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3일, 스튜어트군단의 공격과 얼리 사단의 방어
1862년 5월 2일, 잭슨은 놀라운 기습을 달성했지만, 아직 북군의 우세는 여전하였다. 잭슨군단이 하워드의 11군단을 격파했다 해도, 아직 슬로컴 12군단과 코우치 2군단이 정면에 있었고, 시클스 3군단과 11군단의 잔병들이 우익에 있었으며, 미드의 5군단과 프레데릭스버그에서 도착한 레이놀드의 1군단이 좌익에 있었다. 스튜어트가 잭슨군단을 인수했을 때, 아직 이 지역의 북군의 병력은 8만으로 남군 전체병력보다 많았다. 북군 사령관이 침착하게 대처만 했어도 스튜어트의 군단은 좌우가 고립된 채 궤멸될 수도 있었다.
특히 이 지역 전체를 제압할 수 있는 하젤그로브 고지와 페어뷰 고지가 모두 시클스 3군단이 장악하고 있었다. 하젤그로브 고지는 스튜어트의 군단과 리장군의 부대가 연결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요충지로, 이곳을 차단할 수 있으면 남군은 연결이 끊긴다.
시클스는 전날의 전투에서 우수한 전투력을 보인 자신의 군단으로 이 고지를 사수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후커가 보기에는, 시클스의 위치는 스튜어트와 리의 부대 사이에 낀 취약지대로 보였다. 북군 주력과 3군단이 고립될 수 있다는 생각에, 후커는 시클스에게 하젤그로브에서 나와 페어뷰 일대의 방어진에 합류하라고 하였다.
하젤그로브 고지에서 북군 진지를 바라본 모습
한편 스튜어트는 오랜 기병 정찰의 경험으로 하젤그로브의 가치를 쉽게 간파하였다. 5월 3일의 주 공격목표로 하젤그로브 고지를 잡았다. 만약 북군이 이 고지를 사수해 내면, 이 전투는 남군의 대패로 끝날 수 있었다. 스튜어트는 잠도 자지 않고 공격계획을 짰다.
시클스가 후커로부터 페어뷰로의 철수지시를 받은 것은 5월 3일 5시 무렵이었다. 명령대로 3군단은 하젤그로브에서 철수하였다. 철수가 채 끝나기도 전인 오전 5시 반, 스튜어트의 힐 사단 예하 아쳐 여단이 선두에서 하젤그로브로 진격하였다. 필사의 각오로 고지에 달려든 남군은 미쳐 떠나지 않은 100여명의 북군과 4문의 포대를 노획하였다. 스튜어트는 직접 고지로 달려와서 북군을 향해 모자를 흔들며, “파이팅 조 후커, 우리 동네에서 꺼져!” 라고 소리쳤다.
스튜어트는 즉시 30문의 대포를 하젤그로브에 배치하도록 하였다. 포터 알렉산더가 추가로 20문의 포를 가져와서 50문으로 늘렸다. 여기에 리의 부대인 엔더슨 장군이 지원사격을 가했다. 곧 남군의 화력이 북군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스튜어트의 기세에 호응하기 위하여 리장군도 부대를 전진시켰으며, 오전 8시, 첸슬러슨빌 전방으로 진격하였다. 역습에 역습을 거듭한 격전이었으며, 3번이나 리의 부하들이 북군 진지를 탈취했지만 3번이나 북군이 다시 장악하였다. 페어뷰의 북군 포대는 필사적으로 남군을 저지하였지만, 이미 하젤그로브의 남군포대는 70문이나 되었다.
저돌적인 스튜어트의 지휘와 남군 최고의 포술가라는 포터 알렉산더의 포대에 의해 전세가 결정되었다. 오전 9시, 페어뷰의 북군 포대는 견디지 못하고 후퇴한다. 페어뷰의 포기는 곧 챈슬러슨빌의 포기로 이어졌으며, 오전 10시, 스튜어트는 북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챈슬러슨빌로 진격한다. 스튜어트는 자신이 직접 포대를 인솔하여 플랭크 도로 상에 배치한다.
이 때 북군 사령관 후커는 사령부인 챈슬러 집에 있었는 데, 남군 포대에서 발사된 포탄이 집을 명중하고 후커는 땅바닥에 내팽개쳐진다. 다친 곳은 없었지만 의식이 멍해진 상태였다. 후커는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도 지휘권을 선임 지휘관인 코우치에게 넘겨주는 것을 거부한다. 이로써 이 지역의 북군 작전에 큰 차질이 생긴다.
