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디우스의 충성스럽고 신뢰할 수 있는 7군단
클라디우스의 충성스럽고 신뢰할 수 있는 7군단의 역사는 기원전 58년 줄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에서 지휘했던 4개 군단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다뉴브강을 수비하며 4세기 중반까지 존재했다.7군단의 상징은 다른 카이사르의 모든 군단이 그러하듯이 사자, 또는 황소다. 7군단은 로마제국의 군대 중 가장 오래된 군단이다. 그들은 기원전 58년 줄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침공에 함께했다. 로마 지휘관은 네르비족과의 전투에서 7군단에 활약에 대해 언급했고 7군단은 카이사르의 부관 크라수수의 지휘아래 갈리어 서쪽의 원정에 동원됐다. 56년 7군단은 베네티족에 대한 원정에 참여했고 나중엔 브리타니아 탐험에도 참가했다. 베르킹게토릭스로 인한 위기의 때에 7군단은 파리 근방에서 싸웠고 일리시아 공방전에 참가했을 것이다. 또한 이들은 확실히 벨로바키족의 소탕작전에 참가했다.
42년 이 프로빈키아의 총독 Dalmatia는 최근에 권력을 잡은 클라디우스 황제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7군단과 11군단의 병사들은 재빨리 이 반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Paterna(the old ones)라고 불리고 있던 7군단은 명예로운 칭호인 Claudia Pia Fidelis(클라디우스의 충성스럽고 신뢰할 수 있는 7군단)를 받았다. 11군단에도 같은 칭호가 주어졌다.
트라이아누스 황제의 치세때 다키아와의 전쟁이 다시 발발했고 7군단은 가장 중요한 군단중 하나였다. Viminacium기지는 로마군의 두 번째 다키아 침공때 로마군이 건설했다. 그 근방 Drobeta에서 로마군은 다뉴브강을 가로지르는 Apollodorus of Damascus가 디자인한 유명한 다리를 건설했다. 7군단은 그 다리의 건설에 투입된 것으로 보인다. 106년 드디어 승리를 쟁취했다.
3세기에 로마제국은 제국의 여러 전선에서 위협을 받고 있었다. 다뉴브강위의 영토는 대피되어야 했고 몇몇의 패전이 기록됐다. 7군단은 고생했을 것이다. 269년 7군단은 Visigoths족을 패배시키는데 참가했을 것이다.
Gallienus황제와 그의 적수 Postumus가 대립할 때 7군단은 충성을 지켰고 그 보상으로 Pia VI Fidelis VI ('six times faithful and loyal')와 Pia VII Fidelis VII 같은 이름을 받았다.
4세기 말까지도 7군단은 여전히 다뉴브강 중부를 지키고 있었다.
다른 카이사르의 군단들이 그러하듯 7군단의 상징은 황소였고 사자였던 경우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