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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보면 비잔티움이 없었다면 이슬람의 진군을 유럽이 막을순 없었겠죠?

작성자베이커특공대| 작성시간10.02.05| 조회수1941| 댓글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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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Arius 작성시간10.02.05 페르시아의 내부투쟁은 그냥 권력암투가 아니라 군대를 몰아서 왕좌를 뺏고뺏는 소모전양상이였습니다. 호스로우 2세가 아들에 의해 살해되자 그 뒤를 이른 카바드는 비잔티움과 평화를 맺는데 성공하지만 그 자신이 황제의 노예라고 자처할정도로 비참했습니다. 또한 카바드가 병사하자 이미 호스로우 2세의 장군으로써 명성을 떨쳤다가 호스로우 2세의 제거명령으로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이집트를 갖고 봉기한 샤르바라즈는 비잔티움에 땅을 돌려주는 대신 본인을 샤한샤로 인정해달라고하여. 마침내 무력으로 정권을 찬탈하지만 얼마못가 암살당하고 그뒤로 여성황제가 2명이나 옹립되는등 사산조 페르시아는 안정된 정치적 권력이 부재한채
  • 답댓글 작성자 임용관 작성시간10.02.05 항상 제국의 말기는 황위 쟁탈전의 연속이네요...
  • 작성자 Arius 작성시간10.02.05 혼돈의 도가니탕으로 빠져듭니다. 그들의 조상인 아케메네스조가 망한것도 내부투쟁에서 갓승리해서 국체를 추스를 기력도 없이 갑자기 마케도니아의 대규모 공세의 패배를 거듭하면서 망한것처럼 사산조도 내부투쟁이 사그러들즈음 이슬람이 비잔티움과 함께 사산조의 공세를 퍼붓고 사산조의 방패막이 되주던 라흠조는 아랍에게 박살이나고 뛰어난 명장 왈리드가 지휘하는 무슬림군대는 사산조페르시아의 대군을 연달아 대파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메소포타미아를 빼앗기게되나 이란고원에는 아직도 충직한군대들이 남아있었지요. 사산조의 잔당들은 제국멸망이후에도 장기간 마잔다란의 험준한 산맥에서 저항을 합니다. 결국 발렷지만;
  • 답댓글 작성자 Arius 작성시간10.02.05 사산조의 운명은 이미 비잔티움과의 싸움에서 결정되었다고 봐야합니다. 두제국이 서로 명운을 걸고 싸움 상태에서 사산조는 예전 나르세스가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발린거보다 더 훔씬 두들겨 터졌고 더욱이 비잔티움이 그나마 안정된 정치기반으로 살아남은것과는 달리 사산조는 호스로우 2세 사후 뒤를 수습할 장기간 집권하는 군주가 부재했기에 망한것이죠. 이미 니네베전투이전부터 호스로우 2세는 병령모집의 고충을 겪었다고 합니다 (게이볼그님글 참조) 두제국의 싸움은 치고 빠지는수준이 아니였고 거의 목을졸라가며 너죽고 나죽자 이런류의 전멸전이였죠; 그나마 비잔티움의 정치적권력이 공고했다고하면 사산조는 그런게 부재했고요
  • 답댓글 작성자 임용관 작성시간10.02.05 마잔다란의 저항이 마사다 저항과 오버랩될만한가요?
  • 답댓글 작성자 Arius 작성시간10.02.05 그정도는 아닙니다; 꽤나 한 9세기까지 버틴것으로 아는데 마잔다란지역자체가 험준한 고령으로 이루어진대라서 그런거지 마사다 저항처럼 눈물나는 분투를 한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사산조의 잔당이지만 그저 독립세력으로써 살아남은것같고요; 마지막황제 야즈다게르드 3세와 피루즈는 중국 당나라로 망명할라했고. 야즈다게르드 3세는 신하손에 살해되었지만 피루즈는 살아남아 대당우무위장군이던가 대장군을 지낸것으로압니다
  • 작성자 Arius 작성시간10.02.05 그리고 본론으로돌아가서 말하자면 비잔티움이 그렇게 출혈을 내면서도 이슬람대군을 막지못했다면 이미 유럽은 알라를 외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 콘스탄티누스 4세시절 드디어 무슬림대군을 출발시킨 무야위야는 시리아에서 뛰쳐나왔고 이건 칼리프의 친정으로써 마지막 안사르(무함마드의 조력자)까지 동원해 성전의식을 고취시키며 콘스탄티노플을 육지와 해상에서 두들겨대지만 콘스탄티누스 4세의 능력과 종교적으로 일치단결해 군민이 합심해서 마침내 이슬람군대를 대패시키지요
  • 작성자 Arius 작성시간10.02.05 프랑크제국이 서로마제국이 되는 800년경 그당시 비잔티움과 프랑크제국을 합쳐봣자. 이미 황금기를 맞이한 이슬람의 비하면 코웃음칠일이지요. 이슬람은 옛 히스파니아에서 마우레타니아와 아이귑토스에 이르는 광할한 옥토를 손에넣었고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 아라비아반도 시리아 팔레스티나 메소포타미아 플러스로 시칠리아 크레타 키프로스 모두 아랍의 손에있었습니다. 당시 중요한 육상교역로의 심장부를 장악했고 지중해는 아랍인들의 바다였지요 이들은 남이탈리아에서도 활개를 쳣고 아드리아해와 프로방스에서도 근거지를 마련해 해적질을 일삼았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 임용관 작성시간10.02.05 지중해를 내해 수준으로 장악했군요. 프랑크나 비잔틴, 어느 한 쪽이 뚫렸다면 세상이 완전히 바뀔뻔 했네요...
