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시마 트리니다드 - 정식명칭은 산티시마 트리니다드 이 누에스트라 세노라 델 부엔 핀(Santísima Trinidad y Nuestra Señora del Buen Fin)-는 함포 112문 규모의 일등급 전열함으로 건조되었고, 이후 1795년과 1796년 사이에 선미갑판과 선원선실 사이의 상갑판에 함포가 추가되어서 130문 규모로 커졌으며, 1802년에 계속하여 네번째 포열갑판이 증축되어서 실제로 추가된 함포수는 적었지만 140문 규모의 화력을 갖춘 전함으로 성장했다. 산티시마 트리니다드는 재건조 되었을 때 세상에서 가장 큰 무장선박이었다.
HMS 빅토리
산티시마 트리니다드의 설계도
추가된 대포들의 무게 때문에 흘수선이 매우 높았고 이로 인해 항해속도가 대단히 느렸으므로 심지어 몇몇 해군 장교는 이 전함을 오직 카디즈 만을 방어하는 용도로만 사용제한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USS 펜실바니아
발미
말라가 항구에 정박중인 산티시마 트리니다드(리플리카)의 선수상
1780년 8월에는 전열함 HMS 라밀레스와 3척의 프리깃함의 호위를 받던 63척의 영국호송대 상선 중 55척을 나포하였다. 1782년에는 지중해 소함대에 합류하여 2차 지브롤타 공격에 참가하여 잠시 싸운 후 지지부진한 스파르텔 곶 전투에 참전했다. 1795년에 산티시마 트리니다드에는 선원선실과 선미갑판이 포함되고 여분의 8파운도 대포들이 장착된 4층 갑판이 증축되었다.
1797년에 산티시마 트리니다드는 1월 14일에 벌어진 성 빈센트 해전에 에스파냐 사령관인 호세 데 코르도바의 기함으로 참전했으며 이 전투에서 심하게 파손되고 영국 함대에 거의 나포될 뻔 하였다. 산티시마 트리니다드는 넬슨 준장이 지휘하는 캡틴 (함포74문), 컬로든 (함포74문)호와 최초의 전투를 시작했다. 이후 블렌하임 (함포90문), 오리온 (함포74문), 이리지스터블 (함포74문), 엑설런트 (함포74문)의 협공을 받았다. 이로 인해서 산티시마 트리니다드의 모든 돛대가 부러지고 승선인원 중 절반 이상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심지어 군기까지 빼앗겼지만 펠라요 (함포74문)와 프린시페 데 아스투리아스 (함포112문)의 지원을 받아 후퇴하는 바람에 영국해군은 산티시마 트리니다드를 나포하는데 실패했다. 며칠 후 산티시마 트리니다드는 파손되어 너덜너덜해진 상태로 에스파냐로 복귀하던 중 리차드 보웬 선장이 지휘하는 함포32문 규모의 프리깃함 HMS 테르프시코레의 공격을 받았으나 탈출에 성공했다. 마침내 산티시마 트리니다드는 수리를 위해 카디스 항구로 돌아오는데 성공했다.
9년 후, 프란시스코 자비에르 우리아르테와 해군 소장 발타자르 이달고 데 시스네로스의 지휘하에 산티시마 트리니다드는 프랑스-에스파냐 연합함대의 일원으로서 1805년 10월 21일 트라팔가르 해전에 참전한다. 선체가 너무 커서 바람이 약하게 부는 날은 키가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연합함대의 작전목적에 부합하는 전력으로서는 비효율적이었다. 산티시마의 거대한 선체와 위치로 인해 연합함대의 기함인 부솅타투르 대신 영국 함대의 집중적인 목표가 되었고 수 많은 전함에게 동시에 공격받았다. 돛대를 모두 잃은 끝에 결국 토마스 프레멘틀 선장이 지휘하는 넵튠호에 항복하고 만다. 산티시마 트리니다드는 파손된 채 프린스호에 견인되었지만 전투가 끝난 다음 날 영국 포획자들은 선체에 구멍을 내어 폭풍우속에서 침몰시켜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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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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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타메를랑 작성시간 11.03.13 동시대 유럽 해군에서 가장 훌륭한 전함을 스페인이 만들었군요. 하지만 저 전함을 제대로 움직일 승무원과 전투원이 부족해서 그다지 큰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좋은 자료, 잘 보았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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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왕마귀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1.03.13 이게 얼마만에 보는 리플입니까...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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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타메를랑 작성시간 11.03.13 리플이 그리우셨나요... ㅠ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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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Chagall 작성시간 11.03.31 역시 ㅋ 기동력이 생명이네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