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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書評)I-(1)『배반당한 베트남전쟁』
『배반당한 베트남전쟁』(도서출판 알파, 2002), pp. 354, 정가 12,000원.
이 책은 베트콩 즉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법무장관을 지냈으며 2차 대전 종전후 인도차이나전쟁과 미국이 관여한 베트남전쟁을 통하여남베트남의 독립과 평화를 얻기 위한 투쟁에 평생을 바친 튠뉴탄, 그가 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 북베트남 공산당에 의해 탄압을 당한 과정을 생생한 증언으로 엮은 고발장이다.
저자 토모다 세기는 1935년 동경에서 태어나 와세다대학 불문과를 졸업하고 도쿄신문사와 산케이신문 외신부에 근무했다. 1967년 2월부터 다음 해 3월까지 사이공 특파원으로 근무했으며, 1974년부터 78년까지 파리특파원이었다. 번역자 양창식씨는 육군사관학교 10기를 졸업하고 장군으로 예편했으며, 국회에 3선의원을 지냈다. 민정당과 민자당에서 당무위원을 지냈으며, 현재 베트남참전 전우회 부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자유지성300인회」를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는 군의 원로이다.
이 책은 베트남전쟁에 해방전선의 회원으로 참가한 남베트남 출신 튠뉴탄의 증언을 엮은 수기이다. 민족의 독립에 인생의 절반을 건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의 전 각료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공산당 지도부의 모순과 변질, 권력과 억압을 고발하여 베트남전쟁의 승리와 외세로부터의 해방의 허구와 공산당의 그 진정한 정체를 증언을 통해 고발하고 있다.
II
탄뉴탄은 1923년 11월 14일, 사이공에서 태어났다. 1945년 8월 2차 대전의 종전과 더불어 베트남독립의 열망이 모든 베트남인들의 마음을 휘어잡았다. 툰도 그 중 한사람이었다. 대전 중 그는 하노이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이 때 툰씨는 활동가로서 싹을 보여주었는데, 데모와 학생집회에는 빠짐없이 참석하였다. 45년 8월 사이공으로 돌아왔을 때, 청년운동에 뛰어들었다. 연합군이 상륙했고, 일본군이 무장해제 되었다. 그러나 북부에 들어온 것은 중국의 국민당군대였고, 남부에는 영연방군이 프랑스군을 끌고 들어왔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프랑스군은 다시 베트남을 정복하고자 했다. 그리고 베트남의 저항운동이 시작되었다.
탄씨의 아버지는 아들이 혁명가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프랑스에 유학을 보내었다. 파리에서 탄씨는 호치민을 만나는 귀중한 경험을 가지게 된다. 탄씨는 면담 끝에 “공산주의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다”고 말하자, 호치민은 탄씨에게 프랑스 공산당의 주요 인물들을 소개해 주면서 공산주의를 배우도록 권유했다. 그리하여 탄은 그들을 통해 공산주의에 관한 수업을 받게 되었다. 탄씨는 프랑스시절부터 공산주의운동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공산주의 운동이 식민지와 억압받는 민족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고 있었고, 사회정의를 위해서도 투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탄씨는 호치민을 “직업적 공산주의자이기는 애국자”라고 생각했고(p.69), 그는 호치민에 대한 그런 믿음은 평생 동안 간직했다.
1951년 사이공에 돌아온 탄씨는 아버지덕분에 징병을 면하게 되었다. 메콩 델타의 캄보디아 국경 근처의 중학교 교사 자리를 얻었다. 그는 그 지방의 레지스탕스와 손을 잡게 되었고, 지식인 공작임무를 부여받았다. 54년부터 56년까지 징집을 피하게 위해 다시 탄씨의 아버지는 그를 프랑스로 보내었다. 54년 7월에 제네바협정으로 인도차이나 전쟁은 끝났다.
제네바협정은 대불전쟁의 종말을 고하는 계기가 되었으나,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反共 베트남의 보호자가 프랑스로부터 미국으로 바뀌는 분기점이 되기도 했다. 제네바 협정이후 남쪽에 남아있던 레지스탕스 대부분은 북쪽으로 되돌아갔다(약 10만명으로 추산됨). 그런데 남쪽에서 북쪽으로 되돌아간 자는 그 후 북쪽에서 하노이정부에 의해 조직적으로 훈련을 받고 남쪽으로의 침입요원이 되었다. 탄이 파리에서 돌아왔을 때, 사이공에서는 이미 고딘 디엠 정권이 확고하게 권력의 기반을 강화하고 있었다.
탄은 1956년 디엠 정부에 들어오라는 친구의 권유를 뿌리친다. 그 거절의 이유는 디엠 정부가 미국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미국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는 점, 디엠 자신이 만다린(중국 봉건체제의 高官을 치칭함) 출신의 가톨릭 교도로서 미국 스펠만 추기경과 미국정부에 의해 정권의 자리에 앉게 된 인물이라는 점 등이었다. 탄은 “고딘디엠 정부는 진짜로 독립된 정부가 아니다”라고 결론지어, 철저하게 디엠 정권을 불신했다.
III
1960년 12월 사이공 근교에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이 결성되었다. 이것이 베트남전쟁의 개시로 보아야 할 것이다. 탄씨 일행들은 옛 레지스탕스와 회원과 남베트남의 모든 反 디엠 세력을 한 덩어리로 뭉쳐서 종교적으로나 이념적인 차이 여부를 불문에 부치고 반정부전선을 형성하려고 시도했다. 해방 전선의 의장은 변호사 출신인 쿠엔후토에게 자리를 맡겼는데, 그는 원래 1954년 제네바협정후 협정의 준수를 슬로건으로 한 운동으로서 남쪽에서 생겨난 평화옹호운동의 의장이었다. 디엠정부는 쿠엔후토를 감금시켰으나, 게릴라부대는 그를 구출하는데 성공했다. 해방전선의 회의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보안문제였다. 탄씨는 해방전선의 공식명단에서도 주도 면밀하게 삭제되어 있었다.
베트남공산화이후 역사가들에게 남는 가장 큰 의문점은 하노이와 남베트남의 해방 전선과의 실제적 관계는 어떠했는가에 있다. 미국을 위시한 서방측에게 해방전선이란 북측이 남측을 침략하기 위해 만든 하노이의 괴뢰 즉 ‘꼭두각시’였나? 아니면 해방전선은 주체성을 가진 존재로서 하노이는 단지 이를 지원만 했을 뿐이라는 하노이의 말은 사실이었나? 75년 베트남의 해방이후, 그토록 쉽게 허망하게 남쪽이 북쪽의 지배하게 들어간 이유는 무엇인가? 해방 전선이 주체성을 가지고 있었다면 어떻게 왜 이를 저지하지 못했는가?
탄씨의 증언에 의하면, “서방측이 저지를 가장 큰 잘못은 해방전선을 공산당의 단순한 ‘도구’로 본 것이다. 틀림없이 공산당의 주도권은 존재했다. 그러나 이 주도권은 (남쪽의) 모든 애국자의 열망에 응답하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공산당만으로는 이렇게 광범위한 민족해방전선을 만들어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호치민의 공산당은 철저한 현실주의 노선을 걸었기에, 어디까지나 국민들의 요구를 흡수하고, 그 요구에 따르도록 행동하는 것이었다. 공산당이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잡다한 사회계층 그리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해방 전선에 결집시킬 수 있었다”(pp. 64-65).
미국방성 보고서에 의하면, 하노이가 남쪽의 반란사태를 주목하고 정식으로 개입을 하겠다고 비밀리에 선언한 시점은 1959년 5월의 노동당(공산당) 제2기 중앙위원회 제15회 총회 때였다. 이 총회야말로 베트남민주공화국(북베트남, 월맹)이 남쪽에 대한 개입의 출발점이었으며, ‘정치투쟁’에서 ‘군사투쟁’으로의 전환시킨 모임이었다. 그전까지는 국내건설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고 한다. 54년 제네바협정이후 베트남의 공산당 조직은 약 5천내지 1만명 수준에서 골격이 유지되었으나, 정치투쟁에 국한하였다. 디엠정권은 “남쪽의 공산주의자를 거의 소탕하는 데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탄씨와 같은 해방전선에서 베트콩으로 일한 인물들은 민족문제와 이데올로기 문제를 어떻게 생각했는가였다. 탄씨에 의하면, “당시(64년 초)에는 이데올로기 문제는 일체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아니했다. 중요한 것은 오직 단 한가지 민족의 해방과 조국의 자유였다.” “우선은 민족주의 단계를 거쳐야만 했다. 나는 공산당도 조국의 이익을 이데올로기에 우선시키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p.67).
