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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보드 루스탐 파루흐-호르마즈드와 신앙이 이룬 까디시야 전투

작성자알카시르|작성시간10.11.03|조회수1,014 목록 댓글 3

스파보드 루스탐 파루흐-호르마즈드와 신앙이 이룬 까디시야 전투

저자: 제항기르 코야제

 

사사니 시대의 정치적 발전의 마지막 단계는 장군들의 지배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 새로운 봉건제는 아랍의 침입 이전에 미처 스스로를 탄탄히 다질 여유가 없었다.

 

크리스텐슨 교수는 사사니 제국의 쇠퇴와 멸망에 대한 가장 중요한 요인을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그 봉건제는 호스로 1세(정의로운 아누시르반) 치하의 군사 정책의 결과였다. 장군들과 총독들이 자신의 담당구역을 세습 봉토쯤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크리스텐슨 교수는 이렇게 말했는데, 옛 왕조의 쇠퇴와 더불어, 그러한 장군들과 총독들은 왕 옹립자로서 더욱 많은 영향력을 발휘하려 하거나, 아니면 자기 자신이 왕이 되려 했다. 예를 들어, 바람 초빈, 비스타흠(비스탐)과 파루한 샤르바라즈(샤란-구라즈)는 일시적으로 스스로 왕이 되었다. 바람 초빈이 그 치명적인 선례가 되었고 샤란-구라즈가 뒤따랐으며, 이는 옛 이란의 통일과 독립에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샤란-구라즈의 암살은 그 나라의 귀족들에게 왕위 찬탈 놀이는 너무 위험하다는 것을 깨닫게 했고, 이 나라가 사사니 가문의 것이라는 생각은 쉽사리 타협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귀족들은 왕 옹립자가 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것이 샤란-구라즈의 통치 이후 수많은 어린 왕들이 옹립되고 폐위된 이유였다. 심지어 아르다시르 3세 때에도, 마-아두르-구슈나스프가 섭정 역할을 했다. 얼마 뒤에, 타바리에 의하면 호라산의 총독이었던, 아니면 아두르파테칸(아제르바이잔)의 이슈칸 혹은 프린스였던 파루흐-호르무즈드가 왕위에 욕심을 내었고 여황제 아자르미도흐트에게 결혼을 요청함으로써 그것을 공고히 하고자 했다. 오만한 여황제는 이 제안을 거절하였고 그녀의 야심 많은 구혼자를 암살해버렸다. 그러나 파루흐-호르무즈드의 아들 루스탐은 수도로 진격하여 여황제를 붙잡아 눈을 뽑고 폐위함으로써 아버지의 복수를 했다. 아버지와 아들 둘 다 아제르바이잔의 이슈칸 혹은 프린스라고, 아르메니아인 작가들은 기록하였다. 프린스 루스탐이 정복을 통해 자신의 왕국을 확장하려는 야망이 있었다는 것도 엿볼 수 있다. M. ST. Martin이 쓴 아르메니아 역사에서 루스탐이 631년에 아르메니아를 비잔티움 총독 프린스 바라즈디로트로부터 빼앗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루스탐의 아르메니아 정복이 그가 아랍인을 상대로 군사를 모았을 때 그 안에 상당한 수의 아르메니아인 부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루스탐은 야즈드가르드 3세(최근에 즉위한)가 크테시폰을 점령하는 것을 도왔고, 자신은 섭정이 되었다. 그는 다리크-파트(또는 집사)로 임명된 자신의 형제 파루흐자드와 또 다른 지도자 자도에의 도움을 받아 통치를 해나갔다. 놀데케가 추측하는 것처럼 야즈다가르드의 즉위에 대한 그의 도움과 여황제에 대한 그의 공격은 동시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루스탐은 그 시절 이란의 다른 귀족 권력 요구자들과는 달랐다. 그와 그의 형제는 그들이 왕좌로 이끈 군주에게 한 마음으로 헌신하였고, 외국 침략자로부터 이란을 방어하는 업무를 수행했던 것이다. 비록 수도에서의 음모에 유린당했고 사트라프들의 국가 방어에 대한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나라와 왕을 위해 끝까지 싸웠다고 후세에 전해진다. 그들은 이란인들의 경의와 찬탄을 여태껏 받아오는 것으로 보상을 받았다.

 

이란의 서사시에는 루스탐이 고귀하고 대단한 활력을 가진 사람으로 묘사된다. 그와 그의 형제는 이란과 야즈다가르드의 유일한 투사로 찬양받는다. 그들의 불변의 충성과 원기는 다른 이란 스파보드들의 반역과 멍청함과 비교된다. 훗날의 어떠한 역사가도 루스탐을 좋게 평가하지 않은 적이 없다. 크리스텐슨은 그를 “비범한 정력을 가진 사람이었으며, 좋은 행정가였고 훌륭한 장군”이라고 묘사한다.

