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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ger] 체첸항쟁사

미국 남북전쟁- 불패의 군 (Invincible Army) 12. 프레데릭스버그 전투 = 돌담벼락

작성자jager|작성시간07.12.31|조회수1,139 목록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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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레데릭스버그 전투 지도. 검은 색이 북군, 흰색이 남군
 

 
  12월 12일 저녁에 리장군과 잭슨, 그리고 본 보케(von Borcke)라는 스튜어트의 참모는 북군 진지에서 400미터 정도 떨어진 곳까지 가서 적진을 정찰하였다. 정찰 결과, 북군의 주공이 잭슨의 진지에 올 것이라는 것을 간파했다. 설마 롱스트리트의 강력한 진지에 정면으로 돌격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으며, 만약 공격한다면 잭슨의 진지를 우회해서 공격할 것이라 생각했다. 스튜어트의 기병대가 잭슨의 우익에서 이러한 공격에 대비토록 하였다.

 
  1862년 12월 13일 오전 9시, 미드의 사단을 선두로 프랭클린의 5만 5천이 잭슨의 진지를 향해 진격을 시작했다. 이 무렵 D.H 힐과 얼리 사단이 도착하여 잭슨의 진지 우측에 배치되었다. 잭슨의 총병력은 4만이었다.
  이 전투에서 잭슨은 평소에 입고 다니는 군복 대신에 스튜어트에게 기병옷을 입었으며 노란 깃털 달린 모자를 썼다. 스튜어트와 잭슨은 무척 친한 사이로, 서로서로 농담을 주고받았다. 이 날도 스튜어트는 부하들을 시켜 잭슨을 놀렸다고 한다.
   당시 잭슨의 진지에는 작은 늪지대가 형성되어 있었는 데, A.P 힐 사단의 담당지역이었다. A.P 힐은 늪에 병력을 배치했다가 적이 기습하면 곤란하기 때문에 이 지역에 병력을 배치하지 않았다. 본 보케가 잭슨의 진지를 둘러보다가 이 지역이 공격에 취약할 것이라고 건의했지만, 잭슨과 힐은 늪지대이기 때문에 이 건의를 무시했다.
  잭슨의 진지는 대부분 숲 속에 포진했기 때문에 번사이드는 잭슨의 병력이나 위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다. 프랭클린은 미드의 사단을 단독으로 보내고 나머지 5개 사단을 대기시켰다. 잭슨의 진지로 쇄도하기에는 너무 정보가 없었으며, 무엇보다도 지도가 형편없어서 지형을 잘 파악하지 못했다.
  미드의 사단은 6천 5백명으로 3개 여단으로 구성되었다. 3개의 공격제대로 나누어 잭슨의 진지로 전진하였다. 이 때 잭슨은 스튜어트에게 기병포격대로 공격을 명령했고, 스튜어트는 기병포대의 지휘관인 펠함 소령에게 이를 전달했다.
  24살의 펠함은 상황이 긴급하기 때문에, 자기가 직접 인솔한 2문의 포로 북군을 공격하겠다고 스튜어트에게 전달했다. 미드 사단이 잭슨의 진지로 전진하는 가운데, 펠함의 포대는 잭슨의 우익에서 사격을 하였다. 곧 16문의 북군 포대가 반격을 가했고, 2문 중 1문의 포는 못쓰게 되었다.
  하지만 펠함은 대담하게도 1문의 포로 계속 미드 사단을 공격하였다. 미드 사단의 진격이 주춤하였다. 북군은 포대를 더 끌고 와서 32문의 포로 펠함을 공격했다. 펠함은 이리저리 포대를 이동하면서 사격을 가했다.
  워낙 펠함이 여기저기에서 사격을 하기 때문에 북군은 적어도 4문의 포가 공격을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북군의 응사에 포병 중 여러명이 중상을 입었고, 펠함도 말에서 내려 포병을 도왔다. 스튜어트는 3번씩이나 후퇴할 것을 명령했지만 펠함은 이를 거부하고 계속 공격하였다. 마침내 포탄이 떨어지자 펠함은 포대와 함께 후퇴하였다. 리는 롱스트리트 진지에서 이를 목격하고 “저렇게 나이어린 젊은이에게 저런 용기가 있다니 놀랍다”고 감탄하였다.
 펠함의 1문의 포는 미드 사단을 무려 1시간이나 저지하였다. 프랭클린은 116문의 포로 스텐포드 하이트에서 잭슨의 진지를 포격하였지만 대부분의 남군은 숲속에서 안전하게 피신하였다. 잭슨은 자신의 포대 위치가 파악되지 않기 위해 이에 응사를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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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드 사단의 공격에 응사하는 펠함과 1문의 대포
 
