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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에티오피아인들의 이집트 점령에 대하여.....

작성자웰링턴|작성시간05.02.13|조회수573 목록 댓글 6
리플로 달기엔 글이 좀 많아서 이렇게 답글로 답니다...

에티오피아는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아프리카 이집트 남쪽 지역에 붙인 이름입니다. “검게 그을은 얼굴들의 땅”을 의미하는 말이죠. 따라서 이 이름은 주로 현대 수단의 북반부와 현대 이집트의 남쪽 끝 부분을 포함하던 히브리어 “구스”와 일반적으로 일치하고있죠. 이집트의 문서들에서도 이 지역은 '케에시'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대 에티오피아의 수도였던 곳들은 '나파타'와 '메로에'로, 메로에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의 가계를 따라 왕권이 계승되는 왕국의 중심로 알려져있죠. 따라서 왕권을 갖게 되는 아들은 어머니인 황태후에게서 왕좌에 앉을 권한을 받게 되며, 때때로 황태후가 그 땅의 실제 통치자였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리스와 라틴 저술가들은 에티오피아의 그러한 몇몇 여왕들이 사용한 칭호로서 간다게라는 이름을 언급하고있습니다. 기원전 19세기부터 시작되었을것으로 보이는 점토판들과 운문기록들이 나오면서 많은것들이 알려져있는데 고대 이집트의 왕 람세스가 에티오피아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그중에 한부면이죠....

당시 부터 기원전 10세기까지 이집트 파라오 밑에 있는 이 영토를 관리한 부왕(副王)은 “구스의 왕의 아들”이라는 칭호로 알려져 있었던것으로 보아 속국으로 지내왔음을 짐작할수있습니다. 10세기이후엔 독립이란것을 하고 있었다고 보여지는데...수도를 이전하고..(나파타에, 후에는 '하르툼'에서 북북동쪽으로 210킬로미터쯤 떨어진 메로에'로 이전 ) 개별적인 군사력을 가졌다는것이 보여집니다.

르호보암 제5년(기원전 993년)에 유다를 공격했던 파라오 시삭(셰숑크 1세)의 군대에는 에티오피아의 전사들도 포함되어 있음을 알려주고, 아사 왕 제10년이 지난 뒤 즉 기원전 967년경에, 에티오피아 사람 제라가 백만 명을 이끌고 유다로 진격했지만 마레사에서 완패를 당하였다고 알려주죠...에티오피아는 이당시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였으며 이집트까지 넘볼수있는 상황까지 갔던것이죠.

역사는 기원전 8세기 후반에 에티오피아가 이집트를 정복하고 약 60년 동안 지배했음을 알려 주는데, 이 일은 “(에티오피아의) 제25왕조” 중에 있었다고합니다. 이 왕조의 통치자들 가운데는 성경에서 디르하가(Tirhakah)라고 불린 타하르카(Taharqa)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왕은 "산헤립(센나케리브)의 군대가 유다를 침공하는 동안(기원전 732년) 그 군대를 치러 올라왔지만, 아시리아의 비문들에 의하면 엘드게에서 패배하였다."라고 알려줍니다. 이 일을 계기로 아시리아의 황제 에살-핫돈과 아슈르바니팔은 그들의 통치 중에 각각 이집트를 침공했으며, 아슈르바니팔이 상(上)이집트의 테베(노-아몬이라고 불림)를 멸망시키면서(기원전 684년경) 이집트는 완전히 정복되었고, 나일 강 유역에 대한 에티오피아의 지배도 끝나게 되었다고 알려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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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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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RH-Stalker | 작성시간 05.02.14 그당시 사람들은 구라가 심해서 기록된 숫자의 0 한두개를 빼야 맞는거라던데..(어디서 주워들음 -_-;;;)
  • 작성자이혁수 | 작성시간 05.02.16 1만 정도 아닐까요?
  • 작성자웰링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5.02.16 음~~일만이라....그당시 이집트의 정규군은 45만....유다의 병력은 60만정도였습니다. 1만으로 유대를 공격했으면 과연 기록이나 했을까요...
  • 작성자이혁수 | 작성시간 05.02.17 기원전 10세기 경의 유다가 60만이나 되는 병력을 보유했다.......좀 믿기 힘드네요. 6만 아니었을까요?
  • 작성자웰링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5.02.17 6만으로 이집트군과 전면전을 벌일수있었을까요....시삭과의 전투에서도 상당한 규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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