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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15권 바로잡기

작성자마법의활|작성시간08.11.07|조회수1,540 목록 댓글 47

  1. 15권에서 얘기하는 논조가 유스티니아누스의 동로마 제국이 무척이나 경제가 피폐했다는 것인데,   이는 사실과 굉장한 거리가 있습니다.

 

   동로마 제국 경제는  감세 정책을 시행했던 발렌스, 그리고 부패 척결과 시스템 관리에 상당한 공을 들인 테오도시우스 시대부터 회복세를 타서, 역시 시오노도 인정하는 풀케리아 시대에도 그건

여전했습니다.

 

    서구 사학자들인 워랜 트렌드골드, 오스트로고르스키에 의하면, 이미 유스티니아누스의 전전임자인 아나스타시우스 때부터 제국 재정 상태는 굉장한 호조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동로마 제국은 그 많은 전투 비용을 커버하고도 국고가 남을 정도였다는 것이죠.


 유스티니아누스가 단순히 프라퍼갠다에 미쳐서 결정한 게 아니라, 사전에 들어가는 비용과 회수하는 비용을 계산해서 군대를  축차적으로 투입을 했었습니다.

 

  실상 유스티니아누스의 제국 재건책을 망쳐놓은 것은 전염병으로 인한 급격한 세수 감소지, 무리한 착취가 원인이 아닙니다. 

 

 그리고 유스티누스 2세 (어이쿠..이것도 "유스티니아누스  2세"라고 책에선 적어놓고 있습니다만.

엄청난 치명적인 실수입니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 황제는 그보다도 100년 훨씬 후에 등장하는 황제입니다.  )

 때 국가 재정이 완전 앵꼬난 것처럼 쓰고 있지만, 그 뒤 제정신 박힌 티베리우스 2세가 제위에 오르면, 몇 가지 조치를 해서 어느 정도는 복구시켜놓습니다.

 

 마우리키우스 때 또 다시 앵꼬가 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동로마 제국 체제 자체의

비효율성이나, 과중한 세금 등등의 그런 본질적인 현상이 아닌, 국가 재정의 일시적인 운영상의

모순 문제였습니다. 

 

 이는 헤라클리우스가 해결하면서 다시 증명됩니다. 

 

 2. 시오노 나나미는 이탈리아와 카르타고의 경제력이 반달 왕국 그리고 뒤를 이은 동로마 제국 때문에 나빠졌다고 악담을 퍼붓던데, 그것도  사실과 매우 다릅니다. 

 

 카르타고 지역은 상당한 경제력을 이후 회복했었고, 위기의 시대가 되면 아예 헤라클리우스가 수도를 카르타고로 천도하는 것까지 생각했을 정도였습니다.

 

  난장판 되었다는 이탈리아 지역도 생각 외로는 경제적 역량을 어느 정도 보존하고 있었고,

롬바르드 족 또한 깽판만 마구 쳐댄 게 아니라 사방에 프랑크와 동로마가 버티고 있어서

나름대로 합리적인 통치를 했습니다.

 

 여담이지만 카르타고 지역이 또 반달 족 지배하에 들어가서 피폐했다고 쓰시는 데,

조지프 테인터에 의하면 경제적 발전 지표는 오히려 그 시대에서 가장 월등했다 합니다.

 

 그 할머니 생각으론  도나투스 파하고 정통파가 머리 끄댕이 잡고 싸우기만 하면

경제가 발전 안되리라 생각하시는 듯 하지만, 반달족 통치자들도 바보 멍청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게만 놔두면 종말이 다가온다는 것 정돈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들 역시 생각 외로 경제 부흥과 학술 진흥에 힘을 쏟았고, 결국은 이들 역시도 가톨릭파로

개종을 합니다.  이들 역시 바보가 아니었기 때문에 계속 아리우스 주의, 도나투스 주의로만

놀면 언젠가는 동로마 제국에게 생트집을 잡혀 당하고야 말리라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유스티니아누스도 동고트 왕국에 대해서는 "척결해야 할 이단"운운의 여론 플레이에서

상당한 재미를 보았으나, 반달 왕국에 대해서는 그 수법을 써먹을 수가 없어서 아주 고민했었습니다.

 때문에 반달 왕국은 그냥 조공 받아먹는 수준에서 끝마치려고 했으나....

 

 그에겐 생각지 않는 횡재, 반달 왕국에게는 뜻하지 않은 대재앙이 발생했었습니다.

반달 왕국이 꽤 오랜 기간 잘 버틸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너진 것은,

 벨리사리우스 정복 직전에 기존의 가톨릭 정통 반달 왕을, 반역자 아리우스파 반달 장군이 찬탈해서 잔인하게 죽였기 때문에 이 친구에 대해서 반달 왕국 내부에서도 안티 분위기가 팽배했기 때문입니다.

