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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들

이거 서양판 환빠인가요?? =ㅈ=;;

작성자Τιταυιζ|작성시간08.02.25|조회수2,057 목록 댓글 21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거, 지인께서 보여주셔서 알게 된 것인데... 읽어보니 한단고기 논쟁이 생각나기도 하고 본좌님의 말씀에서 새로 알게 된 지식도 있고.. 하여 짧은 영어로 한번 번역하여 보았습니다.


출처는 EB포럼 http://forums.totalwar.org/vb/showthread.php?s=df07b4c215d8f8f3e72233b4c99f3c47&t=83475&page=2 입니다.
주제는 "EB에서 켈트가 너무 쎄게 나왔어요" 입니다...ㅡㅡ;;

SaFe 라는 닉과, Frostwulf 라는 닉의 글에 대해 본좌 (싸이코 V) 님이 조목조목 반박하는 내용의 일부입니다.

 

SaFe님 글의 일부 : 저는 언제나 예의바르고 젠틀하게 처신하려고 노력합니다. 만약 저의 코멘트가 무례하게 보인다면, 그것은 오직 제 짧은 영어실력때문입니다.

본좌 : 님의 글이 무례하다는 느낌, 받은적 없습니다.

 

 

SaFe님 글의 일부 : 모쪼록 제 짧은 영어를 참고 봐 주시기 바랍니다.


 

본좌 : 님의 영어는 아주 좋습니다. 다만, 제가 이전에 피력했던 의견, 혹은 취지에 대해 오해를 하시는 듯 합니다.


 

SaFe님 글의 일부 : 혹시 Jastorf 나 Hapstedt 문화에 대해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본좌께서는 켈트 문화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셨지만, 다른 문화권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무시하시고 계시는 듯 합니다. 상기 문화권은 기원전 500년경에 존재했다고 하던디요.


 

본좌 : 예. 그 이론의 이론적 토대는 대부분 Jordane 이 지은 "게티카" 와 독일 로만티스트인 Gottfried Herder 와, 감히 제가 말하기엔 뭣하지만, Ludwig Schmidt (게르만 부족의 역사) 의 저술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비록 제가 까놓고 그런 문화들을 부정하는 입장은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받아들이기에는 학문적으로 의심이 가는 부분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런 주장들을 명확한 사실이라고 보긴 어렵습니다.


 

SaFe님 글의 일부 : 저는 좀더 후대의 게르만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그러한 문화가 단지 역사학적 레이더에 반짝이는 광점에 불과했다는 본좌의 말씀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본좌 : 저는 이 자리에서 게르만인의 민족적 자부심에 대해 태클을 걸 생각은 없습니다. 이는 세월을 거치는 동안 게르만인들이 보여 준 가치나, 임팩트의 포괄적인 특징에 대한 발언이 아닙니다. 이는 단지 님이 말씀하신, 켈트가 "게르만족에 의해 서쪽과 남쪽으로 밀려 나갔다" 는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려는 것 뿐입니다. 당시 켈트/칼리아인들의 이주시기 당시에 게르만 족은 "레이더 스코프에 반짝이는 점" 이었을 따름이었습니다. 즉 제 말의 요지는 님이 원인과 결과, 본말을 전도하고 계시다는 것이지요. 물론, 그 시기의 끝무렵에 가면, 게르만인들이 일부 켈트인들을 몰아낸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허나 이 때는, 제가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이미 켈트인들이 그 지역에서 심각하게 약해진 뒤였습니다.


 

SaFe님 글의 일부 : 저도 Halstatt 문화에 대해서는 본좌님과 의견이 일치합니다. 하지만 라 테네 문화에서 드러나듯이 켈트와 게르만 부족 사이에는 광범위한 상업적 접촉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멋진 켈트 예술품들과 귀금속들... 논리적으로 생각한다면, 켈트인들의 뛰어난 무기들도 아마 교역의 대상이 되었을 겁니다. 지난 주 전 이곳에서 아주 흥미로운 대화를 나눴는데요... 대화를 나눈 어떤 사람은 결국 기원전 시기엔 무덤에서 게르만적인 (어쩌면 교역된, 약탈된 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릴지도...) 켈트식 검이 발견된 적이 없다는 것을 시인했더군요. 전 이 사실을 보고 여기 사람들이 무식하다는 사실에 실망했습니다.


 

본좌 :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말씀하신 것들은 게르만인들이 켈트/갈리아인들의 부와 물건들에 군침을 흘렸고, 무력에 의해 적당한 기회가 만들어지면 그것을 뺏기위해 달려들었다는 가설만을 증명할 뿐입니다. 그런 예는 로마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으며... 전 역사를 통틀어 나타나는 일입니다. 그것은 누비아/리비아 도적떼들이 이집트를 공격할 때 쓰여진 인류 역사상 첫번째 연대기에서도 드러나는 일이며, 그 후에도 쭉~ 나타나는 일입니다.