  • 답댓글 작성자 아뉘 작성시간10.02.05 800년대면, 이미 우마이야 왕조는 내전으로 폭싹 주저앉았고 이베리아 반도쪽은 코르도바 칼리프령으로 독립해버렸으며, 이라크는 압바스 왕조가 막 일어나서 내전으로 엉망진창인 상태였습니다. 해적질을 일삼을 수 있었던건 우마이야 왕조가 몰락하면서 북아프리카 해안가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 이에 해적들이 그 근방에 진을 치고 닥치는대로 지중해를 지나는 상선들을 덥쳐서 그런거구요. 900년대에 들어와서는 이미 압바스 왕조의 드넓은 이슬람 영토는 갈갈히 찢어져 분할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후 십자군 원정부터 시작해서 전체적으로 이슬람이 수세에 놓이게 됩니다.
  • 답댓글 작성자 Arius 작성시간10.02.05 이슬람이라고 표현한것은 무슬림의 세력권들이 그만큼 넓었다는것이지요. 이미 십자군전부터 아모리움왕조가 건국된시기부터 이슬람은 비잔티움에게 수세로 몰립니다 ;아모리움왕조의 연장선상이 마케도니아 왕조이며 이미 아모리움왕조시절부터 크레타탈환 (일시적인게 아니라 몇년정도 지배그리고 재탈환하려다가 바르다스 섭정의 암살로 무산)과 킬리키아 시리아북부 메소포타미아 북부 아르메니아에서 일어난 원정들은 모두 이러한것을 보여주지요
  • 답댓글 작성자 Arius 작성시간10.02.05 심지어 요한네스 1세 치미스케스시절 바그다드 인근까지 무인지경으로 진격합니다. 물론 니시비스등의 요새도시들은 항복하거나 약탈을 면하기위해 조세를 바쳤지요 ; 요한네스 1세시절에는 잠시나마 갈릴리까지 진격 일시적으로 점령하고요. 바실리우스 2세의 뒤를 이른 황제가 요한네스 1세나 니케포루스 2세 그리고 바실리우스 2세정도의 군대지휘를 보여주었다면 팔레스티나도 확보할수있었습니다. 문젠 압바스조가 주저앉고 비잔티움이 슈퍼파워로 떠오른지 50년도 안되서 새로운 무슬림들의 영웅 투르크족이 비잔티움을 격파해서 중동을 춘추전국시대로 만들어버린게 문제지만요
  • 작성자 베이커특공대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0.02.05 근데 페르시아가 적어도 헤라클리우스가 즉위할 당시에는 비잔티움보다 영토가 몇배는 더 컸는데 아무리 헤라클리우스가 잘 싸웠다고 하나 그 작은 제국이 페르시아 같은 거대한 제국을 떡실신 시켰다는게 신기하네요. 아나톨리아 지역이 고대에 비옥했다고는 들었는데 페르시아는 쓸모없는 땅이 많았었나보죠?