해방전선의 회원으로는 유달리 사회의 상층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지식인이나 상공업자 등이다. 해외 유학출신자도 있었다. 부르주아 출신으로 사회적으로 안정적 지위를 갖고 있는 자가 많았다. 그래도 가장 활동적인 그룹은 좌익분자들이었다. 그 핵심은 공산당원으로 그들은 1962년 1월에 노동당의 ‘남쪽에서의 나뭇가지’인 인민혁명당을 결성했다.
당시 공산당(베트남 노동당)은 민족주의 전술을 채택하고 있었다. 호치민은 남쪽은 ‘민주적 민족주의’의 단계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즉 민주민족혁명을 최대의 목적으로 삼았으며 사회주의 건설의 단계는 차후로 미루었다. 남쪽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보다 조국의 독립과 점진적인 통일, 그리고 남쪽의 자치였다. 남쪽 사람들은 지역의 특수성을 존중한 베트남연방과 같은 것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p.67-68)
인민혁명당은 해방전선의 핵심이었다. 탄씨는 1964년에 인민혁명당에 입당을 권유받고 입당에 동의했다. 인민혁명당에는 정통 공산당원 이외에 지식인 레지스탕스 회원과 디엠 정권의 탄압에 쫒기는 반정부 애국자들이 결집하고 있었다. 탄씨는 인민혁명당이 “민족해방을 최우선의 목표로 하는 당으로서 이데올로기를 우선시킬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하노이의 전략은 남쪽의 민족주의와 合致한다는 신뢰감을 끈임 없이 유지했다는 점이다. 사이공의 함락이후 미국과 사이공이라는 적이 사라지자 해방전선의 비공산주의자들이 하노이의 공산당에 신뢰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신뢰감이 원인이 되어 그렇게도 쉽게 북쪽의 지배를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IV
탄씨는 反 디엠 쿠데타의 진상에 대해서 놀라운 증언을 하고 있다. 1963년 11월의 반 디엠 쿠데타에서 돈 반 민 장군들과 협력하여 쿠데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가톨릭계의 후안 곡 타오 대령은 실제 해방전선의 비밀공작원이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분명히 증언했다. 이것은 해방전선이 얼마나 사이공 정권의 깊이 그 조직망을 넓히고 공작의 손을 뻗쳤나를 보여주는 극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1964년 12월, 미국에서 돌아온 타오 대령은 지하에 숨어서 쿠엔 칸 타도를 위한 쿠데타 음모를 했다. 1965년 12월, 타오 대령은 약 50대의 전차와 수개 대대를 지휘하여 사이공을 공격했으나, 실패하였다. 그 후 타오 대령은 군법회의 결석재판에 회부되어 사형판결을 받았다. 타오는 군 지도부에서 해방전선과 비밀리에 연결을 갖고 있었던 장교였다. 즉 해방전선은 창립이후 전력을 다하여 디엠정권의 기반을 허물어 버리는데 진력을 다해 왔다는 점이다. 대중을 동원하여 디엠 정권에 반대하도록 만들고, 디엠 정권의 갖가지 잘못을 이용하여 이 정권을 불신하도록 선동했다.
여기에 디엠 정권의 부정부패가 해방전선의 노력을 도와주었다는 사실이다. 해방전선의 회원은 베트남 주민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존재했다. 해방전선의 공작원이 사회의 도처에 박혀있다고 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후안 곡 타오 대령이었다. 어쨌든 디엠에 대한 쿠데타와 그 후 일어난 쿠엔 칸에 대한 쿠데타는 사이공 측의 혼란과 내부 대립을 더욱 격화시켜서 해방전선에 유리한 역학관계를 조성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타오의 공헌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1958년까지 디엠 정권은 남 베트남에서 공산당을 적발하여 거의 조직을 괴멸시켰다. 그 때 괴멸직전의 레지스탕스를 살려 재집결시키고 군대를 군대조직을 탄생시킨 인물이 후안 곡 타오였다. 1959년 타오는 디엠 정권으로부터 메콘 델타의 벤츄성의 성장(省長)으로 임명되었다. 그 때 성장은 절대 권력을 갖고 있었다. 타오는 아무도 모르게 벤츄성에 옛 레지스탕스 회원들을 결집시켜서 그 결과 일제봉기운동으로 전화하는 기초를 만들었다. 결론적으로 탄씨는 타오 대령을 “남베트남에서 가장 뛰어난 첩보장교이자 스파이”라고 평가한다.
60년대 중반기에 오면서, 미국의 베트남 참전이 본격화되자 북베트남과 해방전선은 이에 대응하여 새로운 전략을 모색했다. 북베트남은 대규모의 전투에 대비하고, 해방전선은 미국의 개입에 반대하는 대내외의 여론조성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탄씨는 사이공에서 평화운동의 조직에 착수하게 된다. 당시 이미 해방전선은 하노이의 동의를 얻어 사이공에 연합정권을 수립할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디엠후의 사이공정권과 해방전선이 연합하여 정부를 만든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미국의 전면 개입과 북쪽으로 일제 봉기, 전면공세로의 전환에는 아직 시기가 무르익지 않았다. 그래서 침략자 미국에 대한 민족주의를 총동원하여 민중에게 호소하여 맞선다는 전략을 수립했다. 해외에서는 국제여론을 동원하고, 국내 군사 면에서는 무장세력을 소부대 전투단위로 분산시켜 미국군에 인민전쟁의 방법에 의거하여 대항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60년대 중반, 해방전선은 남베트남의 대부분, 특히 지방에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정도로 커졌다. 탄씨와 해방전선은 테러전술을 구사하면서 지방의 행정당국자들을 공포에 몰아넣었다. 주민들이 혐오하는 촌장들을 유괴 납치했다. 또 사이공 정부군의 초소를 포위하여 군의 사기를 떨어뜨렸고, 사이공 병사들에게 탈주를 계속 선동하였다. 사이공 정부의 간판인 전략촌을 파괴하여 각지의 행정기구를 괴멸시켰다. 해방전선은 처음에는 미국과 군사적으로는 정면 대결을 피했다.
그러나 정치면에서 민중을 동원하여 미국의 개입을 반대하였다. 도시에서의 투쟁을 중요시하고, 학생, 불교도, 상인들을 독려하여 평화를 부르짖도록 했으며 민족자결을 요구하도록 했다. 미국 자동차도 불사르기도 했다. 민중의 반미감정을 불타게 선동하여 침략자 미국에 대한 증오심을 북돋았다. 탄씨는 64년 변호사들과 함께 <남베트남 민족자결운동>을 설립하였는데, 그 목적은 미국의 개입을 저지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65년 2월, 사이공 정부는 탄씨의 평화운동을 탄압하기 위해서 탄씨를 체포했다. 그러나 사이공 정부는 탄씨가 해방전선의 회원이라는 점을 알지 못했다. 이 때 붙잡힌 대부분의 평화운동 지도자들은 사이공 정권내에 친척이나 친구 등 연결고리가 있어서 가혹하게 취급당하지는 않았다. 탄씨의 형량은 금고 2개월 그나마도 집행유예였다. 해방전선의 투쟁에는 공개적 활동과 비공개적 활동의 두 가지가 있었다. 공개적 활동은 앞서의 평화운동처럼 유명 인사들을 내세워 행하는 도시투쟁이 전형적인 것이다. 비공개적 활동의 경우, 사회적으로 위장하고 활동하는 것과 도시 투쟁과 해방전선 지도부간의 연락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65년 키 정권이 등장하기 전후로 해서 사이공 등 여러 대도시에서 해방전선 측의 테러 공세가 갑자기 강화되었다. 당시의 대형테러 사건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964/12/24, 사이공 미군장교숙소 폭파 (사상자 76명).
-1965/2/10, 퀴논 미군숙소 폭파(사상자 40명). 3/30, 사이공 미대사관 폭파(사상자 208명). 6/16, 사이공 탄손누트공항 건물 폭파. 6/25, 사이공 수상 레스토랑 “미칸” 폭파(사상자 122명). 12/4, 사이공 미군숙소 메트로폴 호텔 폭파(사상자 155명).
-1966/4/1, 사이공 미군숙소 빅토리아호텔 폭파(사상자 155명). 4/13, 탄손누트공항 포격(사상자 162명, 항공기 28기 파괴). 11/1, 사이공의 디엠 정권 타도 기념식장에서 포격(사상자 28명 이상).
