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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과 배신, 신앙의 서사극 - 리투아니아 내전

작성자the Prince of New South Wales|작성시간09.04.12|조회수1,314 목록 댓글 10

1377년, 리투아니아의 지배자였던 알기르다스가 사망했다. 문제는 그의 뒤를 과연 누가 이을 것이냐는 것인데 제일 유력한 후보는 알기르다스의 두번째 아내의 장남인 요가일라였다. 알기르다스에게는 첫번째 결혼에서 낳은 안드레아스라는 아들이 있었지만 리투아니아의 관습으로 치자면 안드레아스는 아직 알기르다스가 공자였을때 낳은 아들이니 "공자의 아들"에 불과했고 요가일라는 대공이었을때 낳았기 때문에 "대공의 아들"이었으므로 요가일라가 대공이 될 명분이 더 컸다. 물론 안드레아스가 이것을 인정할리 없었고 내전이 일어났다.

 

요가일라의 승리는 숙부인 켄스투티스가 그의 편을 들면서 사실상 결론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전형적인 리투아니아 전사이자 전통의 수호자였던 켄스투티스는 리투아니아의 관습에 따라 요가일라를 지지했고 명성높은 그의 결정은 리투아니아인들의 마음이 요가일라에게로 기울어지도록 만들었다. 이렇게하여 요가일라는 승리하여 대공이 되었다.

 

내부의 문제를 해결한 요가일라는 외부의 문제와 맞닥뜨렸다. 당시 리투아니아의 적은 튜튼기사단이었는데 유럽 최후의 이교도로서 남아있던 리투아니아는 사방이 기독교국가들로 둘러싸인 상태였다. 이 다구리당하기 쉬운 위치에 있는 나라의 군주로서 요가일라는 여태껏 적대적이었던 기사단과 화해하고 기독교로 개종할 뜻을 비췄다.

 

문제는 켄스투티스였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그는 전형적인 리투아니아 전사에다 전통의 수호자였다. 이교도로서의 자부심으로 젊은 시절부터 아버지, 형과 함께 기독교인들과 싸워왔던 그에게 있어 개종이란 감히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다. 켄스투티스의 강력한 반대에 요가일라도 슬슬 짜증이 치밀기 시작했다. 자기가 대공이 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자기보다 훨씬 높은 인기를 누리며 리투아니아 전통수호에 옹고집을 피우는 켄스투티스는 이제 슬슬 요가일라에게 있어 동료가 아닌 정치적 라이벌이었다. 결국 요가일라는 켄스투티스의 동의없이 독자적으로 기사단과 접촉하여 개종의 의사를 펼쳤지만 여기에 분노한 켄스투티스는 쿠데타를 일으켜 요가일라를 구금하게 된다.

 

이런 사태에 난감하게 된것은 켄스투티스의 아들인 비타우타스였다. 그는 사촌인 요가일라와 깊은 우정을 쌓으며 친한 친구로 지내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그런 일을 벌였으니 요가일라를 볼 낯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아버지를 수차례 설득하여 결국 마음이 누그러진 켄스투티스는 요가일라를 풀어주게 된다. 물론 대공으로서의 전권을 모두 돌려준 것은 아니었다.

 

비록 풀려나긴 했지만 굴욕을 당한 요가일라는 커다란 분노를 마음에 품게되었다. 하지만 일단 세력이 열세였던 그는 켄스투티스의 뜻에 따르는 척 하며 지냈지만 밀사를 몰래 기사단에게 보내 리투아니아의 완전개종을 조건으로 음모를 진행시켰다. 얼마후 기사단이 트라카이로 처들어왔고 이를 막기위해 켄스투티스가 군대를 이끌고 나가자 요가일라는 부하들을 모아 켄스투티스를 기사단과 함께 양쪽에서 공격했다. 켄스투티스는 사로잡혀 버렸고 얼마후 살해당했다. 80년이 넘는 인생을 리투아니아 전사로서 자긍심을 가지고 한때 천하를 호령하던 노익장의 최후였다. 그의 아름답기로 소문난 사모기티아 아내는 요가일라의 동생 스키르가일라가 차지했다.

