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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현대사

동청철도 호로군(護路軍)의 시작 (1)

작성자신룡기2|작성시간24.10.09|조회수156 목록 댓글 4

동청철도 호로군(護路軍)의 시작 (1)

청나라와 제정 러시아 사이의 비밀 조약(일명 1896년 모스크바 조약 = 일본에 대항하는 청나라와 제정 러시아간의 비밀조약)에 따라 제정 러시아는 만주에서 철도를 건설하는 특권을 가지게 되었다.

중동철도(=동청철도=중동로=만주횡단 철도=Китайско-Восточная железная дорога : КВЖД) 조사 프로젝트와 철로 건설 프로젝트가 시작될 때, 제정 러시아는 철로 건설 인력을 보호한다는 핑계를 댔다.

만주 동청철도 = 중동철도 = 중동로 위치

1903년경 만주 철도 상황

 

1897년 5월경 제정 러시아 동청철도 회사는 동청철도 경비대(일명 ‘호로군’:도로 혹은 철로를 경비하는 부대)를 설립하였다.

8월경에는 게른그로스스(Александр Алексеевич Гернгросс : 1851~1925, 의화단봉기 진압 및 러일전쟁 등 참전) 대령이 중동철도 경비대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마치 자기 나라인양 북만주 하르빈에 사령부를 설치하였다. (※ 만주 하르빈은 제정 러시아가 건설한 도시이다. 당시 중국령이었으나 모든 실권은 제정 러시아가 자기땅인양 행사)

 

12월에는 제정 러시아 철로 경비대가 블라디보스토크 등에서 만주로 진입해 철로를 따라 곳곳에 주둔했다.

철로 경비대는 1900년까지 2,000명 이상의 보병과 2,500명 이상의 코사크 기병으로 늘어났다.

 

의화단 봉기 동안 철로 경비병의 수는 11,000명 이상으로 증가했다.

하이라얼(호륜패이=후른베이에르=후룬빼이), 하르빈(하루삔=하얼빈), 애혼(아이훈=흑하=아이훈조약 체결지), 치치하얼(제제합이), 부여(扶余 : 충청도 부여와 동일 명칭), 길림, 요양, 봉천(심양), 철령, 금주 등 주요 도시와 교통로를 잇달아 점령했으며, 동시에 해상 운송, 탄광 점유, 산림 자원도 통제했다.

 

 

제정 러시아 동청철도 경비대의 만행

이 기간 제정 러시아 동청철도 경비대는 대략 25,000여명의 4개 여단 규모에 이르게 된다.

철로 경비대는 중국땅임에도 영향권 내에서 민사, 사법, 수비대 및 기타 권한을 행사하였다.

 

동청철도(중동철도)의 주요 역, 구간, 공장은 삼엄한 경비를 받게 된다.

1901년 러시아는 중동철도 수비대를 자아무르스키(Заамурский округ) 국경수비군으로 재편성해 특별 국경수비대에 편입시켰다.

 

사령부는 하르빈에 설치되었고 제정 러시아 재무부의 지휘를 받았다.

하르빈과 중동철도, 아무르강 일대에서 러시아군은 의화단 토벌, 마적 토벌을 내세워 중국인들의 재산을 강탈하고, 여성을 강간하고, 무고한 주민들에게 총격을 가하고, 집과 마을을 불태우고, 철로를 따라 거주하고 있던 주민들에게 큰 고통과 재앙을 주기도 했다.

 

 

중국인들의 만주 진출 본격화에 기여

1901년 동청철도는 임시 개통되었고 1903년 공식 개통했으며 요동반도 여순에서 출발하는 남만주 철도, 북경 방향 철로와도 연결되었다.

또 러시아 시베리아 횡단 철도와도 연결되면서 중국인, 조선인들의 연해주, 시베리아 진출이 쉬워지게 된다.

중국인들의 만주 진출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한가지 계기가 되었고, 제국주의 국가간 만주를 둘러싼 이권 다툼 역시 심화되었다.

 

1904년 러시아와 일본 전쟁이 시작될 무렵, 동청철도 경비대는 제정 러시아 만주군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직원과 전통은 동일하게 유지되었다.

광대한 동청철도(자바이칼 지방-하르빈-블라디보스토크)와 만주철로(일명 남만주철도)의 남부 지점(하르빈-여순 구간)에는 4개의 제정 러시아군 수비 여단이 있었으며 총 24,000명의 보병과 기병, 26문의 대포가 배치되었고, 킬로미터 당 평균 11명의 병력이 배치되었다.

 

1904~1905년 러일 전쟁 동안 이 부대는 동청철도를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것 외에도 일본군을 공격하기도 했다.

그들은 128건의 철도 파괴 행위를 막았고 200건 이상의 군사 충돌을 견뎌낸다.

동청철도 출입금지 구역을 약탈하는 훙호즈(마적=만주하면 ‘마적’이 설치던 시대)와 거의 매일 전투가 있었다.

