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해서 해석해보는 RS!!!
군단병은 좀 질리네요 ㅎㅎ
다음엔 로마 카타프렉트를 올리겠습다.
갈리아 출신이어서 그런지 숲에서의 매복에 능한 갈리카 3군단 입니다. ㅋㅋ
Legio III Gallica
로마 갈리카 3군단은 폼페이우스가 이끄는 보수적 로마 공화당 지지자들과 맞서기 위해 기원전49년 줄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징집됐다. 갈리카라는 별칭은 이 군단이 갈리아의 로바 프로빈키아에서 모집됐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3군단은 4세기 초기에도 여전히 이집트에서 존재했다. 3군단의 상징은 황소다.
3군단은 줄리우스 카이사르의 적에 대항해 파르살루스 전투와 문다회전을 포함한 모든 군사작전에 참가했다.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후 3군단은 2차 삼두정치의 일원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군대에 합류되어 파르타아를 상대로한 원정에 참전했다. 그들은 옥타비아누스에 대항하기 위해 풀비아와 루이우스 안토니우스(안토니우스의 아내와 형제)가 모집한 군대에 포함됐지만 기원전 41년 페루자에서 포위당함으로써 별다른 활약을 못했다. 악티움 해전과 안토니우스의 자살이 있은 후 갈리카 3군단은 동방으로 파견돼 시리아 프로빈키아에 주둔했다.
63년 Gnaeus Domitius Corbulo의 지휘 하에 갈리카 3군단은 아르메니아의 지배권을 갖기 위해 파르티아에 대항하는 군사작전에 참가했다. Corbulo의 성공은 네로황제가 Corbulo에게 피해망상과 질투를 가지게 하는 계기가 됐고 장군은 자살을 강요당했다. 이일이 있은 뒤 갈 카 3군단은 Moesia 프로빈키아로 이동되어 다뉴브(도나우) 전선에 주둔했다.
69년 4화에의 시기때 3군단을 비롯한 모든 다뉴브강에 배치된 군단들은 처음에는 오토를 따랐고 나중에는 베스파시아누스를 따랐다. 그들은 Bedriacum에서의 2번쩨 전투에서 비탈리우스의 군대를 패배시키는데, 폴라비우스 황조가 시작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시리아에서 근무하는 동안 3군단은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경례하는 전통을 만들었다. Bedriacum에 새벽이 오면 그들은 경례하기 위해 동쪽을 봤다. 비탈리우스의 군대는 그들이 동쪽에서 다가오는 지원군을 향해 경례한다고 생각했고 낙담했다. 이때 3군단의 트리부네스(군단장 보좌)중 한명은 소(小)Pliny이었다.(누군지 모르겠네요)
내전이 끝난뒤 3군단은 다시 시리아로 보내졌고 2세기에 유대인을 상대로 싸웠다. 그들은 또한 161년에서 166까지 루시우스 베루스의 휘하에서 197년부터 198까지 셉티무스 세베루스의 휘하에서 파르티아 제국을 상대로 한 각각의 두 원정에 참가해 대단한 성공을 거뒀다.
갈리카 3군단은 엘라가발루스 황제의 제위 초기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218년 마크리누스 황제의 통치 때 Julia Maesa는 P. Valerius Comazon Eutychianus의 지휘 하에 있는 3군단이 주둔하고 있던 시리아의 Raphana로 갔다. 그는 3군단에게 엄청나게 기부했고 이는 결과적으로 3군단이 5월 16일의 새벽에 당시 14살이던 Julia Maesa의 손자 엘레가발루스를 황제로 선언하게 만들었다. 218년 6월 8일 안티오크 근방에서 엘레가발루스의 가정교사(-ㅅ-) Gannys는 3군단을 비롯한 동방 군단들의 도움으로 마크리누스 황제와 그의 아들의 군대를 격파했다. 3군단의 지희관이었던 Valerius Comazon는 엘레가발루스 황제의 근위대장이 됐다.
219년 3군단은 엘레가발루스 황제의 폭정에 지쳤고 스스로 황제를 자처하는 그들의 사령관이자 원로원 의원인 Verus를 지지한다. 황제는 Verus를 처형했고 3군단을 해산시켰다. 군단병들은 주로 아우구스타 3군단으로 옮겨갔고 아프리카 프로빈키아에 주둔했다. 그러나 다음 황제 알렉산더 세베루스는 군단을 재구성했고 다시 시리아로 재배치시켰다. 이 뒤로 갈리카 3군단의 기록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군단이 어디서 주둔했는가에 대해 약간의 기록이 남아있지만 323년에도 그들은 여전히 시리아에 주둔하고 있었다. 3군단의 주목할 만한 한 사람은 백부장 Lucius Artorius Castus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