 

SaFe님 글의 일부 : 게르만인들이 기원전 300년에서 기원전 100년 사이에 철 세공술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게르만인들이 검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은... 신화일 뿐입니다. 심지어 게르만인들이 많은 로마 병기 (검을 포함한!) 를 노획한 바루스의 전투 이후에도 그러한 것들은 매장지에서 발견된 것이 거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본좌 : 기원후 첫 백년동안 게르만인들은 닳아 없아질때까지 노획물들 (그러니까 빼앗은 로마 검) 을 사용했다는 거지요. 하시고 싶은 말씀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님은 켈트인들의 전체적인 쇠락이 그들의 몰락과 결정적인 패배/어떠한 경우에는 몇몇 켈트인 집단의 전멸을 용이하게 했다는 일반적인 주장에 대해 동의하지 않으시는군요. 도대체 그게 지금의 주제와 뭔 관련이 있다는 겁니까?


 

SaFe님 글의 일부 : 당시 게르만인들은 죽은 자들을 화장-_-했습니다. 때문에 망자들은 그들의 저승으로의 여행에 아무런 짐도 가져가지 못했으며, 마찬가지로 무덤도 없었지요! 이러한 관습은 기원후 첫 백년 사이에 변하기 시작했으며, 시간이 가면 갈수록 화장은 드문일이 되어갔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기원전시대의 고고학적 유물을 찾기 힘든것은 당연한 겁니다.


 

본좌 : 실례지만, 좀 다른 이야기를 해 볼까요. (모르몬 교의 창시자인) 조셉 스미스는 미합중국에서 이집트 상형문자를 발견하여 대천사 가브리엘이 건네준 마법의 안경으로 그것들을 판독했다고 합니다만, 나중에 한다는 소리라고는 그 모든 증거들이 사라졌다는 얘기 뿐이었지요..;; 하지만 과학적인 분석은 좀더 엄밀한 입증을 필요로 합니다. 이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거지요.


 

물론 게르만인들이 망자들을 화장을 하였으며, 그러한 풍습이 점차 사라져 갔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건 벨기에 지방의 켈트인들  Celtic Belgae 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이 지역에서 발달된 철기기술이 있었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지요. 비록 게르만인들이 님이 말씀하신 바와같이 발전된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물직적인 증거는 그것을 증명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들이 라 테네 의 갈리아문화와 교류를 가지면서 토장 등등의 풍습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별로 놀랄일도 아니지요. 갈리아인들은 후에 로마인들이 그랬던것처럼, 똑같은 종류의 영향을 게르만인들에게 미쳤습니다.


 

Safe님 글의 일부 : 말씀하신 바가 맞지만, 님께선 켈트인들이 전투없이 포기하고 떠난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잊고 계시군요. 님은 켈트 부족들이 게르만 부족들의 압력없이 자신들의 고향을 떠났다고 주장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분명 사실이 아닙니다.


 

본좌 : 이 시기 중부/북부유럽에서 여러 부족들간에 충돌, 혹은 전쟁의 증거가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들은 그 지방에서 켈트인들의 세력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 벌어진 사건들입니다. 많은경우 궁벽진 곳의 주민들은 그들의 사라져가는 Halstatt 전통을 지키기보다는 그들 자신도 떠나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갈리아인들의 대부분/중요한 부분은 새로운 기회와, 좀더 살기좋은 땅을 찾아 중부유럽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게르만인들의 압력에 의해 떠난것이 "절대" 아닙니다. 켈트/갈리아인들이 프랑스로 이주하는 동안 게르만인들은 위협이 되지 않았어요. 당시 게르만인들은 역사적 레이더에 반짝이는 광점일 뿐이었다니까요~


 

같은 얘기들 반복... ㅡㅠㅡ (보기도 귀찮음)

 


Frostwulf님 글의 일부 : 제가 뭔가 지적을 해야 겠군욥. 아르베니-아이두이 간의 전쟁 이전에도 로마와의 충돌이 있었잖아엽. 대부분의 전투는 로마인들의 승리로 끝났지 말입니다. 따라서 로마 > 켈트 공식이 대충 맞겠지여. (이놈들도 >>> 이짓 잘하는군요-_-;;) 예예, 물론 브렌 인들도 마찬가지였고요. 로마는 마리우스 이후에는 물론이고 마리우스 이전에도 대부분의 전투에서 이겼습네다.


 

본좌 : 제가 로마 군사력의 우월함을 인정하긴 하지만,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여진다는 것을 기억해 두셨으면 합니다. 로마는 그들의 패배를 변명하거나, 축소시키거나 부당하게 무시하거나 아예 부인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여기에 비록 우리가 알고는 있지만, 대부분 잊고 지내는 예들을 들어보겠습니다.


 

마리우스 이전에는...


 

Battle of Arrentium (286 BC) 집정관 루키우스와 24,000명의 로마군들이 33.000명의 인스부레 인들과 세노세 인들에게 포위된 5,000명의 수비대를 구원하기 위해 보내졌습니다. 로마인들은 패배를 당했으며, 마을은 함락당했고 루키우스는 참수되었지요.

 

Battle of Faesulae (225 BC) 45,000명의 인스부레, 보이 그리고 가에사타에 인들이 45,000명의 로마인들을 패배시켰습니다.

