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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들

이란인의 비판..

작성자KWEASSA|작성시간07.04.24|조회수13,279 목록 댓글 47

  인터넷을 돌다가 발견한 글인데, 상당히 괜찮아서 번역해 올려봅니다. 글을 쓴 사람은 그리스에 사는 이란 출신의 카베 파로크 박사이고, 고대 이란사 전공을 했으며, 대충 보니 우리에게 친숙한 오스프레이 출판사의 서적들과도 상당히 관련을 많이 갖고 있는 분 같네요. 

 

  파로크 박사님은 재미있게 쓴다고 쓰신 것 같은데, 뭐 --; 대충 이런게 학자들의 글입니다. 좀 딱딱하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아무리 즐겁고 재미있다고 해도 항상 어떠한 것의 뒤안에 어떠한 문제가 숨어있는지, 그것을 이해하려고 하고 고민해야 한다는 소중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그런 것이 진정 이성적인 인간의 책임이겠지요.

 

 

 현대의 매체.. 영화, TV 드라마, 버라이어티 쇼, 게임, 춤, 음악, 등등등...

 젊은 사람이 재미있는 것을 재미있게 즐기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그저 재미있게 즐기는 수준에서 <사고>를 멈추어 버리는 사람은 자유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이 아니라 단순히 주어진 것에 반응하는 실험실 생쥐일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300>의 재미를 화끈하게 즐기는 것과, 그 장면 사이사이에 숨겨져있는 편파적 이미지에 현혹되지 않는 공정한 마음을 동시에 유지할 수 있는 건전한 이성이 필요한 것이겠죠.

 

 왜 이런 말을 하느냐면, 이 경우에는 영화 <300>이 문제가 되었지만, 그 못지 않게 다른 쇼니, 드라마니, 게임이니 등등에 대해 문제제기가 나오면 "웃고 즐기면 그만인 것에 일일이 문제제기를 해야 하나",  "귀찮게 그렇게 꼭 따져야 되는거냐",  "일부러 유식한 척 하는거냐" 하는 비아냥을 여기저기서 듣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비판의 정신을 잃지 맙시다.

 아무리 귀찮고, 재미없어도 말입니다.

 

 저는 우리의 젊은 세대들이 전기자극 주면 바로 웃고 울고 반응해주다가 나중에는 종소리만 들려주면 바로 침흘리게 되는 파블로프의 개와 같은 짐승 레벨의 존재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특히,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알기 위해서, 알고 싶어서 자신이 스스로 해야 하는 노력의 중요성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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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원문:

http://www.ghandchi.com/iranscope/Anthology/KavehFarrokh/300/index.htm

 

 

  • 영화 "300": 사실과 픽션의 구분을 위하여

                                                                                                  - 카베 파로크 박사

     

     개봉 첫 주에 7천만 달러를 넘는 수익을 올린 영화 <300>은 헐리웃 블럭버스터 영화사상 최고의 반열에 오를 예정이다. 어쩌면 강렬한 첫 인상을 주는 오프닝 시퀀스에서부터 북미인들과 유럽인들에게는 대작이 될 가능성을 갖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는 프랭크 밀러의 그래픽 노벨을 원작으로 하여 잭 스나이더( <새벽의 저주> 등..)가 감독을 맡았는데, 많은 사람들로부터 대단한 '역사영화'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그 보다 더 대단한 것은 이 영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결론들일 것이다.

     

     이 영화의 제작자들은 (배우들도 마찬가지이고), 영화를 만들면서 어떠한 역사적 사료도 참고하지 않았다고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만화가 자신은 그리스의 역사학자 헤로도토스의 서술에 의존하고 있는 듯 하지만, 헤로도토스는 중요한 정보원임에도 불구하고 불가피하게 어느 정도 편견을 담고 있을 수 밖에 없다. 물론, 어떠한 문화의 어떠한 역사적 작품들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말이다.

     

     내가 쓰고자 하는 에세이는 영화의 시네마토그라피를 다루고자 하는 시도가 아니며 (그것은 영화 평론가들의 몫이다), 배우들과 제작진들에 대한 비판도 아니다. 원작자, 영화감독, 배우들과 제작 스탭들이 反-이란 정서를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바가 결코 아니라는 것을 강조해두고 싶다. 그러나, (아무리 엔터테인먼트를 위한 작품일 뿐이라고 주장한다고 할지라도) 이 영화는 분명히 몇가지 메시지를 내포하고 잇을 수 밖에 없다: 물론, 이러한 메시지들이 밀러씨나 영화의 제작자들이 의도한 바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다음의 비평은 고대 이란과 이란인들에 대해 보이는 인간적 편견에 대한 것이며, 동종의 편견을 영화 <300>은 (설사 그것이 의도한 바가 아니라 할지라도) 분명히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구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내 고유한 의견을 개진하는데 있어서 나의 개인적인 배경을 미리 설명해 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리스에 살고 있는 이란인이며, 현재 고대 이란史를 전공하고 있고, 고대 그리스와 그 "동로마的" 후계자인 비잔틴제국의 역사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있다. 내 그리스인 친구들은 나를 "페르시아"와 "헬라스"가 혼합된 인간이라고 얘기를 한다. 어째서인지, 그리스인이 고대 페르시아를 동경하거나, 그 못지 않게 이란인이 고대 그리스 세계를 동경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 싶다.  한 그리스 친구가 2007년 3월 12일에, 다음과 같은 E-메일을 보내왔다:

     

    영화 <300>을 봤는데, 완전히 실망했다. 그 영화는 페르시아인들을 악마로 묘사하고 있더군. 페르시아에 대해서는 올바른 것이 하나도 없었어. 게다가, 그 영화는 레오니다스 왕의 대사를 통해 일부 그리스 철학자들과 아테네 문명 또한 마찬가지로 악마화 시키고 비하하고 있는 듯 해. ... 도대체 스파르타인들과 악마들이 나오는 이 영화를 왜 보고 있을까 스스로 의심이 들었지. 양쪽 진영 모두에 영광되고 용감하고 명석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내용은 전혀 없어. 스파르타인들이 테르모퓔레에서 행한 일이 대단했던 이유는, 그들이 아무나 상대로 싸울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용맹하고, 영화로운 적을 상대로 싸웠기 때문일텐데 말이야. ... 이 사실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것 같아.

     

     오랜 역사적인 교류를 통해 그리스와 페르시아는 예술, 건축, 과학, 음악, 그리고 심지어는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해서도 서로 굉장한 업적을 이룰 수 있었다. 오늘날 그리스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고대 이란을 자신과 대등한 문명으로 인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서유럽과 북미에서는 그러한 시각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 자못 흥미롭다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이 비평은 다음과 같은 8가지 소주제에 주안할 것이다:

     

    (1)  민주주의와 인권의 개념

    (2)  전쟁이 발발한 이유

    (3) 군사적 충돌: 사실과 픽션의 구분

    (4)  크세르크세스의 실책: 아테네 방화

    (5)  "동방"의 "신비주의"를 타파하는 "서구인"의 이미지

    (6)  이란인들과 그리스인들의 묘사

    (7)  고대 이란의 여성들에 대해

    (8)  “선"과 "악"의 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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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민주주의와 인권의 개념

     

     영화를 보면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을 단순한 이분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선하고 민주적이고 이성적인 "우리" 그리스인과, 전제적이고 악랄하고 비이성적인 "그들" "페르시아인들"의 싸움으로 말이다. 이러한 이분법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다음과 같은 메시지이다:

     

    서구 문명의 붕괴를 막고 있는 300명의 전사들이 있다 ... 만약 야만인들이 이들을 무찌른다면 그리스의 민주주의와 문명은 잔혹한 이방인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할 것이다"

    [크리스토퍼 허드슨, “사상 최고의 전사들", 데일리 메일紙, 영국, 2007.3.09]

     

    서구 문명의 붕괴",  "야만인들", 민주주의와 문명", 잔혹한 이방인"  등의 키워드에 주목해보자. 이러한 키워드는 "타자"에 대한 비하를 감행하는 정치 슬로건의 잔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단순논리는 영화 <300>을 바라보는 일반적인 매체와 관객들에게 단순히 영화화된 그래픽 노벨 이상의 가치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웨스트 버지니아 대학교의 학생인 토머스 엥글은 이러한 현상에 대한 걱정을 표명하며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통해 "역사적 사실을 배우고자" 하고 있다고 얘기한다. 

    [http://www.lewrockwell.com/orig8/engle1.html].