 
 포격이 종료하고 미드 사단이 진격한 때는 11시였다. 남군에게는 불행하게도 미드 사단이 숲 속을 뚫고 진격한 지점은 A.P 힐이 부대를 배치하지 않은 바로 그 장소였다. 미드의 3개 여단은 600미터의 틈새를 파고 들어 좌우에 포진한 남군 아쳐와 레인 여단의 배후를 기습하였다. 그리고 남군 2진에 배치된 그레그 여단을 공격하였다.
 레인과 아쳐 여단은 배후에서의 공격으로 무너졌다. 그레그 여단장은 자신의 부대에 북군이 나타나자 남군끼리 오인사격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수풀이 우거졌기 때문에 상황파악이 잘 되지 않았다. 그레그 여단장은 북군에게 저격당했고 이틀 뒤에 전사한다.
 미드 사단은 잭슨 진지의 틈새를 뚫고 들었지만, 프랭클린의 지원이 부족하였다. 앞서 말했듯이 프랭클린은 지형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에 전 군단을 진격하기를 망설인 것이다. 숲이 우거진 지형으로 인해 미드의 공격 성공에 대해서도 파악이 늦었다. 그 동안에 잭슨은 좌우의 부대를 동원하여 미드 사단을 에워쌌다.
 스톤웰 여단과 조지아 여단이 좌우에서 반격을 가하고, 배후에 있던 D.H 힐과 얼리 사단도 지원을 왔다. 잭슨 군단의 50문의 포대도 미드 사단에게 쏟아졌다. 미드 사단은 25프로의 손실을 입고 패주하게 된다.
  
  약간의 행운과 미드 사단의 분투로 인해 잭슨 군단의 허를 찌를 수 있었지만, 프랭클린에게는 그러기 위한 능력과 열의가 부족하였다. 미드 사단의 공격이 와해되자 프랭클린은 나머지 5개 사단을 배치한 뒤 정지하였다. 이 때가 오후 2시로, 프랭클린 군단은 이 날 더 이상 잭슨 진지에 공격을 하지 않았다.

 
 한편 롱스트리트 진지를 공격하기로 되어 있던 섬너의 군단은 3만이었다. 섬너의 공격은 프랭클린의 공격 성공에 호응하기 위한 양동작전이었지만, 어쨌든 1개 사단의 공격을 통해 메어리스 하이트의 고지를 점령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오전 11시, 섬너 군단의 프렌치 사단이 전투 대형을 갖추고 진격을 시작했다.
  이에 맞서는 롱스트리트 군단은 철통같은 방어진지를 완성시켰다. 메어리스하이츠에 도착한 지 하고 20일 동안, 롱스트리트 휘하 포병지휘관인 포터 알렉산더는 전장 전체를 장악하도록 포대를 면밀하게 계산하고 배치하였다. 북군이 공격을 시작할 때, 롱스트리트는 포터 알렉산더에게 포대의 배치 상황을 물었다. “장군, 우리는 이 지역을 참빗으로 빗질하듯이 쓸어버릴 수 있습니다. 이 벌판에서 닭 한마리 살아남지 못합니다.” 알렉산더가 장담하면서 한 말이다.
  북군 포진지인 스텐포드 하이트에서 섬너 군단의 공격을 지원하기 위해 수백문의 포가 남군에게 사격을 하였다. 번사이드는 프랭클린에게 후커 군단의 2개 사단을 지원보냈고, 남군의 포사격에 망설이는 섬너 군단에게 진격을 명령하였다. 이 무렵 북군의 작전은 변경되었는 데, 남북 양진지에 대한 정면돌격이 되어 버렸다. 계속된 작전 차질로 인해, 이 무렵의 북군 사령부는 이성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프레데릭스버그 뒤편의 벌판에는 가운데 운하가 흐르고 운하를 지나는 다리는 2개 뿐이었다. 이 운하를 넘어서서 400미터를 더 가야 남군 진지가 나왔다.
  섬너 군단의 선두 프렌치 사단은 3개 여단이 1개 여단씩 전진을 하였다. 선두 여단은 킴볼 여단으로 운하를 지나는 다리에서 부대가 정체되기 시작했다. 롱스트리트의 포대는 군단 포대 112문에, 펜들톤이 지휘하는 36문의 예비포대로 합이 148문이었다. 150문 가까운 남군의 대포는 포터 알렉산더의 장담대로 전진하는 북군 대오를 찢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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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담 뒤에서 북군에게 사격하는 코브 장군의 조지아 여단
 
