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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날림번역 <오스프리-엘리트> "고대 앗시리아" (2)

작성자Τιταυιζ|작성시간07.11.01|조회수1,068 목록 댓글 8

티글랏-필레셀 3세의 원정들.

 

왕위에 오른 후 티글랏-필레셋은 얼마간 자신의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암울한 군사적 현실을 타개하는데 온 힘을 쏟았습니다. 이 어려운 임무의 성공과, 곧 이어진 제국 국경선의 급격한 확장은 그의 놀라운 능력을 입증해준다 하겠습니다.

 

즉위 후 첫해동안 그는 앗시리아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행군하여 바빌로니아로 들어가 칼데아인들의 반란을 막느라 정신없는 나부-나시르 Nabu-nasir 왕을 원조했습니다. 이러한 바빌로니아의 약화를 이용하여 그는 두 왕국간의 경계를 Diyala 강으로 정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칼데아인들을 상대하면서 그는 바빌로니아의 대도시로 들어가 나부 나시르왕을 바빌론의 국왕으로 사실상 인정하는 동시에 자신을 "수메르와 아카드의 국왕" 으로 선포했습니다. 비록  나부 나시르왕을 인정하긴 했으나 그는 바빌로니아의 도시에 앗시리아의 총독을 임명하면서 앗시리아의 이익을 수호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러한 시기적절한 조치 덕분에 바빌로니아는 기원전 732년까지 잠잠했으며 이제 앗시리아는 40년간이나 앗시리아를 경제적으로 괴롭혀온 우라르투인들에 대한 반격을 펴는데 온 정신을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우라르투를 넘어 서쪽으로는 시리아, 동쪽으로는 이란 서부에 이르는 우라르투의 강력해져 가는 가신국들에 대한 계획적인 공격을 입안했습니다. 그의 첫번째 목표는 아르파드 Arpad 의 마티-일루 Mati`-ilu 에 의해 이끌어지는 강력한 반앗시리아 세력이었는데 그들은 우라르투 진영에서 굳게 단결하고 있었습니다. 앗시리아 군대가 기원전 743년에 시리아에 진입하자 우라르투의 왕인 사르두르 3세 Sardur III 는 그에 맞서 자신의 군대와 가신들의 군대를 이끌고 티글랏-필라셀에게 대항했습니다. 상 유프라테스의 쿰무 Kummuh 에 있는 삼삿 Samsat 부근에서 벌어진 대전투에서 앗시리아군대는 우라르투 군대에게 큰 패배를 안겼습니다.후퇴하는 우라르투군대를 추격하면서 이제 앗시리아 군대는 우라르투영토 자체를 침범하기 시작했으며, 반 Van 호수가에 있는 그들의 수도인 투루시파 Turushpa 에 대한 성공적이지 못한 공성전을 수행했습니다.

 

더 이상 가신국들을 지원하지 못함으로써 우라르투는 시리아의 가신국들의 운명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라르투에서 돌아와서 남쪽으로 전진하면서 티글랏-필라셀은 아르파드 Arpad 에 대한 공성작전을 명했습니다. 이 작전은 3년간이나 계속되었으며, 상비군이 아니었다면 이 작전은 진작에 포기되었을 것입니다. 그 다음해에 마침내 북서해안의 시리아인들의 국가와 페니키아인들이 평화를 요청했습니다. 아르파드는 결국 기원전 741년에 함락되었으며 기원전 738년에 있엇던 앗시리아 군대의 남쪽으로의 거대한 행군은 남부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의 군주들의 마음을 강렬하게 사로잡았습니다. 그들은 황급히 공물과 선물을 한아름 싸가지고 가서 "앗시리아 군주의 발" 을 껴안았습니다.

