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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ger] 체첸항쟁사

코카서스의 늑대들 : 체첸- 58. 대전략

작성자jager|작성시간11.01.02|조회수3,512 목록 댓글 26

 

 

 


 "북코카서스 전체가 와하비들의 사육장이다."
                     - 러시아 내무부 장관 라시드 누갈리에프

 


  마스하도프가 죽은 다음날인 2005년 3월 9일, 압둘 할림 사둘라예프가 체첸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다. 40살의 이슬람 신학자였던 사둘라예프는 체첸 아르군 출신으로 그로즈니 대학에서 어학을 전공했던 인텔리였다. 체첸어, 러시아어 외에 아랍어까지 사용할 수 있었던 사둘라예프는 이슬람 교리를 공부하고 고향 아르군의 모스크에서 이슬람 신학자인 이맘을 하기도 하였다. 1차 체첸전과 함께 대학을 그만둔 사둘라예프는 아르군의 체첸군 부대에 가입하여 전투를 수행했으며, 1차 체첸전과 2차 체첸전 사이에 그의 이슬람 신학 강의가 체첸 방송국에 방영되면서 점차 이름이 알려졌다.

 

 

 

 

 

 

체첸 4대 대통령. 압둘 할림 사둘라예프

 

 

 2차 체첸전이 발발했던 1999년, 사둘라예프는 아슬란 마스하도프의 진영에 합류하였다. 뛰어난 이슬람 신학 지식을 갖추고 있던 사둘라에프는 마스하도프의 지시에 따라 체첸 샤리아 법정 책임자의 역할을 맡았다. 체첸 내에서는 보기 드문 아랍어 능력자였던 사둘라에프는 코란에 대한 강의를 통해 체첸 내에 이름을 점차 알렸으며,  마스하도프에 거의 전적으로 충성하였다. 2002년 8월의 마즈리스 알 슈라 회의에서 마스하도프의 후계자로 지목됬을 때 사둘라예프는 이 사실을 공개하지 않기를 부탁했다. 마스하도프의 죽음을 상상하기 싫다는 이유였다.

 

 

 

 

 

 

회의 때의 마스하도프와 사둘라예프

 

 그러나 마스하도프의 죽음은 그에게 체첸 4대 대통령의 막중한 임무를 맡겼다. 모든 전임자가 전사한 바로 그 자리에 올랐던 압둘 할림 사둘라에프는 자신의 역활을 정확히 인식하였다. 러시아에 대항하는 전쟁을 계속해서 수행하는 것이었다. 최고사령관으로서 그는 이 전쟁의 승리를 위한 몇가지 전략을 구상한다.

 

 첫째는 러시아 민간인을 노린 테러를 금지하였다. 러시아군과 군사시설에 대해 최대한의 타격을 가할 것이나 민간인에 대한 테러 및 인질극을 벌이지 말 것을 명령하였다. "체첸의 수장으로서 결코 그런 수단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며, 그런 수단이 우리의 자유와 평화를 쟁취하는 데 기여할 거라 믿지도 않는다"  특히 샤밀 바사에프를 상대로 기존과 같은 대규모 인질극을 벌이지 말 것을 요구하고 그로부터 그렇게 하겠다는 대답을 받아 냈다.

 

 

 

 

 

 

샤밀 바사예프와 압둘 할림 사둘라예프

 

 

 두번째는 전장의 확대였다. 세계에서 가장 광대한 대국 러시아를 상대로 한없이 좁은 체첸 땅에 전장에 한정시키지 않고 그 영역을 코카서스 전체로 넓히는 것이었다. 이 전략은 아슬란 마스하도프가 2005년 2월 휴전 명령과 동시에 평화 협정을 제안하면서 러시아 수뇌부에게 경고하면서 처음 언급되었다. "전장은 코카서스 전체로 확대될 것이다"  러시아인들은 이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고 단순히 허풍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체첸인들은 자신들의 싸움이 곧 전쟁이며, 전쟁에 있어 최종적인 목적은 오직 승리라는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현재의 불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그들은 전장을 넓혀서 러시아의 힘을 분산시키고 좀 더 많은 러시아의 피를 흘리게 만들기를 원했다. 아슬란 마스하도프가 언급한 이 대전략은 그의 후임자인 압둘 할림 사둘라예프에 의해 공식 발표된다. 그가 수장의 자리에 오른 지 2달 뒤인 2005년 5월 20일에 발표된 공고문 중 일부다.

