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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 피라미드 전투

작성자왕마귀|작성시간08.04.29|조회수1,703 목록 댓글 13



무라드 베이





1798년 7월 나폴레옹 군대는 알렉산드리아를 침공해서 장악한 후 카이로 측으로 진군했다. 나폴레옹은 피라미드에서 15 킬로미터 떨어져있고, 카이로와는 겨우 6 킬로미터 정도 거리에서 맘루크족이 지휘하는 부대와 맞닥뜨린다. 무라드 베이와 이브라힘 베이가 맘루크 군을 지휘했으며 강하고 고도로 훈련된 기병이었다.





나폴레옹은 전장에서 쓸모있는 이집트 부대는 오직 기병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있었다. 나폴레옹은 다음과 같은 말로 부대를 격려했다.


"전진! 지금 이 순간 4천년의 역사가 제군들을 내려다 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나폴레옹은 무라드 부대의 공격에 대항하여 휘하 부대를 5개 소부대로 나누어서 기병과 보급품을 안쪽에 놓고 대포를 모서리에 위치시킨 직사각형 방진을 구성하게했다.





루이 샤를 앙트완 드제


프랑스 군대는 사다리꼴 대형으로 남쪽을 향해 진격했으며, 우익이 선두에 섰고 좌익은 나일강을 보호벽으로 삼았다. 우익에서 좌익순으로 나폴레옹은 드제, 레니에르, 듀구아, 비알, 봉등의 지휘관이 이끄는 부대를 배치했다. 또한 데지아는 서쪽으로 나아가기 위해 소부대를 보내서 가까운 마을인 비크틸을 점령했다. 무라드는 나일강 근처의 마을인 엠바베에 우익 부대를 배치시킨 후 보병과 몇개의 구식대포로 수비하게 하였다. 보조부대로서 이브라힘이 지휘하는 맘룩크 기병들은 사막에 배치되어 측면을 엄호하려했으나 나일강의 동쪽 제방에 가로막혀 지원해주지 못한채 무력하게 바라만보았다.








프랑스군 방진을 향해 돌격하는 맘루크 기병들


오후 3:30 분경에 맘룩 기병대는 사전경고 없이 프랑스군에 달려들었다. 드제, 레니에르, 듀구아가 지휘하는 분할된 보병 방진은 대열을 유지한 채 머스킷 직사와 포격으로 기병들을 격퇴했다. 프랑스 군 대형에 피해를 입히는 게 불가능해지자 사기가 꺽인 일부 맘루크들은 데지아의 분견대로 공격 목표를 바꾸었지만 이마저도 실패로 돌아갔다. 얼마후에 나일강 근처에 있던 봉(Bon)의 부대가 대열을 갖추어 무라드의 보병들이 지키는 엠바베 마을로 진격했다. 마을로 쳐들어간 후 프랑스 군은 주둔지를 확보했다. 강 사이에서 포위된 수많은 맘루크와 보병들은 헤엄을 쳐서 달아나려 했으나 수백명이 익사했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병사들 중 29명이 전사하고 260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기록했다. 무라드 측의 손실은 훨씬 커서 아마도 거의 3천명에 가까운 숙련된 맘루크 기병들이 전사하고 숫자가 파악이 안된 보병 전사자들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무라드는 고지 이집트로 달아난 후 1799년에 드제에 쫒겨서 숨을 때까지 적극적인 게릴라 전쟁을 계속했다.






자신들의 전설적인 기병대가 패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카이로에서 대기하던 맘루크 군대는 시리아로 흩어진 후 부대를 재편성했다. 피라미드 전투는 700년간 이어져온 맘루크의 이집트 지배가 끝나간다는 사실을 알리는 신호였다. 이처럼 순조로운 출발에도 불구하고 나일 전투에서 일어난 호레이쇼 넬슨 제독의 승리로 인하여 열흘 후 중동을 정복하겠다는 나폴레옹의 야망은 수포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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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Τιταυιζ | 작성시간 08.05.01 굉장히 일방적인 전투였군욥... 저 드제는 진정남 나폴레옹에서 완전 조폭두목포스를 풍기던데;;;
  • 답댓글 작성자타마누님 | 작성시간 08.05.01 진정남을 보신 거군요.. ㄷㄷㄷ
  • 답댓글 작성자타메를랑 | 작성시간 08.05.01 진정남 나폴레옹, 3권 이후로 통 안 나오던데... 작가가 그만두었나 봅니다.
  • 답댓글 작성자최하늘 | 작성시간 08.05.02 일본에서도 연제가 끝났나요? 저는 우리나라에만 인기가 없어서 발매를 안 한줄 알았는데...
  • 작성자셀린느‡ | 작성시간 08.05.01 프랑스 기병이 피라미드를 보고있는...이 아니고 군대를 보고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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