     

     대중 미디어 매체는 (데일리 메일紙와 같은..) 인권과 민주주의, 자유, 그리고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에 대한 무지를 조장하는 또 다른 예시일 뿐이다. 민주주의와 인권의 유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만큼 단순하지 않다. 아래에 서술된 것 처럼, 그것은 그리스인들 못지 않게 고대 이란인들에게서도 유래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인들은 (특히, 아테네인들을 포함한 이오니아인들 사이에서는), “데모스” (민중)과  “크라투스” (정부)의 개념을 만들어냈다. 즉, '민중에 의한 정부'라는 이러한 개념이 오늘날 "서구인들"의 환상을 자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근대 민주주의 성립에 있어서 인종, 종교, 문화적 평등, 그리고 인권 등 분야에서 "동방"이 어떠한 역할을 맡았는지에 대해 인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아케메네스朝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키루스 대제는 인권의 신성함과 개인의 자유를 공개적으로 천명한 세계 최초의 군주였다. 

    "키루스 대제", 팀 뉴워크, 2000, p.21

    (Ancient Armies, Concord Publications, 앵거스 맥브라이드 作)

     

     키루스는 세계 最古의 일신교를 창시한 조로아스터(짜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을 숭배했다.

    듀라 에우로푸스 (오늘날 시리아 소재)의 미스라교

     사원에 있는 짜라투스트라의 초상, 3세기 BCE

     

     조로아스터는 인종과 민족, 믿는 종교와 상관없이 모든 인간은 내면적인 선과 악이 존재하고 있다고 가르쳤다. 모든 인간은 선과 악을 택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져 있으며, 그것을 선택하는 것은 곧 우리 자신의 책임이다. 따라서, 조로아스터는 인간의 선함, 그리고 그 신성함을 믿는 것이야말로 인간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는 사고, 행동, 그리고 언어에의 자유가 주어진 것이다. 이러한 이념은 조로아스터의 원칙들에 표명되어 있다: 선한 생각 (펜다르 니크), 선한 행동(케르다르 니크) 그리고 선한 말 (고프타르 니크).

     

     결국, 사고, 행동, 언어의 자유에는 모든 인류의 선을 위해서만 이 자유를 써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이 뒤따라오게 되는 것이다. 조로아스터는 "나쁜 민족"이나 "나쁜 종교"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쳤다. 단지, 자신의 공동체이든 타인의 공동체이든간에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조로아스터교도들은 종종 고대 이란을 "자유의 땅(자민 아자데간)"이라고 불렀다.

     

     조로아스터는 모든 선한 것을 대변하는 아후라 마즈다('최고의 천사')라는 전지전능한 신에 대해 설파했다. 하지만, 이 아후라 마즈다를 받아들이냐 마느냐는 개인의 선택에 달려있었으며, 각 민족들에게 강제적인 개종을 강요한 예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키루스 그 자신도 바빌로니아의 신 마르둑의 像에 복배하며 존경심을 표한 것이다. 그라프, 히르쉬, 글리슨&크레프터가 지적한 바와 같이, “선한 이들에게  천상에서의 내세가 기다리고 있으며, 악한 이들에게는 고통스러운 내세가 준비되어 있다는 믿음은 아케메네스朝의 군주들이 자신에게 복속된 여러 국가들을 도덕적으로 대하는 태도의 근간이 되었다..."[i]    

     

     그리스의 군인/역사학자인 크세노폰은 그의 저작 퀴로파이디아 에서 키루스 대제를 격차한하면서, 그가 속임수, 오만함, 음흉함, 이기심이 전혀 없다고 서술한다. 키루스 대제는 세계 최초의 "통일영웅" - 즉, 모든 사람들을 하나의 제국으로 포섭하고자 한 - 이다. 그는 서로 다른 언어, 원칙, 율법 모두를 포용하고자 했다. 키루스 대제를 깊이 흠모한 알렉산더 대왕 또한 333~323 BCE의 페르시아 정복 이후에 이 "통일영웅"의 기치를 내걸었던 것이다.

     

     키루스의 정부체제는 '키루스의 원통'을 통해 불멸의 것이 되었다. 이것은 바빌론 정복 직후 538 BCE에 키루스의 명령에 의해 만들어진 원통형 토기이다..

     

    키루스의 원통. 이것이야말로 세계 최초의 인권헌장이다. 뉴옥의 UN 청사에는 키루스 원통의 내용을 담고 있는 복사판이 존재하고 있다.  

     

    이 키루스 원통의 3대 전제는 다음과 같다:

    (1) 모든 인종, 언어, 종교의 평등함

    (2) 추방당한 만민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음

    (3) 파괴된 모든 신전은 복구될 것

     

     키루스가 바빌론의 군주 나보니두스를 격파했을 때, 그는 바빌론 유수의 유대인들에게 자유를 주었다. 이것은 유대 민족, 종교, 전통과 문화의 존속을 보장한 세계 최초의 선언이다. 키루스는 유대인들이 신전을 재건축 하는 것을 허가했으며 그에 필요한 비용을 대줬다. 페르시아 제국은 다리우스 대제의 치세에 위의 원칙을 답습하여 519~518 BCE에 걸쳐 예루살렘의 대사원을 재건했다(에즈라 書, 4:1). 키루스의 자비로움은 구약성서에  야훼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 (에즈라書)로써 불멸의 것이 된 바, 코레쉬 ('키루스'의 히브리어 발음)는 유대인들에게 메시아로써 추앙받았다. 이사이아는 키루스에 대해 “그는 나의 양치기이니 그가 내 모든 것울 아루리라” (이사이아書, 44.28; 45.1)라고 언급한다. 성서이 인물들인 에즈라, 다니엘, 에스더, 그리고 모르데카이는 모두 페르시아의 궁정에서 중요한 직위를 갖고 있었으며, 에스더와 모르데카이의 묘소가 2,5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유대인들을 받아들인 고대의 엑바타나 자리였던 하마단에 그대로 남아있다.  페르시아왕 크세르크세스 자신의 왕비 또한 유대인인 에스더 황후가 아니었던가.

    고대 이란을 보다 인간적으로 그려낸 1962년도 헐리웃 영화, <크세르크세스>. 이 영화에서 크세르크세스역을  리쳐드 에간이 열연했고, 그의 유대인 왕비 에스더역은 죠안 콜린스가 맡았다.

     

     

    이란의 하마단에 있는 에스더와 모르데카이의 무덤

     

    빅터 데이비스 핸슨 교수(Hoover Institution, 스탠포드 대학, Professor emeritus at 캘리포니아 대학)는 “자유 vs. 압제” 에 대해 다음과 같이 명료하게 얘기하고 있다:

     

    “만약 평론가들이 <300>을 통해 테르모퓔레의 의미를 '자유 vs 압제'로 단순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선 고대의 사료들을 먼저 제대로 읽어본 후에 헤로도토스, 플루타르코스, 그리고 디오도로스 등을 탓해야 할 것이다. 이들이야말로 전쟁이 발생할 때 마다 페르시아의 압제에 대항해 그리스가 자유를 걸고 싸웠다는 자랑을 일삼았으니 말이다. 자유를 걸고 싸운 최초의 인물들이 그리스인들은 아니다. 게다가, 군주정 또한 동방만의 것도 아니다. 이 '자유의 수호자'라는 그리스인들이 알렉산더 대왕 아래 하나로 뭉쳤을 때 그들은 똑같은 짓을 하지 않았던가? 페르시아, 이집트, 인도를 침략하고 자신들의 제국을 세웠으니 말이다. 게다가 로마인들은 또 어떠한가?"

    [전문: http://www.victorhanson.com/articles/hanson101106.html]

     

     

    (2) 전쟁이 발발한 이유: 알려지지 않은 부분들

     

     위에서 언급한 것 처럼, 서구의 대중적 의견과 역사관에서는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을, 자유를 상징하는 그리스인들이 '페르시아의 압제'에 대항하여 싸운 것으로 극적으로 그려내곤 한다. 이에 대해 넬슨 프라이 교수는 그러한 역사적 내러티브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경고를 보내고 있다: “…과거에 현재를 투영하는 행위로써 객관적인 이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Richard Nelson Frye, 1984, p.93]

     

     아나톨리아 서해안의 이오니아인들의 봉기가 있었고, 이들과 같은 족속인 아테네인들이 페르시아에 대항할 수 있도록 이들을 지원한 것이 크세르크세스의 아버지인 다리우스 대제(549-486 BCE)로 하여금 490년에 그리스를 침공한 원인이 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전체 이야기의 한 단편일 뿐이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경제적 배경에 대해 논하는 서구의 역사학자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이 무렵이면, 그리스인들은 지중해에 강력한 해상교역권을 완성해두고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남부 이탈리아는 물론이고, 남부 프랑스까지도 뻗어나간 식민도시들을 세웠는데, 예를 들어 오늘날 프랑스의 도시인 "니스(Nice)"는 그리스의 "니케아"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리스인들의 교역소는 오늘날 그루지야 공화국인 코카서스 지역까지도 존재하고 있었다.

