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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날림번역 <스쿼드론> 고대 켈트인 (1) +a

작성자Τιταυιζ|작성시간08.05.09|조회수1,356 목록 댓글 8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좋은 그림과 쉬운 설명이 있는 책을 참 좋아합니다...^^;

 

그나저나 돌아오는 5월 15일은 이 책의 일러스트를 그리신 故 맥브라이드 화백 타계 1주년입니다... 뭐 저도 불법날림번역을 하는 주제에 이런 말을 할 자격은 없겠지만... 여튼 우리모두 망자의 영혼을 생각해 줍시다.

 

 

서문.

 

켈트 전사들의 역사는 무려 3천여년에 걸쳐 있으며, 이들은 장구한 역사의 흐름속에서 매우 독특한 군사 문화를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이에 반해, (서) 로마군의 역사는 기껏해야 천여년 남짓에 불과하며, 중세기사들의 역사는 고작 500년 이상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남긴 흔적들이 오늘날에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상태를 유지한 채 그토록 오랜 시간을 견뎌냈다는 것은 참으로 놀랄만한 일입니다. 글에앞서 켈트 전사들에 대한 기록을 두가지만 끄집어 내 보도록 합시다. 첫번째 기록은: "그넘들이 검을 집기만 하면 얼마나 가공할 파괴가 펼쳐지는지! 아무도 그들앞을 가로막지 못하며, 성벽또한 그들의 가공할 잔혹함 앞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두번째 기록은:  "노래를 부르면서 전장에 도착한 그들은, 큰 소리를 지르고 펄쩍펄쩍 뛰면서 그들의 무기와 방패를 부딪혀 귀를 멍멍하게 만든다... 만약 당신이 그들의 맹목적인 첫번째 공격을 막아낼 수만 있다면, 그들의 사지는 곧 축 늘어질 것이다..." 이 두 기록은 모두 접근전에 능숙했으며, 손에 칼을 쥐고 돌격하기를 즐겼던 전사들에 대한 묘사이지만, 이 두 묘사는 기록된 시기가 무려 2,000년이나 차이가 납니다. 첫번째 기록은 1757년의 퀘벡 전투에서의 스코틀랜드 하이랜더들에 대한 기록이며, 두번째 기록은 기원전 189년의, 아시아 지역의 켈트인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와같은 그들의 흉포함과 용맹무쌍함에 대한 명성이 그토록 오랫동안 이어졌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지만, 분명 여러분중 누군가는 그들이 전투에 오직 헌신적인 용맹만으로 참가한 것인가 하고 의문을 품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의문은 타당한 것이며, 수세기에 걸친 연대기 기록들을 살펴보면 켈트인들에 대한 좀더 많은 사항을 알 수 있으니, 그들은 고대시절부터 돈을 받는 용병생활로 먹고사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물론 전쟁이 그들 문화의 핵심을 이루고 있기는 합니다만, 이들은 이 특징적인 전투능력에 오직 "광기" 라는 단어로만 정의될 수 있을 또 다른 특징또한 동시에 지니고 있었습니다. 고대 기록에는 이들이 오직 허리에 걸친 칼집을 제외하고 완전히 나체로 싸웠다는 언급이 있어 왔습니다. 그들은 적의 민간인과 군인을 가리지 않는 무차별적인 광포함과 적의 머리를 수집하는 습관으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기원전 3세기경의 한 그리스 왕에 의해 주문제작된 대리석 조각에는, 몸에 걸친 것이라고는 토르크 torc (금속 목걸이)뿐인 전사들이 적에게 굴복하느니 차라리 자살을 택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좀더 후대의 켈트인들의 기록에서 이 "광기" 는 전사가 괴물로 변하는 과정으로 종종 묘사됩니다. 에린의 영웅 쿠훌린이 전투에 앞서 행한 이와 유사한 행동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갑자기 발작을 시작했다. 이 발작은 그를 일그러뜨렸으며, 그를 괴물같은 형상으로 보이게 했다. 모든 뼈와 내장들이 마치 폭풍우에 흔들리는 나무처럼 흔들렸다. 그의 몸 내부는 피부 밑에서 꽈배기처럼 꼬였다. 그의 허벅지는 마치 그의 송아지의 그것처럼 근육이 울퉁붕퉁 올랐다. 그의 몸 군데군데에 근육 덩어리가 전사의 주먹크기만큼 몽아리졌다. 그의 머리는 부풀면서 심하게 요동쳤다. 그의 혈관이 팽창했다. 갑자기 그는 그의 한쪽눈을 머릿속으로 밀어넣었는데, 따라서 심지어 학이라 할지라도 그의 두개골안에 들어간 눈을 끄집어 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의 뺨 피부는 턱뼈에서부터 벗겨져 식도부분의 뼈와 연골이 드러났다. 그의 턱은 덜덜 부딪혔으며, 그의 목에서는 거품이 흘러나왔다. 그의 머리카락은 마치 검은 덤불마냥 꼬이거나 곤두서 있었다." 작가는 이 구절에서 전사가 전투에 돌입하기 전에 얼마나 무시무시한 증오로 충만해 있는지, 그리고 동시에 어떠한 과정을 거쳐 한마리의 사나운 짐승으로 변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투가 끝나고 주민들 앞에서 퍼레이드를 할 때면, 그는 평상시의 핸섬한 외모로 돌아와서 그의 평온한 인상으로 주민들을 안심시켰습니다. 켈트인들의 이러한 광기에서 기인한 공포때문에 로마인들과 그리스인들의 무장은 점점 중무장화 되었습니다. 켈트인들의 이러한 관습은 오랫동안 지속되었으니, 웰링턴 공작 휘하의 아일랜드인과 스코틀랜드 출신 병사들은 한 차례의 일제사격 후, 그들의 선조들의 돌격에 전혀 부끄럽지 않는 돌격을 감행했습니다.

 

켈트인들 역시 자신들의 전투기술에 대한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이러한 자신감은 그들의 아름답게 세공된 무기나 갑주에서뿐만이 아닌, 그들의 크고작은 모든 유물들로부터 미루어 알 수 있는 특징입니다. 그들은 또한 훙륭한 기수들이기도 했으니, 그들의 뛰어난 마술馬術은 그들이 먼 옛날의 고향이었던 유라시아 초원지대에서 살았을때부터 전해져 온 것으로 추측되며, 이러한 마술은 그들이 서부와 북부 유럽을 차지하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남부 브리튼에 산재해 있었던 영토내에서 그들은 백악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백마를 조각하기도 했으니, 따라서 그들이 이 지역또한 지배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한편 그들의 교역규모가 커짐에 따라 기존의 작은 동전들이 큰 동전으로 교체면서 그들은 새로운 동전에 전차와 말, 그리고 이 호전전인 사람들의 속도감과 역동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울퉁불퉁한 다리와 휘날리는 망토를 새겼습니다. 이 책에 실린 앵거스 맥브라이드 화백의 훌륭한 그림들은 켈트인들의 자부심과 호전성에 관한 시각적 자료을 제공하는 동시에, 그들의 장구한 역사를 재구성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할슈타트 Hallstatt 호숫가에 서 있는 켈트인들, 기원전 6세기 중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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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스타트는 현재의 오스트리아 짤츠부르크 인근의 한 마을이며, 19세기에 이곳에서 발견된 부장품들은 이 초기 유럽지역의 켈트인들의 통치기 명칭을 이 마을의 이름을 따 짓게 만들었으며, 이 유물들은 아마도 기원전 7세기에서 기원전 5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측됩니다. 할레 Halle, 할레인 Hallein 과 같은 많은 유럽의 지역명과 유사한 이 지역명은 이 곳의 암염광산의 존재를 암시하고 있으며, 또한 선사시대의 초기 무역에서 소금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하겠습니다. 선사시대의 부족장들과 그들이 지배하는 공동체에 있어서 소금은 부의 중요한 근원이었습니다. 소금은 음식이 변질되는 것을 막아주고, 그 맛을 훌륭하게 해 주었으며, 또한 다른 물건과 교역하는 데에도 쓰였습니다. 소금의 훌륭한 보존성은 한 암염광부의 시체의 예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 바, 먼 옛날에 붕괴된 암염굴에서 발견된 이 시체는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거의 부패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중부 유럽지역의 켈트 전사들은 이러한 소금 무역으로 부유해져갔으며, 그들의 영향력은 다뉴브강과 라인강을 따라 프랑스와 남부 독일로 퍼져나갔습니다. 이 시기의 초기에 많이 쓰인, 단순히 구리와 주석만으로 만들 수 있었던 청동은 점차 철기로 대체되었으니, 이 역시 켈트인들의 막대한 부를 보여준다 하겠습니다. 농업역시 충분히 발달되어 있었지만, 약탈또한 주기적으로 행해졌습니다. 약탈은 노예와 같은 부가적인 "가축" 을 얻게 해 주었는데, 이들은 (소금과 철광석과 함께) 와인과 사치품의 결제수단으로써 로마와 그리스 등지로 수출되곤 했습니다. 그들의 호전적인 문화는 켈트인들의 영토 확장에 있어서 그들의 적수의 존재를 허락하지 않았기에 오래지 않아 중부 유럽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지만, 그들 켈트인 부족간의 끊임없는 불화는 그들로 하여금 어떠한 형태의 제국을 건설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림의 전사들은 켈트인 지도자와 그 추종자들의 부유함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청동과 철은 무기를 장식하거나 강도를 높이는데 함께 쓰였습니다. 왼쪽의 인물은 볏 장식이 달린 돔 형태의 투구를 쓰고 있는데, 이는 파사우와 바바리아와 같은 중부 유럽에서 발견되는 전형적인 초기 켈트식 투구이며 그 기원은 기원전 1000년경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러한 형태의 투구는 세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거의 형태가 변하지 않았으며, 급기야는 에트루리아인들과 같은 다른 지역의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그는 또한 못장식이 되어있는 흉갑을 착용하고 있습니다. 그의 청동제 검은 초기 켈트식 검의 전형적인 특징인 "비스듬한 어깨" 형태의 가드가 달려 있습니다. 초기 고전작가들은 켈트인들의 울 의복을 "체크무늬가 된" 혹은 "알록달록한" 이라는 단어를 써서 표현했으며, 이는 아마도 오늘날의 스코틀랜드 지방의 고유한 격자무늬와 비슷한 의미로 해석됩니다.