 

 잔인하고 무능한 찬탈자가 간혹 외적보다 더 증오를 받는 건 어디서나 공통 현상이지요근데 요것도 시오노 님께서는 생략~ 뭐, 특정 결론을 위해서겠지요. 


3. 시오노 나나미는 유스티니아누스가 학문과 거리가 먼 무식쟁이였다고 하면서 역사의 미스테리라고 하는데, 여기서 역사의 미스테리는 오히려 사실을 정반대로 기술하는 시오노 나나미입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동시대에서 가장 뛰어난  교양인이었다는 게 학자들의 중론입니다.
 그는 뛰어난 신학자, 법학자였던 동시에 뛰어난 작곡자였고, 시인이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네로 황제가 되고 싶었던 모습이죠.)

 

 유스티니아누스에 대해 온갖 저주와 욕설을 퍼부었던 프로코피우스마저도, 유스티니아누스가 현신한 아크데빌이라고는 할 수 있었으나 아는 게 없었고 시와 노래도 형편없었다는 소리는 감히 적어놓질 못했습니다.  여하튼 유스티니아누스가 당대 최고의 교양인이자 음악가였다는 건 그조차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왜 이 사람을 시오노 나나미는 무식쟁이로 몰 수 밖에는 없었는가....

 그거야, 뭐, 뻔할 뻔자.  유스티니아누스는 기독교인이기 때문입니다.  -_-

 로마에 기독교가 퍼지면서 무식쟁이들만 대거 지도층에 들어가서 양산되었으니, 유스티니아누스도

무식해야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4. 아카데미의 폐쇄로 학문적 수준이 대폭 낮아졌다?

 

  워랜 교수에 의하면, 율리아누스의 시대에서  이미 이백년이 지나 헬레니즘 철학과 교육이 기독교에 대폭 침투한 그 당시에는 훌륭한 역량을 가진 기독교 학자들이 많았기에,
아카데미의 폐쇄에도 불구하고 학문적 수준에는 전혀 영향이 없었다고 합니다.

 

  즉 기독교 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아무 거리낌이나 주저없이 그리스 신화나 일리아드를 줄줄줄 읊어대는 자들이 많았다는 얘기죠. 시오노 나나미는 그런 사람들이 없었다고(혹은 르네상스 이후에나 등장한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입니다만, 아쉽게도 아니었습니다.

 

 학술 전통이 대폭 죽어버린 서로마 지역에서도 그리스-로마 학문을 수도사들이 보존했었는데,

대규모 교육 기관을 유지했던 동로마 제국에선 어땠을 지 그건 너무 뻔한 것입니다.

 중세는 광신도들이 지배한 무식한 시대였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이리 하신 듯.


 동로마 제국의 학술 수준이 대폭 다운이 된 것은 헤라클리우스가 아랍에게 패배를 당하면서 이집트와 시리아, 아나톨리아를 잃어 경제가 피폐한 나머지 교육 부문에 국고 보조가 끊긴 것이 원인이지,

유스티니아누스의 아카데미 폐쇄가 원인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시대에도 계속해서 제국은 가능한한 필수 학술 분야에 국고 보조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

5. 로마법 대전을 활용 못했다?

 ......물론 라틴어로 씌어졌지만, 그 시대의 판관들은 충분히 라틴어판 로마법 대전을 활용할 수 있을 정도의  기량이 있었습니다. 로마인이 없어졌으니 로마법 대전도 활용못했다. 이건 소설 용어로는 훌륭해도, 역사적 사실과는 영 거리가  멉니다.


 로마법 대전이 활용이 잘 안되는 것은 역시 아랍의 돌진 시대 이후고, 이것도 경제 수준의 저하로 교육이 퇴보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이 법전이 그리스어 버전으로 개정판, 요약판, 다이제스트, 판례집, 계속해서 나왔던 것은 일언반구 언급이 없습니다.


 

6.  4~6세기, 8~12세기의 동로마 제국 경제-학술 부흥에 대해선 말이 없다.

 기독교 제국은 교리 싸움하느라 나날을 지새우므로 경제 부흥하면 안되는 모양입니다. 요즘 극우 목사님들 입에서 나오는 "예수님 믿어서 미국이 잘산다"는 굉장한 오버지만, 그 반대도 이렇게 문제가 심각 합니다.


