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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야로슬라블의 바이노프 -3

작성자[♥]CARDCAPTOR SAKURA|작성시간15.04.28|조회수208 목록 댓글 0


앞서 말했듯이 거의 내부적으로 눈치 봐가면서 하는 회의와 투표, 따분하고 맨날 하는 소리만 하는 교장선생님스러운 연설에 대한 프라브다의 비판은 바이노프에 의해서 스리슬쩍 지역에서 은폐되었습니다. 대신 바이노프의 지루한 연설에 대한 아첨들만 가득했죠. "바이노프 동지의 지도 아래 우리는 특별한 성공을 거두었다!" 혹은 "바이노프 동지의 지도 아래 우리는 더 큰 성공을 거둘 것이다!" 등등.. 


프라브다의 사설의 내용은 야로슬라블 주의 당은 만나기만 자주 만나지 막상 하는 건 없다는 내부고발자를 매우 정확한 분석이라고 극찬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프라브다가 요구한 것은 지역 공산당 정치국 회기에서 이 내용을 공개적으로 다루고, 지역 신문에 이것을 실어야 하고, 지역의 모든 당 회의에서 이 내용에 대한 비판적 토론을 조직해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이노프는 이를 사적으로만 돌려보고 2월에 열린 당회의에서 "우리 다 통할 수 있는 처지 아냐?"라는 식으로 나옵니다. 프라브다는 이를 즉각 공산당 중앙위에 보고합니다. 이건 단순히 오만함의 문제가 아니고, 바이노프 패거리가 중앙위에 저항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내용으로요. 


그리고 얼마 뒤 중앙위로부터 야로슬라블 뿐만이 아닌 더 넓은 범주에서 지방에 대한 공격이 들어옵니다. 2월 26일에 있던 공산당 회기에서 스탈린의 최측근 안드레이 쥐다노프가 연설을 했었는데, 여기서 중앙위 대표이자 주 공산당 당서기인 안드레예프에게 "우리들"과 "당신들"을 구분하는 어법을 썼던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소련 공산당은 지도부 아래에서 단일한 정당으로 모두가 혁명동지인데, 이런 말을 하는 건 엄청난 정치적 리스크를 지는 일입니다. 가장 마지막에 이런 어법이 사용된 건 1930년에 부하린이 당지도부에 대고 "당신들"이라고 말했을 때였습니다. 몰로토프가 빡쳐서 중간에 개입했고, 비단 이 어법 때문은 아니긴 하지만 니콜라이 부하린의 운명은 여러분들도 다들 잘 아시리라고 믿습니다.



쥐다노프가 이런 초강경수를 두면서 했던 연설의 내용은, 지역의 당조직에 민주화가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비밀스럽게 자기들끼리 짜고치는 선거 하지 말고, 당기관지를 정기적으로 지역 당조직에 보고하고, 엄격한 당의 규율을 따를 것이며, 소수는 다수에게 종속되어야하고, 당의 상부에서 내려진 결정은 모든 당원들이 합심해서 무조건적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 그 골자였습니다. 지역당 내에서 패거리 짓고 몰려다니고, 선출과 투표 대신 짜고치는 고스톱이 횡행하고, 밀실 담합 같은 마피아 정치가 성행한다고도 깠습니다. 가장 위대하신 스탈린 동지께서 거기에 끼어들어서 추임새 하나 적절하게 던져줍니다.


"그런 건 결탁이지."


지방 당 지도부들에게 있어서 가장 공포스러웠던 것은 프라브다가 쥐다노프의 프라브다가 2월 회기에서 관해서 가장 처음으로 실은 연설이 되었다는 겁니다. 스탈린 연설보다 앞에 실었다 그 말이죠. 이건 사실상 지역 당 지도부와 본격적으로 전쟁을 선포한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30년대 초반에 이 놈들이 기어오르든 말든 묵묵히 하고 싶다는 데로 해주면서 사법권과 행정권의 핵심을 중앙으로 집중시키고, 34년에 본격적으로 감시를 시작하면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 그림을 세밀하게 그린 다음에, 36년 막바지에 지역 당의 지도자들의 심복과 수족들을 모두 가지치고 보직을 싹 뒤섞어버리는 이 엄청난 작업이 끝나자마자 시작되는, 피의 북소리가 울리기 시작한 것이죠.


야로슬라블에는 비상이 걸렸습니다. 프라브다에서 자기들 까는 사설 하나 실었다고 스탈린에게 츳코미를 날릴 아마이한 시기가 아니게 되어버렷~ 이 연설이 행해지고 이것이 전국 각지로 뿌려지기까지에는 2주가 걸렸는데, 다들 적당히 눈치는 깠을 겁니다. 1937년 3월 6일, 쥐다노프의 연설이 전국에 알려지고 난 다음 날, 야로슬라블 시의 당활동가들과 군 당서기들이 일주일 동안 모여서 회의를 하기로 일정을 잡습니다. 모여서 조금 똥줄은 타지만 역시나 형식적인 대응을 합니다. 바이노프가 아 내가 실수했다. 미안하다 잘못했다 사과할게 프라브다 니들이 맞는 것 같아 이런 식으로 열심히 말했으나.. 뒤늦은 대응이었죠. 부적절했고요. 스탈린 동지께서는 말만 나불대는 것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3주 뒤, 2월 회기에 대한 스탈린의 연설이 배포됩니다. 스탈린 역시 주 공산당의 당서기들에 대해서 매우 심기가 불편하다는 내용이었죠. 그리고 바이노프에게는 아주 영광스럽게도, 가장 위대하신 스탈린 동지께서 바이노프를 친히 언급해주십니다.


