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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현대사

1921년 자유시 참변 당시 볼셰비키측 최고 지도기관 명칭은 동양비서부 ? 원동비서부 ? 극동비서부 ?

작성자신룡기2|작성시간24.02.09|조회수63 목록 댓글 2

1921년 자유시 참변의 볼셰비키측 최고 지도기관 명칭은 코민테른(제3 국제공산당)의 동양비서부인데......

자유시참변과 관련되어 언론에 보도되는 명칭이 동양비서부, 원동비서부, 극동비서부 3개를 주로 쓰고 있어서 혼란이 좀 옵니다.

그러나 여러가지 자료를 볼 때 '동양비서부'가 더 적합한 명칭 같습니다.

아시아 공산혁명을 인도할 동양비서부의 설립

1921. 1월경 코민테른(제3국제공산당)에서 이르쿠츠크에 아시아의 공산혁명을 인도하기 위해 동양비서부를 설립하고 고려인 부대의 지도 권한을 코민테른 본부 등에서 동양비서부로 이관함(동양비서부는 1920년 9월경에 설치되었다는 소리도 있다). 극동공화국(혹은 「원동공화국」이라고도 한다)내에 있었던 한인부가 해체되고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원동비서부라는 명칭보다는 동양비서부가 적합한 명칭임)로 고려인 부대 지도권한이 이전되기 시작됨. (한인부는 해체 이후에도 일부 인물들이 수개월간 유지됨)

 

러시아령 독립군 부대 지휘권의 동양비서부 이관과 이르쿠츠크파의 군권장악

한국 독립운동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레닌 등이 1919년경 코민테른을 설립하였고, 이 무렵 코민테른 내부에 서양비서부에 맞먹는 아시아 혁명을 인도할 동양비서부를 설립하여 아시아 혁명과 한국 독립운동에 관심을 기울이자, 러시아 공산당 중앙·혹은 달뷰라·극동공화국·극동공화국 군부가 한 때 가졌던 러시아 영내 한국 독립군 지휘권은 사실상 동양비서부로 넘어간 상황이었다.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시작. 양파의 대립

......독립운동가 김홍일의 주장에 따르면......

그러니 이들 상해파에 대립되는 이르쿠츠크파 공산주의자들이 가만히 있을 턱이 없었다. 사실 그들 이르쿠츠크파는 상해파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1918년 정월(1월)경에 이르쿠츠크 지방에 살고 있던 한인 2세들인 김철훈, 남만춘 그리고 오하묵 등이 모여 따로 공산당 조직을 만들었다.

 

그들은 1919년 9월 5일경 이르쿠츠크 일대의 소련 공산당 지부내에서 (이르쿠츠크에서) 김철훈, 한안드레이, 최고려, 오하묵, 박이노겐치 등이 모여 전로한인공산당을 조직하였으니, 이것이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시작이다.

 

(김홍일의 주장에 따르면) 이들 가운덴 제정 러시아 사관학교 출신인 오하묵이란 자가 있었다. 그는 1920년의 시묘노프 잔당 토멸 당시에 이미 파르티잔을 조직하여 적군과 연합 공격한 바가 있었으며, 그 후에도 계속 천여명의 부대를 이끌고 적군을 도와준 탓으로 소련 공산당 지부에서는 그를 신임하고 있었다. ​

 

그리하여 그들은 당지부(코민테른 동양비서부)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차차 당세를 넓히는 한편 본국과 중국 각지에도 사람을 보내어 집요하게 자파조직을 꾀하는 등 대단한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 때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얼마우재」라고 불렀다. (마우재란 러시아 사람을 가리키는 뜻이며 얼은 그들이 이세(二世)이기 때문에 붙여준 중국식 말임)

 

그들은 이르쿠츠크 당지부와의 긴밀한 유대를 기회로 치타 정부의 혼란을 이용하면서 당무관계로 코민테른 원동서기국(혹은 「동양비서부」라고도 한다) 책임자인 슈먀츠키(Шумяцкий)가 원동공화국(혹은 극동공화국)의 서울격인 치타로 가는 것을 중도에 맞아 그를 이르쿠츠크에 주재케 하는데 성공했다.

