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령관이 된 그랜트는 1862년 겨울을 미시시피 강의 빅스버그 요새를 공략하는 데 몰두하였다. 당시 미시시피강은 북군의 막강한 해군력으로 대부분의 거점을 확보하였다. 하지만 강 줄기 한 가운데에 있는 빅스버그 요새는 해군력만으로는 난공불락이었다. 강력한 육군이 직접 요새를 함락시켜야 했는 데, 보급상의 문제가 많은 데다 포레스트와 같은 유능한 기병대장이 남군에 많았다. 그랜트는 수차례 시행착오를 한다.
하지만 그랜트에게는 불굴의 의지가 있었다. 3번이나 빅스버그 공격에 실패하여 회군했음에도 그는 다시 시도하였다. 마침내 1863년 5월 1일, 북군 함대에 병력을 수송하여 빅스버그 남쪽으로 항해한 뒤에 강을 건너 내륙으로 쳐들어 갔다. 보급로는 포기한 채 현지조달로 채우고, 강을 남하하는 도중의 남군 포대는 무시하고, 적의 영역에서 패배할 경우에 전군이 고립된다는 위험도 개의치 않았다.
이 대담한 작전으로 2만 5천의 북군 병력이 빅스버그 남쪽에 상륙하여 내륙지방으로 진격하였다. 이를 상대하는 남군 사령관은 조셉 존스턴이었는 데, 그는 빅스버그의 수비군을 철수시켜 자신의 병력과 합류한 뒤에 그랜트와 대적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빅스버그는 너무나 중요한 요새였기 때문에 대통령이 이를 금지하였다. 결국 존스턴의 부대와 빅스버그의 부대는 분리된 채 그랜트에게 패한다.
오랜 포위전 끝에 1863년 7월 4일, 게티즈버그의 패배 다음날 빅스버그 요새는 그랜트에게 항복한다. 이로써 링컨이 오랫동안 열망했던 미시시피강의 재패가 실현되었다. 북군은 남부를 두동강 냈으며,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자원도 나눠져서 더욱 전쟁을 어렵게 하였다. 그랜트는 소장으로 승진한다.
빅스버그 전투에서의 그랜트
치카모가 전투에서 북군 로즈크랜스 사령관이 남군에게 패하자, 테네시 주의 북군은 채터누가 시에서 남군에 3방향에서 포위된다. 그랜트는 10월 17일, 채터누가로 가서 그 지역 북군 사령관이 된다. 부대의 보급과 처우에 신경을 써서 우선 떨어진 북군의 사기를 올렸다.
약 2주 뒤인 11월 8일, 그랜트는 브레그의 남군에게 공세를 건다. 셔먼이 좌익에서 공격하고, 토머스가 중앙, 후커가 우익이었다. 이 전투에서 셔먼은 클레번 사단에 막혀 공격을 실패한다. 후커는 이 전투에서 상당히 능력을 발휘하여 남군의 좌익을 돌파한다. 연이어 다소 우발적인 토머스의 공격이 시작된다. 당시 토머스 군단의 세리단 사단장이 남군 진지를 향해 인사를 했는 데 남군이 대포로 화답을 한 것이다. 열받은 세리단 장군이 즉시 돌격을 명령했고, 연쇄적으로 토머스 군단 전체가 돌격을 시작했다.
토머스의 공격으로 남군 중앙이 돌파되었다. 그랜트는 처음에는 계획에도 없는 우발적 공격을 한 토머스에게 화를 냈지만, 돌파가 너무 성공적이어서 뭐라 하지는 않았다. 패주한 남군은 조지아주의 달튼으로 퇴각하였다. 이 후 남부는 영원히 테네시주를 상실한다.
채터누가에서 남군 진지 중앙으로 돌격하는 북군
서부에서 활약한 그랜트의 전적을 살펴보면, 가장 두드러진 점이 포기할 줄 모르는 불굴의 의지였다. 도넬슨 요새나 샤일로, 빅스버그, 채터누가 모두 남군의 반격이나 역습으로 인해 좌절을 겪거나 위기상황을 겪었다. 하지만 그랜트는 항상 평정심을 유지한채 침착하게 대처했으며 그 모든 전투를 결국은 승리로 이끌었다.
이것이 대부분의 북군 장군에게는 없던, 링컨이 그토록 찾던 자질이었다. 어떠한 고난에도 물러시지 않는 기백과 담대함. 그것은 리장군과의 일전에서 그의 가장 큰 무기였다. 1864년 3월, 그랜트는 서부지역 사령관으로 셔먼을 임명하고 자신은 최고사령관으로서 포토맥군을 지휘한다. 이제 리치먼드를 향한 붉은 길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