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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숨겨진 역사]나 가거든 => 명나라 황제들의 장례 이야기

작성자가터벨트후작|작성시간24.09.16|조회수267 목록 댓글 5

출처: https://www.fmkorea.com/2990597254

 

 

이번 글에서는 중국 황제들 중 명나라 황제들의 장례 이야기를 다뤄보려고 해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천하를 통일한 자수성가 끝판왕 주원장

 

이 주원장은 무지막지한 숙청을 하였지만,

 

백성들에게는 좋은 통치를 베푼 군주로 기억 되는데...

 

그 최후의 유언은 다음과 같았어

 



"제물로 금은보석을 사용하지 말도록 하여 백성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말도록 하라"

 



난세를 살아오면서 피로 얼룩진 삶을 산 그였지만,

 

그래도 죽기전에는 애민군주로서 후대의 모범이 될 만한 훌륭한 유언을 남겼다고 할 수 있는데...

 



한편으로 주원장은 또 다른 특명을 내렸는데,

 

자신의 비빈과 궁녀들을 순장 시킬 것을 명했고,

 

이때 58명이나 되는 생목숨의 그대로 순장 당해 망자를 따라가야 했는데,

 

비빈이 46명, 궁녀가 12명이었어..

 

마지막까지 그는 지킬박사와 더불어 하이드였던 셈...

 



그나마 주원장과 함께 순장된 궁녀들의 유족들은 명 황실에서 특별히 우대('단종' 당한 건문제와 '세조'한 영락제 모두)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이러한 아버지의 잔인한 심성을 자식들 또한 그대로 보고 배워,

 

그의 아들과 손자들 또한 자신의 죽었을때 그 주변 여인들을 순장 시켰는데 그 중 주원장의 5째 아들 주숙의 장자 주유돈은 황제도 아니면서 무려 7명(1명의 비와 6명의 첩)을 순장 시키기도 하였어

 



그리고 명나라 3대 황제 영락제도 죽기전에 유언으로,

 

"복상기간과 장례의식은 모두 고황제(주원장)이 남긴 제도를 따라야 한다."고 당부 하였는데,

 

이는 순장이라는 쓰레기 풍습도 그대로 따라 하겠다는 심보였어

 

이때 <명회요>에는 장릉(영락제의 묘)에 16명의 묻혔다고 기록하였으며,

 

<조선왕조실록>에는 그 규모가 30여명에 다했다고 쓰여짐

 



이 사건이 이렇게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것은 영락제 사후 순장된 비와 궁녀들 중 조선인 출신인,

 

여비 한씨와 궁녀 강씨가 있었기 때문인데,

 

이들은 명나라 황제에게 바쳐진 공녀로 그 중 한씨는 황후의 부재 상황에서 여비로 책봉되며 명황실의 비 중에서도 높은 위상을 차지했기에,

 

조선에서는 영락제 사후 그녀가 순장되자 큰 충격을 받게 되었는데,

 

*명대의 순장은 살아있는 채로 묻던 것은 아니고 오늘날의 교수형 집행처럼 먼저 마루 위에 나무로 만든 작은 평상을 놓아 그 위에 서게 한 후 목에 올가미를 걸은 후 평상을 밀어버려서 숨을 먼저 끟고 황제와 함께 묻는 방식을 취했어...

 

 

멀리 중국까지 끌려갔다가 순장 당해버린 비련의 여인의 이야기는 많은 조선인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내,

 

실록은 그때의 참상을 비교적 상세히 전하는데,

 

순장날 궁인들에게 음식을 먹이고 마루에 끌어올리니 그 곡성이 진동 하였는데,

 

이때 마지막으로 황위를 물려받은 인종을 본 한씨가 늙은유모만은 조선으로 돌려보내 줄 것을 간청하였고,

 

인종은 이를 승낙하였어

 

그리고 그녀는 죽음을 앞두고 얘절하고 "유모, 나는 간다. 유모 나는 가네." 라고 외쳤다고 해ㅠㅠ

 

* 그리고 이 인종 주고치놈은 통수를 치는데, 아주 옛날 고대도 아니고 순장이 외부로 알려지면 좋을게 없을 야만적인 풍습인건 명나라 황제나 조정도 알고 있었고, 이 날 참상의 외국으로 세어나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다가 11년후에야 그 유모(김흑)는 마침내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었는데, 그녀로 인하여 그날의 참상이 결국에 조선에 알려지게 됨