이 일련의 사이공 테러는 국제여론과 미국여론에 조준한 것으로 그 노린 바대로 미국 국내의 反戰 기운에 불을 붙였다. 1967년 탄씨는 두 번째로 체포되었는데, 이번에는 쉽게 풀려나지 못했다. 해방전선과의 비밀 연락책이 붙잡혀서 모든 것을 불었기 때문이다. 한두 달에 걸쳐, 탄씨는 물고문과 전기고문까지 당하게 된다. 그런데 구사일생으로 해방전선에서 포로가 된 미군장교와 교환하게 되면서 풀려나게 되었다. 탄씨는 그 후 7년 동안 정글의 해방전선 본거지에서 사이공 함락까지 7년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V
교훈은 다음과 같다.
1. 민족이나 이념이냐의 논의에서 해방전선의 회원들과 탄씨는 공산당원들이 민족이 이데올로기보다 우선적으로 고려할 것이라는 착각에 빠졌다.
2. 남베트남인들의 프랑스식민지 경험에서 오는 외세에 대한 격렬한 민족감정을 하노이 공산당은 철저히 이용하여 반미운동과 평화운동으로 활용했다.
3. 미국은 베트남인들의 민족주의 감정을 과소평가했고, 또 하노이의 뿌리 깊은 대남공작은 물론 해방전선과 하노이와의 연대의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4. 54년 제네바협정으로 북으로 돌아간 사람들의 경우, 해방전선과 하노이 측은 이들을 철저하게 포섭하여 남베트남 권력층으로 접선을 시도하려 했다.
5. 50만명의 미군이 참전한 미국의 베트남전쟁은 방송의 무차별 보도와 미국내 反戰여론에서 구멍이 뚫려서 결국 무너지게 되었다. 6. 베트남에서 벌어진 여러 시민단체들의 평화운동 배후에는 하노이와 해방전선의 배후 지령이 있었다는 점이다.
서평(書評)II-(2)
토모다 세기(友田 錫) 저, 양 창식 譯 『배반당한 베트남전쟁』
I. 정글속으로 간 튠 뉴탄
1968년 포로교환으로 극적으로 석방된 튠 뉴탄은 베트남 국경선 근처의 빈 주원성 고무농장에 있는 COSVN으로 향했다. COSVN는 영어로 Central Office for South Vietnam인데, 남베트남중앙국이라고 직역할 수 있다. 하노이는 이 존재를 공식적으로 밝힌 시점은 1975년 4월 30일 사이공 함락후의 일이다. 그 정식명칭은 “베트남노동당 남부위원회”라고 불리었으며 위원장은 정치국원인 후안 훈이었다. COSVN은 하노이의 통제를 받는 남베트남에서의 정치, 군사작전의 총사령부라고 볼 수 있는 데, 키신저는 회고록에서 “남부에서의 모든 작전을 지휘하는 공산측 사령부”라고 썼다. COSVN은 하나의 고정된 건물이 아니라 시종 여러 개의 새로운 판잣집을 만들면서 이동하고 있었다. 미군 폭격의 위험성 때문이었다. 탄씨는 COSVN에서 “민족민주평화세력연맹”의 창립에 참가하게 된다. 원래 이 조직은 테트공세 이전에 결성할 예정이었고, 만약 테트공세가 성공하여, 사이공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다면, 사이공 정권을 대신하여 평화세력연맹이 잠정 정부를 수립하려는 계획이었다. 테트공세는 북베트남과 해방전선이 남베트남내의 총병력 24만명 중 8만4천명을 투입시켰다. 테트공세에서 북쪽 정규군이 참가했다는 등의 이야기는 미군의 선전에 의한 조작된 이야기라고 탄씨는 증언한다.
II. 테트공세의 의미:
해방전선의 전술적 패배, 그러나 전략적 승리
평화세력연맹의 회원은 사이공의 지식인이나 유명인사 그리고 여러 사회계층의 대표 중에서 선발되었다. 탄씨 일행이 가장 피하려 한 점은 이 잠정정부가 국제여론 특히 미국 여론으로부터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잠정정부라는 딱지였다. 그러므로 누가 보더라도 공산주의자가 아닌 인물들로 선발되었다. 69년 6월에는 임시혁명정부가 수립되었다. 미국측이 4자회담을 수용한 단계에서 처음으로 임시혁명정부를 만들려는 구상을 하게 되었다. 해방전선과 평화세력연맹은 68년 11월 합동회의를 통해서 임시혁명정부의 수립을 논의한다. 테트공세는 군사적으로 실패했지만, 존슨행정부는 웨스트몰랜드 장군을 교체하였고, 교섭에 응하게 되었다. 그해 5월부터 미국과 북베트남간의 양자회담은 69년 1월부터 해방전선과 사이공 정부와의 각 대표를 참가시킨 4자회담으로 발전하였다. 1968년 가을 공화당후보 닉슨은 베트남전쟁의 종결을 선거공약으로 내세웠다. 69년 7월 닉슨은 괌에서 선언한 ‘닉슨독트린’을 통해서 동남아시아 모든 지역에서 미군의 철수를 구체화시켰다. 닉슨은 그해 2만5천명의 철수를 발표하였다.
테트공세의 1차적 목적은 사이공 정권의 붕괴를 노렸지만, 이것이 실패로 끝나더라도 정치 심리면에서 성과를 올리려는 것이었다. 실제로 테트는 민중의 공감대를 테스트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으며, 지방에서는 민중봉기가 일어났으나, 사이공에서 민중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시민들의 해방전선에 대한 우호적 공감대가 형성되었음을 확인했다.
탄씨의 증언에 의하면, 테트공세 이후 곧바로 북베트남 정규군이 남쪽으로 투입되었다는 견해는 옳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1971년 2월부터 시작된 사이공 군의 라오스 침공작전에서부터이다. 본격적으로 북쪽 정규군이 전투에 참가한 것은 1972년부터이다. 이때 처음으로 남베트남 북부전선에서 북베트남 정규군이 투입되어 그 후 북부에서는 통상 전쟁을 하는 북베트남 정규군, 남부에서는 게릴라전을 주체로 하는 해방전선군이라는 작전의 성격과 범위에 역할 분담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밝혔다. 북쪽 정규군이 남베트남 북부에서의 작전을 담당하고, 해방전선의 부대는 남부에서 자유로이 작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책임분담이 이루어졌다. 이때부터 남베트남 전 지역에서의 군사지휘권이 북쪽 정규군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이런 방침이 수립된 것, 정규전과 게릴라전을 배합시키는 전략은 1972년이 아니라 훨씬 이전, 1965년 미군의 대량개입이 시작된 시점이후부터의 일이다. 즉 모택동의 인민전쟁방식에다가 미군의 대량개입으로 소련형의 정규전쟁 방식이 가미되어 전략상의 적절한 배합과 균형이 이루어진 것이다.
탄씨와 해방전선의 전략은 “교섭해 가며 싸운다”는 방식이었다. 한쪽에서는 교섭을 하고, 또 한쪽에서는 싸움을 계속한다. 즉 한편에서는 미국을 협상테이블로 밀어붙이고 다른 편에서는 힘의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서 싸움을 계속한다는 것이다. 탄씨와 해방전선은 미국측에게 북쪽 정부하고만 협상하는 것이 아니라 해방전선과도 협상해야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러면서도 테트공세 이후 연달아 공세를 계속했다. 그것은 존슨행정부를 협상 테이블에 끌어들이고 또한 해방전선의 존재를 인정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미국내의 反戰운동에 대한 지원사격이기도 했다. 전쟁이 계속되면, 미군 병사의 생명을 잃게 된다는 점, 그리고 해방전선을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미국 여론에 내밀었다. 존슨 행정부는 한발 한발 후퇴하여 결국 협상을 억지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런데, 69년 9월 3일, 베트남 독립과 혁명의 아버지로 불린 호치민이 사망했다. 탄씨의 비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탄씨의 투쟁의 반생을 지탱해 온 것은 호치민 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후일 회고하기를, “호치민의 후계자들이 호치민의 유언을 배신했다”고 간주했다.
69년 11월, 탄씨는 임시혁명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각료 인선에도 가담했다. 사이공 시민에게 잘 알려진 사람, 온건한 성향의 사람, 사이공의 다양한 계층의 시민으로부터 신뢰를 받을 수 있는 사람 등등이 중요 조건이었다. 탄씨는 법무부장관을 맡게 되었다. 임시혁명정부를 만든 목적은 파리의 평화협상에 있었다. 또 동시에 남베트남 민중에 대한 정치적, 심리적 영향력을 행사라는 데 있었다. 각의 회의는 한달에 한번 정도 열렸는데, 정세분석이 주류를 이루었다. 정세분석은 하노이에서 각 성에 파견되어 온 전문가가 보고를 했다.