 

 

 

 

 

 

  " 제3항 - 체첸 서부전선 중 잉구세티아, 오세티아, 카바르디노- 발카리아, 스타브로폴, 카라치- 체르케시, 아디게, 크리스노야스크 구역을 코카서스 전선으로 편성하여 독립시킨다"

 

 

 '코카서스 전선'  체첸을 제외한 북코카서스 공화국의 거의 전체를 포함하는 새로운 전선이었다. 해당 공고문에는 다게스탄이 빠져 있었지만 이는 유일하게 체첸 동쪽에 있는 공화국으로서 문맥상 제외되어 있을 뿐 오랬동안 러시아에 대항하던 '샤리아 자마트(자마트는 이슬람 종교 모임이란 의미다)' 조직 역시 '코카서스 전선 다게스탄 구역'으로서 편성되었다. 거기에 더해 스타브로폴과 크리스노야스크 구역은 코카서스 북쪽의 러시아 영역이었다. 이는 러시아의 본국에서도 전쟁을 수행하겠다는 의미였다.

 

 

 

 

 

크리스노야스크 지역 - 시베리아 한복판에 있는 러시아 최대주

 

  코카서스 전선 중에 잉구세티야와 다게스탄은 이미 현지 반군 조직이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다. 다게스탄은 1차 체첸전 이후에 자생한 와하비 조직이 중부 3개 마을 (카라마키, 차바마키, 카다르) 을 점거하고 농성한 전력이 있으며, 샤밀 바사예프의 다게스탄 침공에 호응하여 정부군과 러시아군을 상대로 농성전을 벌였다. '샤리아 자마트'라 불리는 이 조직은 이븐 알 하타브의 동서였던 라크족 출신의 라파니 카릴로프가 인솔하였다.

 

 

 

 

 

 

가운데가 라파니 카릴로프

 

 

   체첸 내 서전유르트의 훈련캠프에서 게릴라 전술을 교육받은 다게스탄인 중 한명이었던 라파니는 하타브의 '이슬람 평화유지군' 소속으로 다게스탄 침공에 참가하였다. 다게스탄 젊은 층에 인기가 많았다는 라파니는 다게스탄의 구석구석의 마을에 반군 조직을 편성하였고, 특히 중부와 북부 지방의 부이나스크, 구덴, 하사유르트, 카스피야스크 마을을 주요 거점으로 삼았다. 라파니는 이 조직을 점차 남쪽 데르벤트와 그 너머 아제르바이잔 영역 내의 레즈기아인에까지 영역까지 확대하려 했다.

 

 

 

 

 

 

다게스탄의 샤리아 자마트

 

  잉구세티야는 본래 체첸과 혈연적으로 거의 유사한 민족이었으며, 러시아의 1차 침공 당시에 체첸 수도 그로즈니에 거주한 잉구세티야인이 상당수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사촌뻘 되는 체첸인들과 함께 러시아에 대적하였고, 바무트 농성전에도 잉구세티아 동쪽 국경을 통해 숱한 지원자가 교전에 참가하였다. 이후 전투 경험을 갖춘 잉구세티야인들은 2차 체첸전에도 다시 참전했으며, 그로즈니 포위망 돌파 당시 상당수가 전사하였다. 생존자들은 잉구세티야 공화국에 돌아가서 숨을 돌린 다음 현지에 있는 잉구세티야인들과 함께 새로운 반군 조직을 결성한다.

 

 

 

 

 

잉구세티야 반군들

 

  '잉구쉬 자마트'라고 불렸던 이 조직은 샤밀 바사예프가 지휘한 2004년 나즈란 공세 당시에 중추적인 역활을 담당하였고, 작전을 지휘했던 아흐마드 예블로예프와 잉구쉬 자마트의 수장이었던 리야스 고차노프의 휘하에 집결하였다. 나즈란 공세의 성공에서 볼 수 있듯이 잉구쉬 자마트는 우수한 전투력과 충분한 열의를 보유하고 있었다.

 

 

 

 

 

작전 회의 중인 아흐마드 예블로예프

 

  하지만 체첸인들이 그 서쪽 너머 카바르다 발카리아 지역까지 반군 조직을 양성할 수 있을 것인가? 당시만 해도 많은 사람이 이를 믿지 않았다. 하지만 체첸 반군의 수장들은 이 전략을 일관되게 추진하였다. 샤밀 바사예프는 2003년 7월에 카바르다 공화국 박산 마을에 6주 동안 머물면서 현지 이슬람 세력과 교류하였고, 그들의 지원을 얻어내기 위한 사전 작업을 하였다. 샤밀 바사에프는 인근 코카서스 공화국의 젊은 층에는 러시아에 대적하는 전사이자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었다. 그의 체류를 탐지한 러시아 내무군과 FSB 스페츠나츠의 기습에 의해 바사에프는 다리에 부상을 입었지만 탈출에 성공한다.