     

     아케메네스朝는 에게해까지 영토를 확장한 이후로 빠른 속도로 해운국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다리우스 대제는 세계 최초의 공식적인 "제국해군"을 만들었고, 이 선단의 다수는 페니키아, 이집트, 그리고 이오니아인들의 선박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 보다 더 중요하게는, 페르시아제국의 상권이 슬슬 지중해와 흑해에서의 그리스인들의 상권을 침입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쿠크, The Greeks in Ionia and the East, 1962, 98-120; 132-133; 파로크, Shadows in the Desert: Ancient Persia at War, 2007, Chapter 4 등을 참고할 것). 닉 스파타리와 같은 이탈리아 연구자들은 다리우스가 상업적인 접촉을 시도하기 위해 남부 이탈리에까지 해군 정찰선들을 보냈다는 것을 확인했다. (파로크, Shadows in the Desert, 2007, Chapter 4).

     

    1971년에 복원된 아케메네스朝의 선박들

     

     페르시아의 확장된 상권은 그리스인들에게 있어서는 경쟁의 대상이었으며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중요한 동기는 정치적인 것 못지 않게 경제적인 것이었다. 보다 자세한 사항은 참고도서들을 통해서 알아보길 바란다.

     

     (3) 군사적 충돌: 사실과 픽션의 구분

     

     크세르크세스의 대군을 상대로 싸운 그리스인들의 굳건함과 용맹함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영화 <300>은 그런 점에서는 스파르타인들의 장비를 비교적 잘 고증하고 있다. 만화책의 이미지를 그대로 화면 상에 재현해내기 위해서 사료를 통한 고증을 거치지 않은 것을 감안하면 말이다. 그리스측을 묘사한 양식이 비교적 적절했던 반면, "페르시아인"들에 대한 부분은 완전한 허구이다.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영화 상의 페르시아인들에 대한 '이미지'를 벌써 사실로써 받아들이고 있는 바, 사람의 마음이란 것은 참으로 놀랍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여기에서 서술할 것은 크세르크세스의 480년 침공 당시의 군사적 견지에 대한 비교적 간단하고 개론적인 요약이다. 다만, 알렉산더 시대 이후까지도 서술을 진행하여 파르티아 시대(238 BCE ~ 224 CE)와 사산朝 시대 (224-651 CE)의 페르시아 기병들에 대해서도 언급을 할 것이다. 크세르크세스가 실제로 170만 대군을 지휘했는지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세하게 검증할 생각이다. 여기서 언급하는 내용만으로는 모든 의문을 완전히 풀 수 없겠지만, 다만 이 것을 통해 독자들이 스스로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하기를 바랄 뿐이다.

     

    무기.

     그리스의 창과 검은 아케메네스朝 페르시아군의 것 보다 긴 편이었다. 즉, 단병접전이 일어날 경우, 주로 찌르는 용도로 창을 사용했던 스파르타인들이 접전거리 상으로 어느정도 유리할 수 있었던 근거가 된다. (Farrokh, Shadows in the Desert, 2007, Chapters 4-5). 영화상의 페르시아인들의 검은 역사적인 근거가 전혀 없다. 당시 이란인들의 검은 짧은 단검으로, “아케나케스"라고 불렀다.

     

    스키타이인(왼쪽)과 메데스인(오른쪽)

     

     사카 티그라카우다(긴모자를 쓴 스키타이인)과 메데스인(둥근 모자)이 페르세폴리스의 궁저에서 아케메네스朝 왕을 알현하는 모습이다. 아케나케스 검이 길이에 주목하라. 단병접전에 있어서 그리스인들의 검에 비해 부적절하다고 할 수 있겠다.

     

     아케나케스 단검은 물론, 청동기 시대에서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이란인들의 무구에 대해서는 무느케르 모슈타그 코라사니의 저서를 참고하길 바란다:

     

    Arms and Armor from Iran: The Bronze Age to end of the Qajar Period

    http://www.arms-and-armor-from-iran.de/

     

     

    갑주.

     그리스군은 전반적으로 페르시아인들 보다 월등한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모든 스파르타인들이 테르모퓔라이에서 중장을 갖추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불분명하지만 말이다. 그리스제 투구와 흉갑, 그리고 정강이받이는 단병접전시 날붙이 무기에 대해서 뛰어난 방어력을 제공했다. 반면, 대다수의 페르시아군은 갑주를 착용하고 있지 않았다. 미늘갑옷은 착용이 가능했지만 대부분 병사들에게는 지급될 수 없었다. 단병접전에 들어간 경우 페르시아의 병사는 위협적인 공격들에 대한 방어력을 거의 제공받지 못했다. (Farrokh, Shadows in the Desert, 2007, Chapters 4-5). 영화에 등장한 페르시아인들의 갑옷은 완전한 허구이다.

     

    그리스의 군사적 전통.

    영화 <300>은 스파르타인들의 동지애, 열정, 그리고 '에스쁘리 드 코르'(군대의 정신)을 비교적 잘 그려내고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그리스는 강성한 군사적 전통을 갖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스파르타의 어머니는 아기를 포도주에 씻긴다고 하는데, 약한 아이는 술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죽는다고 전해진다. 그 이후에 아버지는 아이를 장로들에게 데리고 갈 것이고, 결국 여기에서 아기가 스파르타인으로 성장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가 가려진다. 만약 이 검증에서 부적격자로 판단되면 아이는 타이게토스 산의 절벽 아래로 내던져지는데, 이것을 “카이아다”라고 불렀다.

     

     영화에서 처럼, 스파르타의 소년은 7세가 되면 훈련을 시작한다. 정식 군복무는 20세 부터 시작된다. 그리스의 항아리들에 묘사된 모습에서 그리스인들이 굉장히 효과적인 전투훈련에 임하고 있는 모습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격투 훈련을 하는 그리스인들 - 오른 편의 '코치'의 모습에 주목하라

     

     훈련은 실전처럼 격렬했다. 스파르타는 전사사회였으며, 민주적 전통을 주장한 것은 아테네인들과 그들의 이오니아인 친족들 뿐이었다.

     

    그리스인들의 팔랑크스 체제.

    그리스인들은 팔랑크스 체제를 도입하고 있었는데, 모든 병사들의 통일된 움직임을 통해 부대 전체가 하나의 개체로써 싸우는 방식이었다. 이 체제에 필수적이었던 것은 적의 공격을 불허하는 강고한 방패의 벽을 쌓는 것이었다. 이러한 방식은 북부 그리스의 마케도니아인들에 의해 개량되었는데, 굉장한 길이의 장창이었던 '사리사'를 사용한 이 대형은 알렉산더 대왕의 페르시아 정복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해냈다. 

     

    그리스 팔랑크스를 묘사한 화병

    ( www.livius.org)

     

    그리스인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단병접전을 수행해온 바, 페르시아군에 비해 단연 이 분야에서 돋보였다고 할 수 있다. 엄청난 훈련을 통해 단련된 스파르타인들은 엄정한 규율 아래에 지휘관의 명령에 바로 반응할 수 있는 팔랑크스를 운용했다. 방패가 서로 맞물린 상태에서 팔랑크스는 전진하며 창을 내지를 수 있었다. 전장에서 개인의 무용을 과시하기 위해 대형을 이탈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모든 전사들은 팔랑크스 내에서 행동해야만 했다. 경장의 페르시아군을 상대로 한 스파르타인들의 항전은 용맹한 것이었으나, 경장의 페르시아인들이 팔랑크스에 근접했을 때 맨손으로라도 창대나마 부러뜨리려고 했다는 것에서 페르시아인들 또한 못지 않게 용맹했음을 알 수 있다.

     

    기병의 진화.

    무구의 측면에서 영화상 묘사된 "페르시아 기병"들은 완전한 허구이다. 피상적인 수준에서 얘기할 때, 영화 속 기병들은 테르모퓔레의 전투가 끝난 후 천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간 후에 등장할 아라비아 기병들과 더 유사하다고 할 수 있으며, 아케메네스朝 페르시아 기병들과는 물론, 이후의 파르티아나 사산朝 페르시아의 기병들과도 다르다. 아케메네스朝 페르시아군의 기병은 다음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후기 아케메네스朝 시대의 메데스 기병

     

     적절한 갑주를 걸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 시대의 페르시아 기병들은 높은 훈련수준의 중무장한 창병을 상대로 안정적인 공격을 펼칠 수 있는 방법을 모색 중이었다.(Farrokh, Shadows in the Desert, 2007, Chapters 4-5). 이것은 물론 페르시아군이 아직 등자를 사용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인데, 결과적으로 기병의 충격이 멈춘 시점에서 보병들의 공격을 받고 낙마하는 경향이 지대했는데, 이 사실을 BCE 5세기의 크세노폰은 예리하게 관찰하고 있다.