 

Sir W. Muir의 루스탐에 대한 평가를 인용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전장에서 용감하나 오만하고 자만심이 강한 프린스의 윤곽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정력은 곧 느껴졌습니다. 귀족들이 그를 비난했습니다.”

 

비록 페르시아가 아라비아의 침입자들이 오기 이전에 쇠퇴할 운명에 처해 있었다고 하나, 운명의 여신은 루스탐의 편을 들어주어 적어도 한 번의 널리 이름을 떨칠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즉, ‘다리 전투’에서의 승리를 말이다. 그는 성공적으로 아랍인들로부터 삼각주를 되찾았으며 아랍 지휘관 아부 우바이드에게 그가 신뢰하는 페르시아인 장군 바흐만 두-이-하지브를 보냈다. 그는 또 다른 장군 잘레누스와 합류했는데, 그는 적 앞에서 달아난 적이 있어 더 이상의 퇴각의 대가는 죽음 뿐이라는 경고를 받고 있었다. 실제로는 루스탐 본인은 알 지스르(또는 다리)의 승리의 현장에 있지 않았지만, 그 성공은 그의 이름과 긴밀하게 관련되어서, 발라두리 같은 위대한 역사가도 루스탐을 승자라고 기록하였다. 그러한 권위를 생각해볼 때, 우리는 고대 이란의 마지막 승리는 루스탐의 후원으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해도 될 것이다.

 

바흐만은 전역을 용기와 주의를 갖고 수행하였고, 아랍 장군 아부 우바이드를 유프라테스 강까지 밀어붙였다. 아랍 군대가 강의 맞은편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기동할 공간을 찾을 수 없었다. 곧 그들은 강에서 내쫓겼으며 코끼리 떼의 돌격에 포위당했고, 그 장군은 하얀 코끼리에 짓밟혀 죽고 말았다. 아부 우바이드의 부관 모탄나의 노련한 솜씨 덕분에 3천 명을 살려낼 수 있었다. 바흐만은 이 때에 모탄나를 추격할 수 있었고, 그랬다면 아랍 병력은 궤멸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때에 페르시아 당의 수장 피루잔이 루스탐의 수도에서의 지위를 위협하였고, 따라서 페르시아가 이 전쟁에서 가졌던 가장 완벽한 기회를 돌이킬 수 없이 잃고 말았다. Sir W. Muir가 잘 파악한 것처럼, 이 제국의 중대한 위기 때의 페르시아 내정의 역사는 “음모와 질투로 제국을 희생시켰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루스탐은 아랍인들을 상대로 한 전역을 완료하여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다. 이는 헤라클리우스 황제조차도, 자신의 군사적 천재로서의 모든 위신과 비잔티움 제국의 분할되지 않은 자원으로도 해내지 못한 것이었다.

 

할리파 우마르는 이 거대한 역전을 언제나처럼 용기와 단호함으로 맞이했다. 그러나 바하두리는 이렇게 관찰하였다. “아부 우바이드와 살리트에게 재난이 닥치고 나서 1년 동안, 우마르는 이란에 대해 언급하길 꺼려했다” 그 사이에, 모탄나는 그의 깃발로 변경의 부족들을 모았는데, 그 중에는 심지어 ‘베니 나므르’와 같은 기독교도 부족도 있었다. 그리고 그는 히라를 탈환한 페르시아 장군 메란을 향해 진격했다. 보웨이브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이번에는 이전의 경험을 살려 아랍인들이 수비하였고 페르시아인들이 강을 건너 공격하였다. 논란이 되긴 하지만, 페르시아인들이 싸움에서 패하였다.

 

아랍인들은 메소포타마와 삼각주를 승리의 열매로 수확하였고, 다른 페르시아 영토로 지속적인 약탈을 하여 물자를 확보하고 공포를 퍼뜨렸다. 더 나아가 할리파 우마르는 대규모 페르시아 침공 재개의 성공으로 용기를 되찾았다. 그는 사드 이븐 아비 와까스에게 지휘권을 주었는데, 그는 예언자의 동료였다는 사실로 유명했다. 모탄나는 그가 고작 ‘일개 베두인 수장’에 불과하다는 것과, 알 지스르의 싸움에서 입은 상처를 회복하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지위를 빼앗겼다. 그 상처는 곧 치명적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죽기 전에, 그는 아랍에 매우 큰 공헌을 했는데, 그것은 사드에게 까디시야와 우다이브 사이에서 적을 맞으라고 조언한 것이었다. “그곳에서 적과 싸우시오,”라고 죽어가는 모탄나가 말했다. “그대는 승리자가 될 것이오. 그리고 설령 패한다 해도, 그대는 친숙한 사막의 황무지를 배후에 두고 있소. 페르시아인들은 그곳으로 들어갈 수 없을 것이오. 그곳에서 그대는 반격할 수 있소.” 사드의 군대는 할리파의 명령으로 징용된 부대가 더해져 부풀어올랐다. 그 군대는 “그 군대는 바드르에서 싸운 1499명 이상의 병사로 이루어져 있었다”. 사드가 지휘한 전 병력의 수에 대해선 여러 설이 있다. 누군가는 30000명이었다 말하고, 모탄나가 지휘한 병력이 8천이라고 한다. 사드 자신이 데려온 병력, 시리아 징집병, 예멘과 남부의 신규 징집병도 그와 비슷한 숫자였다. 그는 할리파의 조언에 따라 인내와 경계를 실천하였다. 그는 자신의 전장을 잘 선택했고, 곧바로 큰 늪지대에서 쉬었다. 그의 후방과 다른 옆구리에는 샤푸르의 거대한 참호가 있었고, 꼬데이스의 요새와 사막이 있었다.