제정 러시아가 주장하기를 러시아 수비대원 수백여명이 사망하고 682명이 부상을 입었다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가 장악한 만주 동청철도 상황

러일전쟁 이후 동청철도 길이 단축으로 인해 철로의 보호를 줄일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포츠머스 조약에 의해 철도 직원을 포함해 철도 1km당 최대 15명의 경비원을 배치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1907년 10월 14일경 자아무르 지역은 새로운 지구로 재편되었으며 54개 중대, 4,200여명, 4개 포대 및 25개 교육 팀이 편성되었다. 이 부대는 3개 여단으로 구성된 12개 분견대로 조직되고, 수비대에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1908년 8월 14일에 485개의 병상을 갖춘 자무르 지역 병원이 설립되었다.

 

각종 이권을 둘러싸고 일본과의 교섭이 계속되던 1909년 동청철도의 중심지 하르빈 역에서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사살하는 일이 발생한다.

그뒤에도 동청철도 경비대는 여러차례 개편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과 일본-중국-제정 러시아의 연합

1915년경, 국경수비대는 동청철도를 유지한다는 조건하에 제1차 세계대전의 최전선에 투입되었다. 처음에는 대략 3개 대대 병력과 600여명의 기병들이 동청철도 경비를 위해 남았다.

러시아 서부 전선의 전황이 악화되자 철도경비대 뿐만이 아니라 시베리아 거주 러시아인들에 대한 동원령 외에도 연해주 거주 고려인, 중국인 노동자도 동원되었고, 제정 러시아의 무기부족·식량난·인력난 등으로 중국과 만주는 때아닌 경제호황까지 발생하였다.

 

동청철도 경비대는 대부분 전투력이 떨어지는 러시아 민병대로 대체되게 된다.

심지어 소총과 총알까지 부족했다고 한다.

 

 

1917년 공산혁명 발생과 러시아 적백내전

1917년 러시아 공산혁명이 발생하였다.

동청철도 역시 러시아 혁명에 휩쓸렸고, 러시아인 노동자와 군인 대표들은 동청철도를 장악하려고 하였으나, 하르바트 등의 러시아 백파가 간섭한다.

러시아 백파의 요청을 받은 만주 군벌 군대가 1917년 12월경 하르빈에 입성하여 혁명세력을 내쫓았다. 물론 독일과 평화를 교섭하던 혁명세력을 타도하려는 일본·미국·영국·중화민국의 묵인이 당연히 있었다.

 

1918년 전직 동청철도 국장 하르바트(호르바트 : Д. Л. Хорват)는 동청철도(중동철도) 수비대를 멋대로 창설하고 스스로 총사령관이 되었다.

역시 일본과 만주 친일군벌, 미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 등 제1차 세계대전 연합국들의 묵인이 있었다.

 

결국에는 만주 동청철도 일대를 일제 시베리아 침략군과 친일 백파(시묘노프, 구트만, 메르쿨로프, 라비치, 에치, 예밀야노프 등)가 장악하자 미국, 영국, 중화민국의 반발은 엄청났다.

1919년에는 중동철도에 대한 국제감시가 시작되었다.

중국에서는 심지어 5·4운동까지 발생하였다.

 

미국·영국·중국은 대놓고 일제의 만주 동청철도 장악과 북사할린섬 점령을 비난하였고, 1차 대전 종전 이후에는 석유금수 등의 노골적인 경제 제재까지 주장한다.

1920년 6월에는 식민지 조선에서도 일제의 만주 동청철도 장악과 러시아령 사할린주 일대의 괴뢰국가 건국계획, 북사할린 섬 점령을 비난하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중국군의 동청철도 진입과 ‘호로군’ 명칭 사용의 본격화

1920년 3월경에는 중동철도 거점 하르빈에 중국군이 주둔하기 시작했다.

중국인 철도 경비대의 주력은 하르빈과 하이라얼(호륜패이)에 주둔하게 된다.

한국에서 흔히 ‘호로군’이라고 부르던 부대는 이 중국군 철도경비대를 가르키는 말이다.

 

러시아측의 동청철도 경비 부대는 이 때부터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게 된다. 물론 러시아에서 쫓겨난 백파 군대 일부가 중국 군벌군에 편입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다.

 

(※김좌진 장군과 호로군 등은 다음편에서 계속됩니다.)

 

출처 : https://baike.baidu.com/item/%E4%B8%AD%E4%B8%9C%E9%93%81%E8%B7%AF%E6%8A%A4%E8%B7%AF%E5%86%9B/53322108

조선일보 1920. 3. 5. 자 보도 <대정8년 조선무역 개황>

동아일보 1920. 4. 3. 자 보도 <노 수비대 사용>

동아일보 1920. 6. 22. 자 보도 <동청선 철병요구>

동아일보 1920. 6. 25. 자 보도 <니항사건 수령 체포>

조선일보 1920. 8. 15. 자 보도 <동철 독판 호로 총사령 사임>

조선일보 1923. 4. 28. 자 보도 <피난민의 귀국을 권유. 노농정부에서 중국관헌과 협력>

동아일보 1925. 4. 27. 자 보도 <미국의 해군 대연습>

1902년형 동청철도 객차
동청철도회사 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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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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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4.10.09 동청철도 호로군의 설립부터 중국인의 만주 진출, 러일전쟁, 1차 세계대전, 공산혁명과 러시아 적백내전, 중국군의 동청철도 진입과 호로군 명칭 사용의 본격화까지 동북아시아의 역사가 숨가쁘게 돌아가는군요 잘 보고 갑니다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10.09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작성자나아가는자 | 작성시간 24.10.10 잘 읽었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10.10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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