     

     그러나 페르시아 기병들은 알렉산더 대왕의 페르시아 정복 이후에까지도 진화를 거듭했다. 알렉산더의 페르시아 정복에 있어서 최대한의 걸림돌이 된 것도 이 강력한 기병들이었으며 이들의 능력은 그리스인들도 감탄할만한 것이었다. 크세노폰은 동시대 그리스인들에게 이란의 기병들에 대한 주의를 당부하는데, 결과적으로 이것은 파르티아인들과 사산朝 페르시아 기병들에 대한 예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이 페르시아의 기사들이야말로 알렉산더의 후계자인 셀레우코스朝의 병사들을 무찔렀고, 카레의 전투(53 BCE)에서 마르쿠스 루키니우스 크라수스를 상대로 극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알렉산더 세베루스(233 CE 크테시폰 전투), 고르디아누스 3세 (244 CE 메시케 전투), 필리푸스 아라부스 (253 CE, 바르발리소스 전투), 발레리아누스 (260 CE, 카레-에데사 전투), 율리아누스(363 CE 페르시아 공략전) 등의 로마 황제들에게 패배를 안겨줬으니까 말이다. 기원 후 5세기가 되는 시점에서는 중앙아시아를 거쳐 투르크인들이 도착하여 로마인들과 페르시아인 둘 다에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아마 이들을 통해 등자의 존재가 유럽에 알려졌을 것이다.

     

    후기 페르시아의 기사들의 유능함을 인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그나마 페르시아 기병들의 능력에 대해 언급한 사람이 있다면 리비아누스인데, 사산朝의 기병들에 대해 언급하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로마의 병사는 차라리 어떠한 다른 꼴을 당할 망정 페르시아인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Libianus, XVIII , pp.205-211; Farrokh, Sassanian Elite cavalry, 2005, p.5]

     

     

    율리아누스 황제의 페르시아 공략전(363 CE)에서 로마군을 상대로 싸우는

     푸쉬티그반 친위대의 중기병(좌측)과 쟈납스파-페슈메르가 기병(우측)

    (Farrokh, Sassanian Elite Cavalry, 2005, Plate D; Paintings by Angus McBride).

     

     이 페르시아 기병들의 무구는 오히려 후대 서구의 기사들의 것과 유사한 '유럽적'인 모습이다. 메일과 플레이트를 갖추고, 리벳으로 강화된 슈팡겐헬름 투구는 물론이며, 브로드소드나 메이스, 배틀 액스로 무장한 모습에 주목하라. 물론 이들은 후대 서구의 기사들에 비해 수 세기나 앞서있다. (Farrokh, Sassanian Elite Cavalry, 2005).

     

     스파르타인들의 시대를 초월한 영웅적 기상은 찬양받아 마땅한 것이지만, 페르시아 또한 영광스러운 군사적 전통을 갖고 있다: 파르티아와 사산朝의 엘리트 기병들이었던 “사바란 이 그와 같은 경우이다. 이 '사바란'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그토록 많다는게 놀랍지 않은가? 그리스계 캐나다인 역사학자인 죠지 트소니스에 의하면; “아쉽게도 우리는 '동방'의 페르시아 기병들에게 참패를 당하는 로마군의 모습을 그리는 영화는 결코 볼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영화는 박스오피스 전적에서 참패를 당할테니까.”

     

     이러한 편견은 엔터테인먼트 매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서유럽과 영어권의 학계에서는 아직도 그리스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으며, 사바란과 같은 강력한 무사적 전통을 지닌 동방에 대해서는 시큰둥하다. 이러한 편견은, 심지어는 권위있는 전사학자인 죤 키건 교수에게서도 볼 수 있는데, 서유럽 기병들이 페르시아의 중기병들로부터 받은 영향에 대해서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페르시아인들이 갑주를 갖춘 기사와 마갑을 갖춘 말을 유럽인들 보다 이른 시기에 사용한 것은 물론, 사실이다. 하지만 유럽인들의 중기병 전술이 이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가정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Richard Keegan, A History of Warfare, 1993, p.286]

     

    죤 키건 교수

     

     키건의 이러한 견해에 반대하는 전사학자들은 헤르만, 미샬락, 이노스트란체프, 니켈, 뉴워크 등 결코 적은 수가 아니다 (Farrokh, Shadows in the Desert, 2007, Chapters 9-22, 24). 키건 교수는 기병의 역사에 대한 편향적인 시각을 대표하고 있는데, 특히 페르시아인들의 영향력에 대해서는 아주 적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의 그리스인 동료 스타마티스에 의하면;:

     

    “…고대 그리스의 영광을 보존하기 위해서 페르시아를 비하할 학술적인 이유가 있을까? 그리스와 페르시아 둘 다 세계문명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키건 교수의 것과 같은 평은 진정한 학술적 성찰의 결과라기 보다는 일종의 도그마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도그마적 태도는 고대 그리스, 페르시아, 이집트, 중국, 그리고 이슬람의 계몽적 황금시대에 대한 서술들에서 자주 보이곤 한다."

     

     

    '이모털'군단.

     아마 가장 재미있는 것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군의 '불사대' 이모털 군단에 대한 묘사일 것이다. 뭔가 피상적으로 헐리웃식 '닌자'의 모습을 닮았는데, 검은 색은 사실 페르시아군 복색에 전혀 사용된 바가 없기 때문이다. 대충 '오리엔털'한 모습의 금속 마스크 또한 이 정예병들이 사용한 바가 전혀 없으며,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페르시아군은 대체로 그리스인들 보다 훨씬 경장이었다. 아래의 그림들이 당시 페리스아군이 모습을 보다 정확하게 묘사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크세르크세스의 그리스 침공 당시 아케메네스朝 페르시아군의 장교의 모습.

     

     위의 모습은 1971년도에 역사학자들이 복원해낸 모습이다. 영화와 현실은 너무나 다르다. 화려한 색채의 복식과 무장 수준을 주목하라(갑주가 없다). 물론, <300>의 제작자들은 만화적인 '악마화된' 모습으로 페르시아군을 그려냈다고 솔직하게 인정하고 있다.

     

     

    크세르크세스의 침공군의 규모

     

    크세르크세스의 군대가 대규모였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정확하게 어느정도의 규모였다는 말인가? 영화의 트레일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300 대 백만명의 싸움"

     

     유럽의 학계에서 주된 사료로 인용하는 것은 헤로도토스인데, 그에 따르면 크세르크세스의 침공군은 170만명 규모였다. (Herodotus, VII, 60). 헤로도토스는 그리스-페르시아 전쟁과 알렉산더의 등장 사이의 시대를 산 인물이다.

     

    헤로도토스 (484-425 BC)

     

     

     헤로도토스는 크세르크세스의 소집에 응한 총 46개 국가를 열거하고 있다(Farrokh, Shadows in the Desert, 2007, Chapter 5). 이와같은 주장을 곧이곧대로 믿기 힘든 것이, 상호 의사소통의 문제는 물론이고, 이 규모의 병력을 조직하면서 그 보급을 댄다는 것은 페르시군에 있어서, 소규모의 군세를 지닌 그리스군에 비할 바 없이 엄청나게 힘든 작업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페르시아군의 규모를 오로지 헤로도토스에만 의존하는 것은 불공정한 일이다. 그리스의 비극작가 아이스킬로스는 그의 작품, 페르사에 에서 크세르크세스의 군세를 "말 그대로 인해(人海)... 어떠한 제방으로도 막을 수 없을 것 처럼 보이는 거대한 물결" (페르사에, 87-90),  ”…아시아의 오만한 지도자가 사람의 떼를 몰아 온 세계를 정복하고자 한다" (페르사에, 73-75) 고 묘사하고 있다.

     

     헤로도토스의 수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일군의 학자들이 침공병력의 규모를 추산하고자 한 시도를 한 것은 19세기 중반에서 20세기 초 까지였다. 고비노와 델브뤽 등의 유럽 학자들은 고전 사료에서 인용하는 수치들의 신빙성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했는데, 아래의 표는 각 학자들 나름대로 추산한 크세르크세스 군대의 규모이다 :

     

     

    학자

    출처

    예상치

     

     

     

    에두아르드 마이어

    William Kelly Prentice, “Thermopylae and Artemisium”, Transactions and Proceedings of the American Philological Association, Vol. 51, 1920 p. 5-18

     

     

    전투원 10만

     비전투원 10만

     

    에른스트 옵스트

    Der Feldzug des Xerxes in Klio, Beiheft 12, Leipzig, 1914, p. 88

     

    9만

     

     

    꽁트 드 고비노

    Histoire des Perses [History of the Persians], Volume II, 1869 p. 191

     

    9만

     

    레지널드 월터 매컨

    Herodotus, The Seventh, Eighth and Ninth Books, London, 1908, Vol. II, p. 164

     

    9만

     

    윌리엄 웃소프 타른

    "The Fleet of Xerxes", The Journal of Hellenic Studies, 28, 1908, p. 208

     

    6만

     

    한스 델브뤽

    Die Perserkriege und die Burgunderkriege, Berlin, 1887, p. 164

     

    5만 5천

     

    로버트 폰 피셔

    "Das Zahlenproblem in Perserkriege 480-479" Klio, N. F., vol. VII, p. 289

     

    4만


     현대의 학자들은 대부분 10만~20만명의 침공군으로 추산하고 있는데, 이것이 아케메네스朝 페르시아의 인구비례에 맞는 수치이다. (Farrokh, Shadows in the Desert, 2007, Chapter 5). 설사 페르시아 제국이 170만명을 동원할 수 있는 인구를 갖고 있었다고 해도 현대와 같은 전자장비와 관리설비 없이 170만 병력을 운용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또, 그러한 군대를 실제로 조직해내어 페르시아에서부터 그리스까지 대규모 원정에 오른다고 할지라도 고대의 보급체계로는 그 규모를 부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러한 규모의 병력동원이 가능해지는 것은 근대 이후의 일인데, 미국 남북전쟁 (1861-1865)의 시대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전신과 철도의 발명 이후의 일이 된다. .

