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와 남부의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로 인한 불화를 극복하지 못하고 야전에서 결판을 내도록 한지 어느새 2년이 지났다. 북부와 남부의 엄청난 물량차이로 인해 몇 주만에 결판을 낼 것이라 예상되던 전쟁이 그만큼 지나간 것이다. 이는 연방의 준비력 부족에도 있었지만, 남부에 나타난 한 노장에 의한 영향이 더 컸다. 로버트 리 장군. 북부의 총사령관 직위를 거절하고 남부로 내려간 이 장군은 12만의 북군이 남부 수도 옆의 반도에 상륙한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동부전선의 사령관이 되어 추종할 수 없는 대담성과 리더십으로 북부를 연거푸 격파하고 워싱턴을 압박하였다. 그의 부하들은 그를 ‘군신’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남부는 북부에 비해 열세였다. 리가 동부전선에서 북군을 연이어 격파하는 동안, 서부에서는 북부의 압도적 저력이 서서히 발휘되었다. 그랜트라는 출중한 장수의 활약으로 포트 헨리, 도넬슨이 함락되어 테네시주의 관문이 열린 이후, 서부의 남군은 샤일로에서 그랜트를 기습하여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하지만 북군의 증원군이 도착하여 실패하였다. 이후 패러굿 제독이 미시시피 남쪽 뉴올리언즈를 함락시키고, 그랜트의 북군과 패러굿의 해군은 미시시피 강의 여러 거점들을 함락시켰다. 마지막 남은 요새가 빅스버그로, 이 요새의 함락은 남부연맹이 두동강으로 쪼개지는 결과를 의미했다. 미시시피 서쪽의 인적, 물적 자원을 사용할 수 없어 가뜩이나 부족한 남부의 전쟁수행력을 약화시키는 셈이다.
리 장군이 2차 북부침공을 계획한 것은 이 시점에서였다. 그랜트의 엄청난 추진력은 몇 번의 실패 끝에 빅스버그를 내륙지방에서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남부연맹에서는 빅스버그에 대한 구원군으로 리의 북버지니아군 중 2개사단의 증원을 요청했지만, 리는 2개사단을 증원하는 것은 시기적으로 이미 늦었고, 결정적 영향력을 줄 수가 없다고 판단했다. 대신 리는 빅스버그의 함락으로 인한 손해를 자신의 북버지니아군의 승리로 만회하기로 결심했다. 즉 다시 한번 북부로 쳐들어가서, 북군을 공격하여 패주시킴으로써, 워싱턴을 압박하여 빅스버그를 포위 중인 북군을 증원하게 만들거나, 적어도 그 치명적 패배가 무색해지도록 여론을 조성할 생각이었다. 리는 장기적인 안목에서, 남부가 전쟁을 오래 수행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리치먼드에서 농성하다 항복하거나 북부로 쳐들어가는 수 밖에 없는 상태다.”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미국 남북전쟁 최대의 전투 게티즈버그는 이처럼 열악한 남부의 상황을 만회하기 위한 리의 필사적인 시도였으며, 반드시 승리, 그것도 대승리가 필요한 절박한 도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