 
 북군은 남군의 포사격을 뚫고 메어리스 하이츠로 진격하였다. 그들을 전방에 있는 롱스트리트 군단의 1진은 7000명 정도였고, 그 중 코브 준장의 조지아- 노스캐롤라이나 여단으로 병력은 2000명에 불과했지만, 돌담벼락 뒤쪽의 움푹 들어간 도로에 위치하여, 돌담 뒤에서 서서 사격할 수 있었다. 코브 준장은 자신의 담당 구역에서만 북군 1만을 처치할 것을 장담했다.
 
  킴볼 여단은 남군의 포격을 뚫고 700미터나 행군하여 돌담 바로 앞까지 갔지만 2000명의 일제 사격을 견디지 못하고 녹아버렸다. 여단의 4분의 1이 살상되었다. 200미터 뒤에 앤드류 여단이 뒤따라 왔고 킴볼여단과 뒤섰여서 남군을 공격하였다. 2개 여단에 남군의 포격과 총격이 쏟아졌다. 잠시 버티는 동안 3번째 여단인 팔머 여단이 도착했다. 3개 여단이 돌담 앞에서 남군의 사격을 버티면서 응사를 시도하였다. 하지만 상대는 돌담 뒤에서 사격하였고, 한쪽은 개활지에서 서서 응사하기 때문에 게임이 되지 않았다. 돌담에서 100미터 이상 전진할 수 없었다.
  프렌치 사단은 1200명의 사상자를 내고 후방으로 도주하였다. 이 시점에서 북군은 롱스트리트의 진지를 정면으로 공격하는 것을 중단해야 했지만, 이미 북군은 이 곳에서 결판을 보기로 하였다. 곧 섬너 군단의 2번째 사단인 핸콕사단이 전진하였다.
  핸콕 사단의 병력은 5천명으로, 포토맥 군에서도 정예부대였다. 특히 1200명의 매거 준장의 아이리시 여단은 그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부대였다. 이들은 특유의 녹색 기를 들고 진격하였다.
  핸콕의 첫 번째 여단은 칼드윌의 여단으로, 조슈아 체엄벌린의 메인 20연대가 소속된 부대였다. 이들은 돌담 80미터까지 전진하였지만 역시 돌파할 수는 없었다. 뒤이어 도착한 아이리시 여단, 절반가까운 사상자를 내고 무너졌다. 세 번째로 도착한 주크 장군의 여단 역시 돌담을 돌파하지 못했다. 핸콕 사단의 사상자는 2000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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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어리스 하이츠 아래에서 남군을 공격하는 체엄벌린의 메인 20연대
 

 
  세 번째로 돌담에 도전하는 북군 사단은 하워드 사단이었다. 이 때가 오후 1시였는 데, 오웬 여단이 선두에서 전진하고, 홀 대령의 여단이 뒤에 따라왔다. 셜리 여단이 프레데릭스버그 외곽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남군의 포격은 전보다 더 격렬했으며, 하워드 사단은 700명의 사상자를 내고 도주하였다.
 