 

 

 

 

 

 

 

카바르다 공화국에 체류할 당시의 샤밀 바사예프

 

  카바르다 발카리아 공화국에 반군을 양성하기 위해 시도한 또다른 체첸인 지휘관은 함자트 겔라에프였다. 그루지아 판키시 계곡에 은신할 당시에 이미 전선의 확대를 주장했던 겔라에프는 코카서스 거의 전역의 지원군을 모집하고 그들을 훈련시킨다. 이들 중에 카바르다인 무슬림 아타에프도 있었다. 충분히 훈련시켰다고 생각한 겔라예프는 2002년 9월에 잉구세티야 겔라스키 마을을 공격하고 철수하였다. 무슬림 아타에프는 철수 중의 혼란 속에서 약 30명의 카바르다, 발카리아 인을 통솔하여 자신의 고향인 카바르다 발카리아 공화국에 돌아갔다.

 

 

 

 

함자트 겔라예프

 

  고향에 도착한 무슬림 아타에프는 세이풀라(알라의 칼) 라는 가명을 사용하고 자신들의 전투 경험을 충분히 살려서 반군 조직을 양성한다. 당시 카바르다 발카리아 공화국은 원래 평화적인 형태의 이슬람 모임이 있었으나 체첸전으로 인해 이슬람에 대해 예민해진 친러시아 대통령에 의해 테러의 잠재적인 온상으로 낙인찍혔고 탄압과 박해가 가해졌다. 수도 날치크의 모스크 1곳을 제외한 공화국 전역의 다른 모스크가 모두 폐쇄됬으며 수염을 기르거나 집 밖에서 이슬람식으로 기도하는 것만으로도 경찰에 체포되는 일이 많았다.

 

 

 

 

 

 

카바르디노 발카리아 공화국 지도

 

 

 이미 높은 실업율 등으로 불만이 팽배해 있던 젊은 층은 정부군의 고문과 박해에 대해 보복할 기회를 원했고, 전투경험이 있는 세이풀라와 그 부하들은 이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었다. 삽시간에 새로운 형태의 반군 조직이 구성된다. 대부분이 공화국 인구의 10퍼센트에 불과한 사회의 비주류인 발카르 족이었다.

 

  이 조직은 '야무크 자마트'라는 이름으로 편성된다. 현재 요르단과 시리아 국경 지대에서 무슬림들이 비잔틴 제국의 대군을 격파했던 7세기의 야무크 전투에서 본땄다는 '야무크 자마트'는 2004년 8월부터 정부군과 러시아군을 상대로 전투를 시작한다. 체겜 마을의 3명의 경찰관을 사살함으로써 시작된 이 공격은 2004년 12월 14일에 공화국 수도 날치크에서 '연방 마약단속 센터' 기습에서 최초의 성과를 거둔다. 6-10명으로 추정되는 반군이 새벽 3시에 수도 한복판의 연방 시설을 기습하여 점거한 뒤 4명의 직원을 죽이고 79정의 ak 소총과 182정의 권총을 노획한 뒤,  준비한 GAZ트럭에 노획품을 싣고 건물에 불을 지른 뒤에 빠져나온 것이다.

 

 

 

 

 

기습 현장을 둘러보는 러시아군

 

  공화국 수도 한복판에서 3시간이나 연방 건물을 점거된 동안 미처 대응을 할 수 없었던 카바르다 정부군과 러시아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러시아군은 2005년 1월에 무슬림 아타에프의 은신처를 급습하여 사살한다. 루스톰 베카노프가 그 뒤를 이었지만 3달 뒤에 역시 사살되었고,  안조르 아스테미로프라는 카바르다 인이 이 조직의 수장이 된다. 그는 발카르인이 다수인 조직의 카바르다인 수장이었으며, 카바르다 중에서도 부족장 가문의 후예라고 한다. 그는 전전임자와 같이 '세이풀라'라는 가명을 사용한다. 사우디 아라비아의 킹 사우드 대학에서 이슬람 교리를 공부했던 안조르는 아랍어에 능통했던 사둘라예프 못지 않은 인텔리였다.