     

     테르모퓔레에서 스파르타인들과 그리스인 연합군의 병력은 6천에 가까웠다. 페르시아군의 규모가 예상 최저치인 4만명에 불과했다고 할지라도 역시 그리스인들은 레오니다스의 최후의 항전에 있어서 명백하게 숫적으로 불리했을 것이다.

     

    그 외에, 크세르크세스의 페르시아군이 이룬 건축적 성과에 대해 제대로 평가하고 있는 사람들도 드물다고 할 수 있다.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세계 최초의 가교를 설립한 셈인데, 이러한 업적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자세하게 알고 싶은 사람은 다음의 히스토리 채널의 다큐멘터리를 참고하기 바란다:

     

    “Engineering an Empire: The Persians”

    http://store.aetv.com/html/product/index.jhtml?id=77071

    5 개 분할로 youtube에서 찾아볼 수 있다  – 제 4부에서 크세르크세스의 그리스 침공의 공학적인 의의를 설명한다 :


    Part 1: http://www.youtube.com/watch?v=eKN-gZuSH2o&mode=related&search=
    Part 2: http://www.youtube.com/watch?v=pdqmdB_Sbtc&mode=related&search=
    Part 3: http://www.youtube.com/watch?v=bykHGRD_BZ4&mode=related&search=
    Part 4: http://www.youtube.com/watch?v=WNWmaMTTesI&mode=related&search=
    Part 5: http://www.youtube.com/watch?v=tFPoe06ThRU&mode=related&search=

    마지막 지적: 살라미스 해전

     

    그 외에도 영화에서는 부정확한 점들이 눈에 띈다. 첫 째, 스파르타인들은 아테네인들의 입장에서는 그다지 '민주적'이라고 할 수 없었다: 스파르타의 사회는 군사적인 계급체제였다. 스파르타인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다고 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이다. 민주주의라는 체제를 포함한 "그리스의 영광"을 위해 싸웠다고는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파르타인들이 정확히 민주주의라는 체제를 옹호하기 위해 싸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둘 째, 마지막 300 명의 스파르타인들은 홀로 적과 맞서지 않았다 - 그들은 적어도 300 명의 테스피아이 인들과 함께 최후를 맞이했다. 결과적으로 크세르크세스는 테르모퓔레에서 승리한 이후 이 지점을 돌파하여 그리스로 성공적으로 진입했다. 크세르크세스의 야망을 진정으로 꺾어버린 것은 해전이었다: 테르모퓔레를 돌파한 크세르크세스는 살라미스에서의 패전 이후 제해권을 상실했으며, 이 상태에서 육로를 통한 침공을 계속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테미스토클레스의 과감한 지휘 아래에 그리스 해군은 페르시아 해군을 살라미스와 피레우스 항구 사이의 협류로 유인하여 격멸시켰다.

     

     당시 그리스 정치의 전형적인 과정에 따라, 그리스를 구해낸 영웅이 된 테미스토클레스는 후일 배신자로 규탄받고 아테네에서 추방당한다! 더 아이러니컬한 것은 테미스토클레스에게 망명지를 제공한 것은 크세르크세스의 후계자인 아르타크세르크세스였다는 사실이다. In my opinion, 테미스토클레스와 크세르크세스, 아르테미시아, 그리고 아르타크세르크세스의 삶을 객관적으로 조명한 영화가 나온다면 그거야말로 정말로 흥미있지 않겠는가?

     

     

    (4) 크세르크세스의 실책: 아테네 방화

     

     그리스 침공에 있어서 크세르크세스의 최대의 실수는 아크로폴리스를 포함한 아테네를 불바다로 만든, 오히려 非-페르시아적인 잔학행위였다고 할 수 있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크세르크세스의 군대는 수 많은 마을과 농토, 그리고 신전 등을 파괴했다. 이러한 행위는 그리스인들의 저항의지를 복돋웠을 뿐이다. 특히, 그리스의 신상을 압수하여 페르시아로 후송한 것은 그리스인들의 보복심에 불을 지폈다. 그리스인들의 이러한 저항의지와 대립의식이 결국 기원전 330년대의 알렉산더 대왕의 페르시아 원정을 불러일으킨 한 원인이 되었다.

     

    크세르크세스는 이 실수를 금새 깨달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아테네를 재건하는데 협조하겠다는 유화책은 실패를 거둔 바, 키루스 대제 이후로 페르시아인들이 정복된 땅에 보여주었던 관용의 이미지는 철저하게 파괴된 것이다. 크세르크세스가 아테네에 행한 일을 키루스도 바빌로니아에 마찬가지로 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까? 단 하나 확실한 것은, 크세르크세스의 아테네 방화 이후로 '서구'인들은 크세르크세스의 그리스 원정을 결코 잊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5) "동방"의 "신비주의"를 타파하는 "서구인"의 이미지

     

     영화의 종반에 다다를 무렵, 그리스-페리스이 전쟁은 “페르시아의 신비주의와 압제” 에 대항하는 싸움이라는 말이 나온다. 도대체 '신비주의'를 어떻게 싸운다는 뜻일까? 20년 이상 역사를 연구해왔지만 솔직히 말해서 크세르크세스의 침공이 유럽에 '신비주의'를 불러오기 위해서라는 주장은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는 것이다. <300>을 제작한 사람들은 이 한마디 말이 도대체 어떤 파급효과를 갖고 있을지 그다지 생각해본 적이 없을테지만, 적어도 그 한마디로 인해 "동방"은 "신비주의"와 연결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서구"는 "신비주의"가 아닌 "이성과 교육"의 대변자가 된다는 말인가?

     

     그리스인들이 오늘날 우리가 중요시 여기는 많은 이성적이고 철학적인 개념들을 일구어낸 선구자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모든 배움과 학문이 그리스에서 나왔다는 식의 주장은 특히 17세기 후반의 것이며, 조금 과감히 말해서 전형적인 "오리엔털리즘"적인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논의와 직접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고전기 그리스인 중에서 피타고라스, 플라톤, 탈레스, 데모크리토스 등을 포함한 상당한 수의 학자들이 페르시아 제국의 페르시스, 바빌론, 그리고 이집트로 유학하여 공부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특히 천문학, 수학, 물리학, 기하학과 신학 등에서 페르시아 학문의 영향은 지대했다. (Farrokh, Shadows in the Desert, 2007, Chapter 4).

     


    피타고라스 (582 - 500 BC)

    ]

    플라톤 (4세가 BC)

    탈레스 (624-546 BC)

    데모크리토스 (460 – 370 BC)

     

     

     게다가, 고대의 어떠한 민족도 그랬던 것 처럼, 그리스인들 또한 자신들만의 미신과 신비주의를 잔뜩 가지고 있었다. 기원전 5세기에 아테네에서 천문학 신성모독으로써 금지당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클라조메나이의 아낙사고라스는 태양에 대한 어떠한 학설을 주장한 대가로 아테네에서 추방까지 당했다. 페르시아인들도 크세르크세스가 바다에 채찍질을 한 것 처럼 비이성적인 면모가 분명 있었지만, 그리스인들도 그런 면에서는 결코 뒤지지 않았던 것이다.

     

     교육과 배움의 진화는 역사상 인권 개념의 진화와 비슷하게 맞물려있다: 그것은 여러 국가, 문화, 그리고 민족 사이의 사고방식이 유기적으로 교류되고 결합한 결과이지 어느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에서 독립적으로 '창시'해낸 것이 아니다.

     

     

    (6) 이란인들과 그리스인들의 묘사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극명하게 내 마음 속에 떠올랐던 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이었다:

     

     "이 영화에서 도대체 누가 그리스인이라는 말인가? 고대 그리스에 대한 영화가 아니었던가?"