챈슬러슨빌에서 필사적으로 싸우는 북군 기병대
후커는 남군이 서, 남, 동 세 방향에서 자신의 부대를 맹렬하게 공격하는 상황에서 북군을 챈슬러슨빌에서 후퇴하여 강가에 진지를 구축하기로 한다. 이 진지는 통나무를 이용하여 엄청나게 두껍게 축성된 요새로, 전날 밤에 후퇴하는 상황을 대비하여 축성한 것이다. 강가의 여울목 주변으로 10킬로 정도 되는 진지였다.
후커가 챈슬러슨빌에서 후퇴하자, 리장군의 부대와 스튜어트의 군단은 챈슬러슨빌에서 만났다.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승리였다. 이 승리의 정점에서 리장군은 애마 트레블러를 타고 부하들의 앞에 나타났다. 격전으로 인해 얼굴에 매연이 짙은 병사들, 부상당하여 동료들에게 부축받는 병사들, 지쳐서 절뚝거리는 병사들 모두 리장군의 모습에 열광적인 환호를 보냈다. 리 장군은 그들 모두가 그토록 원하던 승리를 가져다 줬다.
리의 참모인 마샬 대령은, “ 마치 고대인들이 군신을 우러러 칭송하는 듯 하였다.” 라고 회고하였다. 리의 인생에 있어 절정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리는 이 승리를 가져다 준 잭슨이 중상을 입었음을 알고 있었다. 병상에 있던 잭슨이 리장군에게 승리를 축하하는 메시지를 보내자, “만면에 수심이 짙어졌으며, 리장군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오늘의 승리는 잭슨의 힘이네. 모두 자네 덕이야.’ 라고 말했다.”
챈슬러슨빌 시내에서 환호받는 리장군
이제 남군은 연결되었으며, 후커의 북군을 3방향에서 둥글게 에워싼 형태였다. 오후의 공격을 준비하려 했지만, 동쪽에서 급보가 날라왔다. 세지윅이 얼리의 방어선을 돌파햇다는 것이다.
세지윅의 북군은 레이놀드의 1군단이 이동하였기 때문에 2만 4천이 남았다. 하지만 그래도 얼리의 남군보다는 2배가 넘었기 때문에, 세지윅은 전방에 포성이 들리자 이에 호응하기 위해 프레데릭스버그로 도하하여 얼리의 진지를 공격하였다. 공격진지는 전과 같은 메어리스하이츠였다.
워낙 천연적으로 강력한 진지였기 때문에 얼리는 바크스데일의 미시시피 여단 1000명으로 세지윅의 주공을 막아낼 수 있었다. 3번이나 돌격을 하였지만 여전히 돌담을 격파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북군 지휘관인 위스콘신 5연대의 알렌 대령이 기지를 발휘하여, 백기를 들고 남군 진지로 가서 부상자와 전사자의 매장에 협조하도록 교섭하였다. 당시 남북전쟁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남군 지휘관이 대령을 돌담 뒤쪽으로 오게 하여, 남군의 방어라인이 얼마나 취약한 지를 정탐하게 하였다.
부대로 돌아온 알렌대령은 북군 전원에게 착검을 명령한 뒤 사격조차 하지 않고 그대로 돌담으로 뛰어들었다. 이 때 남군도 착검하여 달려들었다고 하지만 워낙에 열세였기 때문에 돌파되어 버렸다. 대포만 8문이 노획되었다. 돌담의 돌파로 인하여 얼리는 자신의 사단 전체를 서쪽으로 후퇴하였다.
하지만 얼리장군은 1차 불런전투부터 시작하여 주요전투는 모두 참전한 노련한 장군이었다. 이러한 위기상황에도 침착하게 대처하여, 북군의 진격을 서서히 저지하면서 남군의 지원이 오기를 기다렸다. 북쪽 뱅크스 여울목을 사수하던 윌콕스 여단의 병력도 가세하여 세지윅의 진격을 4차례나 저지한다.
리장군은 얼리의 급보를 받는 즉시 맥크로우의 사단 전체와 앤더슨의 1개 여단을 동쪽으로 보냈다. 전방의 후커는 진지를 구축한 뒤에서 웅크리고 있었기 때문에 위험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다. 3만 5천 남짓한 남군으로 8만의 북군을 대치하게 한 뒤, 2만 1천으로 세지윅의 2만을 공격하게 한 것이다. 놀라운 용병술이었다.