  • 답댓글 작성자 아뉘 작성시간10.02.05 허허 동로마 제국이 페르시아 제국에 비해 '작은' 제국이라고 하긴 힘들죠. 헤라클리우스가 즉위할 당시, 일시적으로 페르시아가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이집트의 영토를 먹기는 했지만, 그건 영토로 빼앗은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그 지역을 일시적으로 점령한 것에 불과했고, 본토에 해당하는 이라크 지역과 이란 고원이 당시 아나톨리아와 발칸 반도, 시리아, 이집트, 팔레스타인을 모두 가지고 있던 동로마 제국에 비해 더 생산량이 뛰어나다고 생각되진 않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 Arius 작성시간10.02.05 호스로우 2세시절 제국의 부가 커졋다고 하지만 그건 황제 개인일뿐이고 놀라운 상업적 발전이라던지 기술적인혁신이 있었다고 하지는않더군요. 페르시아야 인도양무역과 실크로드 독점(물론 초원길의경우 돌궐이 꽉잡고있었고 흑해연안의 동로마제국령은 창구였지요)을 한다고 해서라도 사산조가 로마제국 반때기인 동로마한테도 고전한거 보면 그닥; 그리고 아뉘님말씀을 보충하자면 이미 유스티니아누스가 막대한돈을 들여 재건한 북아프리카의 경제력은 헤라클리우스가 카르타고 천도를 생각하고 주장할정도로 눈부셨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정복이 삽질이라고 평가절하되지만. 곰곰히 생각해볼문제입니다
  • 작성자 무브유얼애즈 작성시간10.02.05 꼭 비잔틴 제국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이슬람이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을 거란 보장은 없다고 봅니다. 샤를마뉴가 이슬람 마적단을 훈훈하게 털어주니깐 의외로 이슬람 세력의 폭발적인 확장이 뚝 끊기는 걸 보면, 소아시아 쪽에서부터 진출하던 이슬람 세력도 언젠가 마적단이 한 번 시원하게 털리고 나면 이게 아닌갑다 하면서 제풀에 멈췄을 겁니다. 그 다음 콩가루 날리도록 내전에 들어가는게 이슬람 세력 시나리오 더군요.
  • 답댓글 작성자 Arius 작성시간10.02.05 ; 비잔티움제국이 없으면 누가 이슬람을 막습니까. 이슬람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이 점령되면 오스만처럼 못해도판노니아까지 올라왓을겁니다. 그리고 소아시아로 진출하던 무슬림세력들은 마적단수준이 아니라 칼리프에 본거지인 다마스쿠스 즉 시리아에서 출동해서 연례행사로 돌던 마적단이상입니다. 투르-푸아티에에서 이슬람을 격파한것은 서유럽의 열렬한 자기 피알일 뿐이지요. 당시 주력군은 시리아에와 북메소포타미아에서 아르메니아를 포함해서 격렬하게 소모전양상을 띄며 격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런상태는 아모리움왕조가 들어서기까지 치고받고 주거니 받거니하면서 된것이지요.
  • 답댓글 작성자 Arius 작성시간10.02.05 그리고 투르-푸아티에를 이끈것은 샤를 마르텔 즉 샤를마뉴의 할아버지 아니던가요; 히스파니아의 진출한 무슬림세력들이 북상해서 아퀴타니아로 진격했지만 영토욕보단 약탈전 성격이 강했습니다; 더욱이 히스파니아가 후 무야위야칼리프로 자리매김하면서 이 칼리프조는 프랑크제국보단 같은 이슬람이면서 찬탈한 아바스조랑 힘겨루기를 하고있었고요 이슬람의 분열이란 전제가 없다면. 아니 있었더라도 1차 콘스탄티노플에서 이슬람이 승리했다면 소아시아 산악에서 소규모 게릴라를 펼쳐도 이미 제국의 심장부가 너머간 이상 이슬람의 유럽재패는 시간문제였을겁니다. 사산조페르시아만 해도 심각한 내전상황을 추스렸지만 병력을 박박
  • 답댓글 작성자 Arius 작성시간10.02.05 긁어대서 이슬람군대보다 더많은 군대를 동원했습니다만 결국 크테시폰을 빼앗긴이후 사기가 급감했기에 종교적열의로 무장한 이슬람군을 당해내지못했지요.
  • 답댓글 작성자 무브유얼애즈 작성시간10.02.05 애초에 초기 이슬람 세력의 확장 경로의 첨병 자체가 마적단입니다. 뭐, 마적단이라고 말하긴 쪼매 파워풀 할지도 모르겠지만, 얘네들 하는 짓이 영락없는 마적질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적질이 거침없으면 권위 있는 지도층이 스폰서 넣어가면서 대대적으로 해먹자! 하면서 달려들어 조지는 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슬람 세력이 폭발적으로 확장을 한 이상, 내부 분열 문제는 어떻게 보면 피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 탄탄한 세력을 갖춘 비잔틴 제국의 조직적인 작전이 없었다 하더라도 어느 선에서 모종의 세력에 의해 마적질이 끊기면서 정복열이 흐지부지 되고, 또 어떤식으로든 내전이 벌어져서 지도층의 관심 역시 식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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