     

     이에 대한 가장 간단한 해답이라면, 영화의 제작자들은 그래픽 노벨의 이미지를 그대로 화면에 옮겼을 뿐이라는 것이 되겠다. 그러면 어느정도 그들의 캐스팅이 이해가 된다. 하지만, 실제 그리스인 배우들을 활용하여 그리스인을 묘사할 수는 없었을까?

     

    헐리웃에는 명백히, 고전 시대에 대해 어떤 '이미지'를 고수하고자 하는 의도가 존재하고 있다.  고대의 이란인들을 '오리엔털화' 해서 바라보고자 하는 욕구와 비슷한 선상에, 고대 그리스인들을 '앵글로화' 해서 바라보고 싶어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레오니다스 왕의 모습은 고전기 그리스의 작품에서 살펴볼 수 있는 실제 그리스인의 모습과는 비슷했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거리일까. 헐리웃에서 고전시대 그리스인과 이란인들을 그려내는 모습에 대한 이전의 논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다음을 참조하기 바란다:

     

    영화 <알렉산더>: 그리스인들과 이란인의 묘사

    http://www.ghandchi.com/iranscope/Anthology/KavehFarrokh/farrokh6.htm

     

    이에 대해서는 아마드 사드리 박사(College Professor of Islamic World Studies, Lake Forest College)를 인용하는 것이 나을 듯 싶다. 사드리 박사는 다음과 같이 명료하게 얘기한다:

     

    스나이더의 영화에 묘사된 페르시아인들은 (눈높이까지 복면을 하고 있는 엑스트라들 제외하고는) 분명히 흑인들로 묘사되어 있다. 이것은 분명히 일종의 매너리즘이다. 이러한 쟝르의 영화들에 대해서 비칠 수 있는 최대한의 인내심을 갖고 본다고 할지라도 "아시아의 야만인들"은 악마의 모습으로 그려내면서 스파르타인은 전형적인 백인 미국인의 모습으로 그려내는 것에 경악을 금할 수 없다. 스나이더의 스파르타인들은 열등인종인 흑인과 황인, 중동인들을 상대로 싸우는 백인들이다."

     

     엔딩 크레딧이 오르는 것을 지켜보고 극장을 나온 후에, 나는 관객 중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을 봤다:

     

    이 영화에서는 굉장히 뛰어난 이란 배우들을 썼는걸? 너무나 정확하게 묘사해서 기대한 그대로라고 밖에 말할 수가 없어..  

     

     이 영화 (그리고 그 원작)에서는 "페르시아인", 특히 엘리트일 수록 흑인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것이 흥미로운 점이다. 영화의 트레일러에서는 레오니다스 왕이 페르시아의 사자를 구덩이로 차 넣으면서 “이게 스파르타다!”라고 외친다:

    http://www.youtube.com/watch?v=bCwT0TF6fa4

    <300> 트레일러

     

     이 페르시아 사절은 흑인이다. 영화 상 다른 페르시아인들 또한 흑인이다. 레오니다스 왕에게 처형당하는 페르시아의 장군 또한 흑인이다. 이 역할은 배우 타이론 벤스킨 (<Marked Man>, 1996; Sci-Fighters, 1996, etc.)이 맡았다:

     

    타이론 벤스킨

     

     흥미롭게도, 최근의 영화 <알렉산더> (콜린 패럴 주연)에서는 대부분 아랍어를 할 줄 아는 북아프리카 출신 배우들에게 “페르시아인"의 역을 맡겼다. 이 경우에도 이란인 배우는 없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헐리웃에서는 부정확한 묘사라고 해도 이런 식으로 묘사하는 것이 북미와 서유럽 시장에서  "잘 팔린다"는 생각이 분명 팽배해있다.

     

     페르시아인들이 인종적으로 흑인이었다는 어떠한 그리스, 로마 사료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 그리스와 로마의 사료는 고대의 아랍인들과 페르시아인들을 분명히 인종적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리스의 토기와 화병 등에 묘사된 이란인들은 그리스인들과 놀랄 정도로 유사하며, 다른 것은 오로지 복식과 장비 뿐이다.

     

     이 논의에서, 나는 "페르시아인" 대신 "이란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것이다. "페르시아인"은 쿠르드인과 아제리인 등 제국의 다양한 민족을 광의로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고학과 인류학에서 크세르크세스의 그리스 침공 당시 고대 이란인들의 이미지를 재구성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유물들은 얼마든지 널려있다. 다음의 그리스 화병들에서 흑인(에디오피아인)과 백인(이란인) 사이의 명백한 차이를 눈여겨 보자:

     

     

      [

    그리스의 미술에 묘사된 징병된 아프리카인(왼쪽), 그리고 정규 이란인 (right). 그리스인들에게 있어서 이란인은 명백히 백인종이었으며 아프리카인은 흑인종이었다.

    (Nick Sekunda, The Persian Army, Osprey Publishing, 1992, p.16-17).

     

     고전시대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로써, 닉 세쿤다는 크세르크세스 왕, 이란의 전사들, 그리고 아프리카 출신 병사들의 모습을 복원해냈다 :

     

    에디오피아 출신 해병(왼쪽), 이란인 전사(중앙), 이란의 창병(오른쪽)

     (Nick Sekunda, The Persian Army, Osprey Publications, 1992, Plate C; Paintings by Simon Chew). <알렉산더>와 <300>에서 묘사된 이란인들의 모습과 위의 복원그림의 인종적 차이를 눈여겨 보기 바란다. 

     

     위 그림의 정 가운데의 이란인은 오늘날 이란 사람들 사이에서 별로 눈에 띄지 않을 것이다. 후대의 로마의 사료에서도 3세기~7세기 사이의 이란인들의 모습에 대한 명확한 물증을 찾을 수 있다. 페르시아 복식을 한 세 명의 이란인들의 모습을 묘사한 라벤나의 로마시대 벽화에 주목하라:

     

    라벤나의 벽화에 묘사된 세 동방박사. 이들은 페르시아 복식을 한 이란인을 토대로 그려졌다.

     로마인들은 파르티아와 사산인들의 모습을 그려내는데 객관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인도-유럽인 (즉, "아리아인")은 이란의 고원 지대에 기원전 2,000년에는 이미 도착해 있었으며, 이들의 유전적 혈통은 오늘날 이란인들과 이란어를 하는 근동의 쿠르드인들, 그리고 코카서스 산맥지역과 중앙아시아에까지 명백하게 존재하고 있다. 여기서 "아리아인(Aryan)"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에 있어서 나는 지극히 조심스러운 입장에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아리아인'은 고대 이란어인 “Airya” / “Eire” 에서 유래한 것으로, '주인' 혹은 '자유인'을 의미했다. 오늘날 이와 가장 유사한 형태를 지니고 있는 유럽어는 아일랜드를 의미하는 “Eire”(에이레) 이다.

     

     역사상 이 시점에서 이란을 독특한 곳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이란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다인종-다민족-다언어 국가였다는 점이다. 인도-유럽어족이 도착하기 이전에 이미 남서쪽에 엘람인 문명히 활발하게 존재하고 있었으며, 북서쪽과 서쪽에는 만네아인과 후리아인들이 있었다. 이란어를 하는 인도-유럽어족이 도착한 이래 이들의 문화는 융합되었으며 그 이후로 계속 이란의 어떠한 도시에서라도 수많은 다른 얼굴 생김새와 언어적 유물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아프리카의 흑인들의 혈통을 지닌 이란인들도 있다. 이들은 아케메네스 시대에 페르시아만에 거주하던 에디오피아인들의 후손이다.

     

     유전학자들은 이란, 코카서스, 그리고 근동에 이르기까지 유전적 혈통연구를 진행한 바 있다. 그 중 한 예가 마틴 리쳐즈 교수 및 26명의 학자들이 투르크인, 아랍인, 그리고 이란인들을 상대로 진행한 최신 연구이다. 이란인들에 대한 연구는 대부분 이란어를 하는 쿠르드족(메데스인들의 후손)과 터키어를 하는 이란의 아제르바이젠인(메디아 아트로파테네인들의 후손)들을  상대로 진행되었다. 그 외에도 여러 오세티아인들이 연구에 포함되었다. 오세티아인은 古이란어를 사용하는 민족이다. 아르메니아인들 또한 연구에 포함되었다.

