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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 군대에 대해 읽으면서 몇가지 정리해본것...

작성자hyhn217|작성시간10.11.10|조회수1,163 목록 댓글 13

1. 초기 오스만군은 그냥..... 유라시아 어디든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궁기병 전력이 대다수였음. 화살 우 쏘고 도망가고 다시 우 쏘고 도망가고 그러다 흐트러진다 싶으면 charge ㄳ. 이런 전술이 야전에서 먹힐 때는 있어도 공성전때는 답이 없는지라, 초기의 두 베이인 오스만과 오르한 시절의 오스만군의 공성전은 그냥 주위 마을 다 태우고 도시를 포위해서 굶어죽기를 기다리는게 유일한 답이었습니다. 14세기 들어 이제 공성탑, 공성무기, 지하땅굴, 임시요새 건설 등의 다양한 공성전략을 습득하고 최종적으로 화기까지 도입하면서 유럽을 공포에 떨게 만든 오스만군의 공성전략세트가 완성됩니다.

 

2. 아무튼 초기 오스만군의 주력이 뭐 정규군이 아닌 투르크만 유목민들이나 그런 친구들이다보니 오르한 베이는 어느정도 정규화된 병력을 양성할 필요를 느꼈고, 이렇게 등장한 것이 보병인 야야(Yaya)와 기병인 뮈셀렘(Musellem)이었죠. 뭐 약 한 세기 못되게 존속하다 이후 오스만군의 체제가 갖추어지자 시파히나 예니체리에 밀려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만은.

 

3. 오스만군이 화기를 받아들인건 15세기 중반, 무라드 2세가 먼저 화기를 받아들인 발칸의 보스니아, 세르비아 헝가리와 싸우는 과정에서더군요. 1440년대 헝가리와의 전쟁에서는 헝가리가 전장에 끌고 온 전투마차(소형 포, 핸드캐논을 든 병사들이 들어 있는 마차)때문에 아주 크게 고전을 했었습니다. 이 마차란게 궁기병이 활 쏜다고 박살나는것도 아니고, 다가간다고 하더라도 각종 화기의 사격에 박살이 날 수 밖에 없었던 모양이에요. 물론 오스만군은 10년도 되기 전에 화기와 이 전투마차를 도입하고, 이후 합스부르크나 맘루크등과의 전쟁에서 쏠쏠히 써먹었습니다.

 

4. 오스만군이 처음 대포를 동원했을 때에는 콘스탄티노플의 우르반 거포처럼 괴물같은 크기에 괴물같은 돌덩어리를 쏘아대는 대포를 선호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미리 만들어서 끌고 오는건 어림도 없는 일이라 무려 원재료채로 몽땅 들고 와서 공성전 장소에서 '주조'를 했더랬죠. 그러나 이런 초대형 거포는 효율이 원체 떨어지는지라, 16세기 들어서는 거포의 비율을 확 줄이고 소~중 규모 청동 야포를 대거 운용하기 시작합니다.

 

5. 사파비 왕조와 붙은 찰디란 전투, 악 코윤류(백양조)와 붙은 전투, 맘루크와 붙은 전투 모두 오스만이 승리할 수 있었던 건 위와 같은 화기 도입(야포와 예니체리 총병대)의 덕이었죠. 맘루크 왕조는 시리아의 마르즈 다비크 전투(1516)에서 오스만군의 화기에 아주 개박살이 나버리고 술탄 알 가우리가 전사해버리죠. 마지막 술탄 투만 베이는 대대적 쇼크를 먹고 부랴부랴 화기를 도입하고 대포와 총병을 양성하지만, 이후 이집트의 라이다니야 전투(1517)에서 오스만군에 의해 뒷치기를 당하자 다시 한번 'Cavalry Charge!'를 외치고, 맘루크 왕조는 그렇게 끝나버립니다.

 

6. 이렇게 오스만이 시리아-이집트-헤자즈에 이어지는 광활한 맘루크 왕조를 전투 두번만에 낼름할 수 있었던건 바예지드 2세때 갖춰진 강력한 해군력의 힘이 컸습니다. 그리고 오스만이 이집트를 정복하게 되자 더더욱 강한 해군력이 필요해지게 되었죠. 14세기만 하더라도 말그대로 땅개였던 이들이 16세기만 되면 막강한 해군국으로 자라나게 된 배경은 이집트 정복이라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7. 집고 넘어가는 기본적 사실. 오스만 야전군은 주로 전위와 주기적 약탈을 담당한 아킨지(1595년 발칸 지역의 아킨지들이 합스부르크 공격하다가 떼로 몰살당해 거의 사라져버림... 이후 이들의 역할은 크림 칸국의 타타르 기병대가 담당), 일반 징집병인 아잡, 봉토를 지급받고 그 대가로 병력을 지원하는 시파히, 그리고 오스만 군의 주력 예니체리, 왕실 근위대인 카피쿨루로 구성되었습니다. 시파히나 예니체리, 카피쿨루를 제외한 다른 쪽을 간략하게 설명해보자면...