 

중앙의 인물은 그의 허리에 방어용 청동판을 두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넓은 전투용 벨트는 켈트인들의 신화에서 "전투용 앞치마" 로써 곧잘 목격됩니다. 분명 이것은 초기 제정시대의 로마 병사들이 착용했던 벨트와 비슷한 것이지만, 현란 장식이 되어있는 켈트인들의 벨트는 방어목적 보다는 과시적 목적이 더 컸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철제 칼날을 가진 검은 끝부분으로 갈수록 뾰족해지는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매우 거대하고 긴 할스타트식 검은 대체로 기병이나 전차병들을 위한 베기 위주의 검이었음을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그의 청동제 단검은 그 손잡이 부분에 두개의 고리장식이 달려 있는데, 이는 이 시기에 유행한 전형적인 "더듬이" 장식이었습니다.

 

오른쪽의 전사는 고대 켈트인들의 상징이었던 멧돼지 깃발을 들고 있으며, 그의 철제 투구에는 한 쌍의 날개가 달려 있습니다. 동물들에 관한 이야기들은 켈트인들의 전설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또한 동물들의 힘에 대한 숭배의 관습이 있었다는 것이 이 그림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지도자급 전사들은 전투에 대한 분노의 결과로서 그들의 인간의 형태에서 동물의 힘을 가진 괴물로 변할 수 있다고 믿어졌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후대의 바이킹인들에게도 발견되는 바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동부유럽의 전사들의 복장에 깃털을 꽂는 전통으로 살아남았으니, 이는 17세기와 18세기의 폴란드 윙 훗사르들의 복장에서 화려함의 극에 달했습니다. 또한 오른쪽 전사는 청동 못으로 장식된 덧대여진 튜닉을 입고 있으며 6각형 모양의 방패를 다리에 기대어 놓고 있습니다. 이러한 긴 방패는 초기 이탈리아 방패의 모습에 큰 영향을 끼쳤으리라 생각됩니다.

 

뉴샤텔 Neuchatel 호숫가의 켈트인들, 기원전 5세기 초중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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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텐느 La Tene 라는 단어는 "얕은 여울" 이라는 뜻이며, 현재의 스위스의 뉴샤텔 호수에 해당하는 얕은 여울 지역에서 켈트 전사들은 그들의 신들에게 검과 기타 다른 무기들을 봉헌했습니다. (이곳에선 인간의 해골도한 발견되었으니, 여기서 신들이 인신공양 또한 원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06년과 1917년 사이에 이 지역에서 많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으며, 이는 기원전 5세기에서 기원전 1세기까지의 켈트인 문화를 "라 테네" 라 불리게 만들었습니다.

 

좀더 이른 시기인 할스타트 문화와 이 시대의 켈트인들간의 차이점은 매장관습에서 발견됩니다. 이제 전사들은 종전의 육중한 사륜 마차안에서 묻히지 않고, 대신 가벼운 이륜 전차안에서 묻혔습니다. 이러한 전차의 사용은 이 시기의 켈트식 전쟁방식에 비견해 볼때 연구자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중부유럽의 지형은 일련의 전차대가 궁수나 경보병들을 싣고 이동식 플랫폼 역할을 수행하면서 적 보병라인을 격파하는 고대 중동식 전차운용방식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카이사르는 전차들이 전투에 쓰이기는 했다고 언급했지만, 대부분 전투직전에 적을 겁주는데 쓰였으며 막상 전투가 시작되면 전차병들은 전차에서 내려서 싸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지도자급 전사들이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나오는 그리스 영웅들이 비록 전장에 도착할 때에는 전차를 타고 왔지만 막상 싸울때는 내려서 싸웠다는 묘사와 비슷합니다. 그리고는 전투가 끝나고 흩어지는 적들을 추격하는데 쓰였습니다. 고대 에린인들의 영웅이었던 쿠훌린은 스파이크가 박힌 그의 전차를 그의 적들을 향해 폭풍처럼 돌진시켰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그림의 켈트 전사들은 뉴샤텔 호숫가의 전사들이 가지고 있던것과 유사한, 넓은 날을 가진 창과 긴 철제 베기용 검으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청동제 갑옷과 투구를 입고 방패를 들고 있는데, 이 방패는 떡갈나무로 만들어졌으며, 중앙부분이 청동이나 철판으로 보강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방패 유물들은 그림의 전사들이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는 호숫가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림의 전사들은 아마도 전투를 위한 희생제물에 대해 의논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초기 켈트인들이 착용했던 청동 갑옷은 아마도 미케네인들과 같은 좀더 남쪽 사람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한편 로마인들은 켈트인들이 발명한 메일아머를 받아들였습니다. 여기에는 철제 고리들이 서로 연결되어 튜닉모양으로 만들어졌으며 어깨위에 놓여진 추가적인 메일장갑은 착용자들을 내치리는 검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켈트인들의 메일갑옷의 유물의 실물은 매우 드물며, 일반적으로 그들의 메일갑옷을 광범위하게 받아들인 로마인들의 유물에서 이러한 켈트인들의 과학적 발전을 엿볼 수 있습니다.

 

강력한 철검과 창으로 라 테네 문화권의 켈트인들은 전 유럽을 휩쓸고 다니면서 그들의 문화를 곳곳에 이식시켰으며, 급기야는 지중해 지역의 구석구석으로까지 뻗쳐 나갔습니다. 그들은 스페인과 이탈리아, 그리고 그리스와 심지어 아시아 지역인 터키까지 진출했습니다. 서쪽으로 진출한 켈트인들은 현재의 프랑스와 영국, 아일랜드를 휩쓸면서 그들의 발전된 군사기술과 뛰어난 마술을 이용하여 원주민들을 압도했습니다. 이제 그들의 군사적 관심은 잔인함과 효율성에 있어 그들의 호적수로 부족함이 없는 로마로 돌려질 참이었습니다.

 

중부유럽의 언덕요새, 기원전 5세기 중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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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요새는 켈트 부족들과 그 전사들의 권력의 중심이었습니다. 물론 서유럽 지역의 이러한 요새들은 켈트인들이 도래하기 전에도 존재했습니다만, 켈트인들 역시 이러한 공격하기 힘든 방어시설들을 상당히 많이 건설했습니다. 이러한 언덕요새들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 많은 수가 건설되었으며, 또한 그 방어구조 또한 점점 더 복잡하게 변해갔습니다. 애초에 단순히 흙과 나무로만 지어진 누벽들은 점차 세공된 돌로 보강되어 갔으며, 벽 뒤에는 엇갈리게 배치한 침목들이 벽을 지탱하게 되었습니다. 그 위에는 목재로 만든 울타리와 이동통로, 그리고 전투를 벌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으며, 탑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설치되었습니다. (대략 EB 에 나오는 켈트 성벽을 연상하시면 될 듯..;) 때때로 누벽에 쓰인 목재와 잡석들은 사고로 그랬든 의도적으로 그러했든 화재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러한 화재는 석재의 유리화를 초래했으며, 이렇게 녹은 성벽은 덩어리째 튼튼하게 될 수 있었습니다.;; 좀더 큰 언덕요새들은 내부의 주거공간을 몇 겹의 누벽과 울타리로 둘러싸는 형태를 하고 있었으며, 복잡한 출입구가 이 누벽들을 관통하고 있었습니다. 이 방어시설들은 때때로 별도의 측면보호용 탑이나 머리위에 설치된 육교들에 의해 보강되었으며, 때로는 출입구에 대한 정면 공격을 막기 위한 외루外壘가 설치되어 있기도 했습니다.