 

​이리하여 원동공화국의 서울인 치타에 설치할 예정이던 소위 코민테른 원동서기부는 결국 이르쿠츠크파의 뜻대로 그들의 권내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 코민테른 원동서기부(Дальневосточного секретариата Коминтерна в Иркутске)를 「동양비서부」라고도 합니다. 이 무렵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지도기관이었던 코민테른 내부에 약 1년간 존속했던 부서인 동양비서부가 관할한 지역이 극동 지역을 넘어섰기에 「동양비서부」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달뷰라(다른 이름 : 달비라)」를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혹은 「극동공화국」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슈먀츠키는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장에다가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극동국(달뷰라, 혹은 달이비로.Дальбюро ЦК РКП(б))의 구성원을 겸임하였기에 헷갈린 것으로 보입니다.)​

 

그후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간의 주도권 쟁탈전이 벌어졌다.

(김홍일, 리인섭 등이 주장하기를) 상해파는 이르쿠츠크파를 “공산주의 운동의 정통을 무시한 반당적인 무리들, 이르쿠츠크파의 일원을 과거 백파에 있었던 자, 친일 매국노라고 소문나서 이르쿠츠크로 도망온 자들”이라고 비난하면서 모스크바 중앙정부에 대하여 그들의 활동을 저지시켜달라고 호소하는가 하면, ​

 

이르쿠츠크파에서는 상해파를 가리켜 “민족 자본주의적인 기회주의 공산주의자들”이라고 공박하며 코민테른 동양비서부(혹은 Дальневосточного секретариата Коминтерна в Иркутске, 「원동비서부」라고도 한다)와의 유대강화에 힘을 기울였다.

 

이와 같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양파 간의 추잡한 세력 다툼을 옆에서 지켜본 코민테른 동양비서부(혹은 공산당 중앙위원회 극동국(Дальбюро ЦК РКП(б))의 당국자들은 화해를 유도하는 자, 한쪽 편만을 드는 자 등등 다양하게 갈라져 있었다.

 

동양비서부(혹은 공산당 중앙위원회 극동국)의 당국자들은 곧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대표들을 각각 초치하여 극동혁명에 있어서의 한인들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조속히 양파 간 조직을 일원화할 것을 종용했다.

 

그 때 그 대책의 일환으로 동양비서부(혹은 공산당 중앙위원회 극동국)의 당국자들이 내놓은 안이 바로 1921년에 고려공산당 대회를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결정이 있자 각자 당세확장을 위한 양파의 싸움은 더욱 가열되어 중상모략이 증가하였다. 양파는 총회에서 제각기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각 지방의 대표자 인선에 이르기까지 대립을 빚었다.

......김홍일 장군의 주장 중략함......

1921년 12월 18일경(혹은 12월 20일경) 동양비서부장 슈먀츠키의 형식적인 퇴진과 동양비서부 폐지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장 슈먀츠키와 바이친스키가 한국 독립운동 분야에서 형식적인 퇴진을 발표한다.

 

바이친스키는 한국 공산주의 운동과 관련된 분야에서 이 때 당시에는 물러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된다.

슈먀츠키는 1922년 1월경부터 1925년 1월경까지 페르시아(이란) 주재 전권대사 및 무역대표를 하다가. 1926년 말부터 2년가량 공산주의 동방 노동자 대학 총장을 지냈다.

그 이후에는 한국 독립운동과는 별 관련이 없다.

 

그리고 슈먀츠키가 수장이었던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역시 다른 부서로 대체되며 폐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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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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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4.02.09 바이친스키가 1926년 말부터 2년가량 공산주의 동방 노동자 대학 총장을 지냈고 그 이후에는 한국 독립운동과는 별 관련이 없군요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2.09 슈먀츠키가 동방 노동자 대학 총장을 지냈고... 나중에는 소련 영화 산업 관련일을 했습니다. 이 무렵 공산당, 나치, 자본가 등은 선전선동을 위해 영화를 중요시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바이친스키는 그 뒤 코민테른에서 한국 일본 중국 인도 등지의 공산주의 운동에 관여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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