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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ger] 체첸항쟁사

미국 남북전쟁- 리치먼드로 가는 붉은 길 1. 프롤로그 [두 영웅의 만남]

작성자jager|작성시간08.02.20|조회수1,149 목록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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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즈버그 전투 뒤의 남군 퇴각로

 


  리장군의  2차북부침공은 게티즈버그전투에서의 패배로 끝났다. 7월 3일 마지막 승부수인 피켓대공세도 실패로 끝나자 더는 북부의 영역에 있을 수가 없었다. 리장군은 버지니아로 퇴각할 준비를 한다.

 

  한편 게티즈버그에서 부임한지 3일된 미드가 리장군을 패배시켰다는 소식이 워싱턴에 전해지자 링컨은 기대에 부푼 마음을 안고 명령했다. “리의 군대를 버지니아로 돌려보내지 말고 섬멸하시오.”

  하지만 패배를 당했다고는 해도 북버지니아군은 녹록치 않은 상대였다. 7월 4일자로 리는 전군에 후퇴명령을 내렸다. 이웰군단이 후위를 맡은 동안, 힐의 군단을 선두로 롱스트리트 군단이 서쪽으로 빠져나갔다. 부상자와 보급마차는 멀리 북쪽으로 우회하도록 하고, 스튜어트의 기병대가 행군로 상의 주요 거점을 북군의 기습으로부터 차단하였다. 스튜어트는 북군 기병대의 습격으로부터 남군의 퇴각로를 안전하게 보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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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티즈버그에서 후퇴하는 남군


 

 7월 3일 저녁부터 폭우가 쏟아졌기 때문에 후퇴는 힘든 길이었다. 7월 7일, 남군은 포토맥강의 도하점인 윌리엄스 여울목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이미 4일전에 북군 기병대가 부교를 파괴하였다. 폭우로 인해 강은 범람한 상태였고 도하할 수가 없었다. 남군은 강을 등지고 전투 진형을 짰다.


 7월 12일, 미드는 북군을 거느리고 이 지역에 도착하였다. 남군은 아직 강을 건너지 못했으며, 게티즈버그의 패배로 인해 4만 남짓한 병력 뿐이었고, 북군은 이의 2배가 넘었다. 링컨대통령은 지금이야말로 이 반란을 끝낼 기회라고 생각하고 미드에게 강하게 요구했다.

 

    “무조건 공격해라. 이기면 장군의 공이고 지면 내 책임이라고 해라.”


 하지만 강을 등진 남군의 진지는 그야말로 완벽했다. 포병지휘관인 포터 알렉산더에 따르면, ‘북군이 한번 공격했으면 하는’ 완벽한 지형이었다. 남군은 강력한 진지 뒤에서, 북군이 공격해오면 게티즈버그와 똑같이 되갚아 주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공격을 하기 위해 정찰한 북군 지휘관들은 지형을 한번 둘러보고 공격이 어렵다는 것을 미드에게 보고했다. 미드도 처음에는 공격하고 싶어했지만 남군의 진지를 한번 망원경으로 훝어본 뒤 상황을 파악했다. 더군다나 몇 킬로 떨어지지 않은 곳에 안티탐 전장이 있었다. 당시 북군은 미드 사령관부터 해서 1년 전의 그 처참한 전투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리의 군대에게 공격한다는 것은 크나큰 모험이었다.


 결국 7월 13일 밤에 남군은 주교를 완성하고 포토맥강을 도하하였다. 뷰포드의 기병사단이 뒤늦게 이를 알고 7월 14일 아침 7시에 남군 후위를 공격하였다. 대포 1문과 500명의 포로를 잡았다. 이 최후의 전투에서 피켓대공세에 참전했던 남군 패티그루 사단장이 전사한다.

  하지만 남군의 견제로 인하여 주교 근처까지는 도달하지 못하였다. 결국 남군 전부대가 14일 아침에 완전히 도하하였다. 리의 군대는 사지에서 벗어나 버지니아주로 돌아갔다.


 이 사실이 워싱턴에 알려지자 링컨은 크게 실망하였다. 자기 집무실에서 머리를 감싸쥐고 울부짖었다. 누군가 와서 왜 그러냐고 물어보자, “이 전쟁을 끝낼 수 있는 하늘이 준 기회를 놓쳤다.”라고 하였다. 며칠 뒤에 또 반란군이 우리 땅에서 물러나서 축하드린다고 하자, “전국이 우리 땅인데 무슨 소리야!” 라고 버럭 소리질렀다.


 링컨이 이 때 분을 참지 못하고 미드에게 불평을 토로하는 편지를 썼다가 다시 생각해보고 보내지 않은 사실은 유명하다.