 

영국에 남아있는 철기시대의 언덕요새 중 가장 보존상태가 양호한 것은 도체스터 근처에 위치한 현재 메이든 성 Maiden Castle 이라 불리는 방어시설입니다. 이 세 겹의 타원형 누벽에 의해 방어되는 47에이커 남짓한 방어시설의 역사는 5,000년전 신석기시대의 한 촌락의 방어시설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더 많은 흙들이 파여져 누벽이 만들어졌습니다. 현재 볼 수 있는 이 요새의 웅장한 모습은 기원전 1세기경에 두로트리게스 Durotriges 부족이 점거한 후 완성된 것입니다. 약 백년 후 로마가 브리튼을 침공할 때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휘하의 두번째 아우구스투스 군단이 이 요새를 공격했습니다. 이때 무시무시한 전투가 벌어졌으며 무기와 침목들의 잔재들이 묻히지 않은 채 버려졌습니다. 역시 묻히지 못한 뼈들이 그들의 주인이 검에 배였음을 증언하고 있으며, 그중 한 척추에는 화살촉이 박혀 있습니다.

 

하지만 유럽지역 켈트인들의 언덕요새 중 가장 유명했던 것은 현재의 중부 프랑스 지역의 디종 근처에 위치했던 알레시아의 요새였습니다. 카이사르는 기원전 52년에 이곳에서 갈리아인들의 위대한 군주였던 베르킹게토릭스와 대치했습니다. 알레시아는 고원지대에 위치한 난공불락의 요새였으며, 삼면이 급류가 흐르는 강으로 둘러쌓여 있었습니다. 로마군이 몰려옴에 따라 목재 울타리가 토루위에 설치됨으로서 방어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카이사르는 이 난공불락의 요새를 단순한 돌격만으로 점령할 수 없음을 통찰하고 있었습니다. 대신 그는 장기적인 공성전을 택했지만, 베르킹게토릭스는 다른 켈트 부족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그들과 함께 반격을 감행하여 로마군을 그들 사이의 샌드위치 신세가 되게 만들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카이사르는 대규모의 건설사업을 시작하여 베르킹게토릭스를 겨냥한 장장 11마일에 달하는 요새를 건설하고, 또한 좀더 대규모의 요새를 그 외각에 건설하여 다른 켈트 구원군들의 공격에 그 자신과 부대를 보호했습니다. 이러한 건설이 끝나자 카이사르는 마침내 공성을 시작했습니다. 비록 켈트전사들이 베르킹게토릭스를 구원하기 위해 속속 모여들었지만 카이사르는 결국 켈트인들이 자신들의 패배를 인정할때까지 각개격파로 산산조각을 내버릴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지난한 공성전이 끝나자 카이사르는 켈트인들의 프랑스지역을 효과적으로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켈트인들의 언덕요새는 켈트인들의 힘을 상징함과 동시에 그들의 몰락을 웅변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그림에 묘사된 고위 전사들은 라 테네 시대의 전형적인 무기와 갑옷을 갖추고 있습니다. 중앙의 족장은 프랑스의 마른 강 일대의 베루 Berru 에서 발견된 것과 유사한 뿔모양의 청동제 투구를 쓰고 있습니다. 이 투구는 윗부분이 깃털 장식이 나 있으며, 뒷부분에는 목 가리개가 달려 있습니다. 그의 칼집은 프랑스의 샹파뉴 지역에서 발굴된 유물의 예와 같이 철제 사슬에 매달려 있습니다. 맨 오른쪽의 족장은 망토를 고정시키는 장식된 브로치를 착용하고 있습니다.  전형적인 라 테네 금속제 유물들을 살펴보면, 그 켈트인들이 금속을 가공하는데 능숙했으며, 또한 그 금속들에 에나멜 칠을 하거나 금박을 입하는 기술들도 알고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켈트인들은 자신들만의 고유한 장식 뿐만 아니라 그들의 확장된 교역로를 통해 접할 수 있었던 그리스나 라틴, 심지어는 멀리 떨어진 스텝 지역 주민들의 문양들에 대한 지식또한 가지고 있었습니다. 켈트인들은 금속제 투구위에 볏 장식이나 깃털 장식을 하는 것을 즐겼지만, 지금은 남아있지 않은 가죽과 같은 좀더 가벼운 재료로 만들어진 투구들 역시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켈트인들이 북부 이탈리아의 에트루리아 인들을 공격하다, 기원전 4세기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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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유럽에서의 켈트인들의 세력은 기원전 4세기에 그 절정에 달했으며, 켈트 전사들은 정복에 목말라 있었습니다. 그들의 주의를 끈 비옥한 욕심나는 땅은 알프스 산맥 아래 포강 유역의 북부 이탈리아 지역이었으나, 이 지역은 이미 에트루리아인들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 에트루리아 사람들 역시 호전적인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은 남쪽의 그리스인 정착지를 공격하여 이탈리아 반도내의 그들의 영토를 늘렸으며, 또한 그리스식 전술의 많은 부분을 받아들였습니다. 북부 이탈리아에서의 켈트인들의 영향력의 확장은 원래 무역을 동반한 평화적인 모습으로 시작되었으나, 기원전 4세기초가 되면서 그들의 관심은 약탈로 옮겨졌으며, 곧이어 대규모의 침공이 시작되었습니다.

 

인스부레인들은 롬바르디지역의 현재의 밀라노인근에 해당하는 멜품 Melpum 을 공격하여 마침내 기원전 396년경에 함락시켰습니다. 그 후에 보이인들이 이탈리아 반도에 들어와서 현재는 볼로냐라고 불리는, 그들의 이름을 따 지어진 보노니아 Bononia 를 건설했습니다. 마르차보토 Marzabotto 의 에트루리아인들의 정착지는 약탈당했으며, 그 지역의 묘지에서는 전형적인 라 테네 스타일의 철제 검이 발굴된 바 있습니다. 펠시나 Felsina 역시 에트루리아 방어자들과 켈트인 침략자간의 지난한 격전끝에 기원전 350년 이전에 결국 함락되었습니다. 한 묘비에 새겨진 그 전투의 모습을 살펴보면 승마상태의 그리스 스타일의 복장을 갖춘 에트루리아인들이 나체인 채 검과 거대한 방패로 무장한 켈트 보병들과 맞붙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세기가 끝나갈 무렵이 되면 북부 이탈리아에서 에트루리아인들의 영향력은 거의 사라졌으며, 이제 이 지역은 라틴인들에 의해 갈리아 키살피나 Cisalpine Gaul 라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켈트인들은 이것만으로 만족하지는 않았습니다. 켈트 전사들은 더 남쪽으로 말을 달려 아직은 그 군사력이 충분하지는 않았던 로마와 대치하게 되었습니다. 알리아 전투에서 로마군대는 켈트인들의 사나운 돌격에 압도되었습니다. 로마인들은 그들의 대형이 붕괴되면서 자신들이 거대하고 강력한 켈트인들의 맞수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 켈트인들의 장검은 로마인들의 찌르기용 단검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켈트인들은 패주하는 로마인들을 추격하면서 로마로 진격하여 그 도시를 약탈했습니다. 켈트인들의 지도자였던 브레누스 Brennus 는 자신의 체중에 해당하는 금을 요구했습니다. 로마인들은 이 치욕을 그 이후로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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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ae victis!"