     

    결론적으로, 이란인들의 혈통은 U5 혈통이다: 현대 유럽인들에게 흔한 인자이며, 연구결과를 간단히 요약한다면;

     

    …대부분의 아르메니아인과 아제르바이젠인들은 유럽 및 북부 코카서스인(즉, 백인)이다(p.1263)U5 군체는 중동인들에게는 비교적 희귀한 것으로 대부분 유럽인들에게만 존재하지만, 쿠르드인, 아르메니아인, 아제르바이젠인들에게는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분명 이들이 유럽인들과 공동 조상을 갖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 이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 전혀 의외의 결과가 아니다 (p.1264)”

    [Richards et al., (2000). Tracing European founder lineages in the Near Eastern mtDNA pool. American Journal of Human Genetics, 67, p.1263-1264, 2000]

     

     이 연구에 의하면, 아랍인들과 이란인들 사이에는 전혀 유전적 연관성이 없다. 흥미롭게도, 서부 터키 지역의 투르크인들은 유럽인들의 유전자 특성 일부를 공유하고 있는데, 주로 그리스인과 유럽인들과의 혼혈이 진행된 결과이다. 한마디로, "유럽적"인 외모를 하고 있는 코카서스인들은 다인종 국가인 이란에서 전혀 특이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북부 이란, 길란州의 라슈트에서 알리 마수디가 찍은 1971년도 사진,

     이 이란인 소녀의 인종적 특성에 주목하라

    (Source: R. Tarverdi (Editor) & A. Massoudi (Art editor), The land of Kings, Tehran: Rahnama Publications, 1971, p.116).

     

    이란인들의 이러한 인종적 융합에 대해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는 놀랍도록 적다. 1980년대 초반에 잭 샤힌(“The TV Arab”, 1984) 행한 조사에서, 80%가 넘는 북미인들이 이란인들을 아랍인들의 일종으로 생각했으며 아랍어를 한다고 믿었다. 이것이야마로 "헐리웃식 페르시아인"의 이미지를 만들어낸 결정적인 단서일지도 모른다.

     

    부록: 이란인들에 대한 내재적인 편견이 헐리웃에 존재하는가?

    이란 출신의 배우나 엑스트라들에 대해 미묘한 인종주의가 헐리웃에 존재하고 있다는 걱정스러운 증거들이 있다. 그 중 한 예가 바로 척 노리스 주연의 1991년도 영화인 “The Hitman”, 일 것이다.

     

     

     

    이 영화는 1989년에서 90년 까지 캐나다의 브리티쉬 콜럼비아 주의 북부 뱅쿠버에서 로케로 촬영되었는데, 제작진은 엑스트라 오디션을 위해서 이란인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냈다. 그 이후 벌어진 일은 우스운 만큼이나 비극적이다.

     

    세트를 찾아온 이란인들은 척 노리스에게 커다란 실망이었다. 왜냐하면, "헐리웃식 페르시아인"의 이미지에 익숙해진 척 노리스에게 있어서 실제 이란인들은 너무나 '백인'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북부 이란지역(길란, 마잔다란, 셈난, 탈레쉬)에서는 물론, 북서부(아제르바이젠), 서부(루르스, 쿠르드), 이스파한과 테헤란 등지에서 왔는데 이들의 모습이 근처 슈퍼에서 볼 수 있을만한 “보통 미국인"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제작진은 눈에 띌 정도로 동요했다. 이 오디션에 참가했던 한 이란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요청에 의해 신원은 밝히지 않겟다):

     

    “…제작자들이 세트로 와서는 우리를 보고 눈에 띄게 실망을 했습니다. 우리들 중에는 투르크적 혈통을 지닌 마샤디 사람들도 있었고, 북부와 서부에서 온 금발의 발루키 사람들도 있었죠. 우리들을 보고는 척 노리스와 제작진이, '대체 이 백인들이 여기 왜 있는거야? 난 이란인 엑스트라를 고용한다고 했지 백인 엑스트라를 원하는게 아니란 말야. 관객들은 진짜 이란인들을 보고 싶어 한다고.'라고 말했어요…”

     

     그래서 엑스트라를 모집한 담당자는 이 "백인" 이란인들이 이란 북부와 북서부, 테헤란 지역 사람들이라고 설명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척 노리스와 제작자들은 세트에서 이 '백인'들을 내보내라고 요구했다. 잭 샤힌에 따르면, 아랍인 배우를 모집하는 중에서도 레바논 출신의 아랍인들에게 이와 비슷한 일이 종종 발생한다고 한다. 확실히 헐리웃에는 인간적 편견이 만연해 있다. 이와 같은 편견은 그 '역사물'들에서 교육적인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하곤 한다. 결국, 그러한 편견은 이러한 모습의 '크세르크세스'를 만들어내기에 이르른 것이다:

     

     

     

    만약 "페르시아인"에 대한 <300>의 묘사가 '픽션'이라면, 크세르크세스에 대한 이러한 묘사는 '창작성'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할만하다. 실제 크세르크세스는 어떤 모습이었을지의 고증의 과정에 대해 궁금한 사람은 다니엘 푸르케살리의 다음 기사를 참고하기 바란다:

     

    <300> : 순수한 판타지

    http://www.payvand.com/news/07/mar/1157.html

     

    다니엘 푸르케살리가 지적한 바와 같이, 영화에서 묘사된 크세르크세스는 그래픽 노벨의 그것을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다. 하지만 역사적인 크세르크세스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아래는 페르세폴리스에 있는 그의 부조이다:

     

     

    크세르크세스의 부조

     

    아래는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당시의 크세르크세스의 모습을 고증한 세쿤다 교수의 그림이다.

     

    궁정의 환관 (좌), 샤 크세르크세스(중앙), 근위병 (우)

     (Nick Sekunda, The Persian Army, Osprey Publications, 1992, Plate B; Paintings by Simon Chew).

     

    아래는, 크세르크세스가 아직 아버지인 다리우스 대제의 황태자로 있었을 때의 모습을 그린 고전기 그리스의 묘사이다:

     

    BC 490년, 고문들과 그리스 침공에 대해 상의하는 다리우스 대제 (윗 열 중앙에 앉아있는 인물). 태자 크세르크세스는 윗 열 오른쪽에서 두 번째 이다.

     

    프랭크 밀러와 워너 브라더스가 묘사한 크세르크세스의 모습은 역사의 그것과는 천지차이로 다르다. 캐나다의 토론토 대학의 그리스사가인 에프라임 라이틀은 <300>에서 묘사된 페르시아인과 크세르크세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300>의 페르시아인들은 몰역사적인 괴물들이다. 크세르크세스는 추물은 아니라고 해도 2 미터는 족히 넘는 키에 전신 피어싱을 하고 야한 복장으로 있다. 크세르크세스도 따로 추물로 그려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 그는 동성애자라는 분위기가 영화에 만연해 있는데, <300>의 세계관에서는 동성애자라는 것 만으로 이미 충분히 추물일테니까 말이다."

     [Professor Ephraim Lytle, “Sparta? No. This is Madness”, The Toronto Sun, March 11, 2007]

     

     

    (7) 고대 이란의 여성들에 대해

     

     나는 '페드람'이라는 사람으로부터 이 논의를 적절하게 요약할 수 있을 만한 E-메일을 받게 되었다:

     

     "혹시 영화 보셨나요? 페르시아 여자들에게 너무나 모욕적이라고 하던데요..."

     

    확실히, <300>에 등장하는 이란 여자들은 '골빈' 하렘 여자들로 그려지고 있다. 이것은 트레일러를 보면 극명하다:

    http://www.youtube.com/watch?v=bCwT0TF6fa4

     

    이러한 묘사는 역사적으로 부정확한 것은 물론이고, 비단 이란인들 뿐만이 아니라 모든 여성들에게 모욕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또한 역사적으로 이란에서의 여성들의 지위에 대한 무지로 인해 퍼진 편견 때문이 아닐까 싶다.

     

    고대 이란의 여성들은 제관, 전사, 지도자, 그리고 교육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러한 역할을 자세하게 파고 드는 것은 힘들지만, 몇 가지만 짚고 넘어가면 독자들의 관심을 이끌어내기는 충분할 것이라 생각한다.

     

    로마의 사료에는 사산朝 시대 이란인 기병대에 있는 여성들에 대한 기록이 분명하게 남아있다:

     

     “페르시아군에는 남자들 처럼 옷을 입고 무장한 여성들이 있다…”

    [Zonaras (XII, 23, 595, 7-596, 9)]

     

     

    King 바르발리소스에서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항복을 받아들이는 샤푸르. 왼쪽에 여성 기병장교가 보인다. 그 옆에 수레나스 일족의 귀족이 서있다(높은 모자를 쓴 사람),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무릎을 꿇고 있으며, 그 옆에는 로마의 원로원 의원이 있다(토가). 샤푸르 1세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오른쪽)

     (Farrokh, Elite Sassanian Cavalry, 2005, Plate A; 앵거스 맥브라이드 作).

     

     이란의 여성들은 사산朝 페르시아의 멸망 이후에 7세기에는 우마이야와 압바스朝 칼리프군의 침략에 대항하여 저항군을 조직했다. 그 주요 인물이었던 아프라닉은 피란 장군의 딸이었으며, 아자데는 북부 이란의 길란-마잔다란 지역 저항군의 지도자였고, 아제르바이젠에서는 反-압바스朝 저항군 지도자 바박 쿠람딘의 아내 바누가 남편의 사후 수 십년 동안 저항군을 이끌었다.