 실상은 그 교리 싸움 덕택에 제국의 학술 수준은 아니러니하게도 발전에 발전을 거듭할 수 있었습니다.  헤라클리우스 왕조 시대가 지나면 제국이 살아남는데만 급급하면서 교육 분야에 대한 지출을 대폭 줄여버려 관리들의 질이 대폭  다운이 되었는데, 이것이 성상 파괴 - 성상 숭배 및 단의론 및 단의론 단죄, 단성론 비판 등등등을 거치며 학술적 지식에 대한 요구가 국가적 요구로 급부상합니다.

성서를 뒤져보고, 옛 그리스 성현들의 저작을 재검토하는 과정에서 학문의 부흥이 이어졌고, 이것이 훗날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세웠고 헤라클리우스가 대대적으로 보수한 행정 - 세금 징수 체제의 합리화로 이어집니다.

근데 시오노 할머니께선 교리 싸움하면서 광신도들이 생겨나 이 친구들이 학문하는 이교도들을 탄압하는 찌질한 시대가  이어져 다들 전반적으로 머리들이 나빠졌다고만 쓰려고 하시더군요. 

  7. 뻑하면 등장하는 게 그 대책없는 "파밀리아 개념"입니다만, 2~3세기의 제국이 그 고생을 했던

   것은 그런 "선 방어 전략"이 시대에 맞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전방 생활을 안해봐서 물러터져서, 그리고 이후 황제들이  "로마다운 것"을 버려서가 아닙니다.  종심 방어 전략을 채택하면 제국 안이 전장이 된다고 하는데,

 그나마도 그렇게나 하니까 적군 격퇴가 가능한 것입니다.

 

  선 방어 전략을 채택하면 아예 제국 안에서도 밖에서도 늘상 털리는 꼴이 일어나지요.

3세기때의 군사 전문가 로마 황제들이 바보 멍청이라 종심 방어 전략으로 선회한 것이 아닙니다.

 

 8. 로마는 "민족"이 아닙니다.  그리고, "영토 국가"에서 "수도"를 이전한다고 국가가 아니게

  된다는 논리는 설 자리가 없습니다.  시오노 나나미 본인이 2~3권에서 줄기차게 얘기했던 걸

  왜 뒤집는 지 정말 모를 일입니다.

 

     그리스어를 쓴다고 또 아니라고 하는데, 그리스어 자체가 로마 제국 공용어였다는 논조는

   또한 어찌되는 지 그것도 궁금합니다.

    라틴어를 쓰는 게 제국 정체성이라면, 그 라틴어도 그리스어 영향이 아주 컸고,

   그리스어 또한 라틴어 영향으로 많이 바뀌었던 것도 언급이 없으십니다.

 

 9. 고트 족 토틸라에게 승리를 안겨주었던 건 어디까지나 나르세스의 천재적인 지휘 때문인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그냥 아주 많이 생략하십니다.

  카이사르,  스피키오에 대해선 아주 자세히 세세히 묘사했던 그 역량은 다 어디 갔는지 궁금하지요.

     

10. 로마에는 장군 황제가 테오도시우스 이후 없었다는 엉터리 주장은 아예 언급할 가치도

  없습니다. -_-   

  마르키아누스는 놀고 있었나? 제노는? 그리고 서로마 제국 말기 황제들도 몇명 빼놓곤  전부 장군 황제였는데?

 

    그리고 로마 제국 전성기에도 장군 황제가 아닌 황제가 없었던 게 아닙니다.

     드물어서 그랬느냐고 할 지도 모르겠으나, 오히려 후기 로마, 그리고 비잔틴 로마 시대에도

장군 황제가 아닌 황제가 예외적입니다. 

 

* 관련 출처 문헌

  로마인 이야기 15권 (시오노 나나미 저)

  로마 제국 쇠망사 3,4,5권 (에드워드 기번 저)

  비잔티움 연대기  (존 노리치 저)

  비잔티움 제국사  (게오르그 오스트로고르스키 저)

  비잔틴 제국         (워랜 트레드골드 저)

  고대 전쟁사 이야기  (존 워리 저)

  사생활의 역사 1권   (조르주 뒤비에 저)

   문명의 붕괴            (조지프 테인터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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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메디치 | 작성시간 10.07.13 인상여..
  • 답댓글 작성자초록마르스 | 작성시간 10.07.14 저도 그생각을.. 인상여..
  • 답댓글 작성자로마정신병원(모에당의 아포테커리) | 작성시간 10.07.14 ㄲㄲㄲㄲㄲㄲㄲ.
  • 답댓글 작성자내일로 | 작성시간 10.07.15 인상여... 과거의 향수를 느끼게 함....
  • 작성자캐리어 | 작성시간 10.07.14 와우~ 2년전 글이군요.. 잘 쓰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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