이들 전문가는 1954년 제네바협정 이후 북으로 가서 훈련받고 돌아온 남쪽 출신자가 대부분이었으나, 해당 전문가가 없을 때는 북쪽 출신 전문가로 채웠다. 어느 부처에도 두 가지 목표가 있었다. 첫 번째는 정치, 군사, 외교, 정세를 항시 파악해 두는 것. 둘째는 각 부처에 연관되는 사이공 정부의 각 부처에 관한 모든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언젠가는 사이공 정부를 대신하기 위한 사전조치였다. 탄씨와 해방전선은 사이공 정부의 모든 부처에 정보제공자와 비밀공작원을 잠입시키고 있었다. 대부분 그 부처의 고급간부들이었다. 필요한 정보는 그들이 보내주었다.
III. 고난의 행군, 북폭 그리고 미중 테탕트
탄씨와 해방전선은 1970년 캄보디아의 론 놀의 쿠데타가 발생하면서, 도망자 신세가 된다. 그때까지 3식 끼니를 먹던 것과는 달리, 론놀 정부군과 미군, 그리고 사이 공군에게 쫒기는 신세가 되어 하루 2끼를 간신히 먹게 되었다. 미군과 사이공군이 캄보디아 영내로 침공작전을 개시하여,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지만, COSVN, 해방전선, 그리고 임시혁명정부의 수뇌들을 일망타진하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 이유는 탄씨 일행은 미군의 작전을 미리 알고 대비했던 것이다. 탄씨 일행은 캄보디아 영내에 들어가서 소규모로 분산하여 은신했다. 미국내에서는 베트남전쟁에 대한 저항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미국은 호치민 루트를 집중적으로 폭격했다. 탄씨는 미군 폭격에 대해 흥미로운 증언을 하고 있다. B-52폭격은 한발로서 대략 직경 200미터, 깊이 10-15미터의 큰 구멍이 생긴다. 탄씨는 “미군 폭격의 피해가 별로 크지 않았다”는 놀라운 증언을 한다. 왜, B-52의 비행경로를 사전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B-52 발진기지는 태평양의 괌섬, 일본의 오키나와, 태국의 우타바오이다. 괌섬의 주변에도 동중국해에도 소련의 토롤 어선이 B-52의 발진과 그 경로를 무선으로 알려주었다. 태국의 경우, 미군기지 주변에 해방전선 스파이가 항시 감시하고 있었다.
1970년대 말, 미군병력은 33만5천명으로 감소되었으며, 미군의 점진적 철수가 진행되었다. 1971년 말 남베트남군은 여전히 미국 공군의 지원에 의존했지만, 지상에서의 모든 전투의 작전 지휘권을 갖게 되었다. 남베트남 주둔 미군 병력은 약 16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이제 전쟁의 양상은 달라지고 있었다. 1972년 3월 30일, 북부전선에서 북베트남 정규군이 북위 17도선을 넘어 대전차부대를 이끌고 쾅치성에서 대공세를 개시했다. 이런 공세에 힘입어서, 탄씨와 해방전선, 임시혁명정부 수뇌부들은 다시 캄보디아 국경 가까이에 돌아오게 되었다.
1972년 닉슨의 중국 방문으로 테탕트가 진행되자, 미국을 주적으로 한 해방전선과 하노이는 크게 당황하였다. 해방전선과 하노이 내부에서는 중국파와 소련파들이 서로 대립, 항쟁하였다. 이리하여 베트남공산당과 중국 지도자간에 최초의 대립이 생기게 된다. 이 당시에 소련과 중국은 모두 베트남을 지원했는데, 중국의 쌀 원조는 년간 70-80만톤에 이르는 막대한 양이었다. 중국의 원조가 소련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러는 동안 파리비밀협상은 키신저와 정치국원이며 파리회담의 북베트남 대표단 고문직함을 가진 레둑토 간에 진행되었다. 탄씨는 닉슨의 베트남화 정책을 군사전략이 아니라 선거전략으로 이용했다고 비판했다. 또 베트남정부와 군대가 충분히 자립할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고 철수했다고 비판한다. 탄씨와 해방전선은 사이공 정권의 내부 모순을 증대시키고 사이공 정권과 미국과의 틈을 더 깊게 벌어지게 하는데 힘을 쏟았다.
대중운동에도 호소했다. 도시에서 반정부운동을 선동하고 사이공 측의 신문에 공작하여 민주적 자유를 요구케하고 티우 정부의 인플레 정책에 비판적 목소리를 내었다. 불교도, 학생운동, 지식인이나 카톨릭교도의 반정부운동에는 반드시 해방전선의 회원이 그 속에 들어가 있었다. 1972년 2월21일부터 28일까지 닉슨대통령은 중공을 방문했다. 미국의 중국과의 접근을 통해서 중국의 베트남에 대한 지원 차단을 노리면서 베트남전의 국지화를 노렸다. 그러나 미국의 속셈을 간파한 북베트남과 해방전선은 베트남의 남부, 중부, 캄보디아 국경의 세 방면에서 대공세로 나왔다. 이 공세의 목적은 임시혁명정부의 영토를 획득하는데 있었다. 이미 사이공군의 사기는 미군철수로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72년 3월 30일, 북부지역에서 전차를 앞세우고 북베트남 정규군이 납부로 침공했고, 중부에서도 요충지가 함락되고 사이공군의 제22사단 사령부가 괴멸되었다. 닉슨은 5월 22일, 다시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소련에게 하노이가 군사적 행동을 취하지 못하도록 맹렬히 외교압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미국의 대중, 대소 외교는 결코 하노이의 통일 의지를 꺾지는 못한다.
IV. 파리 평화협정과 그 불길한 의미
73년 1월 27일, 파리에서 미국, 북베트남, 사이공 정부, 임시혁명정부의 4자대표가 베트남평화협정과 4가지 의정서에 조인했다. 그 문안의 서두는 다음과 같다. “미국과 모든 다른 국가들(특히 북베트남)은 베트남의 주권, 정체, 영토, 독립을 존중한다.” 이 파리협정의 진행자였던 키신저와 레둑토가 그 해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되었으나, 레둑토는 수상을 거절하였다. 세인들에게 궁금한 대목은 레둑토가 일생의 영광인 노벨평화상을 감히 거절했던 이유가 무엇인가였다. 레둑토의 거절은 하노이정권의 방침에 따른 것이었다. 평화협정의 약속을 지킬 필요가 없는데 무엇 때문에 수상을 하겠는가? 호시탐탐 베트남을 집어삼켜 공산화를 이루려는 하노이 정권으로서는 노벨평화상 자체가 거추장스런 짐이었다.
하노이의 진심을 전혀 알지 못하는 미국은 파리협정을 불신하는 사이공정부와 베트남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국제휴전감시단을 파견하는 캐나다, 이란, 헝가리, 폴란드 4개국 외무장관을 서명에 참여시켰다. 이래도 안심이 되지 않은 키신저는 영국, 소련, 프랑스, 중공의 4개국 외무장관까지 서명에 동참시켰으니, 파리평화협정은 4+4+4=12개국이 담보하고 보증한 그야말로 값비싼 국제서명문서였으며, 어느 누구도 북베트남군이 다시 정면전쟁을 일으킬 것으로 믿는 국민은 아무도 없었다. 파리 평화협정안은 총 92장 23조로 이루어졌는데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휴전은 그리니치 표준시(GMT)로 1973년 1월 27일 24시에 발효되며 시한이 없이 실시된다.
② 인도차이나 전역에서 포로가 된 미군은 협정발효 후 60일 이내에 전원 석방한다.
③ 협정조인 60일 이내에 미국을 비롯한 베트남 전쟁에 참가한 모든 외국의 군대·군고문관·군사요원 및 그들의 무기·탄약 기타 군장비 물자는 전면 철수한다.
④ 베트남 정부군과 베트콩은 현 위치에 그대로 남는다.
⑤ 당사국에 의해 조인된 합의사항을 승인하고 전쟁의 종결을 보장하며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국제회의를 협정조인 30일 이내에 개최한다.
⑥ 미국은 베트남에 군사 개입 또는 내정 간섭을 하지 않는다.
⑦ 휴전·철군·포로석방 문제를 다룰 국제 휴전감시 관외위원회(ICCS)를 둔다.
⑧ 북위 17°군사분계선은 1954년 제네바 협정에 명시된 바와 같이 잠정적인 것이며 정치 또는 영토를 자르는 분계선은 아니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의 협정이 발표되었다. 즉
① 그 다음날 아침부터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전역에서 전투를 중지한다.
② 모든 미군을 철수한다.
③ 모든 미군 기지를 철거한다.
④ 모든 전쟁 포로들을 석방한다.
