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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날림번역 <스쿼드론> 고대 켈트인 (2)

작성자Τιταυιζ|작성시간08.05.09|조회수2,177 목록 댓글 10

다키아 지역의 켈트 전사들, 기원후 2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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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다키아 지역은 현대의 다뉴브 강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트란실바니아의 산악지대를 포옹하는 현대의 루마니아 지역과 거의 비슷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다키아인들은 매우 다양한 인종과 문화과 뒤섞인 결정체였습니다. 흑해 북쪽에서 온 초원의 전사들이 이 지역에 이주해 온 것으로 보이며, 그들의 사르마티아 문화는 현재의 불가리아 지역에 해당하는 그리스-트라키아 문화와, 서쪽의 중부유럽에서 건너온 켈트인들의 문화와 섞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지역에서 켈트인들의 주력이 서쪽으로 빠져나간 후에도 켈트식 문화를 계속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키아 사람들은 재빨리 농업과 상업에 기반을 둔 정착문명을 받아들인 건설적인 사람들이었으며, 그들 삶에서 배어나는 부유함은 인근의 부러움을 샀습니다. 기원후 2세기경, 이 부유한 지역은 로마황제 트라야누스의 주목을 끌었으니, 그는 기원후 101년에서 105년 사이에 이 지역에 원정대를 보냈습니다.

 

이 전쟁에서 다키아인들이 로마에 어떻게 저항했는지 논의하기 위해 우리가 사용한 주된 사료는 기원후 113년, 로마에 세워진 트라야누스 황제의 기념탑입니다. 이 석주의 조각에는 켈트인들이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많은 물건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다키아인들은 템즈강가에서 발견된 청동방패와 크게 다르지 않은, 소용돌이 모양의 켈트 스타일의 무늬로 장식된 타원형 방패를 들고 다녔는데 이 방패에는 크고 둥근 청동판이 덮혀진 돌출된 부분이 나 있었습니다. 다키아인들의 투구는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었으니, 하나는 단순한 원뿔 모양의 투구였으며, 다른 하나는 프리지아 지역의 투구처럼 뾰족한 끝이 앞쪽을 향해 나 있는 형태의 투구였습니다. 사실 이들 투구에서는 딱히 켈트인들의 것이랄 만한 특징이 잘 느껴지지 않으며, 대신 그리스인들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갑옷은 메일아머와 스케일아머, 그리고 밴드형태의 갑옷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기본적인 의복은 튜닉과 바지, 그리고 망토였습니다. 검은 켈트나 게르만 스타일의 긴 베기 위주의 검이었으며, 그중 한 유물에서는 라 테네 스타일의 흔적을 엿볼 수 있습니다. 마치 오늘날의 풍향계와 비슷한 모습을 한 입벌린 용모양의 깃발은 스케일 아머처럼 시르마티아 초원 전사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한편 켈트인들의 carnyz 스타일을 본딴 트럼펫이 발굴된 바 있습니다. 그들의 기본적인 무기로는 창과 투창, 도끼 그리고 활 등이 있었는데 여기에 다키아인들의 고유한 무기인 팍스 falx 가 추가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림에서 앉아있는 인물은 날이 굽어있으며, 사무라이들의 양손으로 붙잡는 검과 유사한 스타일의 이 무기 (팍스) 를 가지고 있습니다. 로마인들이 이 치명적인 무기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검투사들이 쓰던것과 유사한 정강이받이와 팔 보호대의 사용을 늘렸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트랴아누스는 모두 열 세개 군단을 동원하여 다키아를 침공했습니다. 다른 지역의 켈트인들처럼 다키아인들도 그들 앞에선 일단 후퇴했으며, 대규모 회전을 벌이는 것을 피했습니다. 기원후 101년 겨울에 그들은 반격을 감행했으나 결국 격퇴당했습니다. 트라야누스는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어 진격했으며 마침내 다키아인들의 도읍을 발견했습니다. 다키아인들의 지도자였던 데케발루스 Decebalus 는 자신들의 도읍을 파괴하기보다는 일단 로마인에게 넘겨주는 선택을 하였으며, 이에 트라야누스는 이 새로운 속주를 획득했다는 자신감에 자신을 다키우스라고 부르면서 보무도 당당하게 로마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데케발루스는 적당한 때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마침내 기원전 105년에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게릴라전의 양상을 띤 잔인한 전쟁이 이어졌으며, 양측은 상대방에게 갖은 잔혹행위를 저질렀습니다. 결국 다키아인들의 도읍이 로마 병사들에게 점령되자, 데케발루스는 북쪽으로 도망간 뒤, 그곳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 전쟁기간 동안 로마인들은 옛날, 카이사르가 베르킹게토릭스에 맞서 그러했던 것처럼 공병술에 있어 온갖 지혜를 발휘했습니다. 그 중 중요한 성과로는 다뉴브강을 가로지르는 목재 교량 -이 거의 1킬로미터에 달하는 교량은 고대시대의 상설 교량으로는 가장 긴 길이를 자랑했습니다.- 과, 오르소바 Orsova 의 철문으로 통해는 벼량길을 닦은 것 등이 있었습니다. 후자의 길은 가파른 석회암 지대를 통해 나 있었는데 이 12킬로미터에 달하는 길은 부분적으로 바위를 깍아 만든 것이며, 가장자리에는 절벽에 쐐기로 고정된 까치발에 의해 지탱되는, 폭이 9인치 가량의 널판지로 연결된 부가적인 노견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조직과 공학분야에서 로마인들이 보여준 이러한 인상적인 성과들 역시 트라야누스의 석주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마인들이 보여준 이러한 완고한 결심을 고려할 때, 다키아인들이 그들의 독립을 유지하는데 실패한 것이 놀랄일은 아니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로마인들에 의해 약탈당한 다키아 마을, 기원전 2세기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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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은 트라야누스의 제 2차 다키아 원정기간 동안 한 다키아 마을에 자행된 로마인들의 약탈의 결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트라야누스가 이 원정에서 얻은 이익은 막대했습니다. 다키아인의 왕만이 악정을 행한 것이 아니었으니, 로마인들도 이득이 되는 다키아 지역의 금광에 탐욕스런 손을 뻗쳤습니다. 때문에 다키아인들과 로마인들 사이에 특기할 정도로 잔인한 격전이 벌어졌습니다. 위의 그림에서 로마군 제 30 (XXX) 군단, 울피아 군단의 병사들은 다키아인들의 오두막에 피로 그들의 흔적을 남겨 놓았기에, 이 참상을 초래한 이들이 누군지 잘못 파악하는 실수는 벌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베트남전 당시 일부 미군 병사들이 자신들이 약탈한 마을에 "전화카드" 를 던져놓고 감으로써 적들이 이 긴장, 혹은 힘의 주인이 누구인지 오해를 하지 않은 것과 유사하다 할 것입니다.

 

비록 켈트인들과 로마인들이 로마제국 내에서도 그럭저럭 잘 살수 있었으며, 그들의 삶의 수준이 향상되었다는 것을 느끼면서 게르만 야만족들의 약탈에 공동으로 저항하기도 했습니다만, 이러한 상황은 끔찍한 충돌로 깨질 운명이었습니다. 기원후 1세기경에 브리튼의 이체니족의 왕은 로마인들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재산의 절반을 내놓았습니다만, 이 지역의 로마인들은 매우 탐욕스러웠습니다. (역자 주: 아시겠지만 이 시기는 네로황제의 치세기;; 였습니다.) 그들은 켈트 왕의 재산을 모두 약탈했으며, 그의 아내를 구타했으며, 그의 딸을 능욕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로마제국에 대한 총체적인 반란을 야기했습니다. 부디카 (보아디케아는 오기임.) 라고 알려진 죽은 켈트왕의 부인은 자신의 복수를 무시무시하게 수행했습니다.

 

부디카의 켈트군은 가장 가까운 로마 정착지였던 콜체스터를 공격했습니다. 그곳의 로마 수비병들의 규모는 매우 소규모였기에 그들은 신전들이 있는 곳으로 물러났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켈트인들이 맹공을 가할때까지 이틀을 버텼으나, 결국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은 모든 주민들이 학살되었고 정착지는 불살라졌는데, 현재 이 지역에서 고고학자들은 오직 얇은 재로 된 지층만을 발견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한 로마군단인 제 9군단 히스파나가 마을을 수비하기 위해 파견되었으나 너무 늦게 도착했으며, 결국 그들조차도 포위되어 참살되었습니다. 현재의 런던과 성 앨번 지역도 마찬가지로 파괴되었으며, 타키투스는 무려 7만을 헤아리는 로마 시민들이 살해당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부디카를 막기위해 만여명의 로마 군단병들이 브리튼으로 보내졌습니다. 뒤이은 전투에서는 8만명의 브리튼인들이 죽었다고 말해지고 있습니다. 부디카 그녀자신도 전투에서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이는 켈트인들과 로마인들의 불화에서 초래된 무시무시한 결과였습니다.

