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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E: Academy

[전술]기마민족의 스웜전술

작성자yacha94|작성시간08.02.24|조회수1,250 목록 댓글 4

아프리카에서 가끔 다쓰모드 방송하는 bj 낭아 입니다

디팬스 코리아에 재미있는 글이있어서 가져왔습니다.

 

고대 스웜 전술: 궁기병(Horse Archer)

케이스: 알렉산더의 중앙아시아 작전



스웜(Swarm)

의 사전적 의미


;벌떼, 개미떼, 떼를짓다. 모여들다.



스웜전술(Swarm Tactics)

의 정의


; 특정지역에 있는 타겟이 되는 적부대에 다수의 준독립적인 또는 독립적인 부대의 집중포위공격을 뜻하는말




적을 포위하는것은 언제나 탐나는 목표입니다. 포위공격은 적의 수송선을 끊고 적의 사기를 분쇄하고 퇴로를 차단합니다. 일반적인 포위공격과 스웜전술의 차이는 스웜전술/전략은 전투나 전쟁중 시작부터 집중포위공격을 목표로 삼고 전략및 전술기동을 하여 적을 포위섬멸하는것을 말하며 의도된바와 상관없는 기동에의해 고립된 적을 집중포위해서 공격을하는것을 말하는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독일의 전격전은 스웜전략/전술과 무관합니다. 기동전은 결과적으로 포위공격을 동반하지만 전격전의 주체가 되는 기갑부대의 초기기동및 주기동행동은 포위집중(Convergent Attack)이 아니라 전선돌파(Breackthough)후 핀서기동(Pincer moves)

의 패턴으로 나타납니다.




스웜전술과 측면공격을 동반하는 일반전술과는 구분되어져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한부대가 적과의 교전을 위해 정면을 친 상태에서 기동부대가 적의 측면을 공격하면 일측면포위(Single Envelopments)를 한겁니다. 만약 정면과 적의 양측을 동시에 공격할수 있다면 양측면포위(Double Envelopments)

를 한것이며 이는 스웜전술과는 무관합니다.






스웜전술/전략은 4가지 카테고리로 분류될수 있습니다.




분산 스웜전술 게릴라 전술 케이스


집단 스웜전술 고대 궁기병 케이스


분산 스웜 전략 ??

집단 스웜 전략 Ulm Campaign(나폴레옹 시대)








고대 스웜 전술: 궁기병(Horse Archer)

케이스




전술적 레벨에서 쓰여진 스웜전술의 예는 고대시대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가장 흔하게 접하는 스웜 전술의 예는 중앙아시아 지역의 유목민들이 사용한 궁기병 운용 에서 찾아볼 수 습니다. 이때 스웜전술을 사용하는 측과 그렇지 않은 측의 전투는 주로 유목민의 경기병군대와 정주문명국가의 보병주축의 군대의 대결구도로 나타납니다.



스키타이족, 훈족, 아바족, 불가족, 마자르족, 투르크족, 몽골족, 코사크족 등 잘 알려진 기마궁수들을 거의 다 유라시아 스텝에서 배출해냈습니다.(그 당시 매우 소수의 군대만이 다양한 병종을 조합해서 사용하였고 단일병종으로 구성된 무장집단이 또 다른 단일병종으로 구성된 무장집단를 전투에서 만나는 예는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스텝 기마궁수의 화력과 기동력의 우세함은 화약이 발명되기 전까지는 유지되었습니다. 또한 그들의 적이 페르시아인, 마케도니아인, 로마인, 프랭크인 또는 아랍인이던 스텝 기마궁수들은 대체적으로 잘싸웠습니다.




불행하게도 고대시대에 사용된 스웜전술은 자료가 부족하거나 부정확하여 구체적이지 못합니다.



그리고 스웜 전술은 주로 유목민들이 사용한 전술이기 때문에 양측 다 스웜전술을 사용한측 끼리의 전투에 대한 자료는 매우 단편적이고 제한적입니다. (역사적으로 스웜전술을 사용하는 군대끼리의 대결은 몽고군의 화레즘 정벌(1219-1221) 그리고 몽고군의 13세기의 중동지역침입에서 살펴볼 수 있고 가장 유명한 케이스는 1260년 Ayn Jalut 전투에서 마멜루크들이 이끄는 이집트 군대가 몽고군을 저지한 예입니다.)





매우 소수의 집단만이 다양한 병종을 조합해서 사용하였고 단일병종으로 구성집단이 또 다른 단일병종으로 구성된 집단를 전투에서 만나는 예는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알렉산더의 중앙아시아 작전(329-327 BC)







알렉산더는 스웜 전술을 쓰는적과 싸우게 되는 최초의 서양측 지휘관입니다.




스키타이 유목민은 대체적으로 기마궁수를 사용한 스워밍 전술을 사용했고 헬스폰트를 도하한 마케도니아 팔랑크스부대를 최초로 격파하기도 하는 장본인 입니다.




하지만 알렉산더는 스웜전술에 대항할 새로운 전술을 고안해 냈고 스키타이 기마궁수를 결국에는 물리쳤습니다.




알렉산더는 Gaugamela 전투에서 페르시아 황제 다리우스를 격파하고 나서 옛 페르시아 제국의 북동쪽 변방을 장악하는데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특히 스피타메네스의 지휘하에 반란이 난 박트리아와 소그디아나 두개주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알렉산더가 자자테스(현재 우즈베키스탄 지역쯤)

강역에 요새를 건설하고 있을 때 강건너 북쪽에 거주하는 한 무리의 아시아계 스키타이인들이 나타나 알렉산더와 마케도니아병사들을 조롱하고 모욕하기 시작했습니다.




전에 겪은 수많은 전투로 인해 얻은 상처로 뼈가 부서져 다릿살 사이로 빠져나오는 아픔을 겪고 있던 알렉산더의 그때 기분은 매우 좋지 않은 상태 였습니다. 알렉산더는 강을 건너 스키타이 인들을 공격하기로 했고 스키타이인들은 우리가 현재 “파르티아 전술”로 알고 있는 방법으로 이에 대응하여 더욱 빠른 기동력으로 적을 포위하고 긴 사정거리를 이용해 화살로 공격하는 잇점을 활용합니다.



포위공격은 기마궁수에게 한번에 공격할 수 있는 목표물의 증가라는 잇점을 가져다 줍니다. 일반적인 스웜 전술을 사용하는 집단의 움직임을 살펴보면 포위망을 좁힌후 개개인의 기마궁수들이 끊임없이 공격을 가하고 뒤로 빠지면서 부대전체가 물흐르듯 천천히 교대하며 공격을 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공격과 후퇴의 한 사이클을 펄스(pulse)

라고 합니다. 펄스가 지속적으로 유지되어야 효과적인 스웜 공격이 가능합니다.