 

켄스투티스의 죽음으로 요가일라는 권력을 장악하긴 했지만 비타우타스가 아직 남아있었다. 아버지가 죽자 그는 마소비아로 망명했지만 요가일라의 마수가 뻗쳐오자 결국 아버지의 또다른 원수인 기사단으로 도망치게 되었다. 그가 제안한 것은 리투아니아의 완전개종, 조건은 복수였다. 마침 요가일라가 호락호락하지 않은 것에 불만을 품고있었고 또한 그가 폴란드의 어린 여왕 야드비가와의 혼인을 추진하자 불안해진 기사단은 이번에는 비타우타스를 밀어주기로 하고 그를 사모기티아로 보냈다. 사모기티아에서 켄스투티스는 거의 레전드급 영웅이었다. 그런 그의 아들이 찾아오자 사모기티아 전사들은 앞다퉈 그의 휘하에 모여들었으며 자신들이 그토록 지켜왔던 이교도신앙을 버리고 우상으로 섬기던 신령수들을 베어버리면서까지 켄스투티스를 죽인 요가일라에 대한 복수를 다짐했다.

 

비타우타스와 기사단이 손을 잡고 처들어오자 요가일라는 당황했지만 곧 면밀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그는 비타우타스를 잘 알고있었다. 비록 켄스투티스가 죽긴 했지만 자신과 아버지와의 일을 잘 아는 비타우타스라면 이해해줄 것이었다. 그는 비타우타스에게 밀사를 보내 그와 타협을 했다. 조건은 켄스투티스의 모든 영지를 비타우타스에게 돌려주는 것. 결국 타협은 이뤄졌고 비타우타스는 행동을 취했다. 당시 진군해가던 기사단은 점령한 요새와 도시들을 비타우투스가 이끄는 사모기티아인들에게 수비하도록 했는데 이들이 지도자의 명령으로 갑자기 적으로 돌변하자 당황한 기사단은 황급히 본국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당장의 위기에서 벗어나 요가일라와 비타우타스는 손을 잡았지만 요가일라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약속했던 영지는 동생들에게 나눠줬고 비타우타스에게는 구석에 있는 변두리영지만을 준 것이다. 요가일라의 약속불이행에 비타우타스는 이를 갈았지만 일단은 만족하는 척 하며 후일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사태가 진정되자 요가일라는 전부터 추진하던 폴란드와의 혼인동맹을 다시 추진했다. 그에따라 그는 기독교도로 개종하였고 부아디수아프라는 새 이름을 받았지만 이 이름은 별로 사용하지 않았고 대신 요가일라의 폴란드식 발음인 야기에우오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지게 된다.

 

폴란드에 머물며 폴란드를 다스려야했기에 요가일라는 리투아니아는 동생들에게 맡겨놓았다. 바로 이때가 비타우타스가 노리던 기회였다. 그는 다시 기사단에 전과 같은 제안을 했다. 이미 한번 배신한 전력이 있었기에 비타우타스와 다시 손잡는 것은 꺼림칙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다른 대안이 없었기에 기사단은 다시 비타우타스를 지원해줬다. 기사단과 사모기티아의 지원, 켄스투티스의 아들이라는 후광에 힘입어 그는 요가일라의 동생들을 몰아내고 리투아니아를 장악해갔고 요가일라는 폴란드의 힘을 빌려 리투아니아를 되찾으려 했지만 기사단은 헝가리와 마소비아를 끌어들여 폴란드를 견제함으로서 요가일라는 리투아니아를 제대로 지원할 수 없었다.