 

로마인들과 켈트인간에 벌어진 다른 잔인한 전쟁은 스페인에서 벌어졌습니다. "로마인들과 켈티베리아인들 사이에 벌어진 이 전쟁은 '맹화의 전쟁' 이라고 불렸다" 하고 로마의 연대기 작가인 폴리비우스가 회고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나 아시아에서의 전쟁들은 한번이나 두번의 대회전에서 전세가 결정되는 반면, 그 곳에서의 전쟁은 결정적인 전투없이 질질 끌다가 밤의 어둠이 몰려와서야 잠시 중단되곤 했다. 양측모두 굳이 그들의 전투깃발을 휘두르거나, 자신들의 몸을 피곤하게 만들지 않았다." 이 전쟁은 부분적으로 게릴라 전의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양측은 서로를 능가하는 잔혹행위를 저지를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습니다. 한 로마 지휘관은 한 무리의 스페인 켈트인들을 용병계약에 대해 논의하자는 구실로 자신의 캠프로 초대했습니다. 일단 켈트인들이 무장을 풀고 로마인들의 울타리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로마군 지휘관은 바깥으로 향하는 출구를 봉쇄시킨 다음 켈트인 전사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로마는 이러한 잔혹행위를 개선식으로 축하했습니다. "그들은 산적때보다 나을것이 없다" 라고 끝내 스페인의 켈트인들을 정복할 수 없었던 로마장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투덜거렸습니다. "그들은 인근지역을 황폐화시키거나, 마을들을 불태울때나 가축들을 약탈할 때는 용감하지만, 정규군으로서의 가치는 없다." 하지만 그 후 이천년동안 이 지역에서는 이러한 아주 효과적인 켈트식의 전쟁이 계속 별어졌으며, 지금도 켈트주의에 기원한 테러단체들이 이곳에서 활동하는 중입니다 (아마도 바스크지역의 독립단체들을 말하는 듯 하네요.). 하지만 결국 로마인들은 스페인에서의 승리를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켈트 전사들은 근본적으로 난공불락의 지역들만을 지켜내면서 녹초가 되었으며, 계속되는 비참함과 고통을 필요 이상으로 감내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패배가 확실한 완고한 투쟁을 미덕으로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전쟁보다는 평화를 선호하는 켈트사회 전체의 입장에서 봤을때 아마도 켈트인들의 가장 큰 약점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로마화된 비잔티움 제국의 수병으로 복무하는 켈트인들, 기원후 6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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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트인들은 특히 마술馬術에서 두각을 나타낸 위대한 육상전사였을 뿐만 아니라, 바다에서도 훌륭한 선원이자 전사였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재능은 기원전 1세기경에 갈리아지방을 정복하던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처음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대서양 해안가에 거주하던 브리타니 인들은 프랑스와 영국 해안가를 오가면서 어업과 상업에 종사하며 번영을 누렸는데, 특히 이들이 자주 오갔던 콘월 지방에는 강한 인척관계가 두지역 주민들 사이에 형성되었으니, 오늘날 콘월 지역의 사투리와 여러 문화유산에서 켈트인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여러 곶과 조수간만이 자주 일어나 육지와의 연결이 자주 끊어지는 강어귀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기원전 57년에 이러한 해안지역에서 지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베네티인들은 시저의 힘에 맞서기로 결심했습니다. 일단 로마인들은 이러한 고립된 섬들로 건너가기 위해 그들의 공학적 시도를 감행했지만, 켈트인들은 그들의 배를 타고 이 섬들에서 쉽게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자 카이사르는 그가 곧잘 해왔듯이 켈트인들의 이러한 능력을 이용하기로 생각하고는 좀더 내륙지역의 켈트인 조선장이들을 고용하여 함대를 편성했으니, 이는 그가 베네티인들과 싸우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배의 바닥은 평평하다." 라고 카이사르는 켈트인들이 만들어 준 배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형태는 얕은 해안가를 항해하는데 적합하다. 그들의 높은 뱃머리와 고물은 그들을 거친 바다와 사나운 폭풍으로부터 보호해주며, 배의 튼튼한 현측은 떡갈나무로만 만들어진 것이다. 배의 가로선목 -발 하나 길이정도의 폭을가진- 은 건장한 남자의 엄지손가락만한 철못으로 고정되어 있다. 배의 닻은 로프가 아닌 체인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배의 돛은 생가죽이나 얇은 무두질한 가죽으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거친 대양의 바람에도 충분히 견딜 수 있다."  대서양의 바다는 지중해 세계의 사람들이 알고있던 가장 사나운 바다였으며, 해안가의 켈트인들은 이러한 바다를 통해 프랑스와 영국, 그리고 아일랜드 등지를 항해하면서 아주 씩씩한 뱃사람들을 배출해 냈습니다. 그들의 뱃사람으로서의 명성은 고전세계에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이들을 고용하여 같은 동족들과 맞서게 함으로써 로마인들은 로아르 강어귀에서 베네티인들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한현 로마인들은 긴 장대에 부착된 낫을 이용하여 베네티인들의 선박의 삭구들을 절단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항해술과 바다에서도 변함없는 그들의 용맹함에 관한 명성을 생각해 볼때 이들이 지중해 세계의 모든 해군에게 환영받은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이번에 맥 화백께서 그리신 그림은 켈트 수병들이 어느 동 지중해 항구의 매음굴에서 신나게 놀다가 비잔티움 해안 경비대에 의해 체포되는 순간을 묘사한 것입니다.;; 기원전 5세기의 서로마제국의 붕괴는 지중해 세력들의 주된 수입원이었던 해상무역에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현재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알려진 동로마 제국이 지중해에서 주도권을 잡게 되었으며, 심지어 이 제국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절에는 부분적으로나마 옛 서로마제국 지역을 탈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결과로써, 비잔티움 제국과 그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은 온갖 지역의 용병들을 끌어드리는 자석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바랑기안인들은 이러한 이방인중 가장 잘 알려진 이들일 것인데, 이들은 스칸디나비아에서 러시아를 관통하는 강줄기를 따라 흑해지역으로 흘러들어 비잔티움 육군에 복무하곤 했습니다. 비록 이 시기엔 예전만큼 환영받지는 못했지만, 켈트인들 역시 이와 유사한 인생을 살았으며 결과적으로 많은 수의 켈트인들이 비잔티움 육군과 해군 양측에 복무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림의 오른쪽에 그려진 금발의 여인으로 보건데, 비잔티움 제국을 동경한 북부와 서부 유럽인들이 남자들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로마화된 브리튼 Briton 인들과 픽트인들간의 전투, 기원후 5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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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튼 지역에서의 로마 제국의 통치는 5세기 초반에 프랑스와 이탈리아 지역에 침공해온 게르만족 야만인들의 주력을 막기위해 황제의 관료들과 병사들이 철수하면서 막을 내렸습니다. 로마제국의 백일몽이 끝나면서 브리튼인들은 이제 로마인들의 직접적인 통치에서 자유로워졌지만, 그래도 그들은 로마 스타일의 생활을 고수했습니다. 로마화된 켈트 군사 지도자들은 빌라에서 살았으며,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구사하면서 기독교를 신봉하는, 여전히 지중해와 연결되는 무역망을 유지하고 있는 조신들에게 둘러쌓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삶을 계속 이어나갔으며, 그들의 해안지역을 약탈하는 야만족 약탈자들과 생존을 건 투쟁을 벌였습니다. 이 시기가 바로 아더왕과 원탁의 기사들이 활약한 시기이며, 이러한 전설적인 영웅의 탄생은 우리가 여태까지 알고 있던 켈트 역사에 새로운 시대를 추가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아더는 아마도 5세기 말엽에 생존했던 로마화된 브리튼인 군사 지도자중 한명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기원후 460년경에 동부 잉글랜드의 색슨인 침략자들에 맞서 일단의 로마화된 브리튼 기병들을 이끈 암브로시우스 아우렐리아누스의 원정을 뒤따랐습니다. 그의 전사들은 "combrogi" 라고 불렸는데, "시골 친구들" 이라는 뜻을 가진 이 단어는 "Cymri" 혹은 "Cumbri" 등의 이름들의 기원으로 생각되고 있는데, 이것들은 웨일즈와 북서부 브리튼 지역의 켈트인들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어 왔습니다. 야만인들과의 전투중에 전사한 암브로시우스의 뒤를 이은 자가 바로 아더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영광스러운 군사 지도자가 열두 전투에서 싸웠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전투가 벌여진 장소는 북부 잉글랜드 지역으로 추측되는바, 이러한 점은 어쩌면 아더의 원정이 색슨족에 대한 것이 아닌, 색슨인들 만큼이나 "로마인다움 romanitas" 을 지켜나가는데 위협이 된 아일랜드나 스코틀랜드의 켈트 약탈자들에 대한 것임을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켈트인들의 연대기에서 아더왕은 "영원한 동정녀이신 성모 마리아의 화상을 그의 방패에 걸고 다녔" 으며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어깨에 달고 다녔" 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교를 신봉하는 픽트인, 스코트인, 그리고 색슨인들에 대항한 그의 작전이, 그러한 과정에서 벌어진 온갖 잔혹행위에도 불구하고 십자군의 성전으로 여겨진 것은 무리도 아니라 할 것입니다.