개개인의 기마궁수는 돌격해서 포위선 안에서는 화살을 직사(공격시 거리 좁힘으로 인한 목표물 근접)로 퍼붙고 후퇴하면서 어깨너머의 곡사(후퇴시 목표물과의 거리차로 인한 필요 사거리 증가)로 퍼붙고 짧은 펄스를 마칩니다. 이러한 방식의 공격을 가리켜 파르티안 샷(Parthian Shot)

이라고도 합니다.




알렉산더는 이들을 상대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기동력이 상대적으로 우수한 스키타이인들의 기동력을 제한할 지형적 장애물, 강이나 요새가 필요함을 간파합니다. 자연지형적인 장애물이 주위에 없자 알렉산더는 자신의 기병대를 미끼로 사용합니다.



미끼로 던져진 소수의 기병대는 알렉산더의 본대 앞에서 떨어져나와 스키타이인들을 유인햇습니다. 예상대로 스키타이인들이 즉시 그 미끼부대를 포위하자 알렉산더는 경보병을 미리 뿌려서 주력기병대의 전진을 가리고(Light Infantry Screening)

경보병 뒤에 숨어서 전진하던 주력기병대는 미끼부대와 경보병사이에 낀 스키타이 기마궁수들을 향해 돌격합니다. 스키타이인들은 여기서 1000여명이 전사하고 150명이 포로로 잡힙니다. 얼마 안돼 스키타이인들은 알렉산더에게 화평을 제의합니다.




하지만 곧 마케도니아군대는 알렉산더 부재시 스키타이 기마궁수에게 매우 취약함하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알렉산더가 Alexandria Eschate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을무렵 150마일 떨어진 곳에서 마케도니아 팔랑크스부대는 기마궁수들에게 박살이 나고 있었습니다.



소그디안 반란군의 수장 스피타메네스는 마라칸다(후에 사마르칸드)

근처의 마케도니아군 전진기지를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600명의 스키타이 기마궁수를 휘하에 두고 있었습니다.




스피타메네스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알렉산더는 860기의 기병과 1500의 용병보병으로 구성된 구원군을 급파합니다.




스피타메네스는 마케도니아군대를 사막으로 유인했고 사막지형에서 스키타이 기마궁수의 스웜전술은 매우 효과가 좋았습니다. 그들은 마케도니아군을 사방에서 포위하고 화살을 퍼부으며 혹시라도 본대에서 고립되는 부대는 가차없이 포위섬멸 하였습니다.






마케도니아측 기록




"적군은 아군을 포위하고 엄청난 양의 화살을 쏘아댔습니다. 저는 하늘이 화살로 이렇게까지 새 까맡게 뒤 덮여 하늘이 어두워지는걸 본적이 없습니다. 아군 측 병사와 마필은 속속 부상당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 공격을 가하던 무리들의 전통이 비워지자 그들은 후퇴하였고 또 다른 무리의 기마궁수들이 곧 나타나 화살을 쏘아대는데 이번에는 하늘이 더욱 많은 화살로 뒤 덮였습니다."




마케도니아 팔랑크스 부대는 사각형의 방어대형을 짜고 후위부대 역할로 방어하며 포위당하지 않기위해 싸우면서 대형을 갖춘체 천천히 숲이있는 있는 협곡으로 후퇴하였습니다. 그러나 안전지대가 가까워오자 병사들은 겁을 먹고 살기위해 협곡쪽으로 뛰기 시작했고 부대진형은 붕괴되었습니다. 마케도니아군은 여기서 전멸당합니다.



알렉산더는 이 비보를 듣고 자신이 직접 대응하기로 맘을 먹은후 일단 보병과 궁수 그리고 기병을 혼합한 연합부대(Combined Arms Force)를 이끌고 스피타메네스의 군대를 135마일 72시간을 쫓아다녔습니다. 하지만 기마궁수부대는 잡힐듯하면 손쉽게 흩어져 버렸습니다. 알렉산더는 목표를 기마궁수부대의 섬멸(Unit Destruction)에서 기마궁수부대의 보급거점(Logistical Base Destruction)

으로 바꿉니다.



알렉산더는 그의 부대를 5대의 별동대(Mobile Units)

로 나누어서 기마궁수들이 보급지로 활용하는 지역에 전진기지, 요새등을 건설하기 시작했고 그곳 시골마을주민들은 성벽이 둘러진 큰 도시들로 강제이주시켰습니다. 이들 기지와 요새들은 모두 하나의 시스템으로 연계되어 언제 어디서 적이 나타나도 반응할수 있도록 해놓았습니다.



이 전략으로 스피타메네스 반란군은 식량과 마필을 더 이상 유지할수 없게 되었고 계속 써먹어온 도피/은닉작전(Elusive Tactics)

을 포기하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스피타메네스는 알렉산더의 한 부장이 이끄는 부대와 일전을 벌이고 패배합니다. 그후 스피타메네스는 배신을 당하고 목이잘린채 알렉산더 앞으로 보내집니다.



알렉산더가 23세기전에 사용한 반 스웜(Anti-swarm)전술은 현대 미육군 필드 매뉴얼 FM 90-8 에 나오는 대 게릴라전술 독트린과 흡사합니다. 이 교본에서는 Locate(위치파악), Fix(고정) 그리고 접전(Engage)

를 병사들에게 가르칩니다.




현대의 게릴라들은 고대의 기마궁수들이 마케도니아 중보병과 접전을 피하려 하였던 것 과 같이 전력이 우세한 대규모 적과의 결정적인 전투를 회피합니다.




스웜전술에게 있어 우수한 기동력은 필수요소이며 기동력의 상대적 우위는 역사적으로 기병이 보병을 상대로 가지는 확실한 잇점이었습니다.




역사가들은 기원전 5세기로부터 아드리아노플 전투의 서기 378년까지

그렇게 느린 기동력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보병(마케도니아 팔랑크스와 로마군단병)

이 주력병종으로 그렇게 오랫동안 사용되어져 왔는지 흥미로와 합니다. 하지만 스웜전술을 쓰는 기병군대가 보병군대를 패배시키는 예는 이 기간중 에도 몇몇 있습니다.



아드리아노폴 전투(서기 378년)

이후로는 보병의 주력병종으로 누려온 우세함이 쇠퇴하며 기병우세의 시대를 여는 전환점 보는게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이 전투에서 양측의 로마기병은 고트족 기병에게 박살이나고 후퇴하여 중앙의 로마보병은 기병지원이 끊긴체그대로 포위되고 맙니다. 비지고트족 보병은 로마보병의 정면을 공격했고 고트족 기병은 로마군의 양측면과 후면을 공격하고 전투는 대학살로 변해갑니다.

(하지만 이 전투는 스웜전술의 케이스는 아닙니다.)