 

이 일을 계기로 로마인들은 켈트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받아들였으며, 이는 그들의 전쟁방식을 바꾸었습니다. 그들은 켈트인들의 메일갑옷과 타원형 방패, 그리고 켈트식 투구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켈트인들의 돌격을 투창으로 약화시킨 다음, 그들이 전력으로 내려치는 검 공격을 방패로 막은 후 적들의 복부를 쩔러죽이는 기술을 습득했습니다. 마침내 100여년 후, 로마인들과 켈트인들의 상황은 역전되었으며, 로마인들은 켈트인들의 북부 이탈리아를 침공했습니다. 그 중 한 대결에서 한 로마인 장군은 전통적인 켈트인들의 영웅적 전쟁방식에 따른 인스부레인들의 결투신청을 받았습니다. 로마장군은 말을 타고 두 군대 사이의 빈 공간에 도착했습니다. 북부 이탈리아 켈트인들의 지도자였던 비르도마누스 Virdomanus 는 자신이 라인강의 물속에서 태어났다고 외치고는 로마 침략자들을 금방 해치우겠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그는 그의 말에서 뛰어내려 로마 장군을 향해 그의 창을 단졌으며, 로마 장군역시 그를향해 투창을 던졌습니다. 이 두 창은 모두 목표에 빗나갔기에 두 지휘관은 검과 방패를 들고 격돌했으며, 양쪽은 자신의 지휘관들을 응원했습니다. 하지만 이 결투는 갑자기 끝나 버렸습니다. 로마장군의 검이 켈트장군의 목을 베어버렸으며 그의 굽은 황금 목걸이가 바닥에 툭 떨어졌습니다. 기원전 225년에 벌어진 텔라몬 전투에서 마지막으로 북부 이탈리아에서 독립상태를 유지하던 켈트부족이 패배당했으며 이제 이 지역은 욱일승천하는 로마제국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이 그림의 켈트 전사들은 라 테네 스타일의 투구와 방패를 소지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이끄는 전사는 프랑스에서 발견되는 것과 유사한 사람의 형상을 한 손잡이가 달린 철검을 들고 있습니다 (이 검의 폼멜은 사람의 머리모습을 하고 있으며, 그 팔은 공중에 펼쳐져 있으며 그 다리는 굽은 현태의 가드를 이루고 있습니다.) 두번째 전사는 참수된 에트루리아인의 머리를 들고 있습니다. 전쟁에서 인간의 머리를 수집하는 것은 켈트인들에게 있어 영예의 전리품을 수집하는 행위의 증요한 부분을 차지했는데, 그들은 인간의 영혼이 그 머리에 들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신앙을 간직하고 있던 켈트인들은 적들에 의해 사로잡히거나 부상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적 지휘관의 시체에서 잘라낸 머리를 부적으로써 고집스럽게 간직하고 다녔습니다.

 

켈트인들의 북부 그리스 침공, 기원전 3세기 초중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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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들은 켈트인들을 "켈토이 Keltoi" 라고 불렀습니다. 그리스인 중 가장 위대한 이 중 한명이었던 알렉산더 대왕은 그의 고향 마케도니아 북부지역에 거주하던 이 야만족들의 자부심에 된통 당한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의 궁정에 와 있던 켈트인 사절들에게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으면서 내심 "오직 전하 뿐입니다." 라는 대답을 원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대답하는 대신, 자부심에 가득찬 이 켈트인들은 정직하게 대답하기를 "저희들은 오직 하늘이 저희위로 무너져 내리는 것과, 땅이 갈라져서 저희를 삼키는 것과, 바다가 솟구쳐 우리를 가라앉히는 것 만이 두려울 따름이옵니다." 즉, 그들에게 두려움을 끼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며, 알렉산더는 결과적으로 모욕을 당한 것입니다. 그의 강력한 군대가 거대한 페르시아 제국을 굴복시키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복자가 될 것임을 고대세계가 알게 될 것인데 이 보잘것 없는 야만인들이 대체 뭘 안다고 그에게 그런 모욕을 준단 말입니까? 알렉산더는 그의 분노를 간신히 억제하고 마케도니아 남쪽의 그리스에 있던 군대를 집중하여 동방을 정복하는데 골몰했습니다. 이것은 사실 큰 실수였습니다. 약 50년 후, 이 보잘것없던 야만족들은 그리스로 치고 내려오면서 마케도네아의 왕을 죽였고 고전세계를 황폐화시켰습니다.

 

켈트인들은 그리스인들이 약해졌을 무렵을 노렸습니다. 위대한 알렉산더 대왕이 죽자 마케도니아는 분열되었으며, 그리스 본토 역시 다시금 갈기갈기 쪼개졌습니다. 켈트군의 지도자였던 브레누스는 그의 부하들과 함께 다뉴브 강을 건넜으며, 부하들에게 신들을 모시는 사원이 있는, 그리스 도시의 무지막지한 부가 그들을 기다린다는 연설로 전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렸습니다. 켈트인들이 그리스로 통하는, 산악지형을 통해 나 있는 전통적인 길을 따라 그리스를 침공한 것은 기원전 279년 여름의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거친 이러한 통로들 중 가장 유명했던 곳은 2세기 전에 스파르타인들이 페르시아인들을 맞아 마지막 일인까지 싸웠던 테르모필라이였습니다. 지금은 그와는 다른 그리스 군대가 이 새로운 침략자들과 맞서 싸우기 위해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아테네의 칼리포스 Callipos 는 주로 홉라이트 방식으로 훈련받은 약 25,000명의 병사들을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그리스인들에게 있어 켈트인들의 군사력은 미지의 영역에 속했으나, 그리스 도시들간의 내전에 있어서 용병으로써 자주 활약하기도 했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이러한 전장에서 그들은 높이 평가받았으며, 또한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들의 특이한 전투방식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이 두려움을 모르는 이들을 표현할 적당한 단어를 알지 못한다. 만약 어떤 사람에 대한 미쳤다거나, 감각을 상실했다거나, 심지어 지진이나 폭풍우조차 그를 두렵게 하지 못한다는 등의 표현은 분명히 이 켈트인들을 설명하기에 적합한 것이리라.". 이러한 광기는 후대에 켈트인 자신들의 기록에 의하자면, 인간의 형태를 한 일종의 동물적 괴물로의 변형이었으며 이는 전투의 트라우마가 지속되는 동안 계속되었으며, 그들의 적 만큼이나 아군들까지도 공포에 휩싸이게 만들었음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브레노스는 무려 20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내려왔다고 말해지고 있습니다만, 이는 언제나 야만인들의 숫자를 부풀리기 좋아하는 전형적인 그리스 연대기작가들의 농간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이 약탈군은 수천명의 기병과 그외 이들을 따라온 사람들, 그리고 얼마 안되는 포로들의 총합 이상의 숫자를 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스인들은 스페르케이우스 Spercheius 의 교량을 파괴함으로써 켈트인들의 진격을 막고자 했습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써 브레노스는 그의 부하들에게 명령하여 그들의 큰 방패를 뗏목삼아 그 거친 급류를 건너라고 명령했습니다. 켈트인들은 인근의 주민들을 동원하여 교량을 급조하는 한편, 이러한 방식으로 차례차례 강을 건넜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거치는 마을마다 소름까치는 약탈이 벌어졌기 때문에 켈트인의 진격속도는 상당히 늦었으며, 이러는 동안 그리스인들은 집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방어태세는 식인행위를 포함한 켈트인대에 대한 온갖 잔인한 괴소문들에 의해 더욱 응집되었습니다. 마침내 동틀 무렵 전투가 시작되었는데, 애초에 그리스인들은 유리한 위치에 서 있었으니 그 거친지형 때문에 켈트인 기병들은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으며, 이 기회를 놓칠새라 그리스 보병들은 창과 방패를 가지고 접근전을 벌였습니다. 하지만 켈트인들은 그들 특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전투를 벌였으니, 그들의 몸에 박힌 창을 뽑아내어 그리스인들에게 힘껏 던져 되돌려 주기까지 했습니다. 이와는 별도의 전투가 근처의 해안가를 낀 도로에서 벌어졌는데 여기에 그리스인들은 그들의 삼단노선들을 끌고 왔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인들은 활이나 돌을 던져 켈트인들을 공격했습니다. 하루종일 계속된 전투끝에 많은 전사자가 나왔지만, 승패는 명확히 가려지지 않았으며, 켈트인들은 그들의 상황이 불리함을 깨닫고 일단 후퇴했습니다.