⑤ 다국적군이 평화를 감시한다.
⑥ 남베트남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를 가진다.
⑦ 북베트남 군대는 남베트남에 머물 수는 있으나 더 이상 증강하지는 않는다.
⑧ 북위 17°선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두 나라가 통일될 때까지 분계선으로 남아 있게 된다는 등의 내용이다.
조인된 뒤 2차 14개 조항의 합의가 추가되었다. 8월 들어 미국 의회는 인도차이나에서 더 이상의 미군의 전투를 금지했다. 1973년 말 남베트남 주둔 미군 병력은 거의 사라졌다. 베트남 전 지역에서 停戰이 선포되었다. 그러나 정전은 종이 위에 쓰여 졌을 뿐이며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다. 싸움은 더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군인과 민간인들의 사상자 수는 어느 때보다 많아졌다.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은 상대방이 서로 휴전협정을 위반했다고 비난했다.
파리평화⋅정전협정은 세 가지 함정이 있었다. 우선 북베트남, 해방전선이 사이공정부, 임시혁명정부 및 제3세력에 의한 연합정부의 수립이 실행되지 못했다. 두 번째로 사이공군과 해방전선군의 각기 다른 지배지역이 불분명하게 구획되었고 혼잡한 상태에서 정전이 되었다. ‘표범의 반점’ 방식이다. 최후의 의문은 북베트남과 해방전선이 이 협정으로 정말 정전(停戰)이 실현될 것으로 보았나?하는 점이다.
탄씨의 증언에 의하면, 파리협정이 갖는 중대 의미는 미국이 베트남으로부터 이탈을 약속했다는 점에 있다. 그래서 침투작전이나 테러행위를 계속한 것이다. ‘표범의 방식‘은 임시혁명정부가 강력하게 요청하여 현상 그대로 정전하는 방식이 채택되었다. 현지에서 확고하게 끈질기게 버티어 사이공 정권이 군대를 재편성하고 증강시킬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서이다. 또 일정한 영역에 모여 있기 보다는 각지에 흩어져서 있는 것이 그 지방을 위협하는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는 한편, 탄씨와 해방전선은 제3세력을 해방전선측으로 끌어들이는데 온 힘을 다했다. 학생지도자와 사회지도층을 설득하는데 공작을 강화하였다.
V. 워터게이트 사건;
정치적 해결에서 군사적 공세로의 전략적 분수령
사이공 정권을 무력으로 공략하려는 의도는 최소한 1973년 3월까지는 하노이와 해방전선이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충격적인 워터게이트(Watergate) 사건은 하노이와 해방전선의 전략적 분기점이 되었다. 1972년 공화당의 닉슨대통령이 대선 때 도청을 지시했다는 것을 폭로한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졌고, 1974년 8월, 닉슨의 사임을 몰고 왔다. 하노이와 해방전선측은 닉슨의 워터게이트 사건을 분석하고, 미국이 다시 베트남에 개입하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베트남의 군사적 해결안이 크게 부상했다. 75년 4월 30일의 사이공 함락에 의한 베트남전쟁 종결은 실로 워터게이트 사건에서 출발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베트남의 붕괴에 단초가 된 것은 1974년 말에 시작된 사이공 북쪽의 캄보디아 국경에 인접한 후크省에의 공세와 75년 3월 중부고원의 요충지 반미에트에 대한 공격이었다. 특히 반미에트 공격 후 사이공군 사이의 자괴현상이라는 총퇴각으로 인해 하노이는 일거에 사이공 함락을 감행한다.
후일 사이공 주제 CIA 간부 프랑크 스냅은 그의 저서, Decent Interval에서 후크성 공세는 "해방전선 측에서 사이공 정권의 핵심에 잠입시킨 스파이로부터 보고가 결정적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탄씨도 티우대통령 측근에 해방전선측 첩보원이 잠입하여 최고결정이 밑 빠진 항아리처럼 누설되고 있었음을 확인했다. 티우 대통령은 적의 공격이 캄보디아 국경에 있는 타이닝성이 될 것이라고 결론지어, 중부고원에 대한 병력증강을 고려하지 않고 사이공을 포함한 남부베트남의 남부방면 방위에 중점을 두었다.
이 결론은 즉각 하노이에 보고되었고, 하노이는 허를 찔러서 타이닝성의 옆에 있는 후크성을 공격하도록 결정했다는 것이다. 후크롱성에 대한 공격은 사이공측과 미군의 반응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사이공 정권과 미군은 전혀 반응다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당시 티우 대통령이 가장 신뢰했던 측근 가운데 4명이 CIA에 의해서 '공산분자'로 의심을 받고 있었다. 사이공정권과 미국과의 대립은 미 의회가 사이공 군 강화를 위한 원조 지출을 삭감하고 있었기에 심각해졌다.
사이공군은 반미에트가 함락되자 혼란 상태에서 퇴각하고 말았다. 사이공군의 자기 붕괴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긴급한 순간에 티우 대통령은 중부고원을 포기하고 해안지대 몇 개 거점에 재집결한다는 것과 특히 사이공 방위를 강화하는 것 등이었는데, 이런 정보가 모두 고스란히 탄씨와 해방전선의 첩보기관에 전달되었다. 사이공군의 자괴현상을 목도한 하노이 정치국은 중요 회의를 통해서 '군사적 해결'로 끝장을 보아야겠다고 결정했다.
하노이와 해방전선은 이 찬스에 모든 것을 걸었다. 사이공 공력을 위한 '호치민 작전'이 실시되었다. 북베트남 정규군은 거의 모두 남쪽으로 투입되었다. 총 14개 사단이 투입되었다. 북쪽은 텅 비었다. 북베트남 정규군은 거의 대부분 사이공 주변에 투입되었다. 그 이유는 사이공 군으로 하여금 수도 주변에 재집결해서 방위선을 구축할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서 신속한 투입이 필요했다. 이미 기갑화된 북베트남 정규군은 신속하게 진격하여 사이공에 해방전선의 군대보다 빨리 수도에 돌입하였다.
3월 31일, 하노이 정치국은 병력, 기술병기, 물자를 신속히 집중하여 雨期전에 사이공을 해방시킨다는 방침을 정했다. ‘호치민 작전’이란 명칭이 붙여진 것은 4월 14일이고, 사이공 함락 16일전 일이다. 74년에서 75년에 이르는 과정에서 하노이는 '정치적 해결'에서 '군사적 해결'로의 급속한 방향전환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므로 “20년의 시간을 단축시킨다”는 것은 해방전선이나 임시혁명정부의 역할 그 자체가 통일이후는 별로 불필요하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탄씨는 그 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사이공 공략의 최종단계에서 탄씨는 북경에 파견되었다. 3월에 북경에 가서 4월에 하노이로 돌아 온 탄씨는 5월 13일까지 하노이에 있었다. 4월 30일, 사이공이 함락되었는데, 임시혁명정부의 각료나 해방전선, 평화세력연맹의 지도부는 즉시 사이공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 사이에 군정이 실시되고 있었다. 사이공 도착 이들 뒤 승리축하대회에 참석하게 된다. 탄씨는 사이공 함락을 전후로 해서 하노이측에서 해방전선 인사들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에 대해서 아무런 정보를 얻지 못하고 해방의 기쁨에 흠뻑 젖어있었다.
VI. 결론과 남는 의문점
베트남전쟁은 68년초에 있었던 테트공세가 전쟁의 분기점이 되었다. 미국은 전술적 대승리를 거두었지만, 그 승리를 종전으로 가는 전략적 승전으로 만들지 못했다. 해방전선과 하노이는 비록 군사적 패배를 맛보았지만, ‘민중의 지지’라는 정치적 심리적 차원에서 귀중한 교두보를 확보했다. 존슨행정부는 미군사상자의 급증과 국내의 반전 여론에 굴복하여 해방전선과 협상테이블에 앉게 되었으나, 선거에서 패배하고 공화당의 닉슨행정부가 들어서면서, 베트남전쟁의 미국화가 베트남전쟁의 베트남화로 급속히 정책의 선회가 있었다. 남베트남인들이 정치적 군사적 자립의 적응력을 기르기 전에, 미군철수가 이루어졌는데, 이것이 중대한 패인이 되고 말았다.
닉슨은 대선전략으로 베트남전의 조속한 종결을 약속했지만, 조기 철군이 사이공 정부와 군의 붕괴를 촉진시켰다. 여기에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미국 정계는 마비되었고, 하노이와 해방전선에 공세의 빌미를 제공했다. 미국의 북폭은 소련과 스파이의 첩보활동으로 정보가 새어 나가 별로 효과가 없었다. 베트남의 군사적 붕괴는 해방전선측이 사이공 권력핵심부에 심어놓은 스파이의 첩보 역할이 컸다.