 

비타우타스는 반요가일라군의 선봉이 되어 빌니우스를 공격했다. 기사단은 이번에 완전히 여태껏 끈질기게 저항하던 리투아니아를 완전정복할 생각이었고 기사단의 승산이 확실하게 보이자 많은 지원자들이 이 "십자군"에 합류해왔다. 그중에는 후일 잉글랜드의 왕 헨리4세가 되는 랭커스터 공작도 끼어있었으며 그가 이끄는 장궁병들은 많은 적들을 사살했다. 제대로 지원을 얻지 못했음에도 빌니우스는 5주간 저항했고 기상까지 악화되자 결국 이들 십자군은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이때쯤 킵차크한국의 칸 툭타미쉬가 티무르에게 패배하여 리투아니아로 망명해오는 일이 벌어졌는데 요가일라는 그를 이용하여 티무르를 물리치고 더 많은 스텝지역과 러시아공국들을 세력권에 넣을 계획을 세웠다. 그는 사모기티아를 기사단에, 리투아니아를 비타우타스에게 넘겨주겠다고 제의했지만 기사단은 평화를 원하지 않았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말로만 하는 개종하겠다는 막연한 약속이 아닌 확실한 개종이었다. 그 개종은 무력을 통해서만 이뤄질 수 있을 것이었다.

 

비타우타스가 다른 마음을 품기 시작한 것은 이즈음이었다. 확실하게 신뢰할 수는 없었지만 요가일라는 분명 리투아니아의 지배권을 자기에게 넘겨준다고 제안했었다. 게다가 기사단이 저지르는 참혹한 살육과 약탈은 리투아니아인이자 자긍심높은 켄스투티스의 아들인 그가 기사단과 손잡기로 한 결정이 과연 옳은 것인지 회의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대로 자신이 기사단을 빽삼아 리투아니아의 군주가 된다고 해도 그에게 주어질 것은 황폐화된 국토와 이반된 민심, 그리고 기사단에게 휘둘릴 힘없는 권력 뿐일 것이다. 결국 그는 다시 요가일라와 손잡기로 했다. 두번째로 기사단을 배신하기로 한 것이다. 이번 역시 지난번과 비슷한 전개를 보였다. 점령된 요새와 도시들을 수비하던 비타우투스의 부하들이 배신하자 기사단은 다시 황급하게 본국으로 귀환해야만 했다.

 

이번에는 요가일라도 약속을 지킬 수 밖에 없었다. 비타우타스는 이렇게 리투아니아의 대공이 되었다. 물론 supreme prince인 요가일라보다는 낮은 grand prince라는 칭호를 써야만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형식적으로는 요가일라가 여전히 리투아니아의 군주였어도 비타우타스는 확실하게 지배권을 잡는데 성공했다.

 

한편 비타우타스의 두번에 걸친 배신으로 이제 기사단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올랐다. 이번에야말로 배신자 비타우타스와 함께 리투아니아를 완전히 끝장내겠다고 결심한 기사단은 유럽 각지에서 온 지원자들과 북쪽에서 고유의 전역을 펼치던 리보니아 지부의 병력까지 동원하여 여태까지 동원된 가장 최대의 "십자군"을 조직하여 대대적인 침공에 나섰다. 비타우타스는 군대를 모아 초기에 이들을 막으려 했지만 부르고뉴 궁병(잉글랜드 용병)들이 쏘아대는 악명높은 장궁에 접전도 전에 간신히 목숨을 건져 도망쳐야만 했다. 십자군은 매복에 걸리지 않도록 모든 숲과 늪지들을 샅샅이 뒤지면서 빌니우스로 진군해갔고 폴란드로부터 지원을 받은 비타우타스는 빌니우스에서 러시아군과 합류해 전투를 벌였지만 러시아군의 패주를 시작으로 군대는 패주해버렸다.