 

위 그림은 북부 잉글랜드 지역에서 벌어진 로마화된 브리튼인 기병들과 픽트인들간의 충돌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림의 중앙부에 위치한 낙마한 상태의 기병은 후기 로마제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갑옷과 장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의 스케일 아머는, 비록 영국에서 이러한 형태의 갑옷이 수백년간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의심할 바 없이 켈트인들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전형적인 로마 갑옷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투구는 코와 뺨 가리개가 달린, 두드러진 돌기가 나 있는 형식인데, 이러한 모습은 토포크의 버그 Burgh 성에서 발견된 것과 유사한 후기 로마기병대의 투구와 유사합니다. 하지만 그는 켈트인들의 전통에 따라 목에 금목걸이를 걸치고 있는데, 이러한 예는 기원후 600년경에 아네이린 Aneirin 의 시에서 찬양받는, 북부 잉글랜드의 앵글로인에 대항한 원정에 나선 켈트인들의 부대의 일원인 로마화된 브리튼인 기병대에 대한 묘사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배경의 기병은 리벳으로 연결된 쇳조각으로 만들어진 게르만 스타일의 고리쇠투구 spangenhelm 를 착용하고 있습니다. 이 두 전사들은 긴 게르만 스타일의 양날 스파타를 소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로마, 게르만, 겔트스타일이 섞인 전투는 암흑시대의 서유럽에서 행해진 전형적인 전쟁방식이었습니다. 켈트인들이 원했든 그렇지 않든, 게르만 야만족들은 향후 1500년간 강력한 영향을 켈트인들에게 끼치게 될 운명이었습니다.

 

아더의 가장 빛나는 대승리는 바돈산자락 Badon Hill 에서의 전투였습니다. 연대기 작가인 네니우스는 천연적인 온천수가 바돈산 인근에서 마치 목욕탕에서와 같이 펄펄 끓어나오며, 고대 서머싯의 바스 Bath 지역으로 추정되는 지역에 위치한 부락에 거주한 로마인들이 그들과 켈트인들이 신성하게 여긴 샘 근처에 목욕탕과 사원을 건설했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로마인다움" 의 증거인 빌라들과 목욕탕들은 아마도 이 시기엔 파괴된 것으로 보이며, 일부분은 강가의 뜨거운 온천수가 흐르는 늪지대에 가라앉았으니, 이러한 묵시록적인 장면은 로마화된 브리튼인과 야만인 침략자들이 사투를 벌이는 전장으로서 참으로 어울리는 장소였을 겁니다. 그 전투는 바스를 둘러싸고 있는 언덕들 어딘가에서 벌어졌습니다. 전투가 삼일 밤낮으로 이어졌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이 전투는 일종의 공성전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전투는 최종적으로 로마화된 브리튼인들이 말을 타고 대규모 기병 돌격를 감행하여 전장의 색슨인들을 휩쓸어 벌임으로써 막을 내렸습니다. 이는 영국 서쪽에서 게르만인 약탈자들을 몰아낸 대승리였으며, 오늘날 이 지역에서는 가장 궁벽한 시골조차도 켈트인들의 자취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로마화된 브리튼 Romano-British 지역의 켈트인들이 색슨인 약탈자를 궁지에 몰아넣다, 기원후 6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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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화된 켈트인들이 거주하는 브리튼을 노린 색슨인들의 침공은 한 판단착오로 시작되었습니다. 수백년간 로마군은 게르만 야만인들을 보조병으로 활용해 왔습니다. 기원후 5세기 초, 로마화된 브리튼인 군사 지도자였던 보티건 Vortigern 은 여러 방면에서 공격을 받고 있었습니다. 북쪽과 서쪽에서는 아일랜드인들과 픽트인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약탈을 벌였으며, 동쪽에서는 게르만인들의 습격이 이어졌습니다. 게다가 그는 갈리아 인들의 강력한 동맹자였던 암브로시우스의 도전까지 받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보티건은 자신의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서 (옛 로마군들이 그랬던 것처럼) 대규모의 색슨인들을 초청해서 템즈강의 타넷섬에 정착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색슨인들의 지도저였던 헹기스트 Hengist 는 보티건의 허약함을 간파하고는 더욱 많은 자신의 동향인들을 데려오는게 어떻냐고 제의했습니다. 보티게른이 이에 동의하자 열 어홉척의 배에 가득 탑승한 색슨인들이 이 지역에 도착했습니다. 이들 전사들에게 군료를 지불하기 위해 헹기스트는 이들에게 켄트 지역의 땅을 내리는게 어떻겠냐고 제의 (협박?^^;) 했습니다. 이에 보티게른은 뒤늦게 그의 통치권이 침해당했음을 깨달았으나, 이미 때는 너무 늦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색슨인들이 남동부 잉글랜드로 퍼져 나갔지만 보티건의 아들인 보티머 Votimer 가 이들에게 반격을 가하면서 수많은 피비린내나는 전투들이 벌어졌습니다. 이에 헹기스트는 보티건을 포함한 모든 켈트 지도자들을 불려들여 평화조약에 대해 의논하자고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켈트인들의 두번째 실수였습니다. 보티건과 다른 로마화된 켈트인들은 비무장인 채로 회의장에 도착했으나, 헹기스트는 그의 전사들에게 그들의 신발속에 단도를 숨겨두라고 지시해 놓은 상태였으며, 마침내 함정이 작동했습니다.. 약 300명에 달하는 지도적 위치에 있던 로마화된 켈트인들이 살해당했으니, 잉글랜드에서의 켈트인들의 지휘계통은 이 비극 이후로 결코 완벽하게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색슨인들과 로마화된 브리튼 Briton 인들간의 전쟁은 수세기에 이어졌으며, 켈트인들은 점차 웨일즈와 콘월지역과 같은 서부지역으로 밀려났습니다.

 

이 그림에서는 한 색슨인이 로마화된 브리튼 군인들에 의해 궁지에 몰려 있습니다. 여기서 색슨인은 산봉우리 모양의 투구를 쓰고 있는데, 이 투구에는 더비셔 지역의  Benty grange 에서 발견된 것과 같은 철제 멧돼지 장식이 달려 있습니다. 투구의 틀은 노루뿔로 만들어진 투구 조각들을 지탱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추측되어 왔습니다. 맷돼지는 게르만의 신인 프레위르 Freyr 를 상징하며, 전투에서의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상징으로 쓰여 왔습니다. 또한 맷돼지 장식은 이 전사가 귀족의 반열에 들어있음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허리에는 색슨인들의 고유한 무기인 색스 seax 가 매달려 있는데, 이 무기는 한쪽에만 날이 달린 긴 단도였습니다. 두 로마화된 브리튼 전사들은 로마 스타일의 스케일 아머를 입고 있으며, 또한 융기장식이 달린 Ridge-style 투구를 착용하고 있습니다. 앞부분의 인물의 투구는 준보석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이는 로마인들의 방식일 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켈트인들의 영향또한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하겠습니다. 비록, 최근에 존재가 확인된, 아일랜드의 로마인들의 거주지에서 영감을 받은 결과일지도 모르는 일이기는 하지만, 아일랜드 연대기에 등장하는 11세기의 아일랜드 군사 지도자였던 브라이언 보루 Brian Boru 의 전사들 역시 이러한 투구를 착용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마화된 브리튼인들과 게르만족 침략자들간의 충돌을 다룬 얼마 안되는 문자화된 기록이 기원후 600년경에 아네이린 Aneirin 이 지은 서사시의 일부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는 로마화된 브리튼 부족중 하나인 고도딘 Gododdin 부족이 스코틀랜드 저지대에 있던 안토니아 성벽의 동쪽 변방지역을 어떻게 통치했는지 묘사하고 있으며, 그들이 노섬브리아의 앵글로족을 약탈하기 위해 1년내내 준비하는 모습들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그들의 군사 지도자인  뮈뉘도그  Mynydogg 는 그의 추종자들을 위해 관대한 축제를 베풀었으며 그들에게 벌꿀술과 와인을 나누어 주었으니, 이러한 축제는 아네이린이 "그들은 그들의 벌꿀술 축제의 비용을 그들의 목숨으로 치루었다." 라고 간단히 언급한 것처럼 군사 지도자와 그의 영향력있는 전사들로 이루어진 수행원들을 묶어주는 봉건적 충성심을 암시해 준다 하겠습니다. 뮈뉘도그는 삼백명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전사들과 그들의 추종자들과 함께 요크셔의 Cattraeth 에서 앵글로인들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아네이린의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메일코트를 입고 그들의 목에 황금 가락지를 착용했습니다. 용감한데다가 잘 무장하기까지 한 이들은 결코 앵글로인들의 손에 죽을때 비통함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이들 삼백명은 모두 전사했으며 켈트인들의 영역은 더욱 축소되었습니다.