 

몇주 후, 브레노스는 자신 휘하의 일단의 기병들을 보내 인근 아에톨리아 지역을 약탈하도록 명했습니다. 이는 테르모필레에 버티고 있던 그리스군 전열에 분열을 야기했으니, 아에톨리아 출신의 홉라이트 병사들이 그들의 토지와 가족들이 켈트인들의 폭력에 내던져진 것을 눈뜨고 보지만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에톨리아인들이 떠나가자 그리스군은 현저하게 약화되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브레노스는 켈트인들이 자신들의 땅에서 물러가 다른이들의 땅으로 옮겨가기만을 간절히 원하는;;; 몇몇 목동들의 협조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켈트인들에게 테르모필라이 인근의 비밀 통로로 안내했으며, 곧 그리스군은 켈트군의 포위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역시 테르모필라이는 배반의 땅인 것인가...-_-) 아침안개의 도움을 받아 켈트인들은 그리스인들을 밀여붙여 분단된 그들을 자신들의 배로 후퇴하게 만들었습니다. 자신들의 몸을 갤리로 내던짐으로써 그리스인들은 가까스로 전멸의 비극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브레노스는 테르모필라이를 돌파했으며, 이제 그리스의 다른 지역들은 그의 다음행동에 촉각을 곤두세웠습니다.

 

브레노스와 그 부하들이 델포이 신전을 털어먹다, 기원전 3세기 초중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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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르모필라이에서 그리스군 주력을 물리친 브레노스는 이제 그 보상을 원했으니 그 보상은 오로지 금과 은으로만 측정될 수 있을 것이었습니다. 그의 전사들은 이미 약탈물에 대한 약속을 받은 상태였으며 만약 그가 그들의 욕심을 채워주지 못한다면 그들은 스스로 패거리를 짜서 약탈을 시작할 기세였습니다. 이러한 사태를 피하고, 그의 군대를 하나로 계속 유지시키기 위해 브레노스는 델포이로 통하는 파르나소스 골짜기를 통해 남쪽으로 진군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파르나소스 산의 사면에 위치한 델포이는 그리스 세계의 심장부였습니다. 이곳은 아폴로신에 의해 이끌어진 고대 그리스인 침공자들의 천상의 신들이 땅의 숭배자들에 의해 떠받들여진 거대한 용신 Python god 을 참살한 곳이었습니다. 이제 이곳에는 태양의 신 아폴로를 기리는 사원이 세워졌으며, 그 둘레에는 숭배자들의 봉헌으로 부유해진 마을이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신전 자체도 수세기 동안 전 세계에서 수집된 보물들로 가득차 있는 상태였습니다. 브레노스에게 있어 이는 참으로 가치있는 보상이 될 것입니다만, 아폴로 신 역시 이 지역을 그리 쉽게 포기하지는 않을 테세였습니다.

 

켈트넘들이 델포이로 진격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오자 그 주민들은 사원의 사제들에게 신탁을 요구했습니다. 신탁녀를 통해 아폴로 신께서는: "나는 내 소유물을 지킬 것이다." 라는 선언을 내렸습니다. 그는 전투의 양상에 대해 예언하기도 했습니다. "최후의 날에 서쪽 세상끝에서 타이탄들이 눈사태와 같이 몰려올 때, 그들은 야만인들의 검과 켈트인들의 전술을 써서 몰려올 것이니, 우리 모두는 머지않아 죄값으로써 이들에 맞서 투쟁에 참여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신은 그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켈트인들이 산악로를 따라 신전으로 잡근하자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바위가 떨어지고 절벽이 전사들의 머리위로 무너져 내렸습니다. 또한 하늘이 어두워졌고 천둥번개가 쳤습니다. 유성들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려와 일부 켈트 전사들을 소사시켰습니다. 눈과 강추위가 많은 부상자들을 죽게 만들었습니다. 게다가 예전의 그리스 영웅들의 영혼들까지 이들의 접근을 방해했다고 말해지고 있습니다.; 비록 켈트인들이 어지간한 자연현상에 겁을 먹는 이들은 아니었지만, 이러한 초자연적인 사건들은 그들을 공포에 질리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 연대기작가들의 기록에 의하자면, 켈트인들의 재물에 대한 탐욕은 이러한 아폴로신에 기인한 공포심을 압도했습니다. 당시 이 사원에는 수천명의 그리스 전사들이 켈트인들을 막기위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브레노스는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 기분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전사들은 그리스 병사들을 일소하고 여사제들을 살해한 다음 마을과 사원 모두를 약탈했습니다.

 

그리스 세계는 이러한 폭력에 격분했습니다. 고전 세계에 있어서 이 사건은 북쪽에서 내려온 야만족들에 의해 자행된 가장 악독한 잔혹행위로 기억되었습니다. 물론 브레노스에게 있어서 이는 엄청난 성공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약탈품들은 다뉴브 북부와 서부의 켈트인들의 지역으로 운반되었습니다. 그 중 일부는 툴루즈 인근 신성한 연못의 켈트 신들에게 봉헌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브레노스는 이러한 승리의 대가를 치루어야만 했습니다. 돌아오는 긴 여정동안 격분한 그리스인들이 활을 쏘고 돌을 굴리면서 켈트인들을 계속 공격했습니다. 이러던 어느날 밤, 공포가 켈트인들에게 엄습했으며, 그들은 자기들끼리 유혈극을 벌였습니다. 브레노스는 이러한 와중에 부상을 입고 결국 얼마후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는 일반에게 있어 아폴로신이 마침내 자신의 원수를 갚았다고 해석되었습니다.

 

이 그림은 델포이 신전의 계단 위에서 승리를 만끽하고 있는 브레노스를 그린 것입니다. 그의 전사들은 신성한 보화들을 옮기고 있습니다만, 그들 주위에는 분노한 신들이 번개를 내리치고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의 브레노스는 후대의 로마 조각에 기초하여 재구성된 메일 갑옷을 입고 있습니다. 이 갑옷의 어깨부위에는 별도의 보호대가 달려 있습니다. 복잡하게 연결된 메일 갑옷의 가장 오랜 유물은 그 건설연도가 기원전 3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루마니아의 한 무덤에서 발견되었는데, 이 유물은 켈트인들이 이러한 형태의 갑옷의 발명자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하겠습니다. 브레노스는 사슬로 만들어진 벨트를 허리에 감고 있으며 금목걸이 -켈트인들의 가장 전형적인 장신구- 를 목에 걸고 있습니다. 금이나, 더 흔하게 발견되는 철로 만들어진 이러한 목걸이는 자유인임을 나타내는 상징이었습니다. 이 목걸이 유물은 현재의 터키에서 영국에 이르는 모든 켈트 사회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됩니다.

 

델포이를 털어먹은 후, 살아남은 많은 켈트전사들이 많은 동족들이 거주하고 있는 마케도니아로 퇴각했습니다. 이들 중 일부는 분수에 맞지않게 탐욕스러워져서 부유한 그리스 지도자였던 안티고노스의 진영을 공격하기로 작당했습니다. 그들에 의해 야간 기습공격이 행해졌지만, 켈트인들은 그리스 숙영지가 텅텅 비어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즉, 그들은 함정에 빠진 것이었습니다. 인티고노스는 기원전 278년의 리시마케이아 Lysimacheia 전투에서 켈트인들에게 통럴한 패배를 안겼습니다. 켈트인들은 더 이상 그리스 세계를 주름잡을 수 없음을 깨닫고 자신들을 유혹하는 다른 모험에 몸을 맡겼습니다. 한 전사집단이 비잔티움으로 건너가서 바다를 건너 아시아에 도착했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좀더 동쪽의, 오늘날의 앙카라 인근 지역에서 그들만의 왕국을 세우기 전까지 비튜니아 왕의 용병으로 복무했습니다. 그들이 건설한 갈라티아라 알려진 왕국은 켈트인들이 세운 왕국 중 가장 동쪽에 세워진 나라였습니다.

 

이집트의 켈트인 용병, 기원전 3세기 초중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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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의 켈트인들이 그리스를 침공하기 한 세기 전부터 그들은 그들의 마술을 필요로 하는 그리스군의 용병으로 복무했습니다. 기원전 4세기경의 그리스 기병장교이자 연대기 작가였던 크세노폰은 그리스 도시국가간의 전쟁에서 보여진 그들의 활약에 관해 기록한 바 있었습니다. 이 중 테베인들에게 맞선 켈트인들에 관한 기록에는: "그들은 비록 수는 적었지만 여기저기서 활약을 펼치고 있었다. 일단 그들은 테베인들을 향해 투창을 던지면서 공격한 후, 적들이 자기들에게 전진함에 맞서 투창을 던졌으며, 곧잘 그들 주위를 선회하면서 투창을 던졌다. 이러한 전술을 펼치면서 그들은 때때로 하마하여 휴식을 취하곤 했다. 하지만 만약 누군가가 쉬고있는 그들을 공격할 기세라도 보인다면 그들은 곧장 말에 올라타서 퇴각하곤 했다. 만약 테베측 전사들이 이들을 테베군으로부터 멀리 쫓아버린다 해도, 이들은 다시 돌아와서 투창을 던져댔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들은 테베군 전체를 농락했으며 그들이 원하는대로 공격과 후퇴를 선택할 수 있었다." 이것은 전쟁터의 켈트인들에 대한 유명한 기록인 동시에 그들이 벌거벗은 야만인이라는 편견에 오염되지 않은 기록이기도 합니다. 이 기록에서 켈트인들은 먼 훗날 승마보병의 형태로 싸운, 말잔등 위에서나 땅 위에서나 싸울 수 있었던 용기병들과 같은 방식의 전투를 치뤘던 것으로 보입니다.