  하지만 확실히 미드는 맥클레란보다는 유능한 장군이었다. 남군이 도하한 뒤 며칠 되지 않아 북군도 포토맥강을 도하하였다. 7월 23일, 남군의 행렬을 따라잡아서 매너시스 고갯길에서 퇴각로를 차단하였다. 북군 선두는 시클스가 지휘했던 3군단이다. 시클스는 게티즈버그에서 발을 절단하는 중상을 입었기 때문에 프렌치 장군이 그 후임이 되었다. 프렌치는 앤더슨 사단 휘하의 워커 여단을 밀어냈고, 오후 4시 반에 증원군을 받아 남군을 공격했다. 남군은 워커 여단에 로저스 사단을 보낸다. 해질 무렵, 북군의 공격을 남군은 방어해 낸다.


 미드 사령관이 내일의 공격계획을 구상하는 23일 밤, 남군은 루레이 계곡으로 우회해버린다. 다음 날 북군이 다시 공격을 시작했을 때는 이미 남군이 안전하게 떠난 뒤였다. 남군은 다시한번 북군의 추적을 따돌리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8월 4일, 북버지니아군은 칼페퍼에서 라파핸노크강을 사이에 두고 안전하게 북군과 대치하였다. 일단 후퇴가 성공하여 위험이 사라지자, 8월 8일, 리장군은 정부에 사직서를 제출한다. “저는 제 자신이 원하는 바도 이행하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국가가 요구하는 것을 해낼 수 있겠습니까? 저 스스로가 누구보다도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있기 때문에, 바라건대 젊고 유능한 인재를 제 자리에 임명해 주십시오.”


 이 사직서에 대한 대통령의 답장은 8월 12일에 도착하였다. “본인에 있어 장군보다 더 유능한 인재를 찾으라거나, 보다 군의 신뢰가 확고한 인재를 찾으라거나, 보다 국민들을 고취시키는 인재를 찾으라는 것은 불가능한 요구입니다.” 사직서는 반려되었다.


 이 무렵 남부의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고 있었다. 빅스버그가 함락되어 남부연맹은 두동강이 났으며, 서부지역 북군 사령관 로스크랜스는 테네시 주에서 브레그의 남군을 밀어내고 있었다. 또한 북군은 막강한 해군력으로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찰스턴항을 공격하고 있으며, 남군 뷰리가드 장군이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게티즈버그의 패배는 이 어두운 상황의 일부에 불과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버지니아주 아니면 테네시주에서 북군에 공세를 가해야 했다. 데이비스 대통령은 버지니아주에서 실패한 주도권을 테네시주에서 찾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9월 7일, 피켓사단을 제외한 롱스트리트의 1군단이 테네시주로 이동을 시작하였다. 맥크로우와 후드 사단, 그리고 포터 알렉산더가 지휘하는 군단 포병들이었다.

  서부로 간 롱스트리트는 역시 리장군이 믿는 부하장군답게 대승리를 거둔다. 9월 19일과 20일, 치카모가 전투에서 롱스트리트의 1군단은 로즈크랜스의 북군 전선 중앙을 돌파한다. 서부지역에서 변변한 승리를 한 적이 없는 남군은 마침내 북군을 패주시킨 것이었다. 이 전투에서 후드장군은 오른발을 잃는다. 남부에 다시한번 기회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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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카모가 전투에서의 클레번 장군. 서부의 철벽이라 불리는 명장


 

 하지만 서부지역의 남군 사령관인 브레그장군은 이 기회를 살릴 인물이 못되었다. 치카모가 전투의 소극적인 지휘와 이후 북군에 대한 추격 실패로 인해 부하들과 심한 불화가 생긴다. 마침내는 12명의 부하장군들이 데이비스 대통령에게 브래그의 사임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제출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다. 대통령은 브레그의 손을 들어주고, 유능한 군인인 D.H 힐의 군단장 지위를 박탈한다. 이 사태가 남군 사기에 가져온 악영향이란 이루 말로 할 수가 없다.

  무능한 사령관 밑에서 견디다 못한 롱스트리트는 국방상에게 부탁을 한다. “저와 제 군단을 다시 리장군 밑으로 보낼 수 없겠습니까? 전능하신 신이 아니고서야 저는 도저히 브레그 밑에서 일할 수가 없습니다.”


 한편 포토맥군도 이러한 남군의 부대 이동에 대처하기 위해 9월 18일-20일, 11군단과 12군단을 서부로 보냈다. 북군은 서부를 증강하는 데 롱스트리트의 1군단은 북버지니아군으로 귀환하니, 서부에서 북군과 남군의 전력차가 더 커지게 된다. 이는 연이은 채터누가 전투에서의 패배를 불러온다.


 롱스트리트의 군단이 없는 북버지니아군은 라피단강 남쪽에서 좌우에 이웰과 힐 군단을 배치하였다. 스튜어트의 기병대가 보병 진지의 좌우에서 도하점을 경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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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3년 가을 무렵의 리장군과 휘하 포병 지휘관


 

 게티즈버그의 패배도 리의 공격정신을 감소시키지는 못하였다. 그 동안 부대를 계속 정비해서, 10월 10일, 남군은 5만 8천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리장군은 이웰과 힐, 두 군단으로 미드의 우익을 선회하여 보급선인 오렌지-알렉산드리아 철도와 북군을 차단하려고 하였다.  10월 12일, 스튜어트 기병의 엄호와 안내 하에, 이웰과 힐 군단은 이동을 시작하였다.