  이로써 코우치 장군이 지휘하는 2군단 3개 사단이 모두 돌담 앞에서 녹아버렸다. 하지만 아직 북군의 공격은 끝나지 않았다. 윌콕스 장군이 지휘하는 9군단의 스터기스 사단이 네 번째로 돌담에 도전하였다. 스터기스 역시 자신의 사단을 1개 여단씩 돌담 앞으로 보냈고, 북군은 용감히 싸웠지만 앞서 간 부대와 같은 운명을 맞았다. 돌담 앞에 북군 시체가 수천명씩 더 얹어졌다.

 
 오후 2시가 되자, 번사이드도 프랭클린의 공격이 실패했다는 것을 보고받는다. 번사이드는 프랭클린에게 재차 공격할 것을 명령하고, 파괴된 섬너의 부대를 대신하여 후커 군단이 진격할 것을 명령한다. 후커는 성공가능성이 무척 희박하다며 공격을 중단할 것을 건의했지만, 전방에서 코우치 군단이 돌담을 확보했다는 오보가 도착했다. 번사이드는 여기서 승부를 봐야 한다며 후커 군단에게 전진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 무렵에는 리 장군도 북군의 계속된 공격으로 좌익이 불안했기 때문에, 중앙에 배치했던 피켓 사단을 돌담 주변으로 증원을 보냈다. 돌담을 담당했던 코브 장군이 전사했기 때문에, 란섬 장군이 부대를 지휘하였고 커쇼우의 사우스캐롤라이나 여단이 증원되었다. 메어리스하이츠는 보다 강력한 상태였다.

 
 5번째로 돌담을 도전한 부대는 후커 군단의 험프리 사단이었다. 험프리 장군은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 시절 리장군의 동기생이었다. 험프리 사단 역시 1개 여단씩 용감하게 돌진했지만 역시 돌담을 돌파하는 데는 실패한다. 험프리 장군은 말이 세 필이나 죽으면서 부하들을 독려했지만 1000명의 사상자를 낸 부대는 와해되었다.
 핸콕은 남군의 돌담을 우회하기 위해 게티 사단을 남쪽으로 보내고 그리핀 사단을 남군 진지 우익으로 보내었다. 하지만 이 무렵에는 북군이 오랜 살육으로 인해 지쳐있었고, 빨리 해가 져서 전투가 끝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게티 사단의 첫 번째 여단이 돌담에서 쏟아지는 사격으로 와해되자 나머지 북군도 진격을 거부했다. 그렇게 하루가 끝났다.

 
 이 날 북군이 롱스트리트 진지에 무려 17번이나 돌격하였다. 17개 여단이 돌격을 하여 각자 절반에 가까운 사상자를 내었다. 프레데릭스버그 전투에서 북군이 입은 사상자의 숫자는 1만 2천이 넘었고, 그 중에 8천명이 돌담을 공격하다가 발생했다. 남군의 사상자는 전체 5천명이 좀 넘었는 데, 그 중에서 돌담에서 입은 손실은 300명이 안 되었다.

 
  프레데릭스버그 전투는 미 육군 역사상 가장 처참한 패배로 기록된다. 건국 시에 영국군과의 전투에서도, 1차세계대전이나 2차세계대전에서도 미국 육군이 이렇게 처절하게 피를 흘린 적은 없었다. 한 진지에 무려 17번이나 공격을 가하고 실패한 전투는 남북전쟁 뿐만 아니라 그 뒤 역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남북전쟁을 통해 발달하게 된 ‘야전축성’에 있었다. 종전까지 통용되던 전투방식은 부대가 정렬하고 상대방을 동시에 저격하는 방식으로, 몸 전체를 드러내고 서로 사격을 가하였다.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는 우수한 방어진지 뒤에서 몸을 숨긴 방어군에게 통할 수가 없었다. 남북전쟁은 이제 더 이상 중세식 전투방식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전쟁으로, 그것을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첫 번째 사례가 바로 이 프레데릭스버그 전투였다.