5월 4일, 세지윅의 군단을 몰아붙이는 남군
얼리 사단과 리의 증원군이 합류한 곳은 살렘 교회 일대였다. 진격하는 세지윅을 2킬로 남짓 뒤로 밀어 붙인 뒤에 날이 저물었다. 리장군은 다음 날 세지윅에 대한 섬멸전이 되기를 희망하였고, 앤더슨 사단의 남은 여단까지 합류시켰다. 이제 병력이 세지윅보다도 앞서게 되었다.
다음날인 5월 4일, 남군은 얼리와 맥크로우, 앤더슨 사단이 3방향에서 세지윅을 몰아붙였다. 얼리사단은 매우 저돌적으로 공격하여 메어리스하이츠를 다시 장악하고 동쪽에서부터 세지윅을 공격하였다. 불행히도 맥크로우 사단과 앤더슨 사단이 적절하게 움직이지 못하여, 리가 기대한 섬멸전은 되지 못했다.
세지윅의 군단이 처절하게 싸우는 동안, 후커는 아직도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자신의 부대를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그토록 비난했던 전임자인 번사이드만도 못한 행동이었다. 그는 리장군을 상대하기에는 너무도 부족한 장군이었던 것이다.
5월 4일, 남군의 공격은 기대에 못미치게 끝났다. 그래도 북군을 둘로 나눠서 고립시킨 상황에서, 리는 다음날에는 기필코 북군을 섬멸하기를 원하였다. 항상 그랬지만, 리는 북군에게 큰 타격을 입히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다음날인 5월 5일, 리는 얼리사단 쪽으로 보낸 부대들을 다시 복귀시켜 후커의 부대에 대한 공격준비를 하였다. 면밀한 정찰 끝에, 후커의 진지 우측으로 공격하여 북군을 퇴로인 여울목과 분리시키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어느 정도 준비를 마치자 날이 저물고 있었다. 리장군은 다음날의 공격을 기약하며 잠에 들었다.
하지만 후커는 리의 공격을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리가 공격준비를 끝낸 그 순간, 후커는 철수준비를 끝냈다. 여러 군단장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5월 5일 밤에 후퇴를 시작하였다. 포병대를 선두로 하여 보병이 뒤에서 강을 도하하였다. 세지윅의 군단도 역시 강을 건너 철수하였다.
5월 6일, 리장군이 북군 진지에 대한 공격명령을 내리고 힐 사단 (힐의 부상으로 헤스가 지휘함)의 팬더여단이 선두에서 진격하였다. 팬더장군은 전방에서 진격하는 동안, 북군이 이미 강을 건너 떠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즉시 사령부로 돌아와 리장군에게 보고했다.
리장군은 대노하였다. “팬더장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이게 자네들의 방식인가? 자네들은 북군이 도망치도록 나뒀어! 내가 어떻게 해야될 지를 말했는 데 자네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 리장군은 화를 삭이지 못한 채, “빨리 쫓아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북군을 공격해!”
하지만 펜더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이미 북군은 모든 부대, 포대, 보급품까지 안전하게 강을 건넌 것이었다. 리장군은 이 놀라운 승리를 거둔 뒤에도 북군을 완전히 섬멸시키지 못한 것 때문에 비통해 하였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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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프란츠 작성시간 08.01.14 역시 리본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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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Balian de Ibelin 작성시간 08.01.16 리장군이 비록 반란군의 수장(물론 북부의 입장에서죠)이긴 하지만 북부내에서도 그를 존경하는이는 많았습니다. 리장군은 개인적으로는 노예제 반대론자였고 인격적으로도 흠잡을데가 없는 인물이었죠(어떤경우에도 남을 힐책하거나 비난하지 않았다더군요 심지어는 적들을 지칭할때도 단지'그들'로 칭했다고 합니다)더군다나 군에 종사하는이들에겐 거의 군신수준이죠...근대전방식의 전투에서 리장군을 능가할만한 지휘관이 얼마나 될까요 전후 대학총장이 되어 미국의 교육에 남은 평생을 바쳤다는점은 후일 리장군이 더욱더 존경받게 되는 이유가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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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Balian de Ibelin 작성시간 08.01.16 14일에 정동진에서 켄터키에서 왔다던 미국인들을 만났는데 남부에선 정말 신격화수준이라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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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truebard 작성시간 08.01.19 남북전쟁 통틀어서 본좌급 장군이며 본좌급 인격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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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임용관 작성시간 09.08.10 리 장군이 정말 대단한 분이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