베트남은 내부에서 붕괴되었다. 디엠정권이후의 쿠데타 정권은 정통성 문제에서 끊임없이 흔들렸고 해방전선은 이 점을 물고 늘어지면서, 미국이 물러가면 하노이와의 평화는 가능하다고 선전선동을 했는데, 여기에 남베트남의 지식인과 시민들이 동조하면서, 뿌리째 흔들렸고, 미국의 원조와 군사적 지원이 없자 여지없이 무너졌다. 남베트남이 자립할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졸속으로 추진된 73년 파리평화협정은 베트남의 패망의 근본 원인이 되었음을 잊지 말아야한다.
전 세계의 주요 국가가 파리평화협정을 보장하는 서명에 참가했지만, 사이공이 함락될 때 어느 나라도 구원의 손길을 주지 않았다. 미국 의회도 냉정하게 지원을 거절했다. 그러므로 종이위에 쓰여진 역사상의 모든 평화협정은 강력한 군사적 억지력이 없으면, 일개 휴지조각에 불과하다는 점을 베트남 패망에서 잘 엿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베트남 패망이 남북한 관계에 주는 교훈은 중요한 것은 전쟁의 억지력이지 남북한의 정전선언이나 평화협정이 주요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고 또 미군이 한번 떠나면 다시 돌아오기는 정말 어렵다는 점이다.
그러면 베트남에서의 미군 철수는 불가피했나? 철수 이외에 대안은 있었나? 효과적인 미군의 군사작전은 무엇이었나? 애초부터 미국의 베트남 참전은 실책이었나? 만약 프랑스가 손을 떼었을 때,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인도차이나의 공산화를 미국이 처음부터 묵인했어야하나? 궁극적으로 베트남이 어떤 전략적 가치를 가졌기에 미국이 개입했던가? 이런 의문들이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는다는 점이 베트남전쟁의 비극이다.
서평(書評)I-(3)
토모다 세기(友田 錫) 저, 양 창식 譯,『배반당한 베트남전쟁』
I. 해방전선 군대의 해체와 남측 정치세력의 소멸
1975년 베트남은 마침내 공산화되고 통일은 달성되었다. 제1차인도 차이나전쟁으로부터 29년, 제네바협정으로부터 21년간의 전화가 꺼졌다. 과연 남베트남 사회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탄씨는 戰勝 축하대회에 참석하였다. 노란별의 붉은 깃발로 장식한 북베트남군대가 행진해 들어 왔다. 탄씨는 옆 좌석의 반 티엔 쥰 총참모장에게 물어보았다. “우리의 유명한 제1. 제5, 제7, 제9사단은 어디로 갔소?” 이 해방전선의 사단들은 캄보디아에서 론놀 군대와 싸워 승리한 역전의 군대였었다. “군은 이미 통합되었소.” 탄씨는 말을 잇지 못했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제부터 탄씨는 하노이에 대한 의혹이 싹트기 시작했다.
옛 사이공 정부의 관료들과 군 장병들의 재교육이 실시되었다. 그들은 정치재교육을 위해 수용소로 수감되었다. 탄씨의 두 형들도 탄씨의 설득에 의해 재교육사무소로 안치되었다. 그러나 6월에 집을 나간 그들은 8월에도 돌아오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다.
사이공 임시혁명정부는 하노이에서 파견된 차관급 인사들에 의해 하나 둘 부처들이 장악되기 시작했다. 탄씨가 일하는 법무부도 예외가 아니었다. 탄씨가 사용하던 두 대의 차량 중 한 대는 해방군에 의해 차압당했다. 탄씨는 76년 7월에 남북통일에 의한 중앙정부의 수립이후, 법무부 장관직에서 물러났으나 특권과 각료대우의 수당은 계속 받아왔다. 민중의 생활은 어려웠다. 배급은 불규칙적이었고, 대부분의 필수품은 암시장에서 살 수밖에 없었다.
II. 일방적으로 해체된 남베트남 정치세력들
탄씨가 북베트남에 대해 결정적 불신감을 가지게 된 계기는 1975년 11월에 개최된 통일에 관한 남북회의에서였다. 7월에 사이공에서는 임시혁명정부, 해방전선, 평화세력연맹의 지도자들이 모여서, 남베트남정부의 합법적 승인을 하노이와 유엔에 요구했으나, 8월에 탈랏트에서 제24차 중앙위원회 총회를 열었던 하노이 당국은 조기 통일과 사회주의를 촉진시킨다는 결의를 통과시켰다.
남측은 연방제 실시를 통한 신중한 통일논의를 원했고, 북측은 남측의 요구에 아랑곳하지 않고 조속한 통일을 촉구하면서 사회주의식 흡수통합을 결의한 것이다. 11월 15일, 사이공에서 열린 남북대표단 회의에서 사전의 각본에 의해 진행되었다. 회의에서 해방전선이나 임시혁명정부를 통일 후 어떻게 대우할 것인가에 대해서 한마디 언급도 없었다. 탄씨는 다음과 같이 한탄한다. “저들은 우리들을 어둠에서 어둠으로 장사지내려 하고 있다. 장송 나팔도 불지 않고 북소리도 울리지 않은 채 장례식도 없이 조사(弔詞)도 읽지 않은 채 ...”
남북회의로부터 1주일 후 ‘최후의 만찬회’가 나이트클럽 렉스호텔에서 열렸다. 해방전선, 임시혁명정부, 평화세력연맹의 지도자급 30여명이 참석하였고, 하노이에서 파견 온 기관장들은 모두 불참하였다. 이곳이 한군데 모여 얼굴을 마주 보는 마지막 밤이었다. 모두들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참석한 모두는 해방전선과 임시혁명정부가 이렇게 일찍 사망신고를 내어야할지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식사가 끝난 후, 모두들 입을 다문 채, 흩어졌다.
76년 4월 25일, 남북 국회의원 총선거가 있었다. 국회에서 국명을 베트남민주공화국에서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으로 하며 수도를 하노이로 했으며, 사이공을 호치민시로 바꾸었다. 남쪽의 임시혁명정부는 여기에서 물리적 수명이 완전히 끝났다. 중앙정부 다음으로 대중조직인 조국전선이 결성되었다. 조국전선은 북쪽에 있었으나, 이제 전국적인 조직으로 탈바꿈하여 해방전선을 흡수하자는 복안이었다. 본회의가 사이공의 독립궁전(옛 대통령궁전)에서 열려 조국전선의 중앙위원회가 선출되었다.
해방전선은 조국전선에 흡수당했다. 남쪽을 지배하려고 날뛰는 북쪽의 태도에 대해서 탄씨와 해방전선은 너무나도 무력하게 당해 버렸다. 그런데 해방전선이나 임시혁명정부, 평화세력연맹 사람들은 그 후 어떻게 되었나? 탄씨는 “소리도 없이 소멸 당해 버렸다”고 증언한다. 이들은 정치적 생명이 말살 당했고, 이들의 존재마저 잊어버리도록 하라는 노력을 했다는 것이다. 여러 집회, 결의, 신문발표에서 가능한 임시혁명정부, 해방전선, 평화세력연맹은 긴 투쟁에서 전혀 공헌이 없었던 것처럼 하고, 이들의 이름을 사람들의 기억에서 말살하고 승리는 오직 공산당만의 힘에 의해 달성된 것처럼 하려고 하였다(p.284). 왜 그렇게 되었나? 그것은 남쪽 3대 정치세력이 부르주아 출신이었기에 이들에 대한 북쪽 공산당 지도자들의 철저한 불신감 때문이었다. 남쪽의 3대 정치세력 중 어느 누구도 정부와 당의 중요 요직에서 완전히 배체되었다.
III. 통일노선에 대한 해방전선과 하노이의 견해 차이
탄씨의 증언에 의하면, 73년 평화협상 때와 75년 사이공 함락이후의 상황이 전혀 달랐다고 한다. 파리협정에서 미군의 철수와 남베트남 인민의 자결권을 국제적으로 인지시키는데, 의견차이가 없었다고 한다. 의견 차이는 사이공이 함락되면서였다. 기본적 차이는 임시혁명정부와 해방전선의 역할, 국민화해와 협력 정책, 특히 기본적으로 남쪽 주민의 자결권에 대한 자세에서 하노이와 견해 차이가 커졌다.