"바이노프는 다른 주에서 사람들을 데려왔죠. ... 23명입니다. 참 많지요. 9명은 돈바스에서 왔습니다. 쥐라블례프, 바이스베르크, 크리메르, 이바노프, 카쯔, 코누칼로프, 유를로프, 알렉산드로프, 그리고 이사예프가 그들이죠. ... 그는 저들 없이는 아무 것도 못합니다. 왜 바이노프가 그래야 했을까요? 외부로부터 온 이 사람들에 대한 지역 당간부의 태도는 무엇이어야만 했을까요? 물론, 이는 감시를 받습니다. 외부로부터, 당신에게 개인적으로 충성하는 집단을 스스로 데려온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는 지역당간부에 대한 신뢰 부족의 표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지역 당간부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지 못함을 바이노프가 표출하게 했을까요? 그에게 한 번 우리에게 말해보도록 기회를 줘봅시다."



쥐다노프와 스탈린의 사설을 프라브다에서 연속으로 실어버리자, 지역에서 숨죽이고 있던 바이노프의 반대파들과 직위가 낮아 찬밥신세던 이들이 드디어 칼을 빼들었습니다. 바이노프가 야로슬라블 주 전체의 당원들을 모으는 회기를 열어야만 했을 때 억눌려 왔던 이들의 급류와 같은 반대가 몰아쳤습니다. 바이노프는 야로슬라블에서 왕처럼 지낼 때 이들을 억누르고 자기 파벌만의 세상을 구축하려고 오만가지 전술을 다 써왔으나, 스탈린의 지시 앞에서 이는 무력해질 수밖에 없었지요.


바이노프의 심복들은 여기서 술수를 부립니다. 주의 교통부 책임자였던 쥐라블례프가 대표적이었죠. 사실 얘는 애초에 빼박캔트였던 게 스탈린이 언급을 직접 해버려서... 쥐라블례프는 당내의 아첨과 특정 지역 간부 영웅시에 대해서 비판을 진행합니다. 자기와 그 파벌은 빼고요. 이번에도 파벌 구성원들끼리 적당히 서로 형식치레 자아비판과 형식치레 상호비판을 하면서 치우려고 했던 수작질을 부리기 시작했죠. 혹은 바이노프의 정말 심복들은 바이노프 대신 고기방패로 나서기도 했고요. 그러자 아래로부터 자와자와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셰하노프라는 당원이 일침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쥐라블례프는 바이노프 동지 밑에서 항상 똑같은 소리만 했죠. 항상 그에게 아첨하면서 바이노프 동지가 이렇게 말했다, 바이노프 동지가 저렇게 명했다, 바이노프 동지가 강조했다... 이런 게 바로 지도자 숭배 아닙니까?" 


신원을 알 수 없는 목소리도 들렸습니다. "당신 저번 회기 때도 있지 않았습니까? 그 때는 왜 이런 말씀 안 하셨습니까?"



바이노프 파벌의 두번째 회피 전략은 이런 분야에 있어서 전통의 강호라고 할만한 꼬리자르기였습니다. 바이노프 파벌은, 네페도프를 중심으로 바이노프 밑으로 들어온 이바노보 파벌과 바이노프가 데리고 들어온 돈바스 파벌 두 개로 구성되었는데 바이노프 입장에서는 당연히 돈바스 파벌이 더 중요할 수밖에 없었죠. 행동대장 쥐라블례프가 네페도프로 화살을 돌리는 것을 시도합니다. "네페도프는 그의 구에 있던 문제를 처리하는 데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타조처럼 그는 머리를 날개 밑으로 넣었을 뿐이죠. ... 저는 네페도프에게 공장 책임자 시페르가 트로츠키주의자라는 것에 대한 정보가 있다고 하였으나, 그는 '뭐가 문제인데? 너 미쳤어? 그는 이바노보 주 공산당의 대표고, 우리 조직 최고의 볼셰비키야.'라고 하더군요."


자와.. 자와...


이번에도 밑으로의 반발이 재개되었습니다.


신원미상의 목소리: "지역 당 회의 때는 왜 이런 말을 안 한 겁니까?"

신원미상의 목소리: "너무 늦었어요!"

쥐라블례프: 사실입니다. 그러나 늦은 게 안 한 것보다는 낫지요.

신원미상의 목소리: 늦은 게 안 하는 것보다 낫다? 너무 낡은 변명입니다. 


