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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ger] 체첸항쟁사

미국 남북전쟁- 게티즈버그 전투 4. 7월 2일 2부 [알려지지 않은 결정적 순간들]

작성자jager|작성시간08.02.03|조회수1,094 목록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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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격하라, 대령. 저 군기를 노획하라”

 

-  핸콕 군단장이 1 미네소타 연대에게 진격을 명령하면서

 

 

 

 

 힐 군단은 전날 2개 사단이 격전을 치뤘기 때문에, 앤더슨 사단만을 투입할 수 있었다. 앤더슨 사단은 5개 여단인 7천 백명의 병력으로, 북군 중앙 세미터리 리지를 향해 공격하였다.

 세미터리리지의 북군은 북군 군단장 중에 가장 우수하다는 핸콕장군이었다. 반도 전투에서의 능력으로 맥클레란이 “최고의 핸콕”이라고 불렀던 이 영민한 군단장은 전날 도착하여 북군의 진지를 컬프스힐에서 리틀라운드 탑까지 배치하도록 하여, 남군을 고전하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예하 사단 중 칼드윌 사단을 3군단 지원을 위해 보낸 상태에서, 기본 사단을 배치하여 앤더슨 사단에 대적하게 하였다.

 

    북군 3군단이 후퇴하여 핸콕의 좌측면이 비어버린 상태에서, 앤더슨 사단의 윌콕스 여단이 빈틈으로 쇄도하였다. 이 빈틈을 메울 부대를 찾기 위해 빗발치는 총알 속을 누빈 핸콕은 (수행원 중 2명이 죽었다.) 별로 크지 않은 연대 하나를 발견하였다. 1 미네소타 연대. 핸콕은 쇄도하는 윌콕스 여단을 가리키며 “전진하라, 대령. 그리고 저 군기를 노획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1800명의 윌콕스 여단을 향하여 불과 300명의 연대가 돌격을 하였다. 착검을 한 상태에서 남군 전선에 뛰어들어 처졀하게 싸웠으며, 연대기수가 5명이나 죽었다. 남군은 그들을 완전히 에워쌓고 공격하였지만, 북군은 굴하지 않고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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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미네소타 연대

 

 

    그리하여 1 미네소타 연대는 핸콕이 증원군이 불러 올 수 있는 귀중한 15분을 벌어줄 수 있었다. 이 대가는 처절하였으며, 연대장 윌리엄 콜빌 대령을 비롯하여 215명의 사상자가 났다. 70퍼센트가 넘는 수치였다. 전투 뒤에 연대기 아래에는 불과 50명 만이 서있을 수 있었다.

 

  앤더슨의 사단 중 라이트 여단과 포시 여단은 핸콕 군단의 정 중앙을 향해 공격했다. 포시 여단은 북군 전초병과의  싸움으로 진격의 탄력을 잃었고, 라이트 여단은 1마일의 벌판을 넘어 핸콕의 군단을 향해 쇄도하였다. 라이트 여단은 전방의 북군을 격파하고 세미터리 리지에 올라가는 데 성공하였다. 북군 중앙을 절단낼 수 있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증원군이 오지 않았다. 당시 앤더슨 사단의 마혼 여단이 지원할 수 있었지만, 누구도 그들을 동원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앤더슨 사단장은 전투 때 수백미터 뒤의 숲속에서 관망하고 있었고, 힐 군단장은 사령부에 있지도 않았다. 전투 뒤의 보고서에서도 이 두사람은 마혼 여단이 동원되지 않은 것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없었고, 마혼 여단은 게티즈버그 전투 동안에 어떠한 전투에도 참여하지 않는다.

 

  라이트여단은 세미터리리지를 차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지만, 북군 한복판에서 1개 여단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퇴로가 차단되기 전에 눈물을 머금고 라이트 여단은 철수해야 으며,  1450명 중에  873명의 손실을 입었다. (여단 전체의 3분의 2에 달한다.)


  힐군단은 딱히 명확한 이유도 없이 부대의 증원을 거절하고 중요한 순간에 결정을 내려야할 사령관이 존재하지 않았다. 리가 가진 3장의 카드 중 2장이 실패했고, 이제 마지막 기회는 이웰에게 달려 있었다.


  이웰군단의 목표는 1차가 컬프스힐, 2차가 세미터리 힐이었다. 이웰은 리의 명령에 따라 북군이 이동하는 순간을 기다려서, 컬프스힐의 북군 6개 여단 중 5개가 빠져나간 순간에 존슨 사단에게 공격을 명령했다.

 

  컬프스힐의 북군은 그린여단으로, 1400명의 병력이었다. 존슨 사단은 4700명의 병력. 남군이 3배가 넘었지만 컬프스힐의 지형은 너무나도 완벽한 방어요새였다. 지형자체가 가파른 고지인데다 전날 북군은 야전축성을 완성해논 상태였다. 남북전쟁 전기간을 통틀어, 고지에 야전축성이 완성된 상태에서 이를 돌파한 사례는 매우 드물다. 단 한가지 기회는 존슨 사단의 스튜어트 여단이 남쪽 배후로 돌아서 진지의 측면을 공격하는 것이어지만. 북군 137뉴욕연대는 메인 20연대가 북군 최좌익을 사수했듯이 북군 최우익을 지켜내는데 성공했다.  여단장 그린 준장은  채엄벌린에 결코 못지 않은 대전과를 올리고 북군의 측면을 사수하였다.

 

 

 이제 해는 완전히 지고 달빛에 의존하여 싸우게 되었다. 