 

브리튼의 켈트인만이 홀로 게르만인들에 맞서 사투를 벌인 건 아니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로마화된 갈리아인 Romano-Gauls 들이 고트족의 침공에 맞서 중부 프랑스를 용감하게 방어한 에크디키우스 Ecdicius 와 같은 군사 지도자들 밑에 모여 게르만인들에게 맞섰습니다. 에크디키우스는 대지주들의 지원을 받아 기병부대를 지휘하여 야만인 산적때들을 뒤쫓곤 했습니다. 그의 반격이 얼마나 맹렬했는지 고트인들은 그들 동료의 시체를 두고 도망가야만 했습니다만, 동료들의 머리만은 베어서 고향으로 가지고 갔기에 에크디키우스는 그가 벤 고트인들의 헤어스타일을 알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고트인들에 맞선 성공적인 전투를 끝낸 후, 클레르몽으로 가서 그 시민들로부터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습니다."얼마나 많은 눈물과 환희가 너를 기쁘기 했는지!" 라고 그의 이복형제인 시도니우스가 회고하고 있습니다. "몇몇 시민들은 너를 뒤덮고 있는 먼지를 키스로 깨끗하게 만들었지. 다른 이들은 피와 땀으로 뒤덮힌 너의 말고삐를 붙들었지. 네가 투구를 벗으려고 하자 열광적인 시민들이 투구의 걸쇠를 풀어주었지. 어떤 이들은 너의 정강이받이를 고정하는 끈에 스스로를 묶기도 했었지. 어떤 이들은 적을 벨때마다 너의 칼에 생긴 생채기를 하나하나 세기도 했었지. 다른 이들은 너의 메일갑옷에 난 검이나 뾰족한 무기에 의해 생긴 구멍들을 세기도 했었지. 너는 너를 환영하느라 벌어진 이러한 모든 어리석은 일들을 점잖게 받아냈었지!" 즉, 이 기록에서 시도니우스는 한때 자포자기적이었던 켈트인들의 열광적인 감정뿐만이 아니라 이 시기의 로마화된 켈트인 군사 지도자가 입었던 장비에 대해서도 부지불식간에 좋은 묘사를 남긴 것이었습니다. 

 

픽트인들이 더너드 Dunadd (Add 강의 항구라는 뜻.) 의 스코트인들을 바라보다, 기원후 8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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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너드는 주위가 습지대로 둘러쌓인 바위위에 세워진, 공격하기가 만만찮은 켈트인들의 언덕요새였습니다. 이곳은 기원후 5세기경부터 스코트인들의 지배를 받은 북서부 스코틀랜드의 달리아다 지역의 요충지였습니다. 혼란스러운 사실이지만, 당시 스코트인들은 스코틀랜드의 원주민들이 아니라, 사실 아일랜드해를 건너 스코틀랜드 서부해안이나 브리튼의 다른 지역을 약탈하곤 했던 아일랜드 지역의 켈트인들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들은 "스코티 Scotti" 라고 불렸는데 이 명칭은 아마도 아일랜드 어의 "약탈을 하는" 에 해당하는 동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줄곧 로마인들에 맞서 싸웠으며, 이제 그 제국이 기울자 브리튼 지역으로 이주하기로 결심했으니 그들이 선택할 땅은 스코틀랜드의 픽트인들이 차지하고 있는땅이 될 터였습니다.

 

아일랜드계 스코트인들은 켈트인들의 전통인 뛰어난 항해술을 계속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전형적인 보트는 커럭스 curragh 였는데 이 보트는 나긋나긋한 나무가지로 만든 틀에 동물의 가죽을 씌운 단순한 타원형 보트였습니다. 이 보트는 거친 바다에서 놀랄만큼 유연함을 발휘했으며, 스코트인들로 하여금 남쪽의 웨일즈나 남부잉글랜드에 대한 약탈을 가능하게 해 주었습니다. 기원후 891년의 앵글로 색슨인들의 연대기에는 "세명의 아일랜드인이 아일랜드에서 키도 없는 보트를 타고 알프레드왕에게 왔었다. 이들은 다른이들의 눈을 피해 항해해 온 것이었으니, 왜냐하면 그들은 이방인이 되기 위한 신의 사랑을 갈구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배는 두장 하고도 반장의 가죽으로 만들어졌는데 그들은 여기에 일주일간의 식량을 실었다. 그들은 일주일간의 항해끝에 콘월에 도착했으며, 그 즉시 알프레드 왕을 알현한 것이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최근에 복원된 커럭스를 보면, 개암나무로 엮어진 틀 위에 세장의 소가죽이 바느질되어 있습니다. 배를 만들어 바다에 띄우는데는 모두 일주일이면 충분했습니다.

 

한편 픽트인들은 그들에 관해 알려진 것이 거의 없는 미스테리한 사람들입니다. 대체로 켈트계열의 사람들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이들은 그들이 몰아낸 원주민들의 옛 어휘가 포함된 언어를 사용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들을 가리키는 픽트라는 단어는 로마인들이 붙인 것으로 "문신을 한 사람들" 이라는 뜻인데, 이는 이들이 몸에 푸른색의 문신을 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픽트인들은 사나운 자유인들이었으며 로마인들을 상대로 한 전투들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들은 칼레도니아 부족의 후손들 중 가장 먼저 로마인들과 충돌한 이들이었습니다. 로마인들의 지배가 사라진 지금, 그들과 더너드의 게일어 사용자들간의 충돌은 시간문제였습니다.

 

픽트인들의 전쟁방식은 몇몇 석판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른 켈트인들처럼 유능한 기수였던 그들은 투창과, 그보다 좀더 긴 기병창을 사용했습니다. 그들의 보병들은 장창이나 파이크를 가지고 아마도 수백년후 윌리엄 월리스와 로버트 부르스의 지휘를 받은 스코트인들이 사용한 것과 유사한 일종의 팔랑스 방진을 짜서 싸웠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그들은 소용돌이 형태의 켈트문양으로 장식된 독특한 정사각형 방패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림의 오른쪽 전사가 그러한 방패를 든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는 코 보호대가 달린 고리쇠투구 spangenhelm 를 착용하고 있는데, 이는 그들과 스코트인들의 국경지대에서 싸운 게르만계 앵글로인의 투구에서 기원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투구는 아베르렘노 Aberlemno 석판에도 새겨져 있지만, 이 석판에 새겨진 고리쇠투구는 아마도 그들의 게르만인 적군의 것인지도 모릅니다. 가벼운 복장을 걸친 그림의 다른 전사들은 도끼와 창, 그리고 검으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옛 라 테네 스타일의 흔적이 이 픽트인들의 칼자루에 나타나 있습니다. 중앙의 인물은 망토와 후드가 연결된 의복을 걸치고 있는데, 이러한 복장은 드로스텐 Drosten 석판에 묘사된 석궁을 장비한 전사가 입고있는 것과 유사한 것입니다. 석궁역시 픽트인들의 병기창에서 생산되곤 했습니다.