 

티글랏-필라셀의 북부 시리아에 대한 욕망은 단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단지 앗시리아 서부의 교역로를 보호하는 것 뿐만 아니라 아예 동 지중해의 교역을 통제하고 싶어했습니다. 즉, 그가 북부시리아에 관심을 돌린것은 해안지대의 교역과 서쪽의 상업을 앗시리아에 유리하게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러한 시도는 이 지역을 필수 이해지역으로 간주해온 이집트에게 심대한 타격을 가져왔습니다. 티글랏-필라셀이 적어도 기원전 3000년전부터 행하여진 레바논으로부터 이집트로 향하는 목재의 교역을 차단하자 앗시리아가 이지역에서 누리고 있는 지위에 대한 도전이 시리아-팔레스타인 소국들을 중심으로 불거져 나왔으며, 이에 앗시리아는 기원전 734년에서 732년까지 이들에 대한 전쟁을 치루어야 했습니다. 마침내 그의 군대는 이들 국가 모두를 패배시키고 이들을 앗시리아의 가신국으로 삼은 후, 가자 Gaza 의 남부에 있는 "이집트의 강" (나일 강) 에 도달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앗시리아 제국의 남부 국경을 표시하는 탑을 세웠습니다.

 

우라르투가 자그로스와 이란에서 누리고 있는 영향력을 잠식시키기 위해 그는 "앗시리아의 국경선 안" 에 있는 모든 지역에 대한 몇번의 대규모 작전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하마단 Hamadan 북서쪽에 거주하고 있던 메디아인들을 공격했으며, 약 65,000명의 주민들을 디얄라 Diyala 강 유역의 앗시리아와 바빌로니아간의 국경지역에 거주시켰습니다. 테페-기얀 Tepe Giyan 지역에 남아있는 앗시리아 속주의 궁전 유적은 그의 치세동안 앗시리아의 국력이 이란에까지 미쳤음을 보여줍니다.

 

치세 13년에 그는 다시 바빌로니아로 가서 나부-나시르 Nabu-nasir 의 아들이자, 새로운 왕을 원조하러 갔습니다. 그는 2년전, 그의 아버지가 죽고 그 왕위를 물려받았으나 그 자리를 비트 아부카니 Bit Abukani 의 칼데아인의 부족의 수장인 우킨 제르 Ukin-zer 에 의해 위협받고 있었습니다. 앗시리아 군대는 지금의 바그다드 근처의 티그리스강을 건너 바빌로니아로 진입했습니다. 비록 바빌론이 점령되었지만 우킨 제르는 남쪽의 페르시아만 입구의 소택지에 있는 칼데아인들의 요새로 도주했습니다. 앗시리아 군대는 그 뒤를 쫓아 그곳에서 3년간의 격전을 치른끝에 그곳의 적대적인 칼데아인들의 영토를 완전히 쑥밭로 만들어 버리면서 반란을 진압했습니다.

 

바빌론은 공식적으로 앗시리아의 행정력하에 있었으며, 다음해 "새해" 맞이 잔치에서 티글랏-필라셀는 "신의 손 (왕홀)" 을 들고 바빌로니아의 왕이라고 포고되었습니다. 그는 2년이 지난 기원전 272년에 죽었으며, 유산으로 어느때보다도 강력해진 앗시리아를 남겨놓았습니다. 그는 의심할 바 없는 위대한 군주였으며, 아마도 아슈르의 옥좌에 앉은 가장 위대한 군주일 것입니다.

 

사르곤 2세 Sargon 2세의 원정들.

 

기원전 722년에 있었던 사르곤 2세의 즉위는 아직껏 그 많은 부분이 미궁속에 묻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티글랏-필라셀의 뒤를 이은 샬마네세르 5세 Shalmaneser V 의 동생이라고 주장했지만, 이러한 티글랏-필라셀과의 혈연관계는 확인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샬마네세르 5세는 아마도 "진정한 왕" 이라는 의미를 지닌 이름인 사르곤의 신중하고도 방어적인 판단에 의해 축출되었으리 추정됩니다. 뭐, 새로운 군주의 근본이 어떻든지, 그는 앗시리아가 멸망할 때까지 앗시리아를 다스린 가장 탁월한 군주들을 배출한 가문인 "the Sargonids" 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그의 후계자이자, 군의 원수인 센나케리브에게 지시를 내리는 사르곤 2세.