   이들이 진격하는 동안 측면이 위험해진 북군 2개 군단이 북쪽으로 이동하였다. 스튜어트가 공격하기에 적절한 지점을 정찰하고 이웰이 도착하여 북군을 공격하였다. 남군은 아직 사기가 높았으며 신속하게 기동을 하여 북군의 배후를 위협했다. 리장군은 이웰과 함께 있었으며, 곧 힐 군단이 도착하여 이웰이 위치를 안내하였다. 이들이 집결한 장소는 브리스토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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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리스토역 전투. 검은 색이 북군, 회색이 남군

 

  하지만 남군의 지휘능력이 예전만 못하였다. 힐 군단 예하 헤스 사단이 북군의 기습에 박살이 나고 4문의 대포를 뺐겼다. 힐은 곧 전선을 보강하였지만 북군의 방어라인을 돌파하지는 못하였다. 북군은 힐의 공격을 잘 막아낸 다음, 10월 15일 전선을 뒤로 후퇴하여 불런 근처에 안정적인 방어선을 형성한다. 남군은 단지 철도의 일부분만을 파괴한 뒤 강을 건너 철수하여야 했다.


  이 전투에서 리장군은 힐에게 매우 화가 났다. 성난 목소리로 사상자를 묻으라고 한 뒤 아무말 없이 돌아섰다고 한다.

   남군의 공격이 끝나자 이제 북군의 차례가 되었다. 11월 하순이 되자, 미드 사령관은 남군의 병력이 북군의 반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남군의 오른쪽 측면을 공격하고자 하였다. 당시 남군은 클라크 산을 사이에 두고 좌우로 50킬로 가까이 넓게 퍼져있었다. 미드의 계획은 스튜어트가 경계하는 지역보다 더 먼 곳에서 강을 도하한 뒤, 남군 우익에 있는 얼리 사단을 격파한 뒤, 바로 힐 군단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똑같은 지역에서 후커가 세운 계획과는 다르게, 미드는 북군 전병력을 이끌고 남군을 우회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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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인천 전투. 검은색이 북군, 흰색이 남군


 

 하지만 선두인 프렌치 군단의 미숙한 이동으로 인해 강의 도하가 정체되었다. 이로 인해 미드가 원하던 기습의 효과는 사라지고 리장군에게 이를 대처할 시간이 생겼다. 리장군은 얼리사단에게 동쪽으로 진격하여 프렌치 군단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11월 27일, 양군은 격렬하게 부딪쳤지만 승부를 내지는 못했다.

  전투가 끝나고 리장군은 얼리사단을 마인 천에 준비해둔 요새로 퇴각시켰다. 다음날인 11월 28일, 미드는 엄청난 포격을 한 뒤에 워렌 군단과 세지윅 군단이 남쪽과 북쪽에서 기습하도록 계획하였다. 동시에 리장군은 12월 2일, 북군의 좌익을 선회하여 공격할 것을 구상한다. 양쪽 다 상대방을 공격할 계획을 세운 것이다.

  다음날 북군은 예정된 대로 포사격을 남군 진지에 퍼부었다. 하지만 포격 후에 미드 사령관이 관측해보니 남군의 진지가 너무 강력했다. 그래서 12월 1일과 2일 사이에 북군을 강건너로 철수시킨다.  12월 2일에 남군이 예정된 대로 공격을 시작했지만 이미 모두 떠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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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인런 전투 당시 클라크 산에서 진지로 향하는 리장군


 

  이 전투를 마지막으로 양군은 겨울철 야영에 들어간다. 이 기간의 전투를 살펴보면, 남군에 있어 롱스트리트와 잭슨의 빈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진다. 리장군은 과감하게 북군의 후방 보급로를 기습하였지만 군단장들은 북군 방어라인을 돌파하지 못했다. 스튜어트는 과거처럼 우수한 기병대장이었고 임무를 충실히 이행했지만 아직 이웰과 힐 군단장은 능숙하게 군단을 이끌지 못하였다.

  

  북부의 경우, 링컨은 미드에 대한 기대를 접어버렸다.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남군을 버지니아로 퇴각하게 한 것으로 벌써 크게 낙담한 링컨은 1863년 하반기 동안 제대로 된 전투가 없자 더욱 실망하였다. 미드는 너무 조심스럽고 신중한 장군이라 큰 재난을 당하지는 않지만 결정적인 전과도 이루지 못하는 장군이었다.


  마침내 링컨은 서부를 휩쓸다시피 한 율리시스 그랜트 장군을 수도로 불러, 중장의 계급과 함께 북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한다. 이제야 비로소 북부는 리장군을 상대할 수 있는 장군을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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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리 장군과 대적하게 된 율리시스 그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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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확인불가 | 작성시간 08.02.20 드디어 그랜트가 총사령관으로 리장군에게 대적하는군요.
  • 작성자truebard | 작성시간 08.02.22 드디어 그랜트 등장이군요
  • 작성자기러기 | 작성시간 09.09.19 오오!!!~~~~그랜트의 등장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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