 

비록 라이벌 피루잔에게 방해받았으나 이제 실질적으로 이란의 섭정이 된 루스탐의 앞길은 매우 큰 위험에 처했다. 그의 노력은 그의 높은 지위와 정력적인 성격에 알맞은 것이었다. 그는 잃어버린 땅 대부분을 되찾았고, 히라로 진격하여 다시 정복했고 그곳 주민들이 제국을 배반한 것을 힐책하였다. 그는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바빌론을 지나 비르스 나므루드의 폐허 근처에 일정 기간 주둔한 것’으로 짐작되며, 나자프를 지나쳐 아랍 군대와 맞닥뜨렸다. 그가 지휘한 군대의 규모에 대해서는 여러 다른 계산이 있다. 누군가는 그 규모를 20만명까지 올려잡고, 다른 누군가는 12만 명이라 추정한다. 후자의 경우 4만 명이 잘레누스 휘하의 선봉대를 형성하였고, 6만 명이 루스탐 휘하의 본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권위자들이 말한 것처럼, “이건 모두 추정에 불과하다”.

 

다른 이들은 아랍 군대를 고작 5-6천에 불과했다고 말한다. 이 관점에 따르면, 아랍인들의 수적 우위는 고려할 필요 없을 것이다. 이 마지막 추정치는 지나치게 적게 계산한 오류를 범했을 가능성이 높다. 루스탐의 군대의 한 요소는 큰 주의를 받아 마땅하다. 다일라인에서 온 4천 명으로 구성된 한 대대가 있었는데, 황실 근위대의 일종이었고 “준드 이 샤한샤”라고 불렸다. 이 북방 민족과 옛 이란의 다른 민족들의 결속은 완전하지 못했다. 루스탐이 죽자, 그들의 일부는 아랍 침략자들과 화친을 맺었고, 이슬람으로 개종했으며 그들에게서 봉급을 받았다.

 

신중하고 통찰력이 있는 우마르가 가능한 가장 많은 아랍 병력을 사드의 지휘하에 둔 것에 비해, 루스탐은 페르시아 제국의 최대 병력 자원을 결코 휘하에 두지 못했다. 귀족 개개인 뿐만 아니라, 여황제-어머니 자신도, 만약 루스탐의 군대에 합류했더라면 전투의 향방을 결정적으로 바꾸었을 대량의 병력을 후방에 보존해두었다. 이것은 까디시야 전투 조금 뒤에, 또 다른 페르시아인 귀족 나흐바르간이 아랍인과 싸우기 위해 단독으로 수도에서 출격한 것을 보아도 분명하다.

 

비슷하게, 아랍인들이 수도로 진격해올 때, 여황제는 또 다른 군대를 내보내어 맞서게 했고, 그들은 바후라시르 전투에서 “호스로의 사자”라 묘사된 노련한 장군의 휘하에서 용감히 싸웠다. 또한, 메다인이 함락된 뒤에, 페르시아의 네번째 군대가 잘룰라에서 아랍인들과 싸웠다. 발라두리는 “이때 페르시아인들은 루스탐의 형제 후라자드가 이끌고 있었다. 뒤이어 일어난 싸움은 그들이 여태까지 겪은 가장 치열한 것이었다. 화살이 꺾이고 창이 부러지며 검이 휘어질 때까지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권위 있는 주장에 의하면, 이 네 번째 전투의 격렬함은 “까디시야에서의 클랑고르의 밤을 능가하지 못했다. 이번 것이 더 짧았다”. 그러나 페르시아 병사들의 용맹함은 의심할 바 못 되는데도, 이 군대는 계속되는 교전에서 점차 소모되어버렸다.

