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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유럽의 보병 방진

작성자왕마귀|작성시간08.10.04|조회수1,730 목록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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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시대에는 가운데 공간을 비워둔 방진이 사용되었으며, 때로는 각각의 측면이 총검을 부착한 단발성 머스킷이나 라이플을 휴대한 2열 또는 그 이상의 병사들로 구성된 직사각형 대열도 사용되었다. 일반적으로 대대(500에서 1,000명 가량)가 방진을 만드는 가장 작은 부대 단위였다. 부대 군기와 지휘관은 공격을 받아 약해진 방진 측면을 보강하기 위한 예비부대와 함께 방진 안쪽에 위치했다. 워털루 전투 당시 웰링턴 부대가 그러했듯이 4열로 구성된 500명 규모의 방진은 각 열의 길이가 이십미터를 넘지않는 빈틈없는 대형이었다.





쿼트르 브라의 28연대, 엘리자베스 톰슨 作


방진을 만든 이후에, 오와 열에 상관없이 보병들은 다가오는 기병들에게 일제사격을 가했다. 일제사격이 효과를 거두려면 돌진해오는 말과 사람이 방진에서 약 30미터 거리로 접근할때까지 사격을 기다려야했으며, 총탄에 맞은 공격측의 사상자들로 인해 결국 부상입은 말들과 기수들의 시체가 쌓이게 되면서 더 이상의 공격을 방해하는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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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을 덜 받은 보병들이 너무 빨리 사격을 할 경우 돌격해오는 기병들에 대한 충격이 약해지고 보병들은 총탄이 떨어진 머스킷만 가진 상태가 된다. 보병이 재장전을 하는 동안 기병들은 매우 짧은 거리를 순식간에 좁혀오면서 휴대한 피스톨로 보병에게 사격을 가하고 기병도로 베어버리거나 기병창으로 보병들을 찌를 수도 있었다.


너무 늦게 일제사격을 가할 경우 (기병이 약 20미터 가량 접근햇을때) 목표물을 보다 정확히 맞출 수는 있지만, 치명상을 입은 말이 쓰러지면서 보병 대열 위를 덮쳐서 방진에 빈틈이 생기게되고, 살아남은 다른 기병들이 방진안으로 들어와 대열을 무너뜨리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사례는 매우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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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털루 전투에서 대불 동맹군의 4열 방진은 열한번의 기병 공격을 버티어냈다. (기병대가 기마 포병과 보병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뤼첸 전투(1813)에서 보병과 경포병 부대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대불 동맹군 기병은 신병들로 구성된 프랑스군 방진을 격파하는데 실패했다. 예나-아우스트리츠(1806), 푸투스크(1806), 푸엔테스 데 오노로(1811), 크라스노이 전투(1812)에서도 이와 비슷한 보병 방진의 인상적인 방어능력이 돋보였다. 리오 세코(1808)와 쿼트르 브라(1815)전투에서 보듯이 방진이 무너지더라도 용맹하고 잘 훈련된 보병들은 이러한 참사가 일어나도 다시 방진을 만들 수는 있지만,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게 된다.


방진 무너뜨리기





피라미드 전투 당시 프랑스군 보병 방진으로 돌격하는 맘루크 기병들


"방진을 깨뜨리기"위한 기병 공격은 보병들의 결속력을 떨어뜨리기 위한 목적이외에도 엉성한 훈련을 받은 보병들이 돌진해오는 기병과 맞닥뜨리기 전에 달아나게 유도하거나 접근전을 통해서 많은 보병을 죽이기 위해 실행되었다.


밀집한 대열에 대한 기병 공격은 주로 방진 모퉁이를 목표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방진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 속임수와 가장된 공격을 통해서 공격자들은 보병들이 사격을 너무 빨리하는 바람에 "총탄을 미리 사용해버리는" 상황을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잘 훈련된 보병들이 자신들의 위치를 고수할 경우 기병의 꿈인 "말을 몰아서 방진안으로 들어가 피바다"로 만드는 상황은 결코 실현되지 못했다.





