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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블: 토탈워

[캠페인]서유럽의 유일 이슬람 국가 '실라' -회귀점

작성자쑤레빠|작성시간07.09.18|조회수248 목록 댓글 1

끊어진 길
 예나 지금이나 나라의 발전에 있어 '길'은 생명이었다.
 한 나라의 흥망사는 모두 이 길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1180년, 도버해협의 패배를 시작으로 곳곳에서 실라해군은 무너져갔다.
 경제를 뒷받침해주던 길이 끊어진 것이다.
 1182년, 지중해로 통하는 지브랄터 해협에서 영국과 프랑스 함대에게 패배를 끝으로
 지중해로의 길은 끊어졌다.


 비어가는 금고
 샤를 대공은 이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영토확장을 통한 농업적 경제로 전환을 해야함을 강조했다.
 이는 영주가 되고 싶어하는 군부의 고급 기사들을 자극했고, 1184 머시아, 1185년 워섹스 침공을 불러왔다.
 브리타니아 정복이 마무리 된 것은 1187년 웨일즈 정복을 통해서였다.
 
 브라타니아가 정복되었다는 소식은 바티칸을 경악시켰고, 교황은 전 카톨릭에 대 실라 전을 요청한다.
 엉뚱하게도 이 요청에 응한 것은 비잔틴이었다. 지브랄터 해협 수복을 위해 지중해 여기저기에서
 시칠리아해협으로 뭉치고 있던 실라 해군을 비잔틴 해군이 급습, 전멸시켜버린 것이다.

 실라의 재정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럼에도 샤를의 야심은 멈출 줄 몰랐다.
 옛독일 영토를 차지하려고 남하하는 폴란드, 헝가리 군세를 막기위해 프랑스 군세의 대부분이 포메라니아로 향한 것을
 기회로 1193년 대륙의 입구 플랑드로를 점령하였다.


 엘시드 재등장

 실라국왕 '앙리1세'는 낮은 능력치로 부왕이었던 쟝1세를 실망시켰을 줄은 몰라도 노력하는 왕이었다.
 점차 드러나는 명석한 재치는 샤를 대공에게 끌려가다간 파멸만이 있을 뿐이란 것을 경고하고 있었다.
 샤를 대공에 대항할 세력이 부족하였던 그에게 엘시드가 나타난 것은 1194년이었다.

 왕은 엘시드를 다시 시종장관으로 삼고, 친 샤를 파였던 아일랜드 영주를 파면시켜버린다.
 그리고 엘시드의 조언에 따라 해군 재건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이런 조치는 플랑드로에서 승리감에 취해있던 샤를대공의 심기를 건드렸다.

 

샤를의 최후
 친샤를파 장군들은 당장 아일랜드로 돌아가서 엘시드를 쫓아내야 한다고 말했지만 샤를은
 우선 프랑스를 멸망시킨 후, 아일랜드 문제를 해결하길 원했다.

 그는 대군을 3로로 나누어 속전속결로 프랑스를 멸망시키겠노라 호언장담하였다.
 1195년, 일드 프랑스, 샹파뉴, 로렌을 동시 침공한 샤를의 대군은 3개의 전장에서
 모두 승리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는 프랑스의 정통적인 유인수법이었다.
 1196년 승리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세곳에서 동시에 프랑스의 의병들이 일어났다.
 때를 같이하여 프랑스 정규군이 침공을 시작하자
 샤를대군은 무너져 버렸다.
 
 일드 프랑스, 로렌 침공군들은 죽거나 포로 잡혔으나 몸값을 거절당하여 전원 처형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샤를 대공은 샹파뉴에서 농성을 하면서 기회를 보아 플랑드로로 달아날 생각이었으나
 1197년 플랑드로 마저 프랑스가 재탈환하면서 그마저도 여의치 않게 되었다.

 이제 자신에게 최후가 왔음을 예감한 샤를 대공은
 자신의 형이자 선대왕이었던 쟝1세의 최후를 떠올렸다.

 1198년, 성을 나온 샤를 대공은 마지막 돌격을 시도했고, 결국 샹파뉴의 어느 이름 모를 숲에서
 최후를 마쳤다.


 도체스터 대회전
 한껏 기세가 오른 프랑스는 1200년 브리타니아 탈환을 목표로 워섹스로 침공하였다.
 실라에게 이제 브리타니아는 포기할 수 없는 영토였다.
 과정이야 어째든 이미 상업주의 기반 경제가 무너진 지금 농업적 기반이 될 브리타니아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지켜내야했다. 
 
 프랑스 군 123100대군과 42200의 실라군이 맞붙은 곳은
 훗날 토마스 하디의 소설로 유명한 도체스터였다.

 기사와 중무장한 보병을 앞세우고 위풍당당히 쳐들어오는 프랑스군을
 실라군의 농민병대가 중앙을 지키고
 굴람의 궁수들이 쉴새없이 활을 퍼부었다.
 
 중앙이 무너지며 위기에 빠진 실라를 구한 것은 양익 기병이었다.
 엘시드가 숨기고 숨겼던 기병들이 배후에서 나타나 적 지휘관만을 목표로
 급습, 목을 베어버린 것이다.

 이 도체스터 회전의 패배는 프랑스를 나락으로 몰아넣었다.
 다시 브리타니아 침공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1201년 독일을 멸망시키고 남진하는 헝가리를 막기에도 벅찰 지경이었다.
 
 도체스터 회전의 승리자인 실라 역시도 브리타니아를 차지 하지는 못했다.
 재정적자의 압박은 더욱 심해져, 이젠 브리타니아에 주둔하는 군대의 운영비도
 되지 못할 지경이었다.

 1210년 마침내 앙리1세는 중대한 발표를 한다.
 브리타니아를 포기하고, 해상무역로를 재개척한다는 것이 주된 골자였다.

 

 승자도 패자도 없이....
 미디블은 확실히 새로운 세력을 중심으로 질서를 회복하여 갔다.
 영국,프랑스, 독일, 실라 간에 벌어졌던 서유럽 패권다툼은 그때까지 유럽의 약자에 지나지 않던
 관망자 '헝가리'와 '이탈리아'의 전성기를 열어주었다. 
   
 또한 십자군 파견에 가장 힘을 썼던 독일과 프랑스, 영국이 힘을 잃음에 따라 알모하드, 이집트의 번영을 가져왔고
 이베리아는 알모하드에 귀속되었고, 이집트는 결국 투르크를 멸망시키고 비잔틴을 로도스, 크레타의
 작은 섬국으로 전락시켰다.
 
 브리타니아 인들의 야유와 곳곳에서 일어난 반란군들의 추격속에서   
 아일랜드로 향하는 배로 오르기 위해 웨일즈로 행군했던 실라군,
 그 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부대해체명령..

 

 그들은 무너져가는 왕국의 휘영과 칼을 맞대고 싸웠던 적들의 몰락을
 꼽씹으며 어떤 상념속에 빠져들었을까?

 

 혹자는 말한다.

 전쟁은 현명한 자에게는 과학이지만, 어리석은 자에게는 도박이다
 그러나 현명한 자의 전쟁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전쟁의 영광이란 허무하다. 총 한번 쏘지 않고, 부상자의 비명을 들어본 적도 없는 자들만이
 더 많은 피와 보복 그리고 파괴를 외칠 뿐인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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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장독대 | 작성시간 07.09.21 오오....굉장하군......화이팅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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