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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아랍이 강해진 이유?

작성자아뉘|작성시간10.03.14|조회수661 목록 댓글 2

여러 이유가 있을 겁니다만, 저 개인적으로는 4가지 이유를 꼽습니다.


1. 비잔티움 제국과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오랜 전쟁으로 인한 약체화


많은 분들이 다 알고 계시는 이유이고, 또 가장 중요한 이유로 꼽는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슬람의 사산 왕조 침입 당시 이미 양 제국은 서로의 기반을 파괴해며 그 전쟁의 정점을 찍고 난 후였습니다. 사산 왕조 페르시아는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이집트, 아나톨리아 반도를 휩쓸고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공격까지 감행했었고, 그 반격으로 비잔티움 제국의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핵심 지역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침입, 파괴하기도 하였죠. 이러한 대전쟁의 여파로 양 제국은 누가봐도 약체화되어 있었습니다.



2. 메디나의 지배 아래 전 아라비아 반도 세력 통합화


어느 역사를 봐도, 유목민족이 한 기치 아래 통합하게 되면 무시무시한 전투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북서 아프리카의 무어족들이 그랬고, 몽골이 그랬으며, 중앙 아시아의 많은 유목민족들이 그런 모습을 보였죠. 같은 이유로 아라비아 반도의 사막 유목민족들은 이슬람이라는 종교적 가치 아래 통합되었으며, 무하마드 사후 벌어졌던 분열 또한 1차 리다 전쟁을 거치면서 할리드 이븐 알-왈리드에 의해 모두 진압?습니다. 그래서 1대 정통 칼리프 아부 바크르는 이슬람의 모든 힘을 양 제국에 쏟아 부을 수 있었고, 이는 2대 칼리프 우마르 때에도 똑같이 적용?습니다.



3. 할리드 이븐 알-왈리드, 아부 우바이다흐, 암르 이븐 알-아스, 우마르 등 기라성같은 영웅들의 출현


제가 예전에 할리드 이븐 알-왈리드라는 전쟁 영웅에 대해 위키 백과를 다 읽어가며 네이버 부흥까페에 연재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 보면서 느낀 것은, "이러한 누가봐도 놀라운 대 위업은 주변 상황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라는 겁니다. 즉, 그 절묘한 시대적 상황이 갖추어졌을때, 그 상황을 활용하고 진짜 그 무대에서 활동할 훌륭한 "배우"가 없는한 그런 위업은 달성되지 않는 다는 거죠.


할리드 이븐 알-왈리드는 우리나라에서는 별로 안 알려졌지만, 사실 이슬람 권에서는 거의 신격화되서 추앙받는 장군입니다.(제가 다니는 연구실에 아프가니스탄에서 온 학생이 있었는데, 거리도 멀고 사실 아랍인도 아닌데도 마치 우리가 이순신을 추앙하듯이 할리드를 추앙하고 좋아하더군요.) 그는 18,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이라크 방위를 모두 쳐부셨고, 그 후 4,000명의 정예 경기병대를 이끌고 시리아 사막을 가로질러 순식간에 비잔티움 제국령으로 진입, 아즈나다인 전투, 다마스커스 공성전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그 후 헤라클리우스 황제의 대반격의 전략을 예측, 무슬림 군대의 각개 격파를 막고 야르무크 강가에서 80,000명의 비잔티움 제국군을 완전히 격파(그는 언제나 완벽한 포위 후 궤멸 시키는 전술을 썼습니다. 그래서 그와 부딪쳐 패배한 군대는 거의 항상 전멸에 가깝게 패했습니다.)하고 시리아의 정복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이 할리드와 쭉 함께 하며 그를 서포트 하고 뛰어난 행정 능력을 보여준 인물이 아부 우바이다흐고, 이집트와 북아프리카를 정복한 암르 이븐 알-아스, 그리고 2대 칼리프로써 뛰어난 전략적 안목으로 헤라클리우스 황제와 야즈데게르드 3세의 연합 공격을 시간차로 격파한 우마르 등등 정말 자세히 들여다 보면 놀랍기 그지없는 인물들이 가득합니다. (사산 왕조 페르시아에게 카운터 펀치를 날려 빈사상태로 만든 것이 할리드 라면, 그런 사산 왕조에게 사실상 사망 선고를 내려버린 것이 퀴디시야 전투인데, 퀴디시야 전투는 우마르의 지휘 아래 이루어졌습니다.)



4. 비잔티움 제국 내 종교 논란으로 인한 분열(단성론 vs. 전통론)


할리드 이븐 알-왈리드의 다마스커스 공성전때도, 암르 이븐 알-아스의 이집트 정복때도 이슬람 세력에게 문을 열어주고 아주 호의적으로 접근했던 세력은 비잔티움 제국내에서 박해를 받던 단성론 세력이었습니다. 제가 요즘 읽고 있는 "비잔티움 제국사"에서도 "단성론자들은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보다 이슬람 제국의 지배를 선호했다"라고 했지요. 지즈야만 낸다면 별 다른 박해없이 받아들였던 이슬람의 융화정책도 한 몫 했을 것이라 봅니다. 초기 이슬람 장군들은 비잔티움 제국이나 사산 왕조 페르시아 측에서 화친 사신을 보내면 이 말을 했다죠.

"지즈야를 내던지, 이슬람으로 개종을 하던지, 싸우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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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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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Arius | 작성시간 10.03.14 칼리프는 야즈데게르드 3세에게 편지를 보내. 무슬림으로써 개종할것을 요구했지만. 황제는 거절하는 서신에. 페르시아의 문명의 찬란함과 더아나가 조로아스터신앙의 대한 믿음을 나타냈지요.
  • 작성자hyhn217 | 작성시간 10.03.19 시리아 가보면 어느 도시를 가든 '칼리드 븐 왈리드 거리'가 있죠. 중부의 홈스에 가보면 '칼리드 븐 왈리드 대모스크'까지 있을 정도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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