남쪽의 자결권이란 외국의 간섭을 배제하는 것은 물론 북쪽의 간섭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남쪽 지역의 특수성을 고려한다는 점이다. 탄씨와 해방전선은 남베트남을 5개의 자치지역으로 구성된 하나의 연방을 수립하는 달콤한 꿈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게 진행되었다. 하노이 공산당 지도자들은 베트남 전 지역에 권력을 배치하고자 하였고, 권력을 당의 손 안에 집중시켰다. 탄씨는 이런 권력에 대한 욕심은 호치민의 유언(遺言)에 어긋난다고 보았다.
공산당은 북쪽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1954년 제네바협정 후 북쪽은 독립국가가 되어 공산당 조직도 크게 확대되었다. 제네바협정 당시 수천명이던 공산당원들이 20년이 지난 74년에는 약 100만명이 되었다. 당원은 대부분 북쪽 사람들이었다. 북쪽은 공산당 정부를 수립하고 이 20년간 모든 분야에서 청년을 양성하고, 행정 간부, 당 간부, 경제분야에서 간부를 양성해 왔다. 남쪽이 제네바협정이후 75년까지 겨우 1만명 정도였다.
그 이유는 끝없는 전쟁의 와중에서 공산당 간부나 전문가를 양성할 여유가 없었다. 하노이가 조속한 통일을 하려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탄씨의 증언에 의하면, 남북이 조건이나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남쪽에 시간을 주게 되면 남쪽이 결속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북쪽에게 권력의 분할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해방전선의 강령에 명시된 민족민주혁명의 단계를 뛰어 넘어 한꺼번에 사회주의 건설의 단계로 이행한 것이 되고 말았다. 권력 장악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다.
남쪽이 제대로 저항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북베트남 정규군이 대부분 사이공 주변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미줄처럼 쳐진 공안당국의 감시만도 모두 북쪽 출신자로 채워졌다. 그리고 해방전선이나 임시혁명정부 또는 평화세력연맹 등 남쪽 자체의 조직은 하나 하나 차례로 해체되었다. 탄씨가 법무부 장관으로 재임하던 1976년 개인의 자유에 관한 3개의 법률안을 입안하여 혁명정부로 하여금 채택하도록 한 것이 그의 인권에 대한 공헌이라고 술회한다. 3개의 법률이란 ①주민의 체포와 구금에 관한 것, ②재판의 조직에 관한 것, ③적용할 형에 관한 법률이었다.
IV. 공산화 이후 고통에 빠진 베트남 민중들
베트남의 공산화 이후, 일반 민중의 생활은 어떻게 변했으며 공안 당국의 억압 실태는 어떠했을까? 일반 주민들은 공포 속에 살았으며 언제 체포 당할 지 알 수 없는 삶을 이어갔다. 최초의 공포감은 재교육수용소로 가는 것이었다. 그 다음으로 미개척지를 개간하기 위해 “新경제구”로의 주민 강제이동이 시작되었다. 그 다음은 기업이나 상점 주인을 대상으로 하는 재교육이 실시되었다. 월급이 적었고 물가는 계속 치솟았고, 무엇이든 돈이 되면 팔아서 먹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견디기 어려운 것은 지역 당국자들의 착취와 압박이었다.
하루 일과를 마치면, 여러 가지 정치 집회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정치집회의 목적은 기본적으로 주민의 관리와 감시에 있었다. 또 주민들을 이데올로기로 세뇌하려고 했다. 연설과 고육을 담당하는 정치간부들은 대부분 북쪽 출신자들이었는데, 그들의 수준은 낮고 무지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무식할수록 더 떠들고 연설은 길어졌다.
신경제구의 개발은 도시주민을 강제적으로 이주시키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들은 재산을 가지고 이주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신경제구는 사람이 거주할 환경이 되지 못했던 곳으로 주로 원시림으로 둘러싸인 산악지방이나 미개간지인 델타지방이다. 단지 곡괭이와 삽을 가지고 나무를 베고 빈터에 개간을 하도록 강요당했다. 상업의 국유화로 자리를 잃은 상인들, 부르주아, 그리고 옛 사이공 정부 공무원과 군인가족으로 남편이나 아들과 같은 일손을 재교육수용소에 뺏겨 직업도 없는 채 내팽개쳐진 사람들이었다.
남베트남에서 일자를 찾기는 아주 힘들었다. 모든 직장은 국가가 관리하게 되었기에, 기업이나 관공서의 책임자 또는
공안간부 등에게 돈을 줄 수밖에 없었다. 신경제구에 가기 싫은 자는 돈을 써야 했으며, 특히 남편을 재교육수용소에 빼앗긴 마누라는 지구 간부에게 울면서 몸을 바치는 경우도 있었다(p.247).
신경제구에 보내진 자는 남베트남에서 수백만명에 이르고 호치민시(옛 사이공시)에서만 100만명에 이른다. 정부는 최초 3개월 정도의 식량을 지급해주며 판잣집 같은 형편없는 집을 지어준다. 개간한 토지에서 생기는 수익을 자기의 소득으로 가져가게 되었으나, 곡괭이와 삽만 든 상인출신자들이 어떻게 적응할 수 있겠는가? 결국 많은 도망자들이 생기게 되는데, 자기 집에 돌아가 보니 북쪽 출신자들이 집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자기는 옛날 자기 집 앞 길가에서 잠을 잔다.
그들은 입은 옷 한 벌 밖에 없다. 아이들은 식당 앞에 떼를 지어서 손님이 먹고 남긴 음식을 다투어가며 얻어먹고 남은 것은 부모에게 가져간다. 이렇게 신경제구는 부르주아와 뿌티 부르주아에게는 유배의 땅이 되고 말았다. 시민들은 하루 종일 강제이주와 추방의 공포 속에서 살아갔다. 남쪽 주민들이 불만이 고조되자, 신 정부는 옛 사이공 정권의 고급관료나 장군들 또는 고급장교를 북쪽에 있는 수용소로 옮겼다. 중국 국경지대에 가까운 산악지대로 이동시켰다. 수용소에서의 식사는 하루 쌀밥 한 그릇에 불과했다. 6개월에 단 한번 외부로부터 소포의 유입을 허락받았다. 외부로 편지를 허용하는 것도 6개월에 단 한 통이었다. 최초 4년간 가족과의 면회도 일체 금지되었다. 북쪽 수용소로 가려면 특별허가증이 필요한데, 총비용이 2,000돈 정도로서 평균 월급이 50-60돈이라고 하는데 불가능했다. 재교육수용소에 수감된 사람들은 실제로는 정치범 취급을 받았다. 매일 반복되는 굴욕적인 취급과 학대가 반복되었다. 도안반토아이씨가 쓴 『베트남수용소열도』(1979)에는 1978년에 수감된 인원이 80만명이 넘는다고 썼다.
V. 착취와 억압 그리고 부패상
학교에서도 극심한 차별이 존재했다. 현 정부에 협력적인 가정과 옛 정부 공무원, 옛 군인의 자제 명단이 있다. 이것은 초중고학교 입학에 조작되고 당락이 결정되는 것이다. 반장선거도 간부의 자제가 당선된다. 선생들도 간부자제들에게 잘하라고 위로부터 지령을 받는다. 옛 정부의 자제들이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거나 괴롭힘을 당하는 것은 다반사였다. 초등학교부터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가르치고 있었다. 고급간부의 자제들을 위하여 특별한 학교가 만들어졌다.
공산당은 정말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은 공산당간부 집에 태어나서 당 간부가 손수 훈련하고 교육시킨 세대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탄씨의 증언에 의하면, 북쪽에서 온 사람들은 남쪽 주민을 압박하는 행위뿐 만 아니라 부패하고 汚職에 빠져들었다고 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북쪽 사람들이 남쪽에 와 보니 전혀 새로운 세계가 기다리고 있었다. 남쪽에서는 미국의 원조 덕분에 물자는 풍부했고 사람들은 생활의 편리함을 즐겨왔다. 남쪽에는 편리한 것들이 모두 있었다. 그들은 이 모든 것들을 가지려고 했다. 트란지스터, 라디오, 자전거, 다음은 냉장고, 다음은 TV, 혼다 오토바이였다. 그들의 욕망은 끝이 없었다. 자연히 주민으로부터 약탈하든가, 국가의 재산을 강탈하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부패가 생겨났다.
부패의 실상은 사이공 정권 때보다 훨씬 심했다. “사이공 정권 때의 사람들은 부패했다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일정한 방법과 규칙이 있었고 노골적이 아닌 방법인 배려가 있었다. 그런데 신정권의 사람들의 오직(汚職)과 부패는 야만스럽고 체면 불구하고 채갔다”(p.261).