다수의 목소리가 바이노프를 극딜했습니다. 처음에 프라브다 사설을 은폐하려 했던 시도에 대해 격렬히 비난을 했찌요. 바이노프 파벌 밖에 있던 군 당서기 렙킨은 "2월 5일에 프라브다 사설이 있었죠. 그러나 3월 8일~10일이 되기까지 지역 당 기관지에는 아무것도 관련 내용이 출판된 게 없고, 어떤 응답과 결정도 없었잖습니까. 이건 주 당조직에서 프라브다를 숨기려고 했던 의도입니다." 마찬가지로 군 당서기였던 발라히나도 "주 당조직은 프라브다 기사에 대해 토의한 바도 없죠."라고 알렸습니다. 


릐빈스크 시의 당서기였던 부샨코프가 말했습니다. "무엇보다, 주 공산당의 가장 큰 실수는 당국이 프라브다 기사를 불일치한다는 이유로 숨기는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고, 바이노프 동지도 유감스럽게도 회기에서 그걸 꺼낼 필요를 못 느꼈다는 점이라고 여겨집니다." 바이노프는 "당국에서는 어떤 결정도 내린 바가 없습니다."라고 답했으나 부샨코프가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프라브다의 비판을 거부하고자 하는 특수한 목적과 함께 고의로 수행되었죠."


물론 이는 이미 게임 끝난 문제였고, 진짜 일이 시작될 사안은 바이노프의 친밀한 심복들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철권으로 그의 주를 다스리던 바이노프와 심복들은 비판을 불허해왔었고, 이는 공포를 통해 유지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바뀌어 바이노프의 이름이 대놓고 언급되면서 개인적 비판까지 시작됩니다. "방금 바이노프 동지는 아첨을 이유로 시와 주의 지도부를 그의 연설에서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그것을 고쳐야할지는 말하지 않았죠. 저는 주 지도부의 핵심 문제가 여기, 주 지도부와 바이노프 동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판의 부재가 있어왔죠." 



쥐라블례프의 꼬리자르기 덕분에 네페도프는 격렬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앞서 말한 부샨코프도 네페도프가 야로슬라블에서 반혁명분자들과 연관된 정치적 실수를 얼버무리고 넘어왔다고 까면서 트로츠키주의자라고 판명된 몇몇 인물들에 대한 후원자이자 보호자였다고 공격받습니다. 바이노프는 그의 돈바스 파벌이 끌은 어그로마저도 네페도프 쪽으로 돌리며 그럭저럭 비판을 마킹해내는 데 성공합니다. 네페도프는 표면적으로 건강상 문제를 핑계삼아 야로슬라블 시를 떠났고, 회의도 못 나오게 되었습니다. 바이노프도 네페도프의 부재 이후 열심히 시체를 팔아먹었습니다만, 돈바스 파벌에 대해 아무 말도 안 하고 가기에는 너무 위험했습니다.


바이노프: "이바노보, 모스크바, 돈바스, 그리고 소련의 다른 지역에서 온 일꾼들은 한 가지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들 스스로를 구원자라고 생각했다는 점이죠. 다른 지역에서 와서는 '너희를 구하러 우리가 왔다' 이런 식으로 말했습니다."


청중들: "옳소!"



노련한 정치인답게 바이노프는 여기서 처신을 나름 적절히 했습니다. 사람들의 정념을 채워줄만큼 자아비판과 돈바스 파벌에 대한 비판을 던지되, 특정 인물을 언급하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눈치 빠른 이들은 이걸 체크했었죠. 군 당서기인 오르가노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조금 구체적이어야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프라브다는 바이노프 동지를 비판했었죠. 이것이 아첨이나 후견이 아니라고 해도 어찌되었든 이 상황은 날카로운 비판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바이노프는 이에 동의하는 척 하면서 주제를 돌리나, 결국 능숙하게 넘겨버립니다. "프라브다가 내가 데려온 일련의 당의 일군들을 비판하는 것은 다들 아시죠. 단순한 산수를 해보십시요. 그 사람들은 7명에서 9명 정도 될 분입니다. 그건 요점일 수가 없어요. 야로슬라블은 소련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오는 새로운 주입니다. 중앙위에서 여기로 보낸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그들 모두에 대한 책임이 나에게 있단 말입니까?"


바이노프는 자신이 이바노보 파벌과 돈바스 파벌 사이에서 얼마나 열심히 중재를 했는지 강조하면서 위기를 모면합니다. 3월 회기에서 다수의 지역당원들이 자신을 몰아내고 파벌을 해체시키려는 시도는 실패로 끝났고, 당기율검사위원회 대표와 짝짜쿵해서 네페도프마저 다시 요직으로 불러들여 2등 서기로 복직시킵니다. 형식상 몇몇 지역당 인사들이 당내 선거로 뽑히기는 하였지만, 눈가리고 아웅이었죠.


바이노프는 스탈린의 대숙청으로부터 살아남았습니다. 도저히 쉴드 불가능한 동료 몇몇을 잃었을 뿐이지, 대숙청이 한창 진행되던 와중에서 스탈린이 그 이름을 직접 언급할 정도의 인물이 숙청의 총탄을 피하는 것에 성공했단 말입니다. 중앙-지방 갈등에서 바이노프의 놀라운 정치력으로 대숙청의 예외가 될만한 정도의 인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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