 
  12월 13일 전투가 종료하자, 리는 전군에 참호를 팔 것을 명령한다. 사실 12일의 전투 당시 남군은 야전축성을 제대로 하지 않은 상태였다. 워낙에 남군의 진지가 강력한 데 축성까지 하면 북군이 공격해오지 않을까 두려워 한 것이다. 하지만 이미 북군이 공격을 가했으니 진지구축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맥클레란보다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번사이드는 아직도 남군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자신이 지휘했던 9군단을 이끌고 돌담을 공격하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다음날 남군의 진지를 살펴보자, 상황이 보다 어려워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군의 진지는 축성까지 겹쳐서 도저히 돌파불가능하였다. 그는 공격계획을 포기한다.
  그렇다면 시가지를 사수할 것인가? 번사이드로서는 그러고 싶었지만 부대의 사기가 심각하게 떨어져 있었다. 부하 장군들은 남군이 진지에서 밀고 내려와 포토맥군을 강으로 쓸어버릴까 두려워하였다. 사실 13일 밤에 잭슨이 그런 건의를 리에게 한 바있다. 잭슨은 야간에 자신의 군단과 스튜어트의 기병을 동원하여, 지친 북군을 강가로 밀어버리려고 하였다. 야간전에 아군을 표시하기 위해 부대원에게 흰띠를 어깨에 대도록 지시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리는 작전이 너무 위험하다며 승인하지 않았다.
  번사이드로서는 부하장군들이 후퇴하자고 하는 데 어쩔 도리가 없었다. 9월 15일 밤에 전군의 철수를 시작하고 16일 아침까지는 도하가 완료되었다. 이 때 번사이드와 가장 친한 부하 장군인 섬너 장군이 사직을 권고하였지만 번사이드는 거부하였다.
  번사이드는 다시 남군을 공격하기를 원했다. 남군의 허를 찌르기 위해, 프레데릭스버그 남쪽에서 전군이 기습적으로 도하하여 남군의 측면을 강타하기를 원했다. 동시에 기병대가 북쪽에서 도하하여 남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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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맥 군의 최대 굴욕이라는 번사이드의 진흙 행군
 
 
  북군의 기동은 1863년 1월 20일에 시작되었다. 한겨울이지만 계절답지 않게 날씨가 포근했다. 그날 저녁, 폭우가 쏟아져서 이틀동안 그치지 않았다. 이틀동안의 폭우로 길은 온통 진흙탕이 되었고, 기습은 커녕 진흙속에서 이동하는 데만 진이 빠졌다. 강건너에서 남군이 따라오면서 진흙속에서 고생하는 북군을 보고 놀려댔다. “어이 양키들, 리치먼드 가는 길은 이쪽이야!” 북군은 이 굴욕 속에서 죽어라 고생하게 만든 자신들의 사령관을 원망하였다. 이것이 번사이드의 ‘진흙 행군’이다.
 번사이드는 자신의 무력감에 몸을 떨면서 팔머스의 진지로 되돌아가는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이 포토맥군 사령관으로서 그가 한 마지막 작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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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한번 승리를 가져온 리와 부하 장군들. 스튜어트, 잭슨, 롱스트리트, 포터 알렉산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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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부여 | 작성시간 08.01.01 jager님의 남북전쟁사를 읽어보고 남북전쟁에 푹 빠져 요즘은 아예 남북전쟁 게임까지 즐기고 있습니다^^ 이번에 저도 남북전쟁에 대해 좀더 알아보고싶어 책을 사볼까 하는데 조언좀 부탁드립니다 시중에 남북전쟁에 관한책은 김준봉씨 책과 박정기씨책이 있던데 jager님께선 어떤 책이 더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 답댓글 작성자jager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8.01.01 입문서로는 박정기씨, 그거 일독한 뒤에 김준봉 씨의 책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고 싶으면 원서를 구해야 됩니다.
  • 작성자리카르도 | 작성시간 08.01.01 잘 읽었습니다. 맥클레란은 카리스마는 있는데 결단력이 없는 반면 번사이드는 자신의 강한 의지를 뒷받침해줄 능력이 부족하군요.
  • 작성자Balian de Ibelin | 작성시간 08.01.02 이대목이 바로 신의영웅들에 나오는 전투죠...너무나 처참했던전투 얼마안가 리장군도 게티즈버그에서 저런 결정을 내리게된다는건 정말 아이러니합니다 헌데 정말 뜻밖에도 포토맥군병사들에게 가장 인기가 높았던 지휘관은 그랜트가 아니라 맥클렐런이었다는 사실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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