 

픽트인들과 스코트인들은 스코틀랜드 북서부지방을 놓고 수세기동안 싸웠습니다. 얼스터의 연대기 기록에 따르면, 기원후 740년에 픽트인들은 달리아다 지역을 목표로 한 대규모 원정을 감행했습니다. 앙구스 마크 페르구스 Angus mac Fergus 의 지휘를 받는 픽트인들은 다수의 거점들을 점령하고 스코트인들의 군사 지도자를 잔인하게 수장시켰으며, 스코트인들을 아일랜드로 돌아가도록 강요했습니다. 앵글로인들은 이러한 혼란을 보고 침공을 감행할 적기라 판단하고는 동부 하이랜드를 침공했습니다만, 픽트인들은 기원후 685년의 Dunnichen 혹은 Nectansmere 에서의 전투에서 그들을 적절하게 패배시킴으로써 스코틀랜드에서의 켈트인들의 독립을 보장했습니다. 아마도 이 전투가 아베르렘노 Aberlemno 석판에 묘사되어 있는 전투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스코트인들이 픽트인들에 대해 승리를 거두었으며, 스코트인들의 왕이 기원후 843년에 픽트인들의 옥좌를 계승했습니다. 그 이후로 하이랜드 지역은 픽틀랜드라 알려지는 대신에 새로이 붙여진 지명들로써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아일랜드 전사들과 바이킹 약탈자들간의 전투, 기원후 9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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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후 10세기 초에 쓰여진 "Gaedhil (아일랜드인) 과 Gail (바이킹인) 간의 전투" 의 연대기 작가는 자신의 책에서 "바다는 끊임없이 배와 보트들을 토해냈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스터 지역의 항구나, 성착장, 혹은 요새치고 데인인들과 해적들의 함대가 없는 곳이 없었다... 그들은 토지를  약탈하고 무력으로 땅을 차지했다. 그들은 아일랜드의 교회들과 사원들을 파괴하고 성골함과 성스러운 서적들을 불태웠다. 그들은 아일랜드의 왕들과 족장들, 그리고 우수한 전사들을 죽였다. 그들은 우리의 꽃다운 여인들을 노예로 삼아서 푸른 바다 너머로 끌고갔다." 바이킹인들의 도래는 브리튼의 켈트인들에게 있어 재앙이었으며, 이들에 의해 그들은 더욱 가장자리로 밀려 나갔습니다. 바이킹인들의 침공은 이제 색슨인들의 영토에까지 번졌으니, 동부 잉글랜드의 많은 지역이 바이킹인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노르웨이인들과 데인인들은 스코틀랜드 서부와 북부지역의 섬들을 획득했으며 이곳에서 자신들의 왕국을 건설했으니, 그때부터 이 지역은 노르만인들의 요소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들은 아일랜드해로 진입하여 하일랜드 해안가를 휩쓸고는 일련의 강어귀에 그들의 정착지를 세우고 말을달려 아일랜드 내륙으로 계속 진출했습니다. 얼스터의 연대기가 이러한 그들의 진출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에서 기원후 793년에 그들은 바다의 약탈자의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기원후 810년까지 그들은 아일랜드의 전사들과 전투를 벌였으며 컨네마라 Connemara 의 주민들을 궤멸시켰습니다. 하지만 아일랜드인들은 반격을 가했으며, 같은 해 오웰즈와 먼스터의 전사들이 그들의 연대기에서 "gentiles" 라고 기록된 바이킹인들을 죽였습니다. 하지만 약탈은 그 강도를 더해가며 계속 벌어졌습니다. 기원후 820년에 바이킹인들은 다운 Down 지역의 뱅거 bangor 를 침공했습니다. 기원후 824년에 다운패트릭 Downpatrick 이 약탈당한 후 불살라졌으며, 그곳의 교회는 파괴되었습니다. 기원후 826년에 아일랜드의 상급왕은 어쩔수 없이 다른 아일랜드의 군사 지도자들과 연합작전에 대해 의논했습니다만, 아무런 성과도 없었습니다. 이제 바이킹인들은 아일랜드에 죽치고 앉아 더블린과 워터포드, 웩스포드, 코크, 그리고 리머릭 등지에 요새화된 정착지를 건걸했습니다.

 

최근의 발굴에 의해 알려진 로마인들이 건설한 아일랜드 해안의 무역 거점들의 예처럼 바이킹인들도 전체 아일랜드를 차지하기보다는 북유럽의 거대한 스칸디나비아 무역 네트워크의 일원이 될 수 있는 강어귀 지역의 제한된 영토를 차지하는데 만족했습니다. 그리고 로마인들의 활동이 역시 그러했던 것처럼 이러한 일은 아일랜드의 켈트인들에게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위에서 잠시 언급했던 "아일랜드인과 바이킹인 간의 전투" 를 작성한 아일랜드 작가에 의하면 바이킹인들의 원정이 성공한 이유는 그들의 훨씬 우수한 무장 때문이었습니다.: "...그 이방인들이 착용한 반짝반짝 빛나는 세겹을 겹쳐만든 무거운 메일 갑옷과, 그들의 강력한 검과 그들의 단단하게 고정된 장창의 훌륭함은..." 아마도 이들이 도래하기 전의 아일랜드에는 메일 갑옷이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 시기의 그들이 브리튼의 다른 지역을 계속 약탈하면서 메일 갑옷은 그들에게도 점점 익숙한 갑옷이 되어 갔습니다. 그 메일 갑옷들은 아마도 바이킹인들의 것일지도 모르는데, 아일랜드인들은 약탈이나 무역을 통해 이러한 갑옷과 바이킹인들의 무기를 점점 더 자주 접하게 되었을 겁니다. 이러한 군사기술들은 아일랜드인들을 감명시켰으니, 전시와 평화시를 막론한 그들간의 상호작용에 의해 더욱 널리 퍼졌으리라는 점은 의심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또한 아일랜드인들은 바이킹인들을 자신들간의 내전에도 끌여들였습니다. 그들간의 끝없는 부족내전기간 중, 어느 켈트인들은 다른 켈트인들에 대항하기 위해 바이킹 전사집단들을 고용하곤 했습니다. 이렇게 켈트인들은 외부의 도움을 구하기 위해 그들의 가장 사악한 적들을 가까이 들임으로써 그들 자신의 위치를 약화시켰습니다.

 

위의 그림은 바이킹인 약탈자들과 아일랜드 해안가의 전사들간의 비교적 이른 시기의 충돌을 묘사한 것입니다. 양쪽이 사용하고 있는 양손으로 잡는 배틀액스는 스칸디나비아에서 기원을 둔 것인데, 나중에 아일랜드인들에 의해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입니다. 바이킹인들의 검 역시 복제되거나, 수입되거나, 약탈되는 등의 방법으로 입수되곤 했습니다. 바이킹인들이 아일랜드에서 활동한 시기동안 아일랜드인들은 주기적으로 그들에게 반격을 가했으며, 기원후 902년의 중요한 전투의 결과로써 그들을 더블린에서 몰아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곧 돌아왔으니, 이는 아마도 아일랜드인들이 무역등과 같은 분야에서 바이킹인들에 대한 의존도가 커졌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11세기까지 한 아일랜드 군사 지도자가 아일랜드에서의 바이킹인들의 존재를 그 근본까지 흔들었으니, 이 군사 지도자의 이름이 바로 브라이언 보루 Brian Boru 였습니다.

 

아일랜드의 군사 지도자인 브라이언 보루가 바이킹인의 베어진 머리를 바라보다, 기원후 11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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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언 보루는 켈트인 군사 지도자의 기질을 타고 났습니다. 오직 잔인함만을 위해 태어난 그는 결코 그러한 기질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권력의 원천은 셰넌 강 shannon 의 강어귀에 위치한 달 카이스 Dal Cais 의 부족이었으며, 그의 제물은 리머릭 인근의 바이킹 정착자들이었습니다. "아무리 작은 공격이라도 그가 이방인들에게 행할 때에는," 하고 Gaedhil (아일랜드인) 의 연대기 작가가 회고했습니다. "그는 아무런 마음의 동요도 없이 그것을 행했다. 그는 숲과 불모지에서부터 기습을 가하여 이방인들을 약탈하고 죽였다. 만약 그가 낮에 이방인들의 마을을 불태우지 않았다면, 그는 반드시 밤에 그것들을 불태웠다." 게릴라전을 펼치면서 바이킹인들의 땅에서 기생한 그는 바이킹인들에게 있어 가장 잔인한 적임이 증명되었습니다. 마침내 바이킹인들은 간신히 그를 그들의 무기와 갑옷으로 위압할 수 있는 "평원의 탁 트인 곳에서 벌어진 용맹스러운 전투" 에 몰아넣는데 성공했습니다. 양측은 메일 갑옷을 입은 채 말 위에서 그들의 검과 도끼, 그리고 창을 휘둘렀습니다. 전투는 낮동안 계속되었으며, 바침내 바이킹인들의 대열은 붕괴되었습니다. 아일랜드인들은 달아나는 스칸디나비아인들을 추격하여 "그때부터 저녁때까지 그들의 목을" 쳤습니다. 이렇게 보루는 스물 여섯살의 나이에 리머릭에 위치한 바이킹인들의 도시를 쓸어버린 것입니다. 그의 전설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리머릭에 대한 약탈은 바이킹인들만 겁에 질리가 만든것이 아니었으니, 인근의 아일랜드 부족들도 보루의 능력에 감명을 받고 그의 휘하에 들어왔으나, 그들보다 더 많은 노회한 아일랜드의 군사 지도자들은 마냥 기뻐하고 있을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바이킹 정착지의 무역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레인스터 Leinster 의 군주는 더블린의 바이킹인들과 동맹을 맺었으며, 기원후 1000년경에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브라이언이 승리했으며 더블린은 약탈당했습니다. 상황이 악화되자 바이킹인들은 즉시 그와 평화조약을 맺었습니다. 이제 보루는 남부 아일랜드의 통치자가 되었으며, 그의 시선을 북부 아일랜드로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보루는 전투를 통해 아일랜드의 상급왕의 자리에 도전하려 했습니다만, 정치가 검술보다 더 큰 효력이 있었으니, 북부 아일랜드의 부족장들은 이러한 동족상잔의 비극을 꺼려했습니다. 그들은 보루에게 투항했으며, 이렇게 보루는 아일랜드의 지도자가 되어 심지어는 브리튼섬으로 약탈꾼들을 보내 그들에게서 공물을 갈취했습니다.