 

많은 아르메니아 분견대가 루스탐을 따라 전장에 나갔다. 이는 루스탐이 아제르바이잔의 “이슈칸” 혹은 프린스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카이타니, 둘라우리에르, 파트카니안이 옛 아르메니아 연대기에서 많은 귀중한 정보를 수집했다. 이러한 사료에서 아르메니아의 알로반의 프린스 바라즈그리고르(그레고리오)가 자신의 용감한 아들(이름은 제반셰르)에게 군사를 주어 크테시폰에서 페르시아군과 합류하도록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연대기는 루스탐이 “그 젊은 아르메니아 지휘관에게 깊은 동정을 느꼈고 자신의 동생이나 아들같이 대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 서술은 자신의 부하에 대한 프린스 루스탐의 친절함과 동정적인 예우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쯤에서 바흐만 하지브를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는 그 전역에서 루스탐의 오른팔이었고 페르시아 군의 다른 어떤 장교들보다도 더 병사들의 신뢰를 받았다. 전투의 선두에서의 그의 싸움과 영웅적인 죽음은 그가 명백히 “전사”였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리고 그는 전장에서 명예롭게 죽은 첫 이란인 장군이었다.

 

루스탐과 사드 둘 다 상당히 주의하면서 거대한 교전을 향해 나아갔다. 루스탐이 메디나에서 까디시야까지 행군하는 데에 4달이 걸렸다고 주장되고, 비슷하게 사드는 메디나를 봄에 떠났으며 전투는 그 해 11월에 벌어졌다. 패배한 쪽인 루스탐은 더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두 장군 모두 그들의 발을 묶어놓은 중대한 일이 매우 필요한 것이라 확신했다. 사드는 끊임없이 지원 병력을 받았고 그들을 그의 군대에 통합할 충분한 시간도 벌 수 있었다. 루스탐은 작전에 사용할 많은 영역을 다시 정복하고 재조직해야 했다. 그는 페르시아 궁정의 조급함이나 그의 적들의 음모에 반응할 마음이 없었으나, 제국의 운명을 가장 빠른 기회에 단 한 번의 전투에 맡겨야 했다.

 

루스탐의 “낙담하는 꿈과 전조”에 대해 할 것 같다. 그 지휘관에게 그가 처한 상황의 심각함을 일깨워주기 위해 초자연적인 전조 같은 건 필요 없었다. 그가 마땅히 받을 권리가 있던 병력을 주는 걸 거부하고, 결정적인 전투를 서두르도록 재촉한, 페르시아 궁정에서의 그를 향한 끊임없는 음모가 가장 나쁜 전조였다. 그는 의심할 바 없이 그 때 발생한 아랍인의 시리아에서의 성공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바쿠사와 피흘의 전투에서 승리했고, 다마스쿠스를 탈취하였다. 그는 이에 무관심할 수 없었는데, 이러한 성공으로 페르시아의 침략자들이 더욱 큰 규모의 지원을 더욱 많이 받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러 해 동안 페르시아 제국의 쇠락은 분명했다. 그러므로 장군의 애국심으로 가득 찬 마음이 불길한 환경에 의해 꺾였을 것이고, 유행하는 천문학의 도움을 받아 하늘의 대응하는 전조를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루스탐은 크테시폰의 궁정이 전장에 가져온 지나친 조급함을 억누르기 위해 이러한 점괴에 의지했을 것이다. 타바리가 기록한 한 일화가 루스탐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크테시폰의 왕궁의 천문학자들의 기술과 부정을 이용했다고 우리에게 지적한다. 따라서, 그를 도왔던 왕실 천문학자와 주르나라는 이름의 인도인 천문학자의 봉사를 루스탐은 이용했는데, 아랍인에 대한 진격의 위임권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마지막 전투 전에 아랍 사절들과 이란의 왕 뿐만 아니라, 루스탐 사이에도 회담이 있었다는 것에 모든 권위있는 학자들이 동의한다. 이 주제에 대해서도 역시 다양한 설명이 있다. 사드가 루스탐에게 보낸 사절 중 한 은 알 무기라흐였다. 발라두리는 알 무기라흐가 “루스탐의 옥좌에 나아가 그의 옆에 앉으려 했다. 그러나 페르시아 기마근위대에게 저지당했다”. 회담 중에, 루스탐은 외교적 수완과 우수한 병력의 과시를 모두 사용했다. 그 절차는 샤나메에도 지적되어있다.

 