 



이렇게 많은 조선신민의 이 일을 슬퍼하였지만,

 

정작 순장당한 여비 한씨의 친남동생되는 한확은,

 

또 다시 명나라에서 공녀를 보낼 것을 요구해오자,

 

앞장서서 자신의 여동생을 공녀로 보내려 하였는데,

(다른 명문가문들에서는 당연히 자신들의 딸이나 누이를 공녀로 가는 것을 원치 않아 어떻게든 명단에서 빼려 노력 하였지)

 

이는 그의 누이가 생전에 영락제의 총애를 받으면서 한확 또한 조선에서 엄청난 권세를 누리게 됐기 때문인데,

 

이 한확의 권세는 그가 궁궐에서 나간 궁녀와 간통하는 죄를 저질렀음에도,

 

세종대왕이 " 이사람은 죄를 줄 수 없는 사람" 이라며 참아야 했던 것에서 단적으로 들어날 만큼 대단한 것이었어

 

그러니 "그 권세 못 잃어" 이런 마인드가 되어버린 한확은,

 

막내여동생을 다시 사지로 몰아넣으려 했는데,

 

당대 다른 조선인들은 그를 "누이를 팔아 출새하는 놈" 이라고 욕했으며.

 

막내여동생 또한 어이가 없어 홧병에 몸져 누웠는데,

 

한확이 이래서는 안된다며 갑자기 여동생에 대한 애정뿜뿜하며,

 

귀한약재를 챙겨오자

 

한계란(막내여동생)은 어처구니가 없어하며, 

 

"누이 하나를 팔아서 부귀가 이미 극진한데 무엇을 위하여 약을 쓰려 하오" 라고 분개하며,

 

칼로 제 침구를 찢고 모아 두었던 재물을 모두 친척들에게 흩어 나눠졌다고 했는데,

 

이것을은 본래 한계란이 시집갈 때 쓰기 위하여 준비되었던 것들 이었어

 

그리고 결국 명나라로 끌려간 그녀를 보며 일반 백성들이 "산송장이 다름없구나" 라며 슬퍼하고 울어주었다고 해ㅠㅠ

 

* 다행히 그녀는 순장당하지 않고 57년이나 명황궁에서 지내다가 7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고 함

 

* 이 한계란에게서는 기황후 같은 흑화의 흔적도 보이는데, 명나라에서는 성품이 착하다고 기록되는 등 존경받을 만한 행보를 보였으나, 조선에 대하여는 자신을 위한 특산물 등을 별도로 요구하는 등의 행동도 하였다고 함... 

 

* 영락제의 총애를 받던 조선여인은 여비 한씨 이외에 권현비에 봉해진 여인이 있었는데, 옥퉁소를 잘 불고, 요리에도 뛰어난 실력을 보여 황제가 그를 총애하였다고 해.. 이 여인은 다행히 순장명단에서 빠짐

 

* 이 한확은 이러한 권세를 바탕으로 조선왕실과도 인척을 맺는데 세종의 아들 계양군의 그의 사위가 되고 외손녀(정의공주의 딸)가 그의 며느리가 되었으며,

 

수양대군과도 사돈을 맺었는데, 이때 시집간 그의 딸이 '인수대비'로 유명한 소혜왕후 한씨였어

 

* 이렇게 평생 중국 황실과 유착하여 권세를 누렸던 한확은 계유정난을 지지하고 세조가 등극하자 그 등극을 '정상적인 양위'로 명나라에 포장하는 사신 임무를 맡게 되었는데, 이 임무는 스무스하게 성공 하였으나, 돌아오지 못하고 중국땅에서 쓰러져 사망하게 됨

 



다시 명나라 황궁의 일로 돌아와서,

 

위의 언급하였던 인종 주고치는 겨우 1년만을 제위하고 죽었는데.

 

이때 역시 4명의 비빈이 순장되었어

 

* 본래 7명의 순장대상으로 선정 되었으나 3명은 그나마 금색종이를 태우는 것으로 대신하게 됨.. 물론 평생 인종 주고치의 능묘에 갇혀 살아야했지만...