 

하지만 보루가 나이가 들기 시작하면서 그의 권력도 그의 손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레인스터의 지도자들과 더블린의 바이킹인들은 그에게 공납을 바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는 더블린에 대한 공성전을 시도했으나 물자부족으로 부득이 후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편 바이킹인들은 바다건너 동족들에게 지원요청을 보내어 더블린의 북쪽에서 약탈행진을 벌이고 있던 보루와 클론탈프 clontarf 에서 대치했습니다. 이 장면은 서사시적인 전투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보루의 아들인 무르카드 murchad 는 이제 (보루르 대신하는) 사실상의 지도자가 되어 있었으며, 달 카이스와 뮌스터 출신의 충성스러운 부하들과 측면의 바이킹 용병들과 아일랜드 동맹군들을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더블린의 바이킹인들은 만 Man 지역과 오크니, 그리고 심지어 데인인들과 노르웨이인들과 함께 이에 맞섰습니다. "양측은 서로에게 잔인하고 통렬한 공격을 가했다." 라고 Gaedhil (아일랜드인) 의 연대기 작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온갖 비명소리들이 전장을 메웠으며 그들 머리위에는 새들과 악마들이 그들에게 바쳐질 공물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일랜드인과 바이킹인들은 상대방을 베고 썰어댔습니다. 브라이언의 아들인 무르카드는 양손에 검들 들고 자신에게 덤벼드는 바이킹인들을 썰어댔습니다. 그가 바이킹인들의 대열에 만든 균열을 노리고 그의 부하들이 파도처럼 밀려왔습니다. 하지만 오크니의 시구르드는 후퇴하기를 거부했으며, 무르카드와 영웅적인 결투를 벌였습니다. 무르카드는 오른손에 쥔 검으로 그 바이킹인의 헬멧을 벗기고는 왼손에 든 검으로 노출된 피부를 가격했습니다. 그 다음 무르카드는 다른 바이킹 군사 지도자와 맞짱을 뜨게 되었지만, 격투 중 그의 칼이 부러져 버렸습니다. 이에 이 아일랜드 영웅은 그 바이킹인의 메일갑옷을 꽉 붙잡고 맨손으로 갑옷의 셔츠부분을 벗겨냈습니다.^^; 땅으로 떨어진 이 두 전사는 맨손격투를 벌였습니다. 무르카드는 이 바이킹인을 칼로 찌르는 데는 성공했지만 바이킹인은 단도를 뽑아 이 켈트인의 복부를 가격했습니다. 이러한 혈투끝에 무르카드는 그 바이킹인의 머리를 벨 수 있었지만, 다음날 그 자신도 전날 입었던 부상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브라이언 보루 자신은 너무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방패벽 뒤에서 전황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가 기다리던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많은 바이킹인들이 죽었으며 클론탈프는 결국 그의 것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비록 주력군대가 흩어졌다고는 하나, 전장에 떠돌고 있는 일단의 바이킹 기병들이 있었으니 이들 중 한 무리가 보루를 엄호하던 아일랜드 방패벽으로 돌진을 시도했습니다. 이에 보루는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적과 싸워야만 했습니다. 그는 그 중 한 바이킹인의 다리를 베었으나, 그 바이킹인은 반격을 가해 보루의 머리를 반쪽냈습니다. 이렇게 보루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영광스러웠던 순간에 죽었습니다. 그 결과로서 아일랜드 부족연맹은 붕괴되었으며, 바이킹인들은 다시 그들의 정착지로 돌아왔습니다만, 다시 아일랜드인들을 지배하지는 못했습니다.

 

더너드 Dunadd 제도의 통치자, 기원후 13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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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인인들의 노르만인 화化 는 켈트인들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11세기경부터 바이킹인들은 북부 프랑스의 노르망디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했으니, 이제는 노르만인이라고 불린 이들의 생활양식은 프랑스와 스칸디나비아의 문화가 뒤섞인 것이었습니다. 1066년에 그들은 잉글랜드를 침공하여 색슨인들의 국가를 붕괴시켰습니다. 호전적인 노르만인들은 브리튼 가장자리에서 여태껏 색슨인들의 공격에 버티고 있던 켈트인들까지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노르만인들은 남부 웨일즈에 정착했으며, 스코틀랜드 저지대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12세기에는 아일랜드를 침공하여 향후 아일랜드에 800년간 유지될 상당한 규모의 영토를 영유하는 통치권을 성립시켰습니다.

 

노르만화된 잉글랜드인들의 맹공격에 끝까지 벼텨낸 켈트 세력들 중에는 더너드 제도를 통치했던 왕국이 있었습니다. 이 왕국은 스코틀랜드의 북쪽과 서쪽 섬들과, 히브리디스 제도, 그리고 아일랜드 해의 만 제도를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이곳의 문화는 달리아다 지역에 잔존하는 고대 켈트문화와 최근에 들어온 노르만인 거주지의 문화가 섞인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이제는 점차적으로 노르만인 지주들에 의해 통치되는 저지대 문화에 친숙해져가는 본토의 스코트인들에 대한 저항으로써 이들은 게일어를 계속 사용했으며, 그들이 선조들이 전해준 켈트전통에 따른 통치방식을 유지했습니다. 이러한 스코틀랜드 문화의 분단은 좀더 현실적인 정치세계에서도 큰 영향을 끼쳤으니, 이제는 야망을 가진 군사 지도자들이 군도의 전사들을 방문하여 본토의 통치권을 되찾는데 도와달라고 호소하는 광경이 생소한 것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11세기경의 스코트 군사 지도자중 가장 유명했던 이가 맥베스 Macbeth 였는데, 그는 나중에 셰익스피어에 의해 벌거벗은 욕망의 표본으로써 불멸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그는 그와 맞붙었던 다른 군사 지도자들보다 특별히 더 악독하지도, 더 선량하지도 않았습니다. 맥베스는 북부 스코틀랜드의 머리 Moray 지역의 게일어 사용권 출신의 전사였는데, 그는 자신을 야망을 위해 북부 군도출신의 노르만인들을 고용했습니다. 그가 기원후 1040년에 스코트인들의 왕관을 탈취하는 성공에 관해 기술한 후대의 역사가는 이 사건을 그의 맞수였던 던컨 Duncan 의 지원을 받는 과도한 잉글랜드인들의 영향력에 대한 게일인들의 반응이었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는 던컨의 아들, 말콤 Malcolm 이 돌아올 때까지 17년간 왕좌를 유지했습니다. 말콤은 잉글랜드 인들의 지원을 받아 군대를 재편성했는데, 이는 자신의 고향에 있던 멕베스를 근심하게 만들었으며, 이들은 결국 그를 살해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로써 노르만-잉글랜드 문화가 이 지역에 다시 들어오게 되었으며, 게일 문화권은 군도의 왕국 지역으로 축소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군도의 군주와 그의 추종자들은 위대한 선원과 상인이였기에, 본토와의 단절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일랜드와 브리튼, 그리고 스칸디나비아를 잇는 아일랜드해에 기반을 둔 무역 네트워크를 번성시켰습니다. 이러한 정치적인 독립은 1263년에 스코틀랜드의 왕 알렉산더 3세가 라르그스 Largs 전투에서 노르웨이의 하코 Haco 에 대해 승리를 거둘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그 전투 이후에야 이 군도 왕국은 스코틀랜드 왕국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지역에서 게일문화는 수백년을 살아남았으며, 군도의 영주들은 여전히 그의 영토 내에서 상당한 정도의 주권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서부 군도의 고유한 비석들과 석판들은 독특한, 노르만화가 진행된 켈트문화를 시사하고 있는데, 이러한 특징은 그 전사들이 사용한 검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바이킹인들의 패턴 웰디드 Pattern welded 검은 여러 지역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 곧잘 모방되곤 했습니다. 여러 돌출면이 있는 폼멜은 이러한 무기들의 가장 전형적인 특징이며, 당시의 그림을 보면 이러한 검을 소지한 전사들을 쉽게 볼수 있습니다. 이러한 검들 중 한 종류가 나중에 양손장검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림의 가운데 인물이 착용한 보호구는 투구와, 메일, 그리고 수직방향으로 패드를 대 누빈 울 튜닉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러한 모습은 서부 군도의 한 비석의 조상을 기초로 재현한 것입니다. 이러한 갑옷은 동시대의 아일랜드 갑옷과 매우 유사한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군사기술의 발전을 위한 스코트인과 아일랜드인들의 노력은 마침내 유명한 게일인 갤로우글라스 galloglas 전사들을 탄생시켰으니, 그들은 6피트 길이의 배틀액스를 휘두르면서 좀더 후대의 북부 아일랜드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군도의 영주들은 16세기까지 스코트인 왕들의 골칫거리였습니다. 한 잉글랜드인 연대기 작가가 당대의 그 전사들에 대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들은 무릎부터 발까지 벗은채로 다녔다. 그들의 헐렁한 웃옷은 느슨한 격자무늬가 새겨져 있었으며, 그들의 셔츠는 사프란으로 염색되어 있었다. 그들은 활과 화살, 석궁, 그리고 짧은 핼버드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언제 허리에 튼튼한 단검을 차고 다녔는데, 이 단검은 한쪽에만 날이 있었지만 날카롭기가 이를 데 없었다. 전시에 그들은 자신들의 몸을 철제 고리로 만들어진 메일코트로 덮은채로 전투에 나갔다. 야지의 평범한 스코트인들은 역청이나 왁스를 흠뻑 칠한, 리넨 천을 여러장 기워만든 외투를 입었으며 그 위에 사슴가죽으로 만든 오버코트를 착용했다."