VI. 정계 은퇴와 탈출
탄씨는 통일베트남 신정부에 대한 민중들의 불만을 목도하고 과거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깊은 실망감과 자괴감에 빠져들었다. 1976년 탄씨는 모든 정치와 인연을 끊고 신정부와 접촉을 끊기 위해 호치민시(옛 사이공시) 교외로 어머니가 사는 곳으로 은퇴했다. 은퇴생활도 고역이었다. 왜냐하면 탄씨에게 견디기 힘든 것은 집에 있어도, 거리를 거닐어도 눈에 들어오는 것은 비난과 원한의 말뿐이었다. 어머니도 그를 심히 꾸짖었다. “네가 돌아오고 후부터 이 나라는 수용소가 되었다. 남쪽 사람들에게 불행을 가져다 준 자는 바로 너야. 가족 모두에게 불행을 가져다 주었다. 남쪽 사람들이 이렇게 괴롭게 된 것은 모두 네 책임이야!” 옛날 친구들, 지식인들이나, 상인, 실업가였던 사람들도 탄씨를 백안시했다.
이런 생활은 탄씨로 하여금 견디기 어려운 심적 고통을 안겨주었다. 1977년 탈출을 결심한 탄씨는 당국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 고무회사 사장을 맡았다. 그리고 메콩 델타의 처갓집에 강을 오가는 배를 구입하여 목재와 목탄의 운반업을 시작하였다. 2년의 준비 후에 결국 2년 뒤 1979년 조국을 탈출하게 된다. 탄씨가 보트피플이 되어 인도네시아 가란 섬으로 탈출하여 드디어 프랑스에 다다르던 것은 1980년 3월이었다. 그는 미국 CIA요원으로부터 미국 망명을 권고 받았지만, 그 청을 거절하고 파리로 망명하였다.
VII. 종합적 결론
하노이 공산당이 주도한 무력통일에 의한 베트남전쟁의 비극적 종결과 베트남 공산화과정은 공산당의 정체와 진면목을 그대로 보여준 20세기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일대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것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가치관을 가진 세력에게 서방세력이 패배한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하노이와 북측 공산주의자들은 민족주의, 민족해방전선, 또 통일과 독립이란 미사여구의 용어로 남베트남 대중들을 유혹하고 매료시켜 이들의 역량을 총동원하여 마침내 세계 최강대국 미국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게 된다. 베트남 대중들은 1945년 종전이후 근 30년 동안 독립과 자유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싸웠는데, 그 싸움의 최전선 소위 해방전선(베트콩)에 참가한 남베트남 사람들은 인간으로서 견딜 수 없는 막대한 희생을 견뎠고 엄청난 봉사를 했었다는 것이 탄씨의 생생한 증언에서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통일된 남베트남에서 하노이 공산당이 한 첫 과업은 민족해방전선이 이제까지 이룩한 모든 공로(功勞)의 말살과 공로자의 거세(去勢)였다. 탄씨는 “하노이 공산당이 호치민의 유언을 배신한 것”이라고 통탄하지만 그것은 공산주의 이념과 공산당의 정체를 제대로 몰라서 늘어놓는 변명에 불과하다. 마치 이것은 레닌이 살아있었다면, 스탈린식 독재는 없었을 것이라고 변명하는 것과 같다. 물론 표면적으로, 하노이 공산당과 해방전선과의 관계는 전쟁 중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그러나 해방전선과 하노이는 궁극적 목표에서 애초부터 달랐다. 해방전선이 외세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쟁취하여 어느 정도 자치와 자립을 조건으로 한 남북연방제를 통한 느슨한 통일노선을 추구한 반면에, 하노이 공산당은 외세로부터 인민들을 해방시켜 남북연방제로 가는 것은 과도기적 단계로서 상황과 조건에 따라서 그 시기를 연장할 수도 있고 반대로 단축시킬 수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사회주의-공산주의 사회의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런 공산당의 핵심 전략을 탄씨와 해방전선의 수뇌부들은 순진하게도 전혀 간파하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하노이가 이데올로기보다 민족적 과업에 우선적으로 동참할 수 있다고 믿었다. 어쩌면 탄씨와 같은 프랑스에 유학할 수 있었던 인텔리 해방전선 지도급 인사들은 공산주의에 철저하게 세뇌되기가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어쨋든 베트남전쟁에서 공산당이 실제로 권력을 장악하게 된 것은 하노이가 民族主義의 外皮와 슬로건을 내걸고 내용이야 어찌되었건 형식상 그 길을 집요하게 꾸준히 걸어왔기 때문이다.
베트남 공산주의의 특징은 무엇인가? 그것은 공산주의를 믿는 농민들이 혁명의 주체로서, 서구에서 산업화와 자본주의의 모순에서 발생한 마르크스, 레닌주의와 약간 다르다. 유럽의 공산주의는 산업문명 속에서 발생하였다. 베트남, 북한, 중국 등의 아시아의 대중은 농민이다. 그리고 그 사회는 반식민지 아니면 식민지 또는 봉건적인 상태에 있었다.
아시아의 공산주의는 이런 사회의 역사적 모순속에서 발생하였다.
탄씨와 해방전선 지도부들은 남북연방제가 실시될 것으로 낙관했었지만, 하노이 공산당의 조속한 사회주의 건설에 대한 집착과 권력독점욕에 의해 항의도 한번 제대로 못해보고 허망하게 무너졌다.
베트남의 공산화는 동화속의 이야기도 아니고 결코 남의 나라 이야기만도 아닌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베트남전쟁은 결코 끝난 것도 아니고, 우리들의 反面敎師가 되어 가슴속에 깊이 살아 숨 쉬고 있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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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jyni 작성시간 11.07.14 너무 길어서 다 읽어보진 못했는데, 어쨌든, 통일후 북부주도가 된건 속았다기 보다는 구정공세로 베트민이 거의 붕괴된게 컸죠.
실제로 게릴라전을 주도해서 미군철수를 이뤄낸건 베트민이지만, 그후 남부를 병합시킨게 월맹 정규군인데다가, 이미 지도부까지 거의 와해되었던 베트민의 입지가 약할 수 밖에 없었죠.
어느시기 어느나라나 그런 상황이면 비슷한 결말이 났을겁니다. -
작성자중화루 작성시간 11.07.14 사실을 객관적으로 끌어온건 괜찮은데 결론은 말같잖은 논리네요. 설사 후에 정국주도권이 공산당에게 넘어간다고 하더라도 그게 쓰레기같은 남베트남정부를 지지할 이유가 될 수 없는거죠. 그걸 겨우 운동권니네가 깽판치면 안된다 논리로 가져가는 찌라시야 뭐. 제왕학에 근거하여 티우같은 쓰레기가 좀만 적당히 해쳐먹었으면 적당히 부정선거하고 100만 밀리샤에 외국배경 가진 30년임기의 수하르토급은 될 권력 몇년만에 말아드셨단 식으로 쓸 구유교역사학자들의 사관보다 저인간의 사관은 더 떨어진 쓰레기. 제왕학은 한 사람에게라도 효용이 있지, 정치못해서 민란나는데 민란일으킨 니네가 잘못이다 하면 당최 이건 뭐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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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김 광 표 작성시간 11.07.18 글쎄요 제가 보기에는, 탄씨와 민족해방전선의 활동을 "티우정권에 대한 항거자체가 잘못되었다"라고 결론내리는 것은 아닌것 같은데요. 그냥..베트남해방단계에서 큰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통일이후에 자신들의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지 못한 통일전선측의 입장에서 서술하고, 그 이유가 북베트남의 정치적인 "배신"때문이라고 서술하고 있는것으로 보입니다.... 이걸가지고 "운동권 깝치지마라"까지 끌고가는건 좀 멀리 가는것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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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중화루 작성시간 11.07.14 미국도 인정했듯이 '베트남에 우리편(뭐 좀 까놓고 해방전선)을 만들었어야 했는데 그러질 않아서 졌다.' 이런 논리로다가 미국에 제언하는 형식으로 쓴다거나 아니면 저자의 그 아비와 할아버지 원숭이들이 2차대전 동남아에서 딱 미국 고방식대로 한 10배는 병크때리다 인기멀어지고 말아드신 걸 원숭이 ㅈ잡고 반성하는 사관이라면 모를까. 더욱이 베트남은 일본과 직접적 연관이 있는 땅인데, 병결(병신같은 결론)내리는 거 보면.ㅋㅋ;
또 그게 뭐 대단한 사관의 사가가 쓴 거라고 어떤 나라에선 그걸 무려 21세기에 번역해서 쳐 들여오는 것까지. 뭐 비슷한 내용의 1차사료는 미국쪽에서 쓴 것도 널리고 널렸을 텐데. 걍 좀 별로임 -
작성자베트남청춘 작성시간 15.0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