 



그리고 그 뒤를 명선종 주첨기가 35세로 죽었을때,

 

또 다시 순장이 이뤄지는데, 

 

이때는 10명의 비빈이 순장되었으며, 

 

이전의 사례와 비교해서 주원장이나 영락제도 자식을 낳아준 여자는 순장하지 않았음에도,

 

이 주첨기는 자기 자식을 낳아줬던 비빈들까지 순장해버림 ㄷㄷㄷ(고아로 자랄 자식들이 불쌍하지도 않았나보다...)



주원장과 영락제야 워낙 네임드 군주이지만, 주고치와 주첨기 또한 그들의 치세를 합쳐 '인선의 치'로 불릴 정도로 황제로서는 명군라인에 해당했던 군주들 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악습을 끝낸 것은 환관 왕진과 환장의 콜라보로 '토목의 변'(오라이트군에게 황제가 생포당함) 이라는 희대의 개병크를 일으켜,

 

암군소리를 듣던 영종 주기진으로,

*영 자체가 굉장히 좋지 않은 시호인데 자식에게 황위를 물려준 황제가 영을 시호로 받을 정도였으니...

 

그것은 주기진의 9세의 나이로 목격했던 순장의 처참한 잔상을 결코 잊지 못했으며,

(* 주기진은 그 희생자들을 위해 추호책문을 쓰고 그들에게 추호를 하사함)

 

자신의 가장 사랑했지만, 후계자를 낳지 못한 황후 전씨가 자신의 사후 순장 당할 것을 걱정해서 였다고 해.

 


어쨋든 그 유지를 받은


명조의 신하들은

 

"중요한 도리에 관한 말씀이다. 영명하시지 않으면 이러한 경지에 도달할 수 없다. 순장을 금지한 일은 고금을 뛰어넘는 것이니 진실로 훌륭한 품덕이로다." 라고 감탄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해

 

그리고 황제는 그러한 신하들의 찬탄에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다시 한번 순장의 금지를 강조한 뒤 눈을 감았는데,

 

어떤 사람들은 그가 죽은 순간에야 유일합 업적을 남겼다고 평가하기도 함.

 

* 이 황제는 최악의 군재와 더불어 첫번째 제위기간(몽골군에게 잡혀 끌려가기 전) 분명히 암군소리를 들을만큼 막장이었지만, 그래도 두번째 제위(몽골로부터 돌아온 후 우역곡절 끝에 제위를 되찾음)는 나름대로 열심히는 국정을 돌보았기는 함.. 역시 사람은 고생해야 철이 드는 것인가?

 

* 어쨋든 명조의 순장풍습은 당대 사람들의 눈에도 명백히 '미친 짓' 이었는데, 명나라는 이 짓을 초대황제부터 5대황제까지 초기 명군라인의 황제들이 계속 해왔던 것으로... 당시의 사고관으로 봐도 순장의 금지가 고금을 뛰어넘는 결단이 아니라, 순장 하는게 시대를 역행하는 미친 짓이었어...

 

* 이 순장은 만주족 정권인 청나라가 들어서고 다시 부활했다가 강희제 때에 폐지 됨

 



"허수아바로라도 순장하면 후손이 끊어진다는건 어린 아이들도 다 아는데, 중국의 풍속이라도 이는 결코 본받을 것이 못 됩니다." - 세종조 대신 허조가 명나라의 순장 풍습을 비판하며 남긴 말 

* 많은 분들이 이미 아실 수도 있는 내용이지만, 조금 더 자세하게 명나라 초기의 순장의 실태를 소개하여 봤습니다. 읽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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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성 배들어 | 작성시간 24.09.16 고대 중국, 순장제도가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외척을 견제하기 위해 시행된 정치적 제사의식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 답댓글 작성자몰라요 | 작성시간 24.09.16 띠용...ㅋㅋㅋ 그럴수도있겟군요;;
  • 답댓글 작성자황초롱이 | 작성시간 24.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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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4.09.16 주원장부터 내려온 순장 악습이 끔찍하군요 다행히 영종이 없앴군요
  • 작성자밸틴1 | 작성시간 24.09.18 몽골제국시절의 풍습이 명나라에 정착되서 계속 내려온건데 그건 얘기 안하는군요.

    말은 쉽게쉽게해서 좋지만, 문맥을 뚝떼먹고 얘기할수 있단 치명적 약점도 동시에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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