    (Farrokh, Shadows in the Desert, 2007, Chapters 4-5).

     

    이란의 여성들은 사산朝의 멸망 이후에도 이처럼 중요한 역할을 계속 해왔는데, 그 중 하나가 레이의 여총독이다:

     

    레이의 여성 총독 (Farrokh, Elite Sassanian cavalry, 2005, p.60)

     

     이러한 남녀평등의 개념은 조로아스터교로부터 기인한 것이었다. 조로아스터교의 전설에서, 조로아스터는 그의 딸 프레이네의에게 누구를 사귀고 결혼할 것인지는 여자의 마음에 달려있다고 말해준다.

     

     

    (8) “선"과 "악"의 대결

     

     마지막으로 짧게 짚고 넘어가보자. "악"한 페르시아인을 그려내는 한 장면에서, 레오니다스 왕은 죽어가는 소년을 품에 안는다. 여기서 소년은 "그들은 어둠으로부터 왔어요..."라고 말을 한다. 페르시아 = 악 임은 너무나도 선명하게 드러나있다.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한 반론은 이 영화가 단지 무해한 만화의 장면을 그대로 실사로 연출하고 있다는 것 뿐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세계의 각 민족에게 있어서, 자신의 선조를 괴물, 원시인, 변태, 악마로 그려내는 작품을 보여준다면 어떤 반응을 할까? 영화제작자들은, 만약 다른 민족의 선조를 그런 식으로 그려내려고 했다면 망설였을게 분명하다. 만약 내가 틀린 것이 아니라면, 이란인들을 괴물, 원시인, 변태, 악마로 그려내는 것은 "예술적 엔터테인먼트"에 불과하지만 다른 국적의 사람들은 그러한 "예술"에서 제외된다면, 그것은 "증오범죄" 만큼이나 "경악스럽고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것"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

     

     엔터테인먼트와 돈벌이를 목적으로 특정 인종적/민족적 집단을 음성적으로 그려내는 것은 위험할 정도로 무지하고 무책임한 일이다. 이 비평에서 앞서 언급한 바 있지만, 관객들과 미디어에서는 (특히 영어권에서) 벌써부터 이 작품의 '역사적' 의의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은 오늘날 이탈리아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에게 보다는 북미와 유럽권 사람들에게 보다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고 있다.  <300>의 상업적 성공은 그러한 이윤을 위해 부정적 감정에 일부러 주목한 것이다.

     

    여기서 나는 조로아스터의 가르침을 상기하면서  마무리를 시도하고자 한다. 조로아스터는 선과 악은 인종, 민족, 그리고 종교와는 무관하게 모든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선과 악 중 어느 것을 택할지에 대한 선택이 주어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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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문제들을 심도있게 논의하면서, 이 글을 읽는 독자라면 인간의 역사에 대한 다면적이고 유기적인 본질에 대해 보다 깊은 관심을 가질 수 있었으면 한다. 민족, 문화, 그리고 인간은 서로 공생관계를 통해 얽혀있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들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만들어냈으며 오늘날 자신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 기술의 진보와 발전을 통해 서로의 간극이 좁아지면 좁아질 수록 우리는 역사에 대한 이해를 깊이 해야만 한다. "동"과 "서"의 대립을 통해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전체로써 인간과 문명에 대해 바라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 카베 파로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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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베 파로크 박사는 “Sassanian Cavalry” (Osprey Publishing, 2005)의 저자이다. 그는 브리티쉬 콜럼비아 대학교는 물론 스탠포드 대학교에서 강연을 한 바 있으며 고대 이란의 전문가로 히스토리 채널에도 등장한 바 있다. 파로크 박사는 현재 이란어협회, 페르시아만 보존협회, 스탠포드의 WAIS (World Association of International Studies) 등의 회원이다. 그의 최신 저서, “Shadows in the Desert: Persia at War” 는 Osprey 출판사에서 2007년 4월 말에 발간될 계획이다. 

     

    주문은:

    http://www.ospreypublishing.com/title_detail.php/title=T1087


     

     

     

    참고서적

     

    Abbott, J. (1902). Cyrus the Great. New York and London: Harper & Brothers

    Boyce, M. (1987). Zoroastrianism: A shadowy but Powerful Presence in the Judaeo-Christian World. London: Dr. Williams’s Trust.

    Curtis, J. (2000). Ancient Persia. London: British Museum.

    Delebeque, E., & Bizos, M. (1971-1978). Cyropédie. Texte établi et traduit par Marcel Bizos. Paris : Les Belles Lettres.

    Farrokh, K. (2007). Shadows in the Desert: Persia at War. London: Osprey Publishing Ltd.

    Frye, R.N. (1962). The Heritage of Persia. London: Weidenfeld & Nicolson.

    Frye, R.N. (1984). History of Ancient Iran. Munich: C.H. Beck.

    Moorey, P.R.S. (1975). Ancient Iran. Oxford: Ashmolean Museum.

    Oxtoby, W.G. (1973). Ancient Iran and Zoroastrianism in Festschriften : An Index. Waterloo, Ontario: Council on the Study of Religion, Executive Office, Waterloo Lutheran University; Shiraz, Iran: Asia Institute of Pahlavi University.

    Spatari. N. (2003).Calabria, L'enigma Delle Arti Asittite: Nella Calabria Ultramediterranea. Italy: MUSABA.

    Wiesehofer, J. (1996). Ancient Persia: from 550 BC to 650 AD. London and New York: IB Tauris. 

    Cartledge, P. (2004). The Spartans. Random House

    Cook, J.M. (1962). The Greeks in Ionia and the East.  London: Thames & Hudson.

    Farrokh, K. (2005). Elite Sassanian Cavalry. London: Osprey Publishing Ltd.

    Farrokh, K. (2007). Shadows in the Desert: Persia at War. London: Osprey Publishing Ltd.

    Head, D. (1992). The Achaemenid Persian Army. Stockport: Montvert Publications.

    Holland, T. (2006). Persian Fire: The First World Empire and the Battle for the West. Doubleday Publishing.

    Khorasani, M.M. (2006).Arms and Armor from Iran: The Bronze Age to end of the Qajar Period. Legat Verlag.

    Sekunda, N. (1992). The Persian Army. London: Osprey Publishing Ltd.

    Wallinga, H.T. (2005). Xerxes' Greek Adventure: The Naval Perspective. Leiden Brill Academic Publishers.

    Ewen, S. & Ewen, E. (2006). Typecasting: On the Arts and Sciences of Human Inequality. New York: Seven Stories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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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haheen, J. (1984). The TV Arab.  Bowling green, Ohio: Bowling Green State University Popular Press.

    McChesney, R.W. (1997). Corporate Media and the Threat to Democracy. New York: Seven Stories Press.

    See also on-line posting by Darius Kadivar:

    Sword and Sandals: Films about Ancient Persia

    http://www.iranian.com/DariusKadivar/2003/January/Bigger/index.html

    Interested readers may consult the following sources for further reading:

    Brosius, M. (1998). Women in Ancient Persia: 559-333 BC. Oxford: Clarendon Press.

    Davis-Kimball, J. (2002). Warrior Women: An Archaeologist's Search for History's Hidden Heroines. Clayton, Victoria: Warner Books.

    Farrokh, K. (2005). Elite Sassanian Cavalry. London: Osprey Publishing Ltd.

    Farrokh, K. (2007). Shadows in the Desert: Persia at War. London: Osprey Publishing Ltd.

    Winchester, B.P.P. (1930). The heroines of ancient Persia: Stories Retold from the Shahnama of Firdausi.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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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 리스트
    • 작성자아하하하 | 작성시간 07.07.01 좋은 글 감사합니다. 대충 기사 보고 알고 있었지만 요새 무한도전의 하하씨가 스파르타라고 외치는게 생각나네요 문화콘텐츠의 침입은 역시 무섭군요
    • 작성자메디치 | 작성시간 08.05.08 좋은글이네요 퍼갈게요...^^
    • 작성자deleosui | 작성시간 09.03.08 꼭 골빈 미국인이나, 나치주의자, 게르만추종하는 한국인들은 고대그리스나 로마하면 금발머리백인이라며 우기더라구요. 역시나 요새 헐리웃영화의 영향이 큰듯. 전 알렉산더 영화에서 콜린파렐이 금발머리였던게 영화감상내내 상당히 거슬렸는데ㅋ밝은금빛이라고 했지 금발이라고 한적은 없는데 골빈감독이 지멋대로 영화망쳐놓은듯ㅋ
    • 작성자㈜로마의후예™ | 작성시간 09.03.21 우와! 이 글 좋습니다. 퍼가겠습니다. :-)
    • 작성자Prinz Eugen | 작성시간 14.03.30 이글을 이제야 보다니... 정말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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