 

서부 군도 (헤브리디스 제도를 가리킴) 의 게일인들의 성, 기원후 14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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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초에 기억될만한 백일몽이 브리튼과 아일랜드의 켈트인들을 한때나마 결속시켰습니다. 최근 있었던, 로버트 브루스가 잉글랜드 왕에 맞서 거둔 배녹번 Bannockburn 에서의 승리는 스코틀랜드의 왕으로서의 그의 지위를 보장했습니다. 그는 그 전투에서 헤브리디스 제도 출신 전사들의 팔랑스 방진을 개인적으로 지휘했으며, 그 외에도 많은 게일인 전사들이 그의 군대에 합류했습니다. 그들은 전통적인 픽트 전사들의 방식인, 빽빽한 장창방진을 이루어 싸웠습니다. 만약 잉글랜드 기사들이 도망이라도 할라치면 게일 전사들은 또다른 고대 켈트식 전술을 구사했으니, 즉 그들은 곧장 말에 뛰어올라 그들을 추격했습니다. 앙글랜드 세력은 스코틀랜드에서 축출당했으며, 로버트 브루스는 그들의 논란의 여지가 없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는 그의 주의를 나머지 켈트 세계로 돌렸습니다.

 

로버트 브루스는 그의 동생 에드워드를 아일랜드로 파견했는데, 그의 손에는 아일랜드 족장들에게 보내는 기억할만한 서신이 들려 있었습니다. "우리와 우리의 백성들, 그리고 당신들과 당신들의 백성들..." 이렇게 시작된 로버트의 선언은 계속됩니다. "...은 옛날 옛적부터 자유인이었으며 동일한 조상들을 공유하며, 함께 행동하기를 열망했으며, 공통된 언어와 공통된 관습에 기초한 우정에 즐거워했었소. 우리는 당신들에게 우리 가문의 이름으로 우리가문의 사랑받는 일원에게 이 편지를 당신들에게 들려 보내어, 우리와 당신들간에 영원하게 지속되며 또한 더욱 강화될 특별한 우정에 대해 논의하고자 하오. 신의 의지와 함께 당신들은 당신들의 신성한 자유롤 회복할 수 있을 것이오." 이 서신은 노르만화된 잉글랜드 정복자들에 맞서는, 아일랜드 해에 걸친 켈트 연합의 사실상의 성립선언이나 마찬가지였으며, 또한 스코트인들과 아일랜드인들이 그들의 공통된 켈트조상들을 알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합니다. 만약 그의 이러한 전략이 성공했었다면, 유럽역사 오랫동안 켈트인들을 구석으로 몰아넣었던 역사의 흐름을 뒤바꿀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들은 고대적부터 내려온 강력한 전사문화를 되살릴 수도 있었을 것이며 브리튼과 갈리아, 그리고 중부 유럽에 걸친 그들의 옛 영토를 회복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이는 로버트 부르스의 정치적 시야의 탁월함을 보여주는 위대한 발상이긴 하지만, 과연 에트워드 부르스가 아일랜드인들의 마음을 움직여 그의 계획에 동참시킬 수 있었을까요?

 

다행히 이 계획은 일단 성공했습니다. 북부 아일랜드의 실력자였던 얼스터의 오닐 O`Neills (역자주: O~ 는 '누구누구의 손자' 라는 뜻입니다. 즉 오닐은 닐의 손자라는 뜻이지요.) 은 에드워드 부르스에게 그들의 왕위를 넘겨주었습니다. 그들은 부족간의 불화가 그들의 입지를 약화시켰다는 것을 깨닫고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자 했습니다. 에드워드 부르스는 1316년에 던달크 Dundalk 에서 아일랜드 상급왕의 왕관을 받았습니다. 로버트 부르스는 그의 형의 아일랜드 영토를 방문하여 갤로우글라스 전사들을 헤브리디스 제도에서 데리고 왔습니다. 이제 부르스의 시선은 웨일즈로 향했던 듯 하며, 웨일즈인들은 이를 예상하고 켈트인이었던 Llywelyn Bren 의 지휘하에 잉글랜드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러한 상황전개에 잉글랜드인들은 당황했으며, 그들은 심지어 유명한 웨일즈 장궁병들을 포함한 켈트인 용병들을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옛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방식대로, 부르스는 아일랜드 각지를 돌면서 모든 아일랜드 족장들로부터 충성의 맹세를 받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때부터 상황이 악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아일랜드인들의 의구심은 그의 이러한 권력의 과시를 목격하고 자꾸만 커져 갔으며, 부르스와 함께 여행한 (갤로우글라스) 전사들은 형편없는 봉토를 받고 마치 산적떼처럼 변해갔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른바 켈트인 연합은, 그것이 비록 같은 겔트인 동족에 의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방인들의 지배를 초래할 것처럼 보였습니다. 한 아일랜드 연대기 작가는 당시의 분위기를 요약하면서 부르스를 "이 스코트의 이방인이 우리 지역의 이방인 (즉, 잉글랜드인) 보다 더 고귀할 것도 없다." 라는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비록 아일랜드인들은 잉글랜드인들을 증오했습니다만, 그들과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부분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한편 스코틀랜드의 켈트인들은 아일랜드인이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할지도 몰랐습니다.

 

1318년이 되자, 에드워드 부르스를 위한 아일랜드인들의 협조는 거의 중단되다시피 했으며, 이때부터 잉글랜드인들의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아일랜드인들의 도움을 받아, 아일랜드의 총독이었던 리쳐드 클래어 Richard Clare 는 포가르트 Faughart 에서 부르스군과 대치했습니다. 아직까지도 부르스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던 아일랜드인들은 그에게 원군을 기다리든지, 아니면 그들이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게릴라전을 벌여 잉글랜드인들을 녹초로 만들라고 충고했습니다. 하지만 부르스는 그의 권위를 재건하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기에 그러한 참을성을 발휘할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충성스러운 스코트인 기사들이 그와 합류했지만, 잉글랜드인들과 그들편에 선 아일랜드인들은 마치 파도처럼 돌격해서 그들을 베었습니다. 전투가 끝나고, 에드워드 부르스의 것으로 추측된 극히 화려한 갑옷을 입은 한 시체가 발견되었습니다. 그의 베어진 머리는 소금이 뿌려진 채 양동이에 담겨서 잉글랜드의 왕에게 진상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부르스의 머리가 아니었으니, 최후의 순간에 그는 적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그의 으리으리한 갑옷을 단순한 메일 갑옷으로 갈아입은 것이었습니다. 그의 시체는 전장 어딘가에 놓여 있었겠지만, 어쨋든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연맹을 갈망하는 웅장했던 켈트인들의 꿈은 이로써 끝이 났으며, 아직껏 남아있는 겔트인들의 지역은 이제 개별적으로 잉글랜드의 침공에 맞서야 했습니다. 이로써 유럽에 강력한 켈트왕국을 세우려는 소망은 그 막을 내렸습니다.