 

Battle of Mutina (218 BC) 15,000명의 인스부레인들과 보이 인들이 4,500명의 로마인들을 패배시켰습니다.


Battle of Litana (216 BC) 35,000명의 보이 인들이 포스투미오스 알비누스 휘하의 25,000명의 로마인들을 학살했습니다. 알비누스는 참수되었으며 그의 두개골은 금박이 입혀져 술잔으로 쓰였습니다.


Battle of Mutilum (200 BC) 16,000명의 보이 인들이 가이우스 암피우스와 13,000명의 로마인들을 패배시켰습니다.


Battle of the Boii (196 BC) 15,000명의 보이 인들이 집정관 클라디우스 마르셀루스와 12,000명의 로마인들을 패배시켰습니다.

기타등등...


 

로마인들이 자랑하는 많은 "빛나는 대승리" 는 첫눈에 반할만한 멋진 승리는 절대로 아니었으며, 예를 들어 텔라몬에서 로마군은 거의 두배에 달하는 병력 (3만명) 으로 전투 초반부터 갈리아인들을 포위했기에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게르만처럼) 로마가 강력한 켈트/갈리아 세력에 의해 심각한 문제를 겪은것도 아닙니다. 로마인들은 그러한 경우엔 소모전으로 나가서 필승을 거머쥐었기 때문이지요. 갈리아인들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여전히 충분한 인적 물적자원이 있었으며, 손실을 얼마든지 보충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한니발도 겪었지요.) 켈트국가/부족들은 그러한 부를 누리지 못했으며 그나마도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닥나 버렸습니다.


 

이러한 전략이 로마에 많은 공허한 승리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Battle of Minicio (196 BC) 에서 집정관 가이우스 코넬리우스 휘하의 24,000명의 로마군은 평화협상을 거부하고,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 마지막 일인까지 싸운 12,000명의 인스부레 인 노인들과 어린이들, 여인들을 학살했습니다. 보이 인들역시 같은 운명을 맞았습니다.


 

"보이 인들의 귀족과 그의 아들들이 집정관 리키우스 퀸티우스의 캠프로 나아가 로마인들의 보호를 간청했으나, 평화에 대한 호소는 무시당했으며 로마인들의 탐욕은 본색을 드러냈다. 그때 집정관은 한 소년과 남색에 빠져 있었는데, 그 소년에게 사람이 죽는것을 보고 싶냐고 물었다. 그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으며, 그 즉시 플라미니우스는 칼을 뽑아 그 불행한 귀족을 배어버리고 아버지의 시체앞에서 그 아들을 겁탈했다." (The Celts, Defeat of Cisalpine Gaul; D'O Hogain)


 

그리고 기원전 191년에 푸빌리우스 스키피오는 38,000명의 고참병사들을 이끌고 35,000명의 보이 인들의 남자들과, 여자들과 어린이들을 공격했습니다. 비록 전투 후 화려한 개선식이 치루어졌으나, 실상 이 전투는 자포자기한 갈리아인들을 학살한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갈리아인들의 압도적 다수를 이룬 비전투원들은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 요리도구와 농기구들을 들고 저항했습니다.


SaFe 는 이 답변 후에 논파당했는지, 잘 시간이 되어서 그랬는지 버로우탔습니다만.. Frostwulf 는 지겹도록 계속덤벼드네요. 본좌님은 십라 시간낭비했네 생각했는지 반박을 그만둠..

 

소감 : "대륙 백제의 증거를 일본이 몽땅 불태웠다" 뭐 이런 주장 우리만 하는건 아니군요 (안도;;)

 

ps: 유틸님 돌아오세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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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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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Τιταυιζ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8.02.26 중세기사님// 감사합니다ㅠㅠ;; 리플이 많아 행복해용;; 팔랑기테스님// 아마도 그런가 봅니다;; ds2lie님// 그나마 안도를;; 게이볼그님// 저도 혹시..했는데 그렇군욥. 감사합니다;; kanon님// EB포럼 가보니까 몇분 계시는거 같더군요;; 스키피오씨님// 켈트인들에게 제법 혼이 났으니.. 로마군의 무기들이 켈트인들의 영향을 안받을래야 안받을수가 없는 것이겠죠...
  • 답댓글 작성자입닥제국 | 작성시간 08.02.27 카밀리안~푸블리안 개혁 군대 갑옷,방패,칼,투구,진형 등 보면 켈트 꺼랑 로마꺼랑 참 비슷함 -ㅅ-
  • 작성자ROK_CompanionOfficer | 작성시간 08.02.27 ...결국 노가다 뛰신겁니까 =ㅈ=;;;여담이지만 싸이코 햏은 자신일이 바빠 대략 무기한 버로우중 (엉엉 젭라 질문 대답좀)
  • 작성자ilmonde | 작성시간 08.02.29 좋은 내용을 번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세상은 어디든지 비슷한 법이로군요. ^^
  • 작성자진셍티 | 작성시간 08.03.01 그냥 헛웃음이...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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