고대 스웜 전술: Carrhae 전투 & Manzikert 전투 케이스



파르티아 대 로마의 Carrhae 전투(기원전 53년)







지중해와 근동에서의 보병우세시대에서 몇몇 예외적인 케이스중 Carrhae 전투의 로마군단병과 파르티아 기마궁수간의 대결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파르티아 정복을 위해 마커스 크라수스휘하의 39000명의 로마군대는 파르티아로 진격해들어갓습니다. 로마군대의 대부분은 군단병들이었고 약간의 경보병과 기병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크라수스는 보급의 원할함과 적에게 포위당하지 않기 위해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진격해나갔습니다. 아랍인 정찰병에 의한 첩보로 파르티아의 수레나의 부대를 상대하기로 맘을먹은 로마군은 평원으로 깊숙히 진입하고 정확하게 수를 알수없는 수레나의 기병부대와 Carrhae 마을 근처(현재 시리아 근방)

에 조우합니다.




기병부대와 조우한 로마군은 속이 빈 사각형 대형을 형성했고 곧 포위당했습니다. 처음에는 탐색전과 약간의 접전만을 벌이던 파르티아 기마궁수들은 곧 대규모로 스웜전술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로마군 진형을 완전히 포위하고 일정거리를 두면서 화살공격을 퍼부었습니다.




로마군측 기록




"파르티아군은 사방에서 거리를 두고 화살공격을 하기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어느 특정 목표를 상대를 겨냥하고 화살을 날리는 것이 아니라 방향만 아군대형쪽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화살을 날리고 있었습니다. 로마군의 대형은 매우 촘촘해서 대충 겨냥하고 쏘아도 누군가가 항상 화살에 맞았습니다. 그 덕에 적들은 목표겨냥에 들이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어서 화살을 더욱 빨리 쏘아댔으며 화살을 빨리 쏘고 활을 더욱 세게 당기는 데에만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아군의 위치는 매우 좋지 못했습니다. 아군이 대형을 유지하면 부상자가 속출했고 적에게 돌격을 감행하면 적은 거리를 두고 달아나버렸습니다. 적은 우리를 계속 죽이는데 우리는 적을 죽일수가 없는 답답한 상황이 계속되었습니다. 파르티아인들이 후퇴하면서 화살을 날리는 수법은 후퇴하면서도 싸우는 방식으로 패주의 불명예를 피해가며 싸우는 매우 교활한 수법이었습니다."



파르티아군의 화살이 계속 낙타등에서 공급되고 있음을 깨달은 로마군은 자신들이 계속 이런 식으로 버티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알았고 크라수스는 자신의 아들에게 6000명의 별동대(군단병, 기병, 궁병으로 구성)

를 이끌게 하여 기마궁수부대에 공격을 명했습니다. 파르티아 기마궁수는 후퇴하는 척하며 로마군 별동대를 본대로 멀리 떨어뜨렸고 포위 후 섬멸합니다.




별동대를 섬멸한 파르티아군은 로마군본대를 다시 포위하고 밤이 되도록 계속 괴롭힙니다. 밤이되자 공격은 멈추었고 야음을 틈타 대부분의 로마군은 Carrhae 마을로 도망쳤습니다. 도망을 치지 못한 체 뒤에 남겨진 로마군 부상병들은 전부 학살당합니다. 다음날 로마군은 기마궁수들이 활동하기 불편한 아르메니아의 구릉지대로 도망을 쳤습니다.




수레나의 파르티아군은 크라수스의 로마군을 따라잡았고 협상을 제의합니다.


크라수스는 협상에 응할 마음이 없었지만 살기위해 몸부림치는 로마군병사들의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어쩔수 없이 화평제의를 받아들입니다.




로마군 진영에서는 화평교섭을 위해 사절을 보내는 문제로 시비가 붙고 난투가 벌어지고 그 와중에 크라수스는 성난병사들에게 살해당합니다. 이사건 후 대부분의 로마군은 항복하거나 도망쳤으며 10000명의 로마군이 붙잡히고 나머지는 다 죽임을 당합니다. 그 후 결국 사로잡힌 로마군은 5000명만이 살아서 돌아갑니다.




로마군단병은 글라디우스라는 짧은검과 필럼이라는 투창으로 무장하고 있었고 이들은 넓은 야지에서 기마궁수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 판명되었습니다.




기원후 4세기초 기병은 로마군의 25%를 차지하기에 이르렀고 페르시아와 아랍군대는 더욱 많은 비율의 기병을 보유하게 됩니다. 등자의 발명과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 스텝에서 나타나는 신종의 덩치 크고 힘쎈말의 등장과 함께 기병우세의 시대가 도래하게 됩니다.




동방에서는 중국, 파르티아, 중앙아시아에서 사용해온 경기병과 기마궁수들과 함께 중장갑 철기들의 활약이 시작되었고 기마궁수와 함께 사용되어 그 효용을 증명합니다. 긴창으로 적보병에게 밀집대형을 강요하는 중장기병부대의 등장으로 기마궁수가 적을 공격할 때 내는 화력의 효과가 증대되었습니다.







비잔틴의 Manzikert 전투(1071년)




6세기에 도달하면서 동로마의 군단병(Legionaries)은 중장기병(Cataphracts)

에게 주력병종 으로써 의 자리를 내어주고 맙니다. 카타프락트 중장기병은 중장갑으로 무장한 기병으로 장창과 검 방패 그리고 궁으로 무장하였습니다. 이는 화력과 기동력 그리고 충격력을 효과적으로 혼합한 무장으로 매우 강력하였습니다. 그 당시 서양에서 프랭크족이나 롬바드출신의 기사집단외에는 동로마의 카타프락트 중장기병에 대항할 자가 없었습니다. 또 비잔틴 중장기병은 동양의 아시아계 또는 아랍계의 기마궁수와도 대등한 싸움을 벌일수 도 있었습니다.




비잔틴 군대 시스템은 제병협동을 사용하여 스웜전술을 사용하는 경기병군대를 상대로 1000년간 많은 승리를 거두어들여 언급의 필요성이 있습니다.




물론 전술적인 부대운용은 비잔틴제국의 성공에 있어 한가지 이유에 불과합니다. 실제 비잔틴은 매수, 외교, 책략, 속임수 등의 사용을 군사력의 투사보다 즐겨사용하였습니다.



비잔틴 전술의 유연함과 조직력은 기병전투에서 필수라고 할 수 있는 충격력의 연속을 가능케 하였습니다. 비잔틴 군대는 자신들이 누리는 모멘텀이 사라지기 전에 최대 5번의 공격을 적에게 가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또 스키타이 매복(Scythian Ambush)

을 포함한 매복공격을 즐겨하였습니다.




보병궁수와 중장기병의 조합은 기마궁수부대가 누려온 원거리 공격의 잇점을 어느정도 상쇄시켜줍니다. 비잔틴제국은 아바족, 투르크족, 불가족, 슬라브족, 마자르족등 스웜전술을 쓰는 군대를 상대로 영토를 지켜왔습니다.