 

 술레이만 대제가 헝가리를 점령하기 전까지 아킨지들은 매년 도나우 강을 건너 헝가리를 약탈하고는 했는데, 헝가리가 오스만 제국의 속령이 되자 아킨지들은 더 이상 약탈전을 전개하기 매우 힘들어졌다고 합니다(합스부르크는 이런 것에 대비해 미친듯이 요새를 세워놓고 터렛+벙커밭을 만들었더랬죠)

 

 아잡은...그냥 농민 징집병입니다. 뭐 우리가 흔히들 생각하기로는 총알받이(...)로 보는데, 그정도로 무의미한 전력은 아니었던 것 같고, 요새나 마을, 항구를 지킨다든가 짐을 운송한다든가 주력 부대를 보조하는 역할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봤자 전선에서는 최전선에 서 있었다는.....

 

 이외에도 오스만 제국군은 발칸 속령들이 제공하는 병력인 보이니크나 그리스의 산적 등을 모아 만든 데르반치스, 마르톨로스, 카포이, 지방 방어를 담당한 섹반, 수병 역할을 맡은 레벤트 등의 보조 보병력을 이용했죠.

 

8. 대략적인 느낌으로는 오스만 제국군하면 예니체리가 창들고 돌격하고 궁기병이 뛰어댕기고 그럴것 같지만, 사실은 수레에 대포와 총병 넣어두고 방어진짜고 예니체리를 포함한 총병-궁수가 뒤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시파히나 아킨지 기병들이 적들을 유인해오면 사격해서 끝장내 버리는 식의 전술을 애용했습니다.

 

8-1. 우리가 중세 이슬람 군대의 전술하면 광신자들이 도끼 들고 뛰어가는걸 상상하지만 예언자 무함마드 시대때부터 아랍-이슬람 군대의 전술은 창병+궁병 조합을 짜고 적이 먼저 공격해오기를 기다리던 방어적 전술이었습니다. 물론 투르크인들은 주로 궁기병을 이용한 전술을 사용했지만요.

 

8-2. 덤으로, 15세기 이후 발칸에서 유럽 세력과 오스만의 전쟁은 평원에서 대차게 뜨는 회전보다는 헝가리-오스트리아 접경 지역의 요새들을 뺏고 빼앗기는 공성전의 연속이었습니다.

 

9.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군이 신성 동맹의 갈레아스에 큰 피해를 입었지만, 바로 그 해 겨울에 오스만군은 그와 비슷한 포격선을 뚝딱 만들어냄. 초기부터 17세기까지 오스만군은 화기 도입, 공성 기술 도입, 전투마차의 사용, 항해술 및 조선술의 도입 등 자신들보다 뛰어난 적들의 군사기술을 받아들이려는 노력은 항상 해 왔고 이런 점이 16세기까지의 오스만의 군사적 성공을 가져올 수 있었죠. 그러나 여러가지 복잡다단한 상황으로 인해 그들이 유럽의 전술과 기술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유럽의 발전 속도에 비해 뒤쳐지게 되고(특히 오스트리아가 창병+총병의 전술을 들고 나오자 오스만 기병대들은 죄다 바보가 되어버립니다...) 결국 17세기의 쇠퇴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러나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고, 오스만 제국은 그 이후 300년간 살아남기 위한 악전고투를 펼치고 이런 노력이 기반이 되어 지금 터키가 정치적-사회적으로 성숙한 중동 국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몇가지 자료를 계속 읽고 있으면서 지금 생각나고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만 몇가지 적어보았는데...언젠가는 더더욱 정리해서 완전한 글을 쓰기 위한 초벌 자료라고 생각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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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Che_GueVaRa | 작성시간 10.11.11 감사합니다. 잘 읽엇습니다.
  • 작성자카게카츠 | 작성시간 10.11.11 잘 읽었습니다
  • 작성자기러기 | 작성시간 10.11.14 좋은 글 즐감하고 갑니다..^-^
  • 작성자휘리릭 | 작성시간 10.11.15 너무나 좋은 글 감사하게 보고 갑니다.
    잘 몰랐던 중동국가들의 전술도 보게 됐고요~
  • 작성자zombie | 작성시간 11.12.07 잘 일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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