 

비타우타스가 도망친 뒤 홀로 남은 빌니우스로 십자군의 공성이 시작되었다. 유럽 각지에서 모인 최고의 공병들이 최고의 기술로 선보이는 공성전이었다. 이번에도 빌니우스 수비대는 끈질기게 저항하였고 성밖으로 나가 갑작스러운 기습을 가하여 많은 피해를 입혔다. 그러던 중 이들의 기습으로 기사단의 물자들이 거의 다 타버리는 일이 발생했고 그뒤 공성은 나흘 동안 더 이어졌지만 수비대는 기사단이 공성기구들을 설치하는대로 족족 파괴해버렸다. 물자는 바닥나고 공성은 영 효과가 없고 게다가 비타우타스가 군대를 모아 빌니우스를 구원하기위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결국 기사단은 논의 끝에 철수하기로 했다. 돌아갈 길이 가장 먼 리보니아 기사들이 제일 먼저 떠나고 기사단 본대는 사모기티아를 거쳐 마구 약탈과 살육을 저지르며 기사단령으로 되돌아갔다.

 

이 최대의 대규모침공이 끝나자 비타우타스는 두말할 필요없는 확실한 리투아니아의 지배자로 우뚝 서게된다. 명목상 군주는 요가일라였을지라도 이제 그의 영향력은 리투아니아에서 거의 사라졌고 그를 대신해 다스리던 동생들로 모두 쫓겨났으며 볼히니아, 갈리시아, 몰다비아 공국들을 무찔러 이제 리투아니아에서의 그의 입지는 확고해졌다. 기사단은 리보니아 지부와 함께 계속 사모기티아를 공격했지만 1398이 마지막 공격이 된다. 비타우타스가 기사단과 타협하기로 한 것이다.

 

비타우타스는 요가일라와 마찬가지로 스텝지역에 영향력을 확대하기를 원했다. 그가 세운 이 계획에서 가장 큰 적은 기사단이 아닌 티무르였는데 그와의 대결을 위해서 기사단과 협정을 맺기로 한 것이다. 비타우타스가 평화를 위한 조건으로 내건 것은 사모기티아의 양도였다. 사모기티아인들은 투덜거렸지만 예전에도 그들은 리보니아 기사단에게 지배당했다 해방된 경험이 있으므로 이번의 기사단의 지배 역시 일시적일 것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였다. 기사단은 이를 받아들여 양측의 전쟁을 종식함은 물론 티무르와의 전쟁에서 지원까지 해줄 것을 약속했다. 이리하여 1399년, 리투아니아, 폴란드, 러시아, 타타르, 기사단이 지원해준 부대의 연합군이 스텝으로 처들어가 티무르와 대결을 벌였지만 결과는 전멸에 가까운 대패였다.

 

이 전역의 패배로 요가일라와 비타우타스의 야심은 좌절되었지만 그래도 오랜만의 평화가 이 지역에 찾아오게 된다. 요가일라는 폴란드의 군주 야기에우오, 비타우타스는 리투아니아의 대공으로서 입지를 확고히 하였고 기사단 역시 리투아니아의 개종과 사모기티아의 점령으로 이교도를 상대로 한 "십자군"으로서의 목표를 모두 이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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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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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타메를랑 | 작성시간 09.04.13 1399년, 보르스클라 강 연안에서 리투아니아 군대와 싸운 티무르는 티무르 제국의 티무르가 아니라 킵차크 칸국의 왕족인 티무르 쿠틀륵이었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최하늘 | 작성시간 09.04.13 으앜ㅋㅋ 저도 티무르 왕조의 그 티무르인줄 알았는데;;;;
  • 답댓글 작성자리카르도 | 작성시간 09.04.14 헉;; 티무르 제국과 시기상 겹친다고 생각하고 완전 착각했네요;;
  • 답댓글 작성자데미르 카라한 | 작성시간 09.04.14 최하늘. 리카르도//아무래도 본인이시니까 아시는거죠 ㅎㅎ
  • 작성자투창병 | 작성시간 09.04.13 요가일라는 결국 카톨릭을 믿게 되었으니 그런데 폴란드.리투아니아 동맹을 폴란드인들은 자랑스럽게 생각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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