10세기경, 마자르족은 비잔틴 영토내의 헝가리 평원에 공격을 가해옵니다.

여기서 마자르족 기마궁수들은 비잔틴 제국군을 상대로 원거리공격(Standoff-fire capability)

의 잇점을 가지고 있질 못했습니다. 비잔틴 군대는 중장기병과 경기병 그리고 중장보병과 경보병으로 구성되어있었고 비잔틴 보병궁수들은 마자르족의 기마궁수보다 사거리에 잇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자르족 기마궁수는 파르티아인들이 로마군대를 상대로 사용한 전법을 그대로 답습했습니다. 투창과 Scimitar(근동의 굽은검)

그리고 궁으로 무장한 마자르족 기마궁수 부대는 그들이 보유한 기동력의 잇점을 활용하면서 원거리 공격으로 천천히 적의숫자를 줄이는 방법을 채택 하였고 고립되는 적부대나 적 부대의 대형이 무너지길 기다렸습니다.



원거리 사격에 유리함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잔틴 군대는 적과 화살을 주고 받기 보다는 접전을 원했습니다. 마자르족 기마궁수는 비잔틴 군대의 단단한 보병방진대형(전면에 장창과 긴방패로 무장한 부대배치)

앞에 돌격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마자르족 군대는 자기들보다 중무장한 적을 상대로 철저히 접전을 회피하였고 계속 거리를 유지하면서 화살공격으로 적을 천천히 죽여나가는 방법을 선택하였습니다.




이러한 마자르족의 전술 때문에 양측은 결정적인 회전이 불가능했고 마자르족도 습격이나 약탈에만 만족을 해야 했습니다.




비잔틴제국은 그들을 둘러싼 적들의 약점에 대해 공부를 해왔습니다. 그들 중 기마궁수를 주력으로 하는 스키타이인들의 전술에 대한 연구도 되어있었습니다.



서기 600년경 비잔틴 군대 매뉴얼인 모리스의 스트라테지콘(Maurice’s Strategikon)을 살펴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추운 날씨, 우천시 그리고 습한 남풍은 기마궁수의 복합합성궁의 활줄을 느슨하게 만든다” 또한 스타라테지콘의 스텝인들에대한 대응법(Dealing with the Scythians, That Is, Avars, Turks, and Others Whose Way of Life Resembles That of the Hunnish People)

의 몇몇구절을 읽어보면 “적들은 기습과 매복 그리고 보급선 차단을 즐겨한다”, “그들은 적을 포위해서 원거리 공격하기를 좋아하며 쐐기대형의 여러 단독부대들이 후퇴하는척하다가 갑자기 반격하기를 반복한다” “그들은 그들이 타고 다니는 대규모의 말들에게 먹일 사료나 마초의 부족에 의외로 쉽게 굴복한다”




스트라테지콘 매뉴얼은 또 비잔틴 군대의 지휘관들에 이러한 충고도 하였습니다. “당신이 이끄는 부대가 포위당하지 않을려면 적이 도하할수 없는 강을 뒤에 끼고 전투를 벌여라”




이런 비잔틴의 철저한 대응과 대부분의 역사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비잔틴제국군은 셀주크 투르크의 군대에 의해 1071년 Manzikert 에서 패배합니다. 비잔틴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1453년까지는 버텼지만 대다수의 역사가들이 Manzikert 전투이후를 비잔틴의 군사적 쇠퇴와 결과적 종말의 시발점으로 잡고 있습니다.




Manzikert 전투 패배후 비잔틴은 제국 내 경제력과 군사력유지에 필수였던 소아시아의 풍요로운 지역들을 빼앗기고 쇠락합니다. 이때의 전투 후 비잔틴의 방어는 예전과 같지 않았습니다.




페르시아 외부로 활동을 개시한 셀주크 투르크는 비잔틴 제국의 동부지역을 약탈하기 시작했습니다. 황제 로마너스 디오게네스는 1071년 3만명의 군대로 출정하였고 비슷한 규모의 투르크 군대와 동부 아르메니아의 Manzikert에서 맞닥뜨립니다.




Manzikert의 지형은 궁기병에게는 최상의 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셀주크 투르크의 기마궁수부대는 전형적인 스웜전술을 개시 하였고 포위망에서 화살을 날려대며 비잔틴군대의 접근을 허용치 않았습니다.




비잔틴 기마궁수부대도 화살을 날려대며 응사하였으나 비잔틴측이 보유한 기마궁수는 너무 소수였고 점차 소모되어집니다. 비잔틴 중장기병은 기마궁수의 지원없이 단독으로 적을 추격할수 없었고 날이저물면서 황제 로마너스는 야영지로의 퇴각을 명합니다.




야영지로 퇴각하는 비잔틴군을 투르크군이 계속 쫓아오며 화살공격으로 괴롭히자 황제는 그의 지칠대로 지친군대에게 다시돌아 적을 향해 싸울 것을 명하였고 후미에 있던 비잔틴 예비대는 이 명령에 불복종하고


야영지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후미의 예비대가 빠져버린 비잔틴 본대는 사방이 포위당해버렸고 사기가 떨어진 비잔틴 군대는 포위당한 채 섬멸됩니다.




비잔틴 후위부대의 이탈로 비잔틴군대의 정연한 후퇴는 패주로 변해버렸습니다.

Manzikert는 망구다이 패턴(후퇴하는척하다가 추격자를 매복후 사방에서 포위공격하는 전법)

의 또 다른 케이스입니다. 망구다이 패턴은 수세대를 걸쳐 기마궁수들이 즐겨사용하는 전술이 되었습니다.



Manzikert에서의 비잔틴군대의 패배에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투르크족의 기마궁수부대의 활약, 황제로마너스의 무능한 지휘력 그리고 후위부대의 반역)

. 또한 당시 비잔틴 군대의 군기는 비잔틴 군대가 최상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6세기부터 10세기까지 군대의 군기와 비교해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많은 당시정황을 다룬 사료들을 종합해보면 투르크측의 매우 숙련된 기마궁수 운용과 망구다이 전술의 효과적인 사용이 비잔틴군 패배의 주요원인임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고대 스웜 전술: 셀주크 투르크 케이스 & 궁극의 스워머 몽고군 케이스



십자군 vs. 셀주크 투르크 케이스: Dorylaeum 전투(1097년)




십자군 전쟁은 스웜머(Swarmer:스웜전술을 사용하는자)와 비 스워머(Non-Swarmer: 스웜전술을 사용하지 않는자)간의 또다른 역사적 대결입니다. 이번에 기마궁수들이 상대하는적은 중장갑의 서양기사들입니다. 서양측 기사들은 긴창과 검으로 무장하고 시리아와 성지(팔레스타인)

의 셀주크 투르크 기마궁수들과 대등하게 싸웁니다.