다른 설명에 따르면, 루스탐은 아랍 사절을 야즈데가르드 왕에게 보냈고, 왕은 화를 내며 회담을 중단했으며 그 사절들을 궁정에 보낸 일로 루스탐을 힐책하였다. 그러나 루스탐이 아랍 사절들에게 한 “경멸적인 위협”으로부터 그가 “지나친 자존심”의 소유자라는 생각을 한 역사가들은 확실히 오해한 것이다. 분노의 표출은 때때로 단지 외교의 한 양상에 불과하다. 게다가, 이 회담의 자세한 부분까지 모두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 권위자가 이 전쟁에 대한 기술과 연관된 기록을 살펴본 바에 따르면, “많은 것이 전설과 상상에 근거하였다”. 위대한 놀데케가 이렇게 말했다 “혼란스러운 회상에 근거한 아랍 전사들의 말은 조심스럽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이 일들에 대하여, 사건의 경과와 회상 모두 혼란스러웠다. 교섭은 “은혜의 사흘” 바로 전에 행해졌는데, 이 시간에 페르시아인들은 아랍 장군들이 내놓은 조항을 고려하였다. 이 사흘의 지체가 페르시아에게 치명적이었는데, 이 틈을 이용해서 가공할 전사 알 까다가 시리아 지원군을 이끌고 전투의 결정적인 시기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알 까다는 아랍 진영의 으뜸가는 투사였는데, 사드 자신은 병 때문에 말에 올라 싸움을 지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시기가 끝날 때에, 루스탐은 아랍 지휘관이 강을 건너게 유도하여 전투를 시작하려 했다. 그러나 아랍 지휘관은 자신의 강력하고 잘 보호된 진지를 포기하기에는 너무나도 신중했다. 그는 강력한 저항에 맞서 강을 건너고 배후의 거대한 장애에도 불구하고 교전을 하는 역할을 루스탐에게 넘겼다. 아랍인들은 강에 놓여진 배다리를 완강하게 지켰으나, 페르시아 기술자들은 용케 강을 가로지르는 둑을 건설하여 아군이 건널 수 있게 했으며, 루스탐은 이렇게 말하며 부하들을 격려했다 “내일이면 우리는 저들을 산산조각 낼 것이다.” 그가 아무리 낙담해있던지 간에, 병사들의 용기를 북돋는 것은 그의 의무였고, 그는 매우 잘 해냈다.

 

 

 

전투의 배치에 대해선, 우리가 가진 정보는 부족하고 모호하다. 그러나 페르시아 군의 양익을 후르무잔 장군(파르스의 사트라프)과 미란 바람 라지 장군이 지휘했다는 것과, 잘레누스는 전위 부대를 지휘했다는 것은 알고 있다. 피로잔은 후위 부대의 지휘를 맡았다. 루스탐에게는 코끼리 30마리(혹은 33마리)가 있었다. 그 중에 18마리는 중앙에, 나머지는 양익에 배치되었다. 루스탐은 자신을 위한 옥좌를 만들었는데, 거기에서 군사 행동을 지시할 수 있었다. 크리스텐슨 교수는 이것이 사사니 왕조의 불변의 관습이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 사건에서 특별한 것은 페르시아 프린스가 적당한 간격에 배치된 일련의 연속적인 사람을 이용해 크테시폰의 궁정과 지속적인 연락을 유지했다는 것이고, 그들은 전투에서 벌어진 일을 야즈데가르드 왕에게 전할 수 있었다. 요컨대 루스탐이 설치한 것은 사람 “전화”였다.

 

전투의 첫 날은 페르시아인들이 완전한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에 모두가 동의하고, 그래서 그 날이 끝나자, 아랍인들과 그 지도자들은 깊은 낙담에 빠지게 되었다. 일상적인 일대일 대결의 연속 뒤에는, 코끼리 횡대가 아랍 군대에 돌진하여 앞을 막는 모든 것을 격파하였다. 헛되이, 아랍 전사들 중 가장 용감한 이들은 아부 미흐잔이 그랬던 것처럼 용맹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코끼리의 역할은 간과되어서는 안 되었다. 마침내 아랍 대장은 타민 부족의 용감한 아심에게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코끼리떼의 돌격을 막아달라고 간청했다. 아심은 궁수를 거느리고 코끼리에게 전진하여, 코끼리를 모는 병사 몇 명을 쏘아 떨어뜨리고, 코끼리 등 위의 가마를 묶은 뱃대끈을 잘랐다. 가마가 땅에 떨어지자 기수들은 학살되었다. 그러나 코끼리의 전진은 그렇게 멈추었으나, 전투는 해질녘까지 중단 없이 계속되었다. Sir W. Muir가 “아랍 병력은 파멸되었다”라고 말한 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첫째 날 전투에 대한 야꾸비의 설명은 프린스 루스탐의 작전에 추가적인 빛을 던져준다. 그에 따르면, 그 장군은 알 우자이브 성에서 싸움을 내려다보던 아랍 지휘관을 기습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아랍인들은 자기네 장군을 지키기 위해 성공적으로 재결집하였고, 그 시도를 저지했다.

 

전투의 둘째 날은 그러나 아랍인에게 유리하게 시작되었는데, 시리아에서 원군이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이 원군의 전위 부대는 알 까까가 이끌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아랍인들이 까디시야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의 도착은 그의 편에 강력한 자신감을 갖다 주었고, 특히 다리 전투의 승자인 바흐만 하지브가 이끄는 페르시아 부대를 공격함으로써 자신의 도착을 알렸다.

