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티즈버그와 채터누가에서 패배한 뒤, 사실상 군사적으로 남부가 북부에 주도적으로 공세를 가한다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개전시부터 두드러졌던 남부와 북부의 산업 역량의 차는 1864년에 들어서면서 절망적으로 변했다. 서부전선의 연이은 패배로 인해 남부는 가뜩이나 부족한 산업기반을 상당부분 상실하였다. 거기에 북부의 해상봉쇄는 서서히 남부의 목을 조르고 있으며 전쟁을 지탱하는 것조차 힘겹게 하였다.
그러나 아직 남부에게는 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있었다. 1864년 11월에 북부의 대통령선거가 있었다. 만약 남부가 북부에 피를 흘리는 것을 강요한다면 북부의 여론은 남부에 동정적인 민주당의 후보에게 돌아설 것이다. 민주당 후보가 당선이 된다면 남부는 신임 대통령과 함께 평화협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점은 링컨대통령도 잘 알고 있었다. 점차 증가하는 반전여론을 누르고 자신이 재선이 되기 위해서는 북군의 승리가 필요하였다. 이를 위해 그랜트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동부에서 리장군을 상대하게 하였다. 서부에는 셔먼장군이 남부 조지아의 주도인 애틀랜타를 함락시키도록 하였다.
이에 맞서기 위해 남부는 서부 사령관인 브래그를 경질하고 조셉 존스턴을 신임사령관으로 하여 애틀랜타를 사수하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셔먼과 존스턴, 리와 그랜트 네 사람의 어깨 위에 북부의 대통령 선거, 아니 미국 전체의 운명이 걸려있었다.
그랜트는 결코 시간을 끄는 타입이 아니었다. 일단 포토맥군에 도착하자마자, 작전계획을 세우고 신속하게 행동하였다. 1864년 5월 4일, 포토맥군은 라피단강을 도하하였다. 당시 남군은 라피단강 전방에 이웰과 힐 군단을 배치하고 60킬로 남쪽의 고든스빌에 롱스트리트 군단을 배치하였다. 식량을 구하기 어렵기 때문에 멀리 분산시킨 것이다.
그랜트는 이웰과 힐 군단에서 먼 동쪽에서 강을 건너서, 리의 우익을 우회하고자 하였다. 1863년 11월에 미드가 시도한 마인천 작전과 비슷한 계획이었지만, 큰 문제없이 신속하게 도하하였다. 3군데에서 도하하였는 데 이들 도하점이 만나는 것이 챈슬러슨빌이었다. 5월 4일 저녁, 핸콕의 2군단이 챈슬러슨빌에 숙영하고, 워렌의 5군단이 서쪽 윌더니스 터번에 숙영하였다. 번사이드의 9군단과 세지윅의 6군단이 다음날 이들과 합류할 예정이었다. 이들 4개 군단에 세리단의 3개 사단의 기병군단까지 합치면 10만이 넘는 병력이었다.
그랜트는 5월 4일 저녁, 큰 문제없이 라피단강을 도하한 것에 안도하며 내일의 행군계획을 짰다. 북군이 주둔한 지역은 윌더니스(Wilderness)라는 지역으로 숲이 우거진 지역이었다. 그랜트는 날이 밝으면 신속하게 이 지역을 빠져나가려고 하였다. 다행히 리장군이 아직 눈치채지 못한 것 같기 때문에 큰 무리는 없을 것 같았다.
윌더니스 지역의 전쟁 당시 사진
하지만 그랜트는 리 장군이 어떤 상대인지 완전히 오산하고 있었다.
5월 4일, 스튜어트의 보고로 북군이 강을 도하했음을 안 리장군은 이들의 도하점을 통해 북군이 윌더니스 터번 근처에 집결할 것임을 간파하였다. 즉시 이웰과 힐 군단을 동쪽으로 이동시켰다. 오후 4시경에 고든스빌에 있는 롱스트리트 군단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랜트가 안심하고 행군계획을 짜고 있는 순간, 이웰 군단은 워렌 군단에서 5킬로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야영 준비를 하고 있었다.
스튜어트가 밤 늦게 정찰을 끝내고 리장군에게 북군이 윌더니스에 머물고 있다고 보고를 하였다. 리장군은 4만의 병력으로 북군 12만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이웰과 힐 군단이 북군을 윌더니스에 붙잡고 있는 동안에 롱스트리트 군단 2만이 남쪽 측면을 기습하기로 하였다. 리장군의 투지가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1864년 5월 5일, 리장군은 이웰을 좌익에, 힐을 우익에 배치하고 동쪽으로 진군하였다. 오전 11시, 이웰 군단이 북군 워렌의 5군단과 조우하였다. 힐 군단은 핸콕의 2군단과 세지윅의 6군단 중 1개 사단(라이트 사단)과 마주쳤다. 양쪽은 숲속에서 격렬하게 부딪쳤다.