첫번째 십자군 전쟁은 십자군들에게 있어서는 단 한번의 유일한 군사적 성공입니다.(당시 기사들이 기마궁수를 상대로는 조악한 기동력과 전술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엄청난 위업입니다.)

몇몇 소규모 전투와 공성전을 제외하고는 Dorylaeum 전투는 십자군이 셀주크 투르크를 상대로 거두는 주요 승리입니다.



1097년 Dorylaeum(현재 터키에 위치)

에서 두개의 중기병 십자군부대는 스웜전술은 쓰는 투르크 경기병군대를 붙잡고 패배시킵니다. 앞으로 묘사될 전투설명을 보면 투르크측은 일대일로 전술적 기동력의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군대는 전술작전 레벨에 있어 허를 찔리고 맙니다.




Dorylaeum 캠페인에서 십자군측은 영주 보히몬드가 이끄는 이태리 노르만부대가 본대로부터 떨어져 나간후 부대가 두개로 쪼개어져서 3일간 따로 전진하고 있었습니다. 보히몬드의 군대는 10000명의 십자군으로 되어있었고 주력은 보병이었으며 비전투원도 다수 동행하고 있었습니다.




1097년 6월30일 저녁 보히몬드의 군대는 Thymbres 강 북쪽 강둑에 위치한 Dorylaeum 이라는 버려진 도시 근처에 풀이 무성한 초원위에 주 숙영지를 세웠습니다.


다음날 아침을 기하여 보히몬드의 병사들은 킬리즈 아스란 이 이끄는 대략 삼만명의 투르크 기마궁수부대에게 공격을 받습니다.




십자군은 기마궁수 스웜전술을 본적도 경험한적이 없었습니다.




십자군측 기록




"투르크족들은 사방에서 나타나 포위해오기 시작했고 아군주위를 빙빙돌면서 화살을 엄청난 거리에서 날리면서 공격을 했습니다."




프랭크인들은 투르크병사 전원이 말을 타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투르크 군대는 십자군 숙영지를 돌며 약간 느슨하게 포위하면서 공격했습니다. 수많은 기사들이 화살에 목숨을 잃었고 보히몬드의 군대는 더 이상 견딜수 가 없어서 강둑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투르크군대는 십자군 숙영지의 대부분을 장악했고 고립된 십자군 부대를 학살했습니다. 보히몬드는 그의 기사들에게 위치사수를 명했고 투르크군은 십자군을 완전포위하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부대를 교대로 공격하게 해서 한쪽은 화살을 공급받고 나머지부대는 공격을하게해서 끊임없이 십자군을 괴롭혔습니다.




소수의 기사들이 참지 못하고 투르크족에게 돌격을 가할때마다 투르크 기마궁수는 기사들이 잡지 못하게 도망을 치며 화살을 계속 쏘아대었습니다.


보히몬드는 자신의 군대가 파공음을 내며 쏟아지는 화살과 투창에 서서히 죽어가고 있음을 볼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에게 있어 투르크인 기마궁수들의 기동력은 극악무도하였습니다. 십자군의 패배는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보히몬드가 전에 구원요청을 위해 보낸 몇몇의 연락병이 다른 십자군 부대를 찾아내는데 성공합니다. 연락병들은 그 십자군부대를 인도하여 접전지로 행하게 하고 그들은 투르크부대의 측면과 후면에 빠르게 공격을 가했습니다. 후면과 측면에서의 예상치 못한 기사들의 돌격으로 투르크군은 혼란에 빠졌고 전투는 기사들의 장기인 육박전 양상으로 흘러갑니다.




다죽어가던 보히몬드의 부대도 적의 후면에 나타난 우군의 등장에 힘을 얻고 재결집하여 투르크군에 돌격합니다. 그 후 전투는 기사들의 승리로 쉽게 끝이 났습니다. 기마궁수는 육박전에서 기사들의 적수가 되질 못했습니다. 기록을 보면 기마궁수부대의 피해는 예상만큼 그렇게 크진 않았습니다. 이유는 투르크군은 단지 그들이 완전히 도망을 치기 전 10분 동안만 접전을 통해 피해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이 전투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스워머(Swarmers)는 중무장한 비 스워머(Non-Swarmers)

를 상대로 승리하기 위하여서는 상대적으로 우수한 기동력을 반드시 확보하여야 한다는 것 입니다. 스워머가 어떤 이유로든지 또는 어떤 경우에서든지 꼼짝하지 못하는 상황에 봉착하면 스워머는 패배하게 됩니다.




십자군은 스웜전술을 사용하는 군대를 두가지 이유에 기인하여 패배시킬수 있었습니다.




1.스워머는 또다른 십자군부대의 행방에 대해 알지 못했음

(Poor Situational Awareness)


2.스워머 자신들이 충격력을 보유한 중기병을 보유하지 못한관계로 궁지에 몰리고 대형이깨진 십자군부대를 조기에 격멸하지 못하고 구원군이 나타날때까지 시간을 허비함(Lack of Shock Force)




Dorylaeum 에서의 십자군의 승리는 계획되고 실천된 것(Planned and Executed)이 아니라 운이 좋아서(By Chance)

그렇게 된 것이 주된 원인입니다.




후일 Hattin 전투와 같이 셀주크 투르크군과 십자군과의 전투들을 보면 기마궁수가 프랭크 기사들을 상대로 상대적 우위를 점하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궁극의 스워머 몽고군 & Liegnitz 전투 케이스(1241년)





몽고족은 역사적으로 스웜전술을 쓰는 궁극의 케이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전술적 전략적 차원에서 둘 다 스웜 전술/전략을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은 스원전술을 쓰는적이던 쓰지않던 적이던 다 패배시켰습니다.




13세기초 징기스칸은 그의 주위의 부족들을 모두 제압하고 고비사막근처의 몽고를 통일합니다. 결국 몽고의 원정의 스케일은 고려에서 독일에까지 뻗히는 광대한 규모를 자랑합니다. 몽고제국은 역사적으로 가장 큰 대륙제국이었습니다.




몽고군의 성공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분산된 지휘시스템(

하급지휘관들에게 상당한 결정권을 허락하여 변화무쌍한 전장상황에 잘 적응케하고 적을 상대로 우선권을 갖게함

:Battlefield Initiative)




2.잘 적용된 스웜전술 컨셉(Successful Application of Swarming Concept)





A. 우수한 전장 상황파악/인식:Superior Situational Awareness


B. 우수한 기동력: Superior Mobility

C. 우수한 장거리 공격화력: Superior Standoff Fire)




3. 적절한 비율의 충격력 확보(Retaining the Good Ratio of Shock Force)




몽고군의 우수한 전장상황파악은 몽고군이 보유한 경기병의 효과적이고 적극적인 운용으로 오는 정찰상의 잇점과 관련이 있고 우수한 기동력은 전군을 기병으로 하는 몽고군의 특성에 기인합니다.(40%는 중기병 60%는 경기병)

그들의 우수한 장거리 공격화력은 그들이 보유한 복합합성궁 덕분입니다.




