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0일, 리의 북버지니아군 2군단인 이웰의 군단이 세넌도어 계곡으로 진격을 시작했다. 세넌도어 계곡은 버지니아주와 북부 팬실베니아주 사이의 계곡으로, 과거 스톤웰 잭슨이 1만8천 병력으로 계곡을 종횡으로 누비면서 북군 6만을 농락한 적이 있었다. 이웰은 당시 잭슨 휘하 사단장으로서, 길안내 역할을 맡은 것이다. 이어서 힐군단과 롱스트리트 군단이 뒤를 이었다. 총병력은 7만 5천명이었다.
6월 28일, 북버지니아군은 팬실베니아주로 넘어갔다. 최초의 복안은 팬실베니아주도 해리스버그 공략이었다. 하지만 북군의 정찰을 담당하기 위해 북군의 주변을 우회하러 간 스튜어트 기병대는 이 시점에서 연락이 끊긴 상태였고, 북군이 북쪽으로 신속히 이동한 상태를 보고하지 못했다. 오후 10시, 롱스트리트의 첩자인 헨리 해리슨이 북버지니아군에 도착하여 북군의 움직임과 사령관의 교체를 보고했다. 북군은 9만 5천의 병력으로, 이미 하루 행군거리인 프레데릭 근처를 지났다는 것이다. 신임 사령관 미드는 전임 사령관 후커에 비해서 영리한 사람이었다. 리는 이 보고를 받고 해리스버그 공략을 취소하고 이웰의 군단을 남쪽으로 집결토록 하였다.
7월 1일, 힐군단 예하 헤스 사단은 사단의 신발을 구하기 위해 팬실베니아 중부 게티즈버그에 들어섰다. 당시 리 장군은 부대가 집결하기 전에 북군과의 충돌을 피하라고 명령하였지만, 헤스 사단장은 기껏해야 민병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게티즈버그에 진입했다. 하지만 전날 북군 기병대장 뷰포드는 이 지역의 중요성과 전략적 거점(중부 팬실베니아를 지나는 10개 도로가 지나가고 있었다.) 을 간파하고 2개 기병여단을 배치한 상태에서 북군 본진이 집결하기 위해 시간을 벌려하고 있었다.
맥퍼슨 리지에 부대를 배치하는 북군 뷰포드 기병대장
헤스 사단은 북군 기병대와 조우하고 놀랐지만, 소수의 정찰대라 생각하고 밀어붙였다. 하지만 북군 기병대의 저항은 상당하여 2개 여단은 퇴각하고 아쳐 여단장이 생포되었다. 헤스사단장은 남은 여단 2개를 동원하여 북군을 거의 밀어내는 시점에서 뷰포드의 전갈을 받고 급속 행군한 북군 레이놀드 1군단이 도착하였다. 레이놀드는 헤스 사단을 밀어낸 뒤, 지형을 살펴보고 이 곳을 결전장으로 정한 뷰포드의 혜안에 감탄했다. 자신의 1군단과 하워드의 11군단을 도착하는 대로 게티즈버그 북쪽에 배치하도록 하였다.
북군 기병대 절체절명의 순간에 도착한 북군 1군단장 레이놀드
리 장군은 포성을 듣고 달려온 뒤, 자신의 명령이 있었음에도 전투가 발생한 데 당혹해하였다. 당시 스튜어트의 기병대도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북군의 규모와 위치에 대한 정보도 없는 상태였다. 일단 롱스트리트의 군단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지만, 이웰의 군단 중 얼리 사단과 로저스 사단이 도착하고, 힐 사단의 팬더 사단이 도착하자, 헤스의 사단과 함께 북군을 공격하게 하였다.
레이놀드의 1군단은 게티즈버그 서쪽 맥퍼슨 리지에 포진하고, 하워드의 11군단은 북쪽에 포진하였다. 레이놀드는 전투 초반에 전방에서 남군 저격수에게 저격되어 전사하고, 더블데이 사단장이 뒤를 이었다. 당시 1군단은 3개 사단으로 워즈워스, 로빈슨, 더블데이 사단이었다. 특히 워즈워스 사단 예하 메레디스 여단은 ‘강철의 여단’이라고 불리며, 실전에서 한번도 패주한 적이 없다는 북군 최정예 여단이었다. 헤스 사단은 재차 워즈워스 사단을 공격했지만, 남은 2개여단도 패주하고 말았다.