 

  세미터리힐에 대한 공격은 얼리 사단의 2개 여단, 헤이의 루이지애나 타이거 여단과 아베리의 노스캐롤라이나 여단에 의해 수행되었다. 이들은 전투에 단련된 정예들로, 특히 헤이의 루이지애나 타이거 여단을 “리의 호랑이”라고 불리는 부대였다.

 세미터리힐의 북군은 하워드의 11군단. 자타가 공인하는 시원치 않은 부대였지만 진지에 배치된 북군의 대포가 너무 많았다. 25문의 포가 고지에서 남군을 향하고 있었고, 달빛을 받으며 루이지애나 타이거와 아베리의 여단은 세미터리힐의 동쪽으로 돌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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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이지애나 타이거 부대. 세미터리 힐 동쪽을 거의 점령했던 용맹한 부대였다.

 

 

  엄청난 손실끝에 포진지에 돌입하는 데 성공했지만, 증원부대가 도착하지 않았다. 세미터리 서쪽의 로저스 사단이 기동하는 중에 시간을 다 보내버렸고, 얼리도 로저스의 증원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고든 여단을 움직이지 않았다. 이 전투에서 너무나 자주 발생했던, 선두부대가 잘 싸웠지만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증원군이 도착하지 않아 후퇴해야 하는 상태가 이 마지막 순간까지 발생하였다. 헤이와 아베리 여단은 철수하였다. 전투가 완전히 끝나는 때는 저녁 10시 반이었다.


 마침내 7월 2일 전투가 종료되었다. 전투의 핵심은 롱스트리트 군단에 있었기 때문에 사상자가 많았다. 후드 사단은 후드 자신이 왼팔을 잘라야 했고, 4여단장 중 2명이 부상을 입었다. 18명의 연대장 중 9명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다. 맥크로우도 자신의 4여단장 중 2명이 죽었다. 20명의 연대장 중 6명이 죽거나 다쳤다. 이날 전투에서 남군은 6천, 북군은 9천의 사상자를 냈다. 

 

  각 방면에서 남군은 북군을 위협하였지만 어디에서도 결정적인 타격을 주지 못했다. 냉정하게 말해서, 리가 지휘한 전투 중에서 최악이었다. 남군은 상호 공격이 전혀 연결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각 방면에서 축차적으로 공격하였고, 유기적 지원이 전혀되지 않았다. 전투에 참여한 부대는 너무도 잘 싸웠지만, 그들을 받쳐주는 세력이 전혀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전투가 종료된 이후, 피켓사단과 스튜어트 기병대가 합류했다. 스튜어트 기병대에 대해서 좀 설명하면, 팬실베니아에서 리의 주력과 분리된 이유로 가장 큰 것은 남군의 ‘자신감’이었다. 북군의 후커에 대해서 매우 우습게 생각했던 남부 사령부에서는, 적진을 한바뀌 돈 후에 남군 주력과 합류하는 장면을 연출하고 싶어했던 공산이 크다. 당시 참전했던 포병대령 포터 알렉산더는 전후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불필요한 위험을 감수했으며, 내 기억 중에서 전쟁 중에 저지른 거의 유일한 만용이었다.” 스튜어트가 맥클레란의 주력을 두 번이나 선회한 사실이 위와 같은 모험을 하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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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군 기병대장 스튜어트.  게티즈버그 전투 때 남군에 그가 없었다는 것은 크나큰 손해였다.

 

  스튜어트는 5개 여단 중 2개 여단을 남겨뒀지만, 리는 이 부대를 세넌도어 계곡의 고갯길을 막는 데나 사용하였다. 실력이 미덥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스튜어트는 두 번이나 북군의 진격에 대한 전령을 보냈지만 이들은 남군에 도착하지 못했다. 더욱 안 좋은 것은 남군의 최초 공격 예정지와 게티즈버그와 차이가 있기 때문에, 스튜어트가 이리저리 해메다가 전투 첫날과 둘째날 부재했다는 것이다.

  결국 스튜어트 기병대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으며, 리의 과신에도 크게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리는 북부로 침공하기 전에 후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 군은 적절히 지휘하는 한 불패의 군이며, 지구 상 어느 군이라도 섬멸할 것이다.”라고 자신의 군에 강한 자신감을 가졌다. 리가 북버지니아군 사령관이 된 이후 게티즈버그 전투까지 불패의 신화를 쌓아 왔기 때문에, 자신의 군에 크나큰 자신감을 가졌지만, 이 자신감이 뒷날의 재앙을 불러온다.


  7월 2일 전투가 종료하였다. 남북전쟁의 일반적인 전투에서는, 전투가 2일이상 지속되는 경우가 드물다. 북군과 남군은 이 날 하루에만 거의 15000명 이상의 손해를 본,  왠만한 회전 못지 않은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하지만 리는 결코 북군에게 전장의 주도권을 남겨놓고 떠날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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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일 저녁의 북군 전투 회의. 미드는 이 자리에서 내일 남군의 공격이 전선 중앙일 것이라고 장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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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Balian de Ibelin | 작성시간 08.02.04 미네소타연대의 희생은 정말 눈물날정도네요 70%가 전력에서 이탈했다면 그부대는 사실상의 괴멸인데;; 스튜어트옆은 모스비인가요?
  • 답댓글 작성자jager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8.02.04 저 그림 속의 처절하게 찢긴 군기가 모든 것을 말해줄 겁니다. 스튜어트 옆의 말고삐를 잡은 사람은 모스비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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