 

켈트 용병들의 명성은 알렉산더 대왕의 제국이 무너진 후, 몇몇 그리스계 지도자들이 지중해 인근의 왕국들을 다스리고 있었던 그리스 세계에 널리 퍼졌습니다. 이집트에서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들어섰지만 그들은 용병들에게 크게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지나친 의존은 화를 불러일으키는 경우도 있었으니, 기원전 259년경, 그의 라이벌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그의 켈트인 부대원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나일강을 따라 그들만의 켈트 왕국을 세우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그들을 패배시킨 후, 가혹한 처벌을 내렸으니 전투에서 죽지않은 이들은 나일강의 작은 섬들에 굶어 죽도록 내버려졌습니다. 이런저런 불상사가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몇년 후 겔트인 용병을 다시 고용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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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맥 화백께서 몽베르 출판사의 의뢰를 받아 그리신 "프톨레마이오스 군대" 에 실린 삽화 중 하나입니다. 제가 그린것도 올리려 했으나 간신히 참았음.. -_-;

 

프톨레마이오스 3세와 4세도 계속 켈트인 부대를 유지시켰는데, 이들은 아시아와 유럽사이의 교량지역인 헬레스폰트 지역에서 모집되었으며, 이러한 사실은 많은 켈트인들이 그리스인들에게 패배한 후, 마케도니아 지역에 거주했다는 사실을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한번은 켈트인들의 한 무리가 용병으로 고용되어 이집트로 오는 도중 뱃머리를 돌려 되돌아간 적도 있었는데, 그 이유는 월식 때문이었습니다. 켈트인들에게 있어 월식은 패배의 전조였기 때문에 그들은 전투를 거부하고 돌아간 것이었습니다. 라피아 Raphia 전투에서 4천명의 켈트인 기병들이 프톨레마이오스의 편에서, 역시 얼마간의 켈트인 용병을 고용하고 있던 셀레우케이아 군대에 맞서 싸웠습니다. 전투가 격화되면서 몇몇 이집트인들이 패주하기 시작했고 셀레우케이아 군대는 그들을 추격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추격전에서 셀레우케이아 군대는 무질서해졌으며, 이에 프톨레마이오스는 켈트 기병들을 출전시킬 기회를 잡았으니, 그들은 일찍이 이와같이 엉성해진 대열을 이룬 적 보병들을 처리했던 때 보다 더 즐거웠던 적이 없었을 겁니다. 크세노폰 역시 이와 유사한 기억을 회고하고 있으니, 그의 회고에 등장하는 켈트기병들은 그들의 장검을 가지고 달아나는 그리스 보병들을 베었습니다.

 

이 그림에 나와있는 켈트인들은 배를 타고 나일 강 곳곳의 역사적인 건축물들을 구경하면서 그들의 이집트 복무를 즐기고 있습니다.^^ 그들 주위의 이집트인 하인들은 큰 키의 금발전사들이 입고있는 메일갑옷과 청동투구에 주눅이 들어있는 상태입니다. 사실 그들의 모습은 이집트인들의 눈에 매우 이국적으로 보였을 겁니다. 그림에 그려진 켈트인들은 이집트인들에 대해 상당히 거만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이들은 아마 이 땅이 자신들이 취하기만 하면 자신들의 것이 될 것이라 논의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켈트인들은 충성스러운 군인들이었으며 특히 프톨레마이오스 5세는 반란을 진압하는데 이들을 투입하기도 했습니다. 켈트인들이 이러한 외국 군대에 대한 복무에 진지한 마음으로 임했다는 것은 프톨레마이오스 5세 시절에 새겨진, 세티 1세의 묘벽에 현존하는 켈트인들의 몇몇 낙서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 낙서에는 "갈라티아인인.. 저희 토아스, 칼리스트라토스, 아칸논, 그리고 아폴로니오스는 이곳에 와서 저희가 잡은 여우를 바치옵니다." 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 낙서는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그리스어로 씌여져 있는데, 이는 그들이 그리스인들이 지휘하는 이집트군에서 복무하면서 그리스어를 마스터했음을 보여주며, 이는 현대의 프랑스 외인부대원들이 프랑스어에 통달하도록 교육을 받는 것과 유사하다고 하겠습니다. 또한 이중 한 켈트인, 혹은 칼라티아인의 이름이 그들의 조상들이 백년전에 털어먹은 신전의 주인인 그리스의 아폴로신의 이름을 딴 것이라는 것 역시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라 할 것입니다.

 

브리튼에 도착한 갈리아 난민들, 기원전 1세기 중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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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유럽의 켈트인들에게 있어 복수의 여신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가장 성공적인 로마 군사 지도자였던 그는 고대 겔트인들의 군사적 지배의 흐름을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그가 오기 전까지 켈트인들은 중부와 서부 유럽에서 무적의 힘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등장한 후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으며, 켈트 독립 지지자들은 오늘날 겔트인들의 변두리 지역 Celtic Fringe 으로 알려진 브리튼과 아일랜드 변두리로 물러났습니다. 게다가 나쁜 소식이 기원전 65년과 60년 사이에 또 들려왔으니, 아리오비스토스라 알려진 게르만 군사 지도자가 (현재의 프랑스 지역의) 갈리아인들의 영토를 침공한 것이었습니다. 프랑스지역의 케트인들은 그들의 켈트 경쟁자들과 경쟁함에 있어 이들 게르만인들을 이용했습니다만, 이는 게르만인들의 힘을 강화시키고, 그들을 탐욕을 부추긴 결과만 가져왔습니다. 갈리아인들이 로마에게 도움을 요청함으로써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그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이 전쟁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각개격파"라는 단어보다 더 적잘한 단어는 없을 겁니다. 켈트인들의 요청을 받고 카이사르는 로마군을 이끌고 갈리아로 들어왔으며, 이로써 그의 갈리아 원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카이사르는 이이제이 전략을 이용하여 켈트인들끼리 싸우게 만들었으며, 켈트 기병들을 용병으로 고용하는 한편, 약해진 족장들에 대한 승리를 거둔 후 자신의 편에 편입시키곤 했습니다. 그가 이런 방식으로 갈리아의 심장부까지 진격해 들어와서야 켈트인들은 현실을 깨닺고 이에 맞서기 시작했습니다. 갈리아 북부지역에서는 특히 무섭기로 유명한 부족 연맹체가 있었으니 이 부족들, 즉 벨가에 Belgae 인들은 카이사르의 진로를 가로막았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게르만인들과 맞서면서 단련되어 이젠 자신들도 게르만인이 다 되었다고 봐도 좋을 이 사람들은 실로 무시무시한 전사들이었으며, 카이사르는 이들을 처리하느라 골머리를 썩혔습니다. 그는 그의 켈트인 동맹기병들을 보내 벨가에 지방을 약탈하도록 시켰으며, 이에 그들의 토지가 로마인들에 의해 파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벨가에인들이 동요하기 시작했습니다. 카이사르는 그의 주력군을 참호 뒤에 숨겨놓고는 전초전이 어느정도 치열해질때 까지 기다렸는데, 이러한 전술은 사실 켈트 자신들이 수백년전에 그리스인들에게 사용한 바 있는 전술이었습니다. 아마도 카이사르는 이러한 사실을 그가 애독한 어느 고전문헌에서 읽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쨋든 이 전술은 주효했습니다. 벨가에 주력군의 물자는 바닥이 났으며, 결국 그들의 군대는 계속되는 습격의 긴장 속에서 무너져 내렸습니다. 승기를 잡은 카이사르는 그의 주력군을 진격시켰으며, 벨가에인들은 산산조각이 나 버렸습니다.