 

알 까까와 다른 두 아랍인 전사는 바흐만에게 달려가며 아부 우바이드와 그 전투에서 죽어간 다른 이들의 복수를 하길 바라왔다고 소리쳤다. 바흐만도 다른 두 페르시아인 투사 피로잔과 빈다반의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알 까까는 피로잔을 쓰러뜨렸고 그의 동료들도 다른 두 페르시아인들을 때려눕혔다.

 

페르시아인들은 적의 다른 지원병력이 가까이 옴에 따라 더욱 당황에 빠졌다. “아랍의 혼이 일어났다”, “그들은 어제의 재앙을 잊었다”고 Sir W. Muir는 관찰했다. 무엇보다도, 페르시아인들은 이전의 이점을 잃은 채 싸우고 있었다. 전투의 첫 날에 잘린 코끼리 병단의 마구를 수리하는 동안에, 즉석에서 조직된 낙타 병단으로 아랍인들은 페르시아 기병대를 물리쳤다. 그러나 그때 루스탐은 관측초소에서 내려와 잘 훈련된 보병대의 도움으로 전황을 회복하였다. 이렇게 “아그와트의 날”이 끝나고, 아랍인들은 2000명 이상을 잃었다. 이토록 큰 희생에 사드는 급조한 무덤에 시체를 매장하기 전에 그들의 몸을 닦는 의식을 거행했다.

 

전투의 셋째 날(야움, 기마스 또는 이마스 라고 불린다)에 결과는 여전히 불확실했다. 그러나 히샴과 그가 시리아에서 이끌고 온 700명의 도착은 아랍 병력의 용기를 북돋웠다. 이 지원부대는 100명씩 한 조를 이루어 띄엄띄엄 간격을 두고 전진했고, 그 결과 원군의 숫자를 과장할 수 있었다. 그 동안 코끼리의 마구가 고쳐졌고 다시금 공격을 재개하였다. 그러나 페르시아 망명자들의 조언에 따르면, 알 까까와 그의 형제 아심과 다른 이들이 이 동물들에게 달려들어 코와 눈에 상처를 입혔다고 한다. 이렇게 맹렬히 공격받자, 코끼리들은 두 군대 사이에서 잠시 동요했다. 그러나 나중에, 그것들은 페르시아 군을 뚫고 돌격하여 운하를 건너 우르르 달아났다. 하지만 루스탐은 그 날을 버텨내는 데 성공했다. 이 전투에 대한 큰 권위자인 사이프 b. 우마르의 의견에 따르면, 아랍인들은 그 날 패배할 수도 있었으나 알 까까의 기술과 히샴이 이끄는 지원부대의 도착이 이를 막았다고 한다. 알 까까의 노고를 평가할 때 잊어서는 안 되는 게 있으니, 낙타 병단을 조직하여 페르시아 기병대의 돌진을 무력화한 것이 그것이다. 페르시아인들의 말은 낙타의 모습과 소리와 냄새에 익숙하지 못했다. 알 까까의 이 책략의 결과 페르시아 기병대가 앞을 다투어 달아나다 보병 대열을 들이받게 되었고, 심각한 문제를 낳았다.

 

혼잡한 전투는 셋째 날 밤 내내 거세게 이어졌고, 역사 속에서 “라일라 알 하리르”라는 명칭으로 유명해졌다. 카이타니에 의하면, 그 명칭은 그날 밤 들려온 고통으로 인한 신음소리를 암시한 것이라 한다. 하지만 웰하우젠은 “하리르”라는 단어는 싸우는 동물들의 억제된 울음소리라고 추정한다. 두 진영 모두 지칠 대로 지쳤고 격노하여 조리 있는 설명의 요구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카이타니의 호기심을 끄는 것이 또 있으니, 예르무크의 싸움에서도 그렇게 불린 밤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부분적으로만 최고 지휘에 종속되어있었지만, 아랍 진영은 이 밤의 와중에 몇몇 이동을 시도했다. 이리 하여 사드는 툴라이하 빈 쿠와일리드에게 아랍 진지 밑에 있는 운하의 여울을 지키라고 명령했다. 페르시아인들이 측면공격을 가해올까 두려워서였다. 그러나 툴라이할리는 운하를 넘으려는 유혹을 떨쳐낼 수 없었고, 대담하게 자신의 속셈을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페르시아인들에게 운하 건너까지 도로 밀려나고 말았다. 다른 아랍 부대들은 이 움직임을 도와 자기 부족의 이름을 외치며 페르시아인들을 공격했는데, 그들의 지도자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사드는 그러한 “용감한 무규율”을 용서할 수밖에 없었다. 아랍인들처럼, 페르시아인들도 둘째 날과 셋째 날 밤에 자신감을 유지하기 위해 부족이나 연대의 이름을 계속해서 외쳤다. 이 밤의 군사행동이 양측의 장군들에게 지시 받지 않았다는 것을 구태여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군사행동은 양측에 극도의 피로와 격노를 불러왔고, 전투의 신속한 종결을 초래했다.