방진을 격파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기병대의 직접적인 돌격이 아닌, 포병대를 이용한 포격이었다. 진정으로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포병 사격을 해야만했다. 20미터 너비의 보병 방진은 아군 본대안에 머무르면서 600미터 또는 그 이상의 거리에서 포격을 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던 야전 포병들이 명중을 기대하기에는 너무 작고 어려운 목표물이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공격자측은 기병대와 기마 포병(horse artilley)을 전개 배치했다. 기병이 출현하면 보병들은 곧바로 방진을 구축하지만, 빽빽하게 밀집된 보병은 기마 포병에게는 대단히 명중시키기 쉬운 목표였으며 - 포격을 받고 방진의 결집력이 흐트러지면 연달아 이어지는 기병의 공격에 뒤따른 압박을 보다 손쉽게 만들었다.





보병과 기병의 연합 공격도 위와 비슷한 효과를 일으켰다. 방진을 구축한채로 방어하는 보병은 개별적으로 사격을 해오는 적 보병에 대응하기가 매우 불편한 위치에 있으며, 공격해오는 상대방 보병과 일제 사격을 주고받기 위해서 방진을 횡대 진형으로 바꿀 경우 적 기병들에게 짓밟힐 수도 있었다.


이밖에도, 보병부대가 방진을 완전히 구축하기 전에 기병이 공격을 가한다면 부대를 완전히 전멸시키지는 못하더라도 다수의 보병을 사상자로 만들 수 있었다. 쿼트르 브라 전투(1815) 에서도 영국군 부대가 지형을 이용해 숨어있던 프랑스 기병의 기습을 가까운 거리에서 받은 후 이와 같은 사례가 여러번 발생했다. 전투 도중 갑자기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바람에 보병들의 화약이 물에 젖어서 그들의 무기가 단순한 장창 역활 정도 밖에 할수 없는 상황일때 기병이 성공적인 돌격을 감행하는 환경적인 요인도 발생할 수 있고, 전속력으로 달려오다 일제사격에 치명상을 입은 말이 방진에 부딪치면서 공간이 생기는 바람에 뒤따라오는 병력이 빈틈으로 파고드는 사례가 살라망카 전투(1812년)이후에 벌어진 가르시아 헤르난데즈 전투에서 일어났다.


19세기 후반의 보병 방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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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남북전쟁 당시 기병대의 공격에 대항하기 위한 보병 방진이 사용된 확인 사례는 오직 한번 뿐으로, 1861년 12월 17일, 로울렛즈 스테이션(Rowlett's Station)전투 당시 남부동맹군 소속의 유명한 기병 연대인 테리의 텍사스 레인저(Terry's Texas Rangers)들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서 32 인디아나 의용 보병 부대(Indiana Volunteer Infantry)가 구축하였다. 19세기 후반에 유럽 군대는 원주민 전사들을 상대로 전투할 때 주로 방진을 많이 사용했으며, 특히 주목할 만한 사례는 울룬디 전투(1879)당시 영국군이 사용한 방진이었다. 그러나 이 방진은 나폴레옹 시대의 것과는 매우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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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방진은 단순히 보병들로 만들어진 전술적 방어형태가 아니라 1,000에서 1,500명의 밀집된 병사들로 구성되었으며 4 귀퉁이에 보병이나 기병 대열이 위치하고 포병, 바퀴달린 기관총, 수송용 짐수레, 짐을 실은 가축, 가축 부리는 사람이 방진 중앙에 위치하여 천천히 이동 가능한 넓은 면적의 방진이었다. 적군이 현대식 화기로 무장하지 않은 경우에만 이 방진은 살아남는 게 가능했다."


식민지 시대의 대규모 전투 당시 빅토리아 호수 근처의 후미진 지역에서 영국군 방진은 프랑스제 무기로 무장한 원주민 부대의 공격을 지원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이틀동안 버티어냈다. 원주민 부대는 1,600명의 사상자라는 피해를 입은 반면, 영국군은 겨우 6명만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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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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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ds2lie | 작성시간 08.10.04 4열밖에 안되는 방진이 상당한 방어력을 지녔군요;; 이미 총의 화력이 너무 우세한 시대인가;;
  • 작성자프랑켄 | 작성시간 08.10.04 비롯 단점이 있긴 있었지만 왜 총기로 주도권이 넘어갔는지 알 수 있겠네요. 제대로 된 방진 같으면 기병약발이 안 먹혀 들어가니 말이죠.
  • 작성자투창병 | 작성시간 08.10.04 5번째는 율란 기병이죠
  • 작성자문학 | 작성시간 08.10.06 좋은자료 잘읽었습니다. 그런데 사진이랑 그림의 작가 또는 출처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작성자라덴더 | 작성시간 08.10.08 오우 +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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