당시 몽고활을 유럽최고의 롱보우에 비교하자면 영국 롱보우는 그 큰 덩지에도 불구하고 75파운드힘과 250야드의 사거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훨씬 작은 몸집의 몽고활은 100~160 파운드힘과 350야드의 사거리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몽고군은 또한 몽고엄지 발사안전장치(Mongolian thumb lock)

라는 기술을 연마 했습니다. 이 기술은 궁수가 오른쪽 엄지손가락에 돌로 만들어진 반지를 사용하여 갑자기 화살을 놓아주는 방법으로 이 기술을 쓰면 화살의 속도가 증가합니다.




몽골 경기병은 화력지원과 정찰에 사용되었고 활을 이용한 경기병 공격이 적 부대의 숨통을 완전히 끊기에 부족할 때에는 중기병의 충격력을 이용한 공격이 사용되어졌습니다. 적의 대형이 무너지고 틈이 보이기 시작하면 몽고중기병은 12피트 길이의 창으로 무장한테 돌격하여 결정타를 날리곤 하였습니다.



전술적인 레벨에서 몽고군 기마궁수는 고대 파르티아나 투르크 기마궁수들이 사용한 스웜전술을 그대로 사용하였습니다. 보다 우수한 기동력과 화력으로 무장하고 신출귀몰하는 몽고군은 거리를 두고 적에게 화살공격을 가했습니다. 만약 몽고군이 적을 포위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그들은 망구다이 전술(Mangudai Tactics)

같은 다른 전술을 사용하였습니다. 망구다이 전술은 후퇴하는척하며 적을 일부을 유인하여 본대로부터 떨어뜨린후 집중포위공격을 가하는 전술을 말합니다.



전략적으로는 몽고군은 몇대의 사단(Toumen)

으로 나누어 일반적으로 넓은 전선을 평행으로 진격하게 하면서 곳곳에 경기병 척후를 보내면서 주력부대의 이동을 은닉합니다. 그러다가 척후들에게 발견되는 적부대가 있으면 이는 근처 모든 평행선상에 있는 몽고군부대의 집중타겟이 됩니다.




군을 몇몇 Toumen으로 나누는 것에는 유리한점이 있습니다. 일단 겁을 먹은 적의 눈에는 여러 방향에서 진입해오는 군대의 규모가 훨씬 커보이고 보급차원에 있어서도 소규모부대는 대규모의 부대보다 훨씬 용이하게 스스로의 보급을 해결할수 있었습니다.




몽고 Toumen 사단들은 여러방향에서 동시에 적을 공격합니다. 적의 정면을 담당하는 사단은 상황에 맞춰어서 적의 진격을 멈추거나 천천히 뒤로 빠지고 그와 동시에 다른 사단들은 적부대의 측방과 후방으로 접근합니다. 적부대는 병참/연락선을 끊기지 않기 위해 뒤로 후퇴할것이고 몽고군은 이때 일어나는 혼란을 최대한 이용하여 적을 포위하는데 성공합니다.




상황이 몽고군에 불리할 경우에는 몽고 Toumen사단들은 우수한 기동력과 전장상황파악을 이용하여 참패를 모면하곤 하였습니다. 몽고군 부대는 다른 기병부대들과 비교하여 전략적 기동력이 우수하였습니다.




몽고군 병사 개개인은 여분의 말을 항상 데리고 다니면서 타고 있는 말이 지칠듯하면 다른 말로 바꿔 타며 전진했습니다.




Toumen 사단들간의 엄청난 거리에도 불구하고 몽고군은 우수한 전장상황파악의 잇점을 유지했습니다. 각 부대간의 연락은 말을 탄 연락병들의 집단이 릴레이 형식으로 말을 달려가며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고 전술적으로는 깃발과 고둥나팔 화전 등을 사용해 신호를 보냈습니다. 전략적으로는 몽고군 부대가 지평선에 나타나기 훨씬 전에 몽고 스파이들이 상인무리로 가장하여 항상 앞서 작전지역에 투입이 되었습니다.




몽고군의 성공은 종종 그들이 작전하는 지형에 영향을 받곤 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적을 포위하는데 성공하면 몽고군은 승리하였고 그렇지 못하고 좁은 길로 움직여야 할경우는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기병이 효과적으로 운용되기 힘든 지형은 아래와 같습니다.




1.늪지대: 말이 좁은길을 따라가야하고 그렇지 않은경우 꼼짝못할 때


2.두터운 숲지대: 말이 좁은길을 따라가야 하는경우


3.산악지형: 몇몇 협곡만이 통과가능할 때




13세기초 몽고제국은 서서히 서쪽으로 확장을 꾀하기 시작했습니다. 러시아는 1240년 몽고의 수중으로 넘어갑니다. 바투칸 휘하의 몽고군은 러시아를 정복하고 헝가리로 눈을 돌립니다. 헝가리로 진입하기전에 바투는 북쪽방면의 폴란드방면을 견제하기 위해 일대의 병력을 Baidar에게 주어 공격케합니다.




헝가리와 폴란드 방면으로 진입한 몽고 Toumen 사단들의 기동력과 유기적인 협조는 흡사 이차대전의 기갑부대들의 그것과 흡사했습니다.




1241년 4월 5일에 Baidar가 이끄는 2개의 몽고 Toumen 사단은 사일레시아의 듀크 헨리2세가 이끄는 2만5천명의 폴란드와 독일병사들과 Liegnitz 에서 조우합니다. 상대적으로 드넓은 평원지역이었던 Liegnitz에서 몽고군은 그들이 애용하는 망구다이 전술을 사용합니다.




몽고군은 유럽의 중장 튜토닉 기사들과 템플라들을 몽골 경기병을 이용하여 몽고군의 중앙으로 유인합니다.




일단 헨리휘하의 엘리트 중기병부대가 공격에 동원되자 일단의 몽골 경기병들은 옆으로 퍼지면서 유럽기사단과 나란히 말을 달리며 활을 쏘아댔습니다. 몽골 경기병들 사이에서 끼인 기사단은 앞, 좌, 우 삼면에서 몽골 경기병들이 쏘아대는 화살에 완전히 노출되었습니다. 몽고군이 연막탄까지 뿌려대자 혼란은 극에 달했습니다. 그리고 적당한 순간이 다가오자 숨어있던 몽고 중기병들이 돌격하여 결정타를 날립니다.




폴란드 방면을 안전하게 하는 미션을 완료한 Baidar 휘하의 몽고군은 헝가리를 침공하는 본대와 재빨리 합류하여 벨라왕이 이끄는 대규모 유럽기사단을 사조강 전투에서 대패시킵니다. 하지만 헝가리의 운명은 오고타이 칸의 죽음으로 겨우 완전파멸을 면합니다. 몽고군은 나타날때와 같이 바람처럼 사라졌습니다.