 

넷째 날(일요일)의 아침의 전투에서 페르시아 군대는 무너지고 말았다. 한 중요한 요인은 무시무시한 모래 폭풍이었는데, 사이프 빈 우마르가 기록한 바에 따르면 루스탐이 전황을 보고 작전을 지시하던 대형 천막까지 쓰러졌다고 한다. 웨일은 공정하게 관측하기를 “팔레스타인에서 남풍이 기독교도들을 이슬람의 추종자들 앞에서 달아나도록 한 것처럼, 까디시야에서도 굉장한 먼지구름이 서풍에 실려 조로아스터교도들에게 불어 닥쳤다. 어찌나 거셌던지 추격하는 무함마드의 추종자들이 적들의 얼굴조차 볼 수 없었다”.

 

페르시아의 패배에 대한 또 다른 요인은 까까에 의한 최후의 필사적인 돌격이었다. 모든 천막이 넘어짐에 따라, 중앙에서 작전을 지시하던 루스탐은 보물 자루를 실은 노새 밑으로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무거운 보물 자루 하나가 그에게로 떨어져 그 등뼈를 부수었다. 이렇게 무능력해지고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게 되자, 루스탐은 운하로 몸을 던져 건너려 했으나 그곳에서 살해되었다. 그의 죽음에 대한 많은 설명이 있고, 그러한 위대한 인물을 자기 손으로 끝장내었다고 주장하는 수많은 이가 있다. 그는 힐랄 빈 울라파에게 살해당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명이다. 그러나 발라두리에 의하면 “살해된 루스탐의 몸에는 수많은 타박상과 자상이 나있어서 치명적인 타격을 입힌 게 누구인지 증명할 수 없었다”.

 

아미르 빈 마디카리브, 툴라이하 이븐 쿠와일리드, 쿠르트 이븐 잠마, 디라르 이븐 알 아즈와르가 루스탐에게 달려들었다. 주하이르 이븐 압드 샴스가 그를 죽였다고도 하고, 아우왐 이븐 압드 샴스가 죽였다고도 한다. 또 다른 설명에서는 루스탐이 자신을 향해 말을 달려오는 힐랄을 향해 화살 한 대를 쏘았고 발을 맞혀 등자까지 꿰뚫었다고 한다. 그러자 힐랄은 루스탐에게 달려들어 그를 죽였다. 루스탐이 어떻게 죽었든 간에, 그의 죽음으로 페르시아 군대는 모조리 패주해버렸다.

 

루스탐이 죽자 군대를 지휘하여 퇴각시킬 사람이 남아있지 않았고, 따라서 타바리에 의하면 이전의 사흘 동안 잃었던 병력에 더하여 퇴각 시에 1만 명을 또다시 잃었다고 한다. 피로잔과 호르무잔이 이끌던 군단은 알 아티끄 운하의 둑을 운좋게 가장 빨리 건널 수 있었다. 그러나 잘레누스가 자기 군대를 미처 따라잡기 전에 둑이 쓸려내려갔고 잘레누스는 부하들을 다시 모으려 시도하다가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다른 주목받는 도망자는 자즈 부하이슈와 까린이었다. 그들은 한 가문 출신인데, 옛 이란에 수많은 유명한 전사를 배출한 가문이었다.

 

이 위대한 전투에 대한 많은 전승을 남긴 아랍인 연대기작가 사이프 빈 우마르가 부하들과 함께 퇴각하기를 거부한 몇몇 용감한 페르시아인 지휘관들의 이름을 고생고생하며 보존한 것은 매우 빛나는 업적이다. 그들은 퇴각보다 “용감히 죽기를” 택했다. 이런 명예로운 위치에 사이프와 타바리는 샤리아르 카나라, 히르비즈, 파루한 아바지, 후스라브슈눔 함다니의 이름을 적었다. 와끼디도 이렇게 관측하였다 “페르시아인의 한 무리는 자신들의 깃발을 땅에 단단히 박아넣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우리 위치를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재집결이 그 사람들한테는 무척 명예로운 것이었지만, 그 때문에 페르시아는 보충할 수 없는 장군들의 목숨을 잃게 되었다. 다이르 이 카브의 나흐베라간의 싸움에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뒤, 크테시폰 방어전을 지휘할 장군이 한 명도 남지 않게 되었다.