 

그림에 묘사된, 이제는 피난민 신세가 된 두명의 갈리아 전사들은 영국해협을 건너와 브리튼의 켈트 족장에게 그들에게 닥친 운명을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족장이 올라타 있는 훌륭한 이륜마차는 전형적인 라 테네의 켈트인들의 스타일에 따라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 가벼운 전차들은 재빠른 이동수단이었으며, 몇몇 역사가들은 서부유럽에 처음으로 대규모 길을 만든 이들은 로마인들이 아닌 이들 켈트인들이라는 의견을 내고 있기도 합니다. 이 역사가들은 애초에 켈트인들이 그들의 전차를 몰기 편하도록 건설한 널판지를 깐 쭉쭉뻗은 길을, 후대의 로마인들이 단순히 돌로 포장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켈트인들의 동전중에는 그들의 역동성을 살펴볼 수 있는, 전차와 기수들이 새겨져 있는 동전들도 있는데, 여기서 전차를 끄는 콧구멍을 벌름대는 말은 울퉁불퉁한 강인한 다리로 전차를 끌고 있으며, 전차기수는 그의 망토를 휘날리면서 전차를 모는 모습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 그림에 보이는 브리튼의 족장은 멋진 청동투구를 쓰고 색유리로 상감세공을 한 청동 방패를 들고 있습니다. 이 그림에 묘사된 이러한 장비들은 모두 템즈강에서 발견된 기원전 1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에 기초한 것입니다. 하지만 몇몇 고고학자들은 이러한 장비들이 전투용이 아닌, 의식용 장비라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여기 묘사된 투구는 아마도 신상神象에 쓰인 것일지도 모릅니다. 여기에 묘사된 것과 유사한 장식이 되어있는 무기들이 강의 신에 대한 봉헌의식에 쓰이곤 했습니다. 무기에 나타나는 대칭적인 장식패턴은 원래 켈트인들의 것이 아닌, 이탈리아나 근동지역에서 유래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어쨋든 영국지역의 켈트인들은 전 유럽을 뒤덮고 있는 매우 복잡한 무역 네트워크의 일부였습니다.

 

기원후 43년에 있었던 사건은 영국지역의 켈트인들이 해협을 건너온 그들의 동료 켈트인들에게서 교훈을 얻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남부 잉글랜드의 아트레바테스 Atrebates 인들은 카투벨라우니 Catuvellauni 인들의 공격을 막다못해 결국 로마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물론 로마인들은 기꺼이 상황에 간섭했으며, 곧 로마군대가 브리튼에 상륙했습니다. 켈트인 부족들은 반세기가 넘도록 자기들끼리 싸웠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로마인들은 스코틀랜드 저지대에 이르는 브리튼 섬을 자신들의 제국의 일부로 삼기 전까지 자신들의 입맛에 맛는 부족들을 지원하며 어부지리를 누렸습니다. 북부 브리튼의 역사가인 길다스는 기원후 540년경에 이 사건에 대해 결론내리기를: "진실로 말하노니 이들은 언제나 외적에겐 약했으나, 자기들끼리의 내전엔 강했다." 라는 언급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켈트세력의 패배는 켈트인 전부가 재난을 당했다거나, 그들 모두가 로마인들의 통치에 굴복했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로마제국은 많은 경우 그들이 중앙권력에 복종하여 세금을 납부하는 한, 지방의 족장들이 이전처럼 자신들의 영토를 다스리게끔 허용했습니다. 따라서 켈트인 군사 지도자들은 이전처럼 영국과 프랑스의 기들의 영토를 통치했으니, 이제 그들은 로마스타일의 주택에서 살면서 서로를 라틴식 이름으로 불렸으며, 카이사르 군대가 오기 전보다 훨씬 빈번하게 이탈리아산 와인을 즐겼습니다.

 

브리튼의 족장, 카시벨라우누스 Cassivellaunus, 기원전 1세기 중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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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세기 중반의 어느 날씨좋은 날에 브리튼섬의 켈트인들이 도버의 백악절벽 위에 서서 로마제국이 그들의 갈리아 형제들을 공격하느라 피어오르는 불빛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대륙에서 도망쳐온 피난민들이 번쩍번쩍한 철과 청동으로 만든 갑옷으로 몸을 감싼 로마 군단병들과, 그들이 건설한 강력한 요새들에 관한 소식들을 이미 전해준 상태입니다. 몇몇 브리튼인들은 대륙의 친구들을 도와서 해협을 건너 물자와 전사들을 보내자고 진언하기도 했습니다. 드루이드들은 외관상으로는 이러한 조력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카이사르가 결코 포기할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또한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어쨋든 이들간의 연합을 막기 위해 카이사르는 기원전 54년에 함대를 모아 해협을 건너 남부 잉글랜드에 상륙했습니다.

 

카이사르 군대의 상륙에 저항하는 이는 없었습니다만, 켈트인들은 이 수백척의 배에 빽빽히 들어찬 병사들을 주의깊게 바라보았습니다. 내륙으로 전진해가면서 카이사르는 일단의 전차와 기병으로 구성된 켈트인들이 그들의 진로를 가로막는 것을 보았습니다. 곧 소규모 접전이 벌어졌으나, 카이사르의 부대들은 켈트인들의 언덕요새를 "거북 등" 진형을 이용해 기어올라 휩쓸어 버렸습니다. 그러는 동안 남부 잉글랜드의 부족들 사이에 침략자들을 몰아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에 군사 지도자들이 모여서 그들의 통일된 지휘관을 선출하였으니, 이 지휘관 카시벨라우누스는 그 이름이 기록에 전해지는 첫 브리튼인입니다. 카시벨라우누스는 카두벨라우니 부족의 부족장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자신이 브리튼에 침공해 온 자였으니, 브리튼에 침공해와 현재의 런던 북부에 자리잡기 전까지는 원래 북부 프랑스에 분포하던 벨가에 족의 일원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비록 켈트인들이 외적의 침략에 맞서 브리튼의 원주민처럼 용맹하게 저항하기는 했으되, 실은 그들 자신들도 로마나 그 후대의 침략자들처럼 원래 브리튼에 거주하던 진짜 원주민들을 침략하여 그들을 잔인하게 대체한 이들이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카시벨라우누스는 로마인들에 대해 게릴라전을 펼쳤는데, 휘하의 전차들과 기병들을 적절히 지휘하여 로마인들을 자신들의 참호화된 숙영지안에 숨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브리튼인들이 자신들의 능력을 지나치게 과신하고 있는 동안, 로마인들은 경사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그들을 잔인하게 몰아냈으며, 이제 카이사르는 템즈강변으로까지 진격했습니다. 곧 로마인들은 카시벨라우누스 자신의 영토에까지 진입했습니다. 켈트 전사들은 나무 교량들이 강가에 가라앉히고 그 반대편에서 적을 기다렸습니다만, 카이사르는 그의 부하들을 강으로 보내어 그들의 머리가 강 위로 솟을만한 얕은 지점을 찾아 간신히 도하에 성공했으며, 뒤이은 전투를 통해 켈트인들을 몰아내어 그들의 원래 고향으로 쫓아버렸습니다. 상황에 이렇게 되자 카시벨라우누스의 동맹은 그 기세가 약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인근의 트리오반테스 부족은 로마와 화약을 맺고 로마에게 카투벨라우니족에 맞설 도움을 요청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이 위대한 족장이 틀어박혀 있는 언덕요새의 위치를 발설하기까지 했습니다.

 