유럽인들은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궁수부족과 전술의 부재로 스텝의 기마궁수들을 상대하기 벅찼습니다. 유럽의 군대는 기사를 주력으로 삼고 의지 하였으나 기사들의 돌격은 주로 적 보병들의 방진을 와해 시키는데 사용되기에 알맞은 전술입니다.




유럽의 보병들은 기사들이 돌격할 때 뒤에서 보조하며 기사들의 후미를 보호해주며 기사들이 미쳐 죽이지 못한 적이나 말에서 낙마한 적을 죽이는데 주로 쓰여져 왔습니다. 서양의 기사들은 우수한 갑옷을 착용하고 훈련도는 매우 뛰어났으나 재빠른 몽골 경기병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습니다.





북미 인디안 스웜전술 & 스웜전략: 울름(Ulm)

케이스와 나폴레옹



북미 인디안 스웜전술 St. Clair의 패배(1791년)





스웜전술의 또다른 예는 북미대륙의 인디언들이 사용하였습니다.

18세기말 오하이오 계곡의 숲지대에서 인디언들은 전장상황파악의 잇점(Superior Situational Awareness)

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싸웠던 지역이 그들의 삶의 터전이기도 하지만 인디언들은 유럽식 군대보다 정찰병을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울창한 산림은 인디언들에게 은닉처를 제공하였고 경무장의 인디언들은 미국식민지 정규군보다 기동력이 좋았습니다. 인디언들은 궁기병들과는 다른 스타일의 스웜전술을 사용합니다. 적을 포위하고 사방에서 공격을 가하지만 포위후 궁기병과 같이 사거리의 잇점을 활용한 공격없이 바로 돌격해 들어갑니다. 비록 인디언들에게 사거리를 이용한 무기공격의 잇점은 없었지만 지형지물을 이용한 기습매복과 우수한 전장상황파악은 승리를 쟁취하기에 충분하였습니다.



미군역사상 인디언들에게 당한 가장 최악의 패배는 1791년 오하이오 테리토리에서 일어난 세인트 클레어의 패배(St. Clair’s Deafeat)입니다. 거의 700여명의 미군 병사들이 여기서 죽습니다.(85년 뒤 수(Sioux)족이 리틀빅혼에서 죽이는 수에 3배)




1791년 9월 미군 지휘관 소장 아써 세인트 클레어(Arthur St. Clair)

는 현재 신시내티로 불리는 지역의 부쪽으로 요새들의 라인을 구축하기 위해 진격하고 있었습니다. 미군은 방어하기 좋은 높은 위치에 캠프를 세우고 많은 수의 보초병을 세워두었습니다.



세인트 클레어장군은 그가 진입한 지역에 대한 정보와 첩보의 부족으로 그는 그의 캠프 지역 옆에 흐르는 강이 무슨강인지도 몰랐습니다. (원래 전투 후에 역사가들에게 붙혀지는 전투명은 지역을 따서 이름을 붙히지만 이전투는 당시 지휘관이 전투가 벌어진 정확한 지역의 위치도 모르고 전투를 벌이고 패배하여서 그냥 세이트 클레어의 패배라고 명명하게 됩니다.)

항상 그렇듯이 이번 전투의 케이스도 여러가지 생각해보아야할 요소들은 있습니다. 미군은 마필이 부족했고, 지휘관은 무능하였으며 부속 민병대의 자질은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단순히 인디언 오합지졸들이 운이 좋아서 세인트 클레어장군을 패배시켰다고 결정짓는 것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미군 지휘관의 무능함만 탓하기 보다는 인디언들의 완벽한 기습과 포위후 사방에서 집중공격 한 사실에 패배의 주원인이 있다고 보는게 보다 설득력 있는 결론입니다.




아무도 인디언부대의 지휘관의 정체에 대해 알지 못했습니다.

한명이 지휘했을 수도 있고 한 무리의 수장들이 카운실 형태로 이끌었을 수도 있습니다.(당시 지휘관을 작은거북(Little Turtle of the Miamis)이나 푸른 재킷(Blue Jacket of Shawness)으로 추정)

이 전투에서 인디언들의 공격패턴은 몇몇으로 통일되어있었습니다.



1.민병대를 향한 과감한 돌격(민병대는 정규군부대보다 돌격에 더 쉽게 붕괴됨)



2.지휘관들을 선택적으로 저격

3.Treeing 기술 사용(무릎을 꿇고 나무뒤에 숨어서 적이 나타나길 기다렸다가 사격, 사격 후 나무에서 나무로 이동하며 사격)


4.적 예봉의 철저한 회피(몇몇 용감한 지휘관에 의해 총검돌격을 하는 미군 분견대와의 접전 회피, 미군이 돌격하면 후퇴하다가 미군이 제자리로 돌아가면 다시 추격하여 포위망 유지)





인디언들은 민병대 보초병들을 향해 돌격했습니다. 그리고 민병대를 패주시킨후 주 캠프로 난입했습니다. 인디언들은 키가 큰 풀밑으로 숨어서 보이지않게 재빠르게 캠프를 단 몇분 만에 포위해버렸습니다. 세인트 클레어 장군의 회고록에 보면 그의 부대는 앞뒤 좌우 사면에서 동시에 공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인디언들의 공격은 끊김없이 4시간 가까이 유지되었습니다.



인디언의 주공은 미군의 좌측으로 반달모양의 형태로 공격을 가하였고 미군의 좌측은 가장 먼저 무너집니다. 한가지 특이할만한 사항은 각각의 인디언 부대들의 하급 지휘관들은 최고 수장회의로부터 내려진 전투목표를 정확하게 숙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고 이는 150년후 독일육군의 Mission-Order와 매우 흡사했습니다. (당시 인디언들의 부대는 급에 따라 50명단위 또는 100명단위 등등으로 세분화 되어있었습니다.)





완전 포위당한 미군의 전투력은 심리적으로 이미 붕괴되고 말았습니다. 캠프에 난입한 인디언들과 미군들의 난투극의 대혼란속에 세인트 클레어장군과 소수의 참모들은 부하들을 버려둔체 간신히 포위망의 한 틈을 찾아서 운 좋게 탈출하는데 성공합니다.

(인디언들은 캠프의 각종 보급품을 약탈하느라 정신이 팔려 세인트 클레어의 잔당을 추격 소탕하는데 실패합니다.)












울름(Ulm)

케이스와 나폴레옹




나폴레옹이 1805년 울름에서 보여준 전략적 레벨의 기동은 스웜전략의 정의와 맞아떨어집니다. 몇몇의 독립적이고 분산된 군단들이 동시에 다른 방향에서 나타나 공격을 가하고 오스트리아군을 포위하였습니다.


