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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金)의 역사

작성자캐리어|작성시간10.03.19|조회수1,433 목록 댓글 18
 

“금? 노랗고 빛나는 조각을 말하는 것인가? 이를 많이 갖고 있으면 검은 것도 희게 되고 추한 것도 아름답게 되지…심지어 나병조차 사랑스러워 보이도록 하고, 늙은 과부에게 젊은 청혼자들이 몰려들고….”


셰익스피어가 희곡 '아테네의 타이먼(Timon of Athens)'에서 한탄한 내용이다. 금에 대한 인간의 갈증과 욕망을 가장 잘 표현해 준 말로 꼽힌다. 인류 역사를 되돌아보면 고상한 명분과 목적 이면에 금에 대한 탐욕이 똬리를 틀고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고대 로마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독교 국교화다. 대제는 313년 “신앙의 자유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선언했다. 마치 근대 인권선언문을 떠올리게 하는 이 밀라노 칙령 이면에는 콘스탄티누스의 권력 의지뿐 아니라 금에 대한 갈증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그 시절 로마 제국은 극도의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속국이 조공으로 바치는 금이나, 제국 내 광산에서 캐낸 금으론 제국의 재정을 감당할 수 없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제우스 등 로마 신들을 모신 신전의 금에 눈독을 들였다. 그는 기독교를 국교로 삼으면서 수세기 동안 제우스 신전 등에 쌓여 있던 금을 징발할 수 있었다. 덕분에 그의 제위 시절 로마 재정은 비교적 건실하게 유지될 수 있었다. 또 그가 만든 솔리두스라는 금화는 이후 700여 년 동안 지중해 지역의 기축 통화가 되기도 했다.


영국 헨리 8세의 경우도 비슷하다. 그는 자신의 이혼에 반대하는 로마 가톨릭에 대항해 1534년 국교를 성공회로 바꿨다. 그는 성직자들의 부도덕하고 사치스러운 행태를 비판했다. 이어 가톨릭 성당과 수도원을 대거 폐쇄해 재산을 압류했다. 특히 그가 군침을 흘린 것은 토지가 아니라 금이었다. 성당 등이 보유한 금을 차지한 덕분에 그는 막강한 해군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십자군 원정도 마찬가지였다. 초기에는 종교적 열정에 심취해 서유럽인이 원정에 나섰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종교적 열정의 자리에 물질, 특히 금에 대한 욕망이 대신 들어찼다. 이에 비하면 콜럼버스의 신대륙 탐험은 정직한 편이다. 그는 드러내놓고 “황금을 가져오겠다”고 말했다.


인간은 언제부터 금을 갈망했을까? 대략 기원전 1500년께라는 게 전문가들의 얘기다. 이전까지 금은 여러 장신구 가운데 하나였다. “반짝이는 장신구였을 뿐 지금처럼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는 물건은 아니었다”고 영국 금융학자 글린 데이비스는 '돈의 역사(A History of Money)'에서 주장했다. 금이 남다른 가치를 가지기 시작한 것은 고대 이집트인 덕분이다.


이집트인은 해외 무역에서 금을 교환의 매개로 사용했다. “이집트인이 언어·문화·종족이 다른 사람들도 금을 알아보고 기꺼이 물건 값으로 받아들인 점을 경험하면서 ‘금=부(富)’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데이비스는 말했다. 금 자체의 속성보다 ‘금을 주고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금에 대한 욕망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이후 금의 지위는 계속 상승했다. 기원전 1091년 중국에서는 처음으로 법정 화폐로 인정됐다. ‘금=돈’이라는 등식도 자리 잡았다. 개인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욕망의 대상이 됐다.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 원정을 시작했을 때 마케도니아인은 페르시아 왕이 궁궐에 비축해 놓았다는 막대한 금을 기대하고 동방으로 향했다. 고대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지금의 프랑스 지역을 점령하러 떠날 때 참여했던 로마 병사들의 가슴속에도 ‘야만족의 금’에 대한 욕망이 가득했다.


16세기에는 금이 인구나 군대, 농업 생산력보다 더 중요한 국력의 원천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중금주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스페인 왕 페르난도 등 서유럽 왕들은 금 한 조각이라도 더 갖기 위해 거친 풍랑 너머로 자국 병사들을 경쟁적으로 내보냈다. 신대륙 금을 차지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산업혁명을 계기로 금은 국부의 원천 자리에서 밀려나 통화가치의 안전판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금본위제가 본격화하면서다.


그 시절 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하던 영국과 미국·프랑스 등 강대국들은 금을 바탕으로 자국 통화가치를 결정했다. 이는 국제교역의 기본 축이 됐다. 하지만 금본위제는 오래가지 못했다. 미국에선 장기적인 디플레를 유발했고, 대공황 시기에는 통화량을 억제하는 족쇄가 되기도 했다. 금본위제에서는 지폐 등 통화량이 금의 양에 의해 결정되는데 금이 워낙 희소한 광물이라 충분한 양을 확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결국 대공황 시기 주요국들이 금본위제에서 이탈했다.


금은 1944년 잠시 돈의 원천으로 부활했지만(브레턴우즈 체제) 71년 미국이 금태환을 중단하면서 다시 돈의 원천 자리에서 밀려나게 된다.

요즘의 금은 ‘그림자 화폐’로 불린다. ‘법정 화폐(Fiat Money·종이돈)’는 아니지만 사실상 돈과 다름없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의미다. 금융이나 경제·정치가 불안해지면 사람들은 금에 기대려고 한다. 현대 화폐가 국가의 법 외에는 가치를 인정받을 별다른 근거가 없는 반면 금은 그런 불안을 잠재워 줄 교환가치를 가졌기 때문이다.


출처-http://blog.joins.com/media/folderlistslide.asp?uid=chobjay47&folder=6&list_id=10560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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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앙겔루스 노부스 | 작성시간 10.03.21 오류가 있는거 같은데...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를 공인만 했지 국교화하지는 않았는데요... 국교화는 381년에 테오도시우스가 했는데... 즉 콘스탄티누스시기에는 다른 종교가 불법화되지 않았기에, 신전의 금도 강탈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만...
  • 답댓글 작성자캐리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0.03.21 밀라노칙령에서는 분명 기독교를 포함해 모든 종교는 동등하다라고 했지만 후에 기독교 우대정책을 했다는것을 이유로 그냥 뭉뚱그려서 기독교를 국교화 하였다 한게 아닐까요? ㅎ
  • 답댓글 작성자앙겔루스 노부스 | 작성시간 10.03.21 캐리어님께서 쓰신 글은 아니기에 의도를 알수는 없긴 하겠습니다만... 다만, 그래도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분은 없는게 글의 완성도를 높일거라 생각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캐리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0.03.23 네 명심하겠습니다 ^^ 나름 훑어보고 이상이 있는 부분은 고치려고 노력하지만 사소한 실수만 손댈 뿐 큰틀은 원작자의 글을 남겨둬야 한다고 판단해서 그랬습니다. 앞으로 최대한 문제의 여지는 수정하겠습니다.
  • 작성자나도사랑을했으면 | 작성시간 10.03.24 윽~~~, 전 금나라의 역사라고 이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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