자신의 주력부대와 함께 카이사르는 그들의 언덕요새와 요새 내부의 방어자들에게 압도적인 공격을 가했습니다만, 카시벨라우누스는 그 어디서도 찾을수가 없었습니다. 그 대신, 이 켈트 군사지도자는 로마군의 상륙지 근처에 거주하던 켈트인들에게 로마인들의 수송로와 통신로를 차단하기 위한 공격을 명령했습니다. 이에 카이사르는 해변가의 그의 기지로 황급히 돌아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양쪽모두 큰 손해를 입지는 않았습니다만, 양측이 생각하는 손실은 단순한 숫자 이상의 것이었으며 카이사르의 기록의 의한다면, 마침내 카시벨라우누스는 로마측에 인질을 제공하고 공물을 바치며, 카이사르가 갈리아로 돌아가는 것에 협조하겠다는 조건으로 평화를 제의했습니다. 카이사르는 이에 만족하는 듯이 처신했지만, 사실 이 기록은 카이사르 자신이 쓴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할 것입니다. 사실 카시벨라우누스는 현명하게 카이사르의 진격을 막았다고 설명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며, 카이사르를 그의 숙영지로 몰아낸 동시에 그로 하여금브리튼을 포기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이 켈트 군사 지도자는 로마군을 브리튼에서 몰아내는 대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이 그림에서 재구성된 카리벨라우누스의 모습은 런던 북부를 흐르는 템즈강에서 발견된 유물을 묘사한 그림에 나와있는 장식이 된 청동 갑옷을 착용한 켈트 대군주의 모습에 기초하여 재현된 것입니다. 그의 오른쪽에는 전차와 언덕요새의 입구가 보이는데, 이 두가지는 모두 전형적인 브리튼에 거주한 켈트인들의 스타일에 기초하여 재현된 것입니다. 그의 왼쪽에는 가슴에 푸르딩딩한 문신을 한 전사가 서 있습니다. 초기 브리튼 거주 켈트인들을 부르는 단어인 "프레타니 pretani" 는 아마도 "자신들의 몸에 그림을 그리는 넘들"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듯 합니다. 이 단어는 후에 "브리타니 Britanni" 라는 단어로 변형되었으니, 이 단어는 이 섬나라와 그 주민들을 가르키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카이사르는 브리튼인들이 그들의 몸을 푸른 얼룩으로 채운다고 기록했는데, 많은 역사가들은 이 물질이 아마도 식물에서 추출되는 푸른 염료인 대청이 아닐까 하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체셔지방의 린도우 습지에서 발견된 잘 보존된 켈트인의 시체는 이러한 의견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이 소위 린도우인이라 불린 시체의 몸에 새겨진 안료는 남동광이나 공작석을 다량 포함한 구리성분이 풍푸하게 배어있는 진흙임으로 밝혀졌으며, 이 또한 강렬한 푸른색을 낼 수 있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로마군에 복무한 켈트인들이 마르코마니인들의 부락을 불태우다, 기원후 2세기 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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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트인들이 로마제국과 간신히 공존할 수 있었던 많은 방법 중 하나가 로마군에 전사들을 공급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많은 켈트 젊은이들에게 있어서 그들이 로마 보조군으로 복무하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습니다만, 이는 진정한 국제혼성군에 편입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였으니, 로마군의 일원으로써 그들은 지중해 세계를 구경할 수 있었으며, 만약 운이 좀 좋다면 상당한 정도의 부도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세월이 흐른 후의 스코틀랜드의 하이랜더들도 마찬가지였으니, 이들중에는 대영제국 군대의 일부에 편입되어 전 세계를 돌아 다니면서 기회를 잡아, 식민지에서 사업가로 활약하면서 막대한 부를 거머쥐는 행운을 누린 이들도 있었습니다. 또한 고대 켈트인에게 있어서 이렇게 로마군에 복무하는 것은 오랜 원수를 갚는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마르코마니족은 다뉴브강 북쪽에 거주하는 게르만족의 일파였습니다. 기원 후 181년경에 마르코마니인들은 쿠아디 Quadi 인들과 함께 다뉴브강 남쪽의 로마 속주를 털어먹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공격에서 그들은 중부유럽지역 켈트인들의 오랜 심장부를 황폐화시켰으며, 그 주민들을 괴롭혔으니, 이들은 이 지역의 로마화된 켈트인들을 학살했습니다. 원래 이 지역의 켈트인들과 게르만인들은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수세기동안 그들은 상대방의 영토를 털어먹어 왔습니다. 하지만 작금의 게르만인들의 침공은 갈리아의 켈트인들로 하여금 로마인들의 도움을 요청하게 만들었는데, 이는 그들의 영토가 게르만인들에게 점령된 상황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다뉴브 지역의 켈트인들은 기꺼이 로마인들의 편에 서서 이 야만족 침략자들과 맞섰습니다.

 

위의 그림은 로마군에 복무한 켈트 전사들이 마르코마니인들의 부락에 가한 보복약탈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중앙의 켈트 전사는 메일갑옷의 값싼 대용품인 스케일 갑옷을 입고 있는데, 이 갑옷은 다시금 로마군에서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메일갑옷 만큼이나 역사가 오래된 이 갑옷은 중동지역에서 유래했으며, 청동이나 철제 금속판등의 재료를 연결하여 만들어졌습니다. 다른 전사들은 메일갑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들의 투구는 아티카 타입인데, 이는 로마의 트라야누스 광장의 부조에 묘사된 것과 같은 형태의 것입니다. 아 투구들은 평소에는 퍼레이드때 쓰기위해 꽁쳐두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쨋든 투구위에 달려있는 한쌍의 깃털 장식은 초기 켈트식 투구들을 생각나게 하며, 이 그림에서는 로마화된 켈트인들을 단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그려졌습니다. 로마군의 역사를 통틀어 비 이탈리아 출신 전사들은 그들 고유의 문화의 영향을 받은 전투복을 입거나, 아니면 단순히 입수하기 쉬운 의복을 입고 싸웠습니다. 그림에서 부상을 입은 게르만족 전사는 로마의 기병용 청동 투구의 변형을 착용하고 있는데, 이 투구는 무역이나, 아니면 이전의 약탈에서 노획한 것으로 보입니다.

 

중앙의 켈트 전사는 야만인의 머리를 들고 있는데, 아마도 그의 로마인 지휘관에게 제출하여 보수를 받을 요량으로 보이며, 마찬가지로 18세기 중반의 프랑스-인디언 전쟁에서도 양측은 병사들이 획득한 적의 머리수에 따라 군료를 지불했습니다. 적의 머리를 수집하는 것은 국경지대의 야만부족 사이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일이었으며, 변경지역의 많은 켈트 전사들 역시 계약제로 일하는 약탈물 수집꾼으로 활약하면서 야만족 도적들을 털어먹고는 그들의 재물을 수집하기 전에 그들의 머리를 들고 와서 시장바닥에 진열하곤 했습니다. 로마 연대기를 살펴보면 이러한 약탈물 수집꾼으로써 카리에토 Charietto 라는 이름을 찾을 수 있는데, 그는 주로 트리에르 인근의 라인강 변경지역을 쏘다니고 다녔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산적질을 하고 살았지만, 곧 이러한 삶에 지쳤으며 결국 근처의 로마 마을로 가서 군적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습니다. 야간공격에서 그는 야만족 산적들에게로 박박 기어가서 그들이 잠자고 있을때 그들의 머리를 베었습니다. 곧 그는 자신과 같은 전문적인 머리 수집가들로 이루어진 패거리의 두목이 되었습니다. 지방의 로마 지휘관은 그의 성공에 관한 보고를 듣고 그의 가치를 인정했습니다. 이 시기 로마군이 침공해오는 프랑크인들에 맞설때, 카리에토와 그의 부하들은 프랑크인들을 야간공격으로 괴롭혀도 된다는 허가를 받았습니다. 카리에토는 이런저런 전공으로 로마군 내에서 승승장구했지만, 마침내 그의 운도 바닥나는 날이 있었으니, 어느날 그는 알레마니족의 대부대와 조우하여 그들의 창에 찔려 죽었습니다.

 

2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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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투창병 | 작성시간 08.05.17 켈트족이 인도어 유럽어족 이기 때문입니다.
  • 작성자강희대제[역블] | 작성시간 08.05.28 우옹 이전사들은 왜케 포스가넘쳐나죤?;;
  • 작성자타메를랑 | 작성시간 10.02.20 훌륭한 자료, 잘 보았습니다. 스크랩해 갈 터이니, 부디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 ^ ~
  • 작성자타메를랑 | 작성시간 12.06.27 안녕하세요, Τιταυιζ 님. Τιταυιζ 님께 한 가지 부탁을 하고자 이렇게 연락드립니다. 저는 지금 전쟁이 만든 종족들의 역사라는 원고를 집필하고 있습니다. 원고 중에서 Τιταυιζ 님이 예전에 우리 카페에 올리신 <열세번째 지파: 하자르 제국의 역사> 편과 <스쿼드론> 고대 켈트인 편에서 언급된 하자르인과 켈트인에 대한 내용 중 일부를 참조해서 제 원고에 꼭 넣고 싶은데, 원저자이신 Τιταυιζ 님의 허락을 받고자 연락드렸습니다. 허락해 주신다면, Τιταυιζ 님의 이름은 꼭 책에 넣겠습니다. 부디 허락해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편안한 하루 보내시고, 건강하세요.
  • 답댓글 작성자Τιταυιζ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06.28 안녕하세요^^ 사실 법률적인 문제는 제가 잘 모르지만, 원 출판사에 대한 저작권 문제만 없다면, 이 번역에 대한 저작권(..이라해야 하나요? 그런게 있다면^^)은 전혀 전~~~혀!! 신경쓰실 필요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제 이름또한 넣으실 필요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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