북군 최강의 여단이라는 강철의 여단. 그들의 높다란 검은 모자는 남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레이놀드의 1군단 전면은 사정이 좋았지만, 북쪽의 하워드 11군단은 그렇지 못했다. 오후 3시, 이웰 군단의 얼리 사단이 북동쪽에서 나타나 하워드의 우측을 공격했다. 동시에 로저스 사단이 1군단과 11군단의 연결부분을 공격하면서, 헤스 사단을 대신한 힐 군단의 팬더 사단이 1군단을 재차 공격했다. 얼리 사단에게 우측면이 노출된 11군단은 견디지 못하고 오후 4시 패주하게 된다. 측면이 비어버리자 1군단도 게티즈버그를 지나 퇴각하게 된다.
당시 북군 2개 군단은 만 8천 7백명 정도가 동원되었는데, 북군의 피해는 포로 3천을 포함하여 무려 9천이었다. 특히 헤스 사단과 정면으로 부딪쳤던 강철의 여단은 1829명 중 무려 1153명이 사상되었다.(63퍼센트가 넘는다.) 남군은 2만 5천을 동원하여 6천 5백의 사상자를 냈다.
7월 1일 전투에서 남군은 북군 진지를 돌파하였지만 북군은 후방에 재정비할 공간을 마련할 수 있었다.
격전 끝에 승리를 거뒀지만, 북군의 주력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핸콕의 2군단이 북군이 패주하는 순간 도착하였는 데 게티즈버그 남쪽의 세미터리 힐과 컬프스 힐을 요새화 하도록 명령한다. 4시 반, 리 장군은 이웰 장군에게 남쪽의 고지인 세미터리 힐을 공격하도록 명령한다.
흔히 게티즈버그 첫날의 세미터리 힐 접수 실패를 이웰의 유유부단함에 돌리고는 하는 데, 실제로는 리의 명령에도 문제가 있었다. 리는 아직 북군과의 대규모 전투를 하기에는 부대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가능하면’ 접수하도록 하되 전면적인 전투를 피하도록 하였다. 이 명령을 받은 이웰은 휘하 3개 사단 중 얼리와 로저스 사단은 격전으로 지쳐있는 상태이고, 아직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존슨 사단을 동원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한 상태였다.
이미 북군은 포대를 구축하였기 때문에, 공격하자면 증원이 필요한 상태였다. 하지만 리 장군은 얼리 사단 중에서도 정예인 고든 여단과 스미스 여단을 경계로 배치하고, 힐 군단의 7천 1백명의 앤더슨 사단은 예비로 남겨두게 하였다. 이는 북군을 정찰할 수 없었던 불안감으로 인해 부대를 예비로 남겨놓고 경계를 한 듯 하지만, 이로 인해 게티즈버그 남쪽 고지를 점령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 버렸다.
게티즈버그 전투 첫날을 종합하면, 격전 끝에 남군이 북군 일부 병력을 밀어냈지만 지역을 제압하는 고지를 차지하는 데는 실패한 불완전한 승리였다. 이제 북군은 7개 군단 8만 병력이 게티즈버그에 집결하였다. 전초전이 끝나고 대전투를 앞두게 되었다.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저스티니안™ 작성시간 08.02.02 오 리장군 ㅜㅜ
-
작성자스키피요 작성시간 08.02.02 카리스마 리~역시 리죠..ㅋㅋ
-
작성자Balian de Ibelin 작성시간 08.02.02 아...리빠기질 또다시 발동되려한다는 ㅡㅡ;; 핸콕장군은 초기북군지휘관중 상당히 뛰어난인물임에도 멍청한 상관들덕에 물을 너무많이먹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
작성자기러기 작성시간 09.09.19 흠..그래도 북군 기병대장 뷰포드의 탁월한 지형 선택과 1군단장 레이놀드의 구원병 도착이 이 전투의 또 다른 승리의 열쇠라고 생각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