이번 케이스는 매우 독특하고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스웜 컨셉이 전략적으로만 사용된 케이스이기 때문입니다.



울름 작전은 단 한번의 전투가 아닙니다. 울름작전은 전략적 승리이며 이는 부정되기 힘듭니다. 전술적 레벨에서 프랑스군은 당시 스탠다드였던 라인(line):횡대사격대형 과 컬럼(Column)

:종대돌격대형의 한단계 업그레이드된 대형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군은 보병과 야전포병 그리고 기병으로 구성되어있었고 그들의 전술적 운용은 다른 유럽의 군대와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나폴레옹 시스템의 가장 독특한 요소는 corps d’armée 입니다.

corps d’armée는 독립적인 제병협동부대(Combined-Arms Unit)로 4개나 5개의 군단이 다이아몬드꼴로 기동하였습니다. 이론상으로는 각 군단(Corps)이 적의 일개 군(Army)

를 24시간동안 상대할 수 있었습니다. 24시간은 다른 아군 군단이 구원하러 달려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나폴레옹군대는 각각의 부대가 미리 의도한 전장에 전투 직전에 신속히 투입될 수 있는 거리로 진군했습니다. 나폴레옹은 부대를 여럿으로 쪼개어 진군 시키면서 적을 혼란스럽게 한 후 각 교통로의 네트워크와 병력통과 가능 최대치 등등을 치밀하게 계산하여 진군케 한 뒤 전투직전에 그의 부대들이 각각 다른 방향에서 전장에 속속 나타날 수 있게 계획하였습니다.




프랑스군은 진군하며 대부분의 보급품을 그 지역에서 충당하였기에 다른 유럽의 군대보다 빨리 행군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프랑스 내에서 벌어진 혁명 덕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의 그랜드 아미는 프랑스 사회의 모든 구성원의 총 집합소나 다름없었고 다른 유럽군대가 용병이나 징집병 또는 사회적 찌꺼기들로 구성된 것에 비해 무척 사기가 높았습니다. 이로 인해 프랑스군대내에서의 탈영은 상대적으로 적었고 나폴레옹은 각 부대들을 따로 떨어뜨려 놓아도 안심하고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전략적인 자유를 얻게 된 것 입니다. 부대간 분산은 보급의 압박을 많이 덜 수 있었고 자체조달의 효과도 커졌으며 대규모 보급부대의 운용의 필요성도 떨어져서 그만큼 더 빠른 속력으로 진군을 가능케 하였습니다.



나폴레옹의 천재성은 상황에 따라 각 부대 간 집중도(Concentration)와 분산도(Dispersion)의 밸런스를 탁월하게 맞추는 능력에서 유감없이 발휘됩니다. 그는 그의 부대가 각개격파 당하지 않도록 하였고 이를 위해 적 본대와 조우 시 기동력을 최대한 활용한 측면 또는 후면공격을 합니다. 그리고 항상 결정적인 순간에 빠른 강제행군(Fast Forced March)

로 적을 놀래켰습니다.



나폴레옹은 "전략은 시간과 공간을 활용하는 기술(Strategy is the art of making use of time and space)" 이라고 말했습니다. 우수한 기동력과 제대로 된 전장상황파악은 시간과 공간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필수요소 입니다. 일일 주파거리 평균 30킬로라는 기동력으로 무장한 프랑스군은 나폴레옹에게 전장에서 적보다 한발 앞서는 우선권을 가질수 있게 하였고 진군지역 앞에는 대규모의 기병의 막(Cavalry Screen)

을 쳐서 나폴레옹의 군단들의 움직임을 적으로부터 가렸습니다.



1805년 페리디난드 대공 지휘하의 72000명의 오스트리아 군은 남독일을 통해 울름(Ulm)

이라는 지역으로 진입하였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의 목적은


나폴레옹의 보급을 끊고 다가오는 러시아군과 연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의 참모는 Karl Mack Von Lieberich 였습니다. Mack 장군은 오스트리아군은 프랑스군을 잡아두는 모루가 되어주고 다가오는 러시아군이 망치역활을 하여서 프랑스군을 궤멸시킨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나폴레옹의 흩어져 있던 그의 부대들이 속속 전장에 모습을 드러내며 오스트리아군을 포위하자 Mack은 나폴레옹의 덫을 빠져나오기 위해 프랑스 6군단을 공격합니다.




나폴레옹의 1개 사단을 혼내주며 전진하던 오스트리아군은 나폴레옹의 전문을 가로챕니다. 그 전문을 읽어본 Mack은 당장 Regensburg로 진격해야 한다고 설파하였지만 페르디난드 대공은 이를 지체시킵니다. 오스트리아군이 10월이 되어서야 결국 동쪽으로 이동했을 때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군을 Elchingen 전투로 막아버립니다.



Mack의 오스트리아군은 울름으로 탈출구를 뚫고 나갈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고 울름으로 진입한뒤 전략적으로 포위당해 투항 삼만명이 포로로 잡힙니다. (울름은 광의적으로 보면 일 측면포위(Single envelopment)로 구분될 수도 있지만 Mack의 주 보급선이 완전히 차단된걸 고려하고 그 보급선 외에는 별다른 대안이 없었던걸 감안하면 완전 포위로 볼 수도 있습니다.)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진행됩니다. 러시아원정은 전략기동력의 상실이 어떤 결과를 가져 다 주는지 잘 말해줍니다. 나폴레옹의 목표는 모스코바 였습니다. 하지만 병력 및 보급수송의 문제로 그의 군대는 늘 보여줬던 분군행군 후 집중포위공격의 모습을 보여주잘 못합니다. 러시아는 초토 후 후퇴하는 파비안 전략(Fabian Strategy)

으로 결정적 접전을 회피하며 후퇴합니다.



러시아의 전략으로 프랑스군은 가장 기초적인 보급품도 손에 넣지 못하는 상황에 봉착합니다. 이는 필수 보급품을 보급하기에도 벅찬 정규보급선에 더욱 압박을 가하게 됩니다. 나폴레옹이 서유럽에서 원정을 할 때 우수한 도로망의 이득과 풍족한 농장지대의 득을 본 것과는 달리 러시아의 열악한 도로망과 초토화된 점령지는 프랑스군의 전략적 기동력(Operational Maneuverability ) 다시 말해 스웜 능력(Swarming Ability)

을 결정적으로 떨어뜨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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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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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yacha94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8.02.24 중기병과 궁기병의 비율이 40:60정도였군요.. 스키타이할때 써먹어봐야지
  • 작성자진영리 | 작성시간 08.02.25 네이버에서 본 글 같네요
  • 작성자Black Raven | 작성시간 08.02.25 흠.. 너무 중장기병을 띄어준게 아닌가염? -ㄱ-;
  • 작성자북어싸만코 | 작성시간 08.03.03 이 글 보고 어쩐지 궁기병이 강한 것처럼 보인다는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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