 

켈트인들의 정착지와 무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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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트인들의 정착지는 북유럽에 건설된 첫 대규모 건축물이었습니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목재와 석재가 풍화되면서 이제는 언덕요새를 이루고 있던 흙더미만이 남이있을 따름이지만, 그것들 만으로도 그들의 상당한 수준의 공학기술과 굴착기술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 중 가장 인상깊은 건축물은 잉글랜드 남서부의 도싯 dorset 지역에 건설된 메이든 성입니다. 1번 그림은 로마군에 의해 공격받아 파괴되기 전까지 사용된, 기원전 1세기경에 건설된 언덕요새를 동쪽 상방향에서 바라본 것입니다.

2번 그림은 유럽지역에 산재했던 켈트 스타일로 지어진 탑을 묘사한 것인데, 일반적으로 석재와 목재로 지어졌습니다. 3번 그림은 이러한 요새 건축물의 단면도입니다. 갈리아인들의 요새 murus-Gallicus 는 내부에 흙을 채운 엇갈리게 짠 목재의 바깥쪽에 돌을 쌓아올린 것이었습니다. 그림 4는 전형적인 초기 켈트식 원형 주택인데, 이 건물은 목재로 만들어졌으며, 지붕은 이엉을 엮은 것이었습니다. 그림 5는 호숫가의 수상생활에 알맞도록 지어진 목조주택입니다. 그림 6은 단순히 나무를 파 만든 보트인데, 낚시를 하거나 호수를 건너는데 쓰였습니다. 그림 7은 좀더 견고한 커럭스 curragh 혹은 코라클 coracle 인데 나무와 짐승가죽으로 만들어졌으며, 여러날 걸리는 바다항해에 쓰였는데 주로 아일랜드 양안의 켈트인들이 사용했습니다.

 

8번에서 12번 그림은 라 테네 시대에 만들어진 다양한 청동제 혹은 철제 투구들입니다. 9번, 11번, 12번 투구는 로마군의 투구에 영향을 끼쳤으며, 로마군들은 이들 투구를 기초로 자신들만의 투구를 창조해냈습니다. 뿔이 달린 10번 투구는 영국의 템즈강에서 발견된 것이며, 퍼레이드에 쓰였거나 혹은 종교적 목적으로 제작된 조각품에 씌여졌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13번 그림은 넓은날이 달린 다양한 창촉을 묘사한 것입니다. 14번 검은 요크셔에서 발견된 것이며, 그 제작시기는 기원전 3세기경으로 추측됩니다. 15번 검 역시 영국에서 발견되었지만 기원전 50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며, 정교한 장식이 되어있는 칼집과 함께 발견되었습니다. 켈트인들이 중부유럽에 거주했을 때 사용했을 좀더 초창기의 무기로는 17번 그림의 청동제 단검과, 프랑스에서 발견된 18번 그림의 단검이 있습니다.

 

켈트인들의 무기와 공예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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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트 문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그 문화의 독특함입니다. 그 영향을 많이 받았든 적게 받았든 남쪽 지중해 문화에 압도되거나, 만약 그렇지 않으면 너무나 미개한 수준이었던 다른 고대 유럽지역의 문화와는 달리 3000년을 살아남은 그들의 스타일과 장식문양들은 오늘날까지도 흔히 쓰이는 소재입니다. 그들의 스타일은 대상이 금속 공예품이든, 직물이든, 그림이든 쉽게 알아볼 수 있습니다.

 

19번에서 22번 그림은 켈트인들의 방패를 묘사한 것인데, 첫 세 방패는 온몸을 커버하는 방패로써 나중에 로마인들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전형적인 켈트스타일을 따른 이들 방패의 장식무늬들은 대칭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이것들이 좀더 고전적인 문화권에 속하는 정착지에서 만들어졌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19번 그림은 초기 라 테네 방패이며 20번 그림은 기원전 3-2세기경에 만들어진 중기 라 테네 양식의 방패입니다. 21번 그림은 기원전 1세기경의 브리튼 방패입니다. 22번 그림의 작은 원형방패는 기원전 50년경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23번 그림은 거울뒤에 세겨진 전형적인 켈트식 소용돌이 무늬인데, 이 거울은 데스보루그 Desborough 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24번 그림은 극도로 정교한 종교의례용 용기입니다. 25번 그림은 매듭장식이 나 있는 목걸이 torc 인데, 금이나 철로 만들어진 이 목걸리는 브리튼에서 터키에 이르는 지역에 분포한 켈트인들에 의해 널리 착용되었으며, 아마도 그 착용자가 자유인임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켈트 전사들과 그들의 무용담에 심취할 때 자주 잊혀지는 일이기는 하지만, 켈트인들은 훌륭한 농부이기도 했습니다. 농사일에 대한 그들의 재능은 그들에게 부와 권력, 그리고 그들의 생존에 필요한 물건들 (물론 사용하고 남은 물건들은 교역에 쓰이거나 저장되곤 했습니다.) 을 제공했으며, 또한 유럽을 무대로 한 이주여행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아마도 전차는 쟁기질이나 수확물을 운반하는데 쓰인 바퀴의 사용에서 유래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들의 계속된 숲 개간과 경작은 오늘날 우리에게 시각적으로 확인 가능한 가장 거창한 시각적 자료를 남겨주고 있습니다.

 

26번 그림과 27번 그림은 사륜 전투수레를 대체한 두 종류의 이륜전차를 보여주고 있으며, 여기에는 라 테네문화의 특징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26번 그림은 브리튼 전차의 재현이며, 27번 그림은 북부 이탈리아에서 발견된 것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28번 그림은 장식된 청동제 재갈인데, 이는 켈트인들이 그들의 말과 관련된 장인들의 기술을 높이 평가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9번 그림은 영국에서 발견된 다양한 형태의 도기들이며, 30번 그림은 숲 개간이나 추수등에 쓰인 다양한 금속제 도구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31번 그림은 수세기 동안 켈트인들이 밭을 가는데 사용한 쟁기의 한 형태입니다. 산업적인 측면으로나 모험적인 측면으로나 켈트인들의 정신은 오늘날 많은 형태로써 우리 곁에 있으니, 우리는 이들의 영향을 비즈니스에서 농업에 이르기까지, 고전문학에서 팝음악에 이르기까지 느낄 수 있습니다.^^;  


출처: 스쿼드론 출판사의 "Ancient Celts" 의 불법날림번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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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타메를랑 | 작성시간 08.05.10 켈트에 대해 관심이 많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 작성자Τιταυιζ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8.05.12 minbang7님// 저한테도 좋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도움이 되었다니 제가 감사합니다^^; 공비님// 아마도 그런거 같다능;;; 생긴걸로만 봐선 하프와 별 인연이 있어뵈진 않지만.. 유틸라이넨님// 참 유구하죠, 저런 복장들... 요거 준비하면서 잠시 웹 뒤져보니 온라인으로 켈트복장 파는 곳이 제법 많더군요. 학생님// 걍 단순번역인 것 뿐인 글을 관대히 봐주셔니 오히려 제가 더 감사합니다 ㅠㅠ 저도 학생님 글 언제나 감사히 읽고 있습니다. 입닥제국님// 흠, 그런 일화도 있었나요?^^; 여튼 여기 원하시는 켈트 대령입니다; 타메를랑님// 뭘요, 부족한 번역글 봐주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__)(--)
  • 작성자투창병 | 작성시간 08.05.17 더너드왕의 국기가 크루세이더킹이라는 게임에서 본듯한
  • 작성자갸려려 | 작성시간 08.06.26 내공이 상당하신듯 ㅎㄷㄷ 잘보고 갑니다
  • 작성자타메를랑 | 작성시간 10.02.20 훌륭한 자료, 잘 보았습니다. 스크랩해 갈 터이니, 부디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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