먼저 북군 워렌장군은 이웰 군단을 처음 목격했을 때, 한 1개 사단 정도의 병력일거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실상 이웰은 전군단을 집결시켰으며 워렌보다 숫적으로 우세하였다. 워렌은 세지윅이 도착할 때까지 공격을 기다리려고 하였지만 오후 1시가 되자 미드가 공격을 명령하였다.
이웰은 유명한 스톤웰 여단을 좌익에서 진격하여 게르마니아 여울목으로 가는 길을 차단하였다. 이에 북군은 전방에 있는 존스 여단을 밀어붙이고 전진하였다. 이웰은 2개 여단을 증원하였지만, 존스 여단의 정면과 우익이 위험하였다. 이 전투에서 존스 준장은 전사하였다.
북군 공격부대의 선두는 유명한 ‘강철의 여단’이었다. 이들은 남군 우측면에서 진격하여 남군 배틀 여단을 무너뜨렸다. 하지만 얼리 사단의 정예부대인 고든 여단이 나타나 북군의 진형을 파고들었다. 고든은 1차 불런전투때 소령으로 참전한 이래 주요한 전투에는 모두 참전한 장군으로, 7일전투 때 맬번힐에도 진격하였고 안티탐에서는 침하된 도로에서 5번이나 총상을 입었다. 이번 전투에서 고든의 여단은 남군의 우익을 위협하는 북군을 격파하고 숱한 포로를 잡았다. 그 중에는 1개 연대 전체도 있었다.
오후 2시경에는 워렌의 공격이 수그러졌지만, 오후 3시에 세지윅의 군단이 도착하여 다시 이웰을 공격하였다. 이웰의 좌익에 대해 강타를 하였지만 남군이 재역습을 가하여 세지윅의 군을 밀어내었다. 전투는 해질 때까지 계속되었고 날이 저물자 양군은 방어선을 구축하기 시작한다.
한편 힐군단은 헤스사단을 선두로 하여 북군 게티 사단과 전투를 하였다. 6군단 소속의 게티는 헤스 사단을 막아냈고, 핸콕의 2군단이 증원을 왔다. 하지만 핸콕은 즉각 공격을 하지 않고 방어축성을 건설하는 데 시간을 썼다. 1시간이 지난 오후 4시, 게티사단이 먼저 남군에 공격을 가했다. 포대의 지원을 받았지만 양측면이 무너지며 게티사단은 후퇴를 하였다.
이어 핸콕은 자기 휘하의 버니와 모트 2개 사단을 투입하고, 캐롤 여단을 게티사단의 측면으로 보냈다. 숲이 우거진 가운데, 양군은 처참하게 전투를 하였다.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치열한 전투였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남군 포병 지휘관 포터 알렉산더의 말이다. 오후 8시에 전투가 끝이 났는 데, 북군 8개 사단(3만 8천명)이 힐의 2개 사단(1만 4천명)을 밀어내는 데 실패하였다.
5월 5일 오후 5시 경의 양군 배치도
5월 5일 그랜트와의 첫 전투가 끝나고 리장군은 크게 기뻐하였다. 숫적으로 우세한 북군을 윌더니스의 숲속에 묶어 놓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북군 장군은 아직 챈슬러슨빌 전투의 교훈을 얻지 못했다.” 피아를 식별하기 어려운 숲에서는 북군이 대부대의 이점을 살리기 힘들고 남군에게 큰 이점을 주기 때문이었다. 이웰과 힐 군단은 리장군의 명령에 충실하여 각각 2개 군단에 상당하는 병력을 묶어 놓았다.
한편 그랜트는 다음날의 작전을 구상하였다. 강을 건너자 마자 생각지 못한 격전을 치르게 되었지만 역시 그랜트도 녹록치 않은 인물이었다. 아직 전장에 도착하지 않은 번사이드의 9군단을 이웰과 힐 군단 사이에 배치하고, 핸콕의 부대와 2개 사단 병력이 힐 군단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무려 북군 10개 사단이 3방향에서 힐의 지친 2개 사단을 공격하는 계획이었다. 일단 힐군단이 와해되면 이웰군단을 처리하는 것은 훨씬 수월할 것이었다.
이웰과 힐 사이에 거리가 4킬로 정도나 떨어져 있기 때문에 이 공격에 대처하기란 매우 어려웠다. 유일한 희망은 롱스트리트 군단이 적시에 힐군단의 남쪽에 도착하여 북군의 측면을 강타하는 것이었다. 롱스트리트는 5월 5일 자정부터 행군을 시작하지만, 5월 6일 아침이 밝아 와도 롱스트리트 군단은 도착하지 않았다.
5월 5일, 북군 강철의 여단에 역습을 가하는 고든 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