 

 

 

 

 

 

 

안조르 아스테미로프. 카바르다 반군의 수장 

 

 아스테미로프는 체첸인들이 지향했던 전선의 확대에 십분 공감함을 넘어서 주도적으로 그 영역을 확장하고 자신의 반군 조직을 보다 확대시켰다. 특히 요인 암살과 기습을 통해 러시아에 지속적인 출혈을 강요했으며, 러시아에 동조하는 현지인들을 암살하여 반군을 상대하는 러시아의 정보 체계를 와해시키고 그들을 고립시키려고 하였다. 자신들의 주요 본거지를 유럽 최고봉인 엘브로스 산 인근의 발카르 마을로 정한 아스테미로프는 점차 반군 규모를 카바르디노 발카리아 공화국의 각 영역으로 확대시켰다.

 

 

 

 

 

카바르디노 발카리아 공화국의 야무크 자마트

 

 

  이 전체 조직은 샤밀 바사예프의 지휘 아래 있었다. 모스크바 테러 이후로 모든 공식 석상에서 물러났던 바사예프는 새로운 전선의 사령관으로서 전역을 확대할 책임을 맡게 되었다. 요식행위에 불과한 임명으로 바사예프는 이미 2004년 나즈란 공세와 그 전의 카바르다 체류 당시에 사실상 이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러시아와의 협상을 원했던 아슬란 마스하도프가 오랬동안 공개적으로 발표하기를 꺼렸기 때문에 공식 논평에 노출되지 않았을 뿐이다.

 

 

 

 

 

샤밀 바사예프

 

   전선의 확대는 세이크 만수르 시절부터의 체첸인들의 오랜 숙원이었다. 이는 이맘 샤밀과 러시아 혁명기의 산악 공화국 등으로 지속적으로 시도되었으나 번번히 실패하였다. 체첸인의 병력이 산맥 서쪽과 동쪽으로 이동한 뒤, 아직 현지인의 충분한 동조를 얻지 못한 상태에서 러시아군의 대규모 토벌로 섬멸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체첸인들은 다른 방식으로 이 문제를 접근하였다. 자신들이 서쪽과 동쪽으로 진격하는 것이 아니라 서쪽과 동쪽의 산민들을 자신들의 영역으로 불러오는 것이었다.

 

 

 

 

 

 

 

1997년도의 체첸의 훈련 캠프

 

 

 충분한 군사 교육을 실시하고 전투경험을 쌓게 한 뒤에 그들을 다시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려보내어 새로운 현지 조직을 만들게 하는 것이다. 전투의 베테랑이 된 코카서스인들은 현지에서 자신들과 뜻이 맞는 동조자를 모집하고 새로운 군사 조직을 만든 뒤에 자신이 배운 데로 훈련시켰다.그리고 그 조직으로 현지의 정부군과 러시아군에 대항하였다.

 

 

 

 

 

 

 

 

  인근 코카서스 공화국에 자신들과 매우 흡사한 자생적인 반군조직을 양성하는 것 - 이것이 전쟁의 승리를 위한 체첸인들의 대전략이었다. 체첸전의 수장들은 지속적으로 이 전략을 지지하며 이를 위해 자신들의 역활을 각자 충실히 수행하였다. 하지만 이들이 과연 러시아에 충분히 대항할 수 있는 조직인가? 코카서스 전선의 수장으로서 샤밀 바사예프는 이를 입증하기 위한 모종의 작전을 구상한다.

  

 

 

 

 

 

 

 

 


 출처 : http://en.wikipedia.org/wiki/Second_Chechen_War
          http://en.wikipedia.org/wiki/Caucasian_Front_(Chechen_War)
          http://www.kavkazcenter.com/eng/content/2005/05/20/3812.shtml
          http://en.wikipedia.org/wiki/Ingush_Jamaat
          http://en.wikipedia.org/wiki/Yarmuk_Jamaat
         http://www.rferl.org/Content/Three_Years_After_Nalchik_North_Caucasus_Resistance_Remains_Potent_Deadly_Force/1329090.html
          http://www.unhcr.org/refworld/country,,,,RUS,,4ca425172,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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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jager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1.03.20 감사합니다.
  • 작성자나욱 | 작성시간 11.01.07 볼때마다 느끼는게 미국이 이라크에서 싸우는것하고 러시아가 체첸에서 싸우는거랑 우리나라나 세계언론의 반응이 대조적이네요 ㅎㅎㅎ
  • 답댓글 작성자jager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1.03.20 사람들이 기존에 갖고 있던 미국에 대한 감정을 투사하는 면도 강하죠. 거기에 우리는 러시아 측과 직접적인 접촉이 별로 없기 때문에 크게 관심을 갖지 않는 듯 합니다.
  • 작성자yskwww | 작성시간 11.02.04 근데 글이 오른쪽에서 잘려서 읽기 힘들어요... 6~7글자씩 잘리는데 ㅠㅠ
  • 답댓글 작성자jager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1.03.20 저도 보기 불편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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