 있는 니항사건 일본인 순난자 비

일본에 여러개 세워져 있는 니항사건 순난자 비

오늘날 일본에 남아 있는 니항사건 순난자비

니항사건 순난자 비에 적힌 명단은 대략 680여명이다.

니항사건 일본인 사망자 명단

니항사건 순난자 비에 적힌 명단중 니항에서 가라유키상 성매매를 하던 일본인 여성들의 명단도 있다.

1920. 3. 12. 니항사건 발생 당시 니항에는 일본인 여성과 조선인 여성 가라유키상 약 90여명 이상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 일본에 있는 니항사건 순난자 비들 중 하나

최소 높이 15미터가 넘는 일제의 거대 니항충혼탑

1920년 4월경부터 시작된 일제의 니항 재공격 작전. 일본 민간인과 포로구출이 목표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1920년 4월 일제의 북사할린섬 공격과 연해주 4월 학살 이후에서야, 니항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일본군 포로가 처형되었다. 국경인 북위 50도를 넘어 공격했으면 명백히 공격을 한 것이다.

일제가 1920년 7월에서야 니항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사할린 섬 북부를 공격했다는 주장은 친일파시스트들이나 하는 허위 주장이다. 오늘날 러시아, 일본 등지에서 이렇게 까지 조작을 하는 자들은 거의 없다.

1918년경 니콜라예스크의 일본인 수 추정 자료는 세르게이 치마피예프 의 자료에서 참고함.

Сергей Тимофеев, Санкт-Петербург. («Нижнеамурская голгофа. Поиски истины» )

1918년경 니콜라예프스크 항구의 여성 가라유키상 은 최소 90명 이상이었으며

1920년 니항사건 무렵에는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상당수가 조선인 여성 가라유키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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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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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4.02.09 일제가니항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사할린 섬 북부를 공격했다는 주장은 친일파시스트들이나 하는 허위 주장이군요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2.09 예. 날짜까지 조작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
  • 답댓글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4.02.10 신룡기2 네 신룡기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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