 

말이 나온 김에 말인데 용감한 히르비즈의 언급에서 사사니 시대에 사제 계급의 남자도 장교로 복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략가로서도, 전술가로서도, 루스탐은 그냥 모자란 인물이었다고 말할 수 없고, 역사가들은 위대한 전투의 뒤집힌 결과에 대한 책임을 그에게 묻지 않는다. 전술에 관해서는, 코끼리의 궤주에 대해 그를 비난할 수 없다. 그것은 분명히 지독한 불행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그 사건 뒤에 전황을 회복한 것에 대해 칭찬받아 마땅하다. 전투의 향방을 결정한 것은 사실 시리아에서 온 방대한 원군의 출현이었다. 어쩌면 루스탐은 이 신선한 적군의 촉박한 출현을 어렴풋이 알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가 알 아티끄 운하를 건너 고르고 고른 강력한 위치를 차지한 아랍인들과 운하를 배후에 두고 전투를 벌이도록 재촉한 것이다. 그 이란인 장군은 무모한 공격자가 아니었고, 카이타니가 관찰한 것처럼, 루스탐은 당시의 페르시아 제국의 약함을 알고 있었다. 그가 병력의 과시에서 압도할 수 있었다면, 위대한 승리의 월계관을 쓰고 크테시폰으로 귀환했을 것이다. 전투 전의 오랜 지연은 그가 페르시아군을 사막-아랍인들이 잘 알고 기병의 움직임에도 익숙하지만 페르시아인들에게는 매우 불리한 곳-으로 끌어들이려는 사드의 전략을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루스탐의 한 손은 아랍인의 급습에 잡혔고, 다른 손은 자신의 왕의 명령에 잡히고 말았다.

 

아랍 침략자들을 그 전이나 후의 어떠한 전투보다도 더욱 격렬한 전투에서 맞닥뜨린 것은 루스탐의 자랑이었다. 이 침략자들이 시리아에서 헤라클리우스의 병력과 맞붙었던 어떠한 전투에서도 이렇게 패배에 가까운 상황까지 몰리지는 않았다. 프린스 루스탐이 여러 상황의 특이한 조합-셈족의 민족 홍수의 파도, 할리파 우마르의 재능과 현명함, 알 까까, 하심, 툴라이하 같은 전사들의 필사적인 용맹, 마지막으로 알 까디시야의 잘 싸운 전투의 결과를 결정하는 데 충분하고도 남았던 격렬한 먼지 폭풍으로 나타난 자연의 분노 그 자체- 속에서도 용감히 싸우다 죽은 것은 전혀 불명예가 아니었다. 아랍인들이 까디시야에 대해 어떠한 전승이나 서사시도 만들어내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가치가 있다. 특히, 이라크 전통주의자들의 학교는 이 싸움의 서사시를 미화하고 꾸미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는데, 덜 노력하고 덜 미화된 메디나 판본도 있다. 마지막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까디시야의 싸움은 아랍인들에게 진정 격렬한 싸움이 무엇인지에 대한 표준과 모범이 되었다. 이리하여, 시핀의 대전투 때에, 그 지독한 격렬함은 까디시야의 그것과 비교되었다.

 

그의 친구와 적이 루스탐의 힘과 인격에 부여한 중요함은, 그의 죽음 후에 얼마 되지 않아 훌륭하게 묘사되었다. 이리하여, 다일람에서 왔으며 루스탐 휘하에서 “왕실 연대”를 조직한 기병 4천명이 그가 세상을 떠나자, 페르시아엔 더 이상의 희망이 없다고 여기며, 아랍인들에게 자신들의 운명을 내던지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동시에, 유프라테스의 양안에 걸쳐 사는 베두인 족의 기독교도들이 아랍 장군에게 와서 말했다: “이제 루스탐이 살해되었으니, 우리는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이겠습니다.” 명백히, 친구와 적 모두 루스탐의 죽음을 아랍인들의 최종적인 승리와 페르시아 패권의 몰락과 동일시했다. 그들은 그가 살아있는 한 침략자들의 성공 가능성은 의심스러웠으나, 그의 죽음으로 페르시아의 파멸이 확실해졌다고 느꼈다.

 

어떤 묘비명이 이 애국적인 장군이 바라거나 요구한 것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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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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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코쟁이22 | 작성시간 10.11.04 교훈 1 - 곡사마 amok 뜨면 답이 없다
    교훈 2 - 카탁도 낙타 앞에서는 답이 없다
    교훈 3 - 장군만 잡으면 단체 모랄빵

    농담이고...

    재미있는 게 여름방학때 읽었던 책에는 로스탐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크라수스를 관광태운 수레나스가 아닐까 하는 설을 써놨더라구여. 그 로스탐은 성공했는데 이 로스탐은 실패했네여.
  • 작성자타메를랑 | 작성시간 10.11.04 루스탐은 페르시아의 전설에 나오는 영웅입니다. 사산조 페르시아 시대를 무대로 하는 이란의 영웅서사시 샤나메(왕서)에 이름이 언급된다고 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코쟁이22 | 작성시간 10.11.04 그 샤나메의 로스탐이 수레나스의 영향을 많이 받아 만들어진 캐릭터(?)였을 거라고 주장하더군요. 제 영어실력이 심히 짧아서(...) 책 내용이 확실히 기억나진 않는데, 출신지나 인생노정, 배경 등이 수레나스와 파르티아 시대를 연상시키는 점이 많다고 하더군여. 아마 영어 위키에도 관련 내용이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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