 

그의 왕위계승에 관한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그는 재위 첫해동안은 앗시리아의 국경선 밖으로 원정을 나갈 수 없었습니다. 본국에서 불화가 벌어진 예전의 경우처럼, 이번에도 제국내에서 갈등이 터졌는데, 그 첫 물결은 바빌로니아에서 터졌습니다. 우라르투와 아르메니아 고지의 왕국들,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서도 봉기가 터졌습니다. 기원전 721년, 사르곤은 처음으로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남쪽의 바빌로니아로 반란을 진압하러 떠났습니다. 이 원정은 우리에게 한가지 의문점을 던져주는데, 나중에 작성된 연대기에 의하면, 그는 이 바빌로니아 토벌작전에 앞서 사마리아의 이스라엘인들의 수도를 점령했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연대기에서 사르곤은 "나는 사마리아를 포위하고... 마침내 점령한 후, 그곳의 27,290명의 주민들을 끌고갔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의 전통대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부족들" 이라 알려진 이 이스라엘인들은 메디아를 비롯한 제국 각지에 재정착하였습니다. 사마리아에 대한 공성전은 사실 기원전 724년, 샬마네세르 5세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성서에 의하면 (열왕기하 17장 5절) 3년간 계속되었습니다. 이것은 사마리아가 아직 샬마네세르의 치세인 기원전 722년에 함락되었다는 앗시리아의 기록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사르곤은 기원전 721년에 다시터진 반 앗시리아 연합세력에 의한 봉기를 진압한 것으로 보이며, 이것은 그에게 있어 사마리아에 대한 선왕의 공격과 한사건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바빌로니아에서 터진 문제는 하등 새로울 것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빈번하고, 그중 일부는 바빌론에 대해 상당한 성공을 거둔 칼데아 부족들에 대해 얼마나 잔인한 처벌이 내려졌는지 이미 알아본 바 있습니다. 비록 사라곤 2세가 바빌로니아의 왕좌를 겸하고 있었던 샬마네세르 5세의 폐위에 의한 어수선한 정국을 이용한 므로닥 발라단 Merodoch-Baladan 이라는 책략에 밝고 머리가 명석한 반란의 지도자와 맞서야 하는 일이 벌어졌지만, 이번에도 지금까지와 마찬가지의 결과로 끝났습니다. 그는 자신의 권위에만 의존하지 않고 엘람 Elam 왕국의 원조를 받아 동맹국 영토로 진입해서 반란군에 맞설 준비를 했습니다. 하지만 엘람인들이 이타주의에 의거해서 이러한 호의를 배푼것은 물론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수세기 동안이나 바빌로니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으며, 작금의 혼란스런 상황은 그들의 이익을 확대시켜줄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의 군대를 티그리스강의 오른편을 따라 진격시키면서 사르곤은 마침내 데르 Der 에서 그들 왕의 지휘를 받고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대규모의 엘람인들의 군대와 부딪혔습니다. 전투의 결과에 대해 사르곤은 "훔바니가쉬 Humbanigash 의 군대를 박살내었다" 라고 주장하고있습니다. 하지만 현실로 돌아와보면, 그후 앗시리아 군대는 퇴각을 강요당했으며 사르곤은 그후 10년간 바빌론을 회복할 엄두를 내지 못했으며.. 그동안 앗시리아는 이곳의 국경을 유지하느라 큰 여려움을 겪었습니다.(아마 연대기는 이러한 뒷사정까지는 적지 않았을 겁니다...) 분명한 사실은 엘람인들이 매우 대규모이며 아주 잘 무장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기에 사르곤이 패배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사르곤은 즉각적인 반격을 할 수 없었는데, 이는 시리아에서 터진 반란 때문이었습니다. 이 반란이 특히 위험하게 보인것은 이들이 그배후에서 므로닥 발라단 의 후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생각도 못한 일이었지만, 사라곤은 이제 그의 주의를 서쪽으로 돌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시리아에서 반 앗시리아 봉기를 이끈것은 하맛 Hamath 의 지도자였는데, 그는 이집트의 도움을 받아 아르파드 Arpad, 다마스커스, 사마리아, 거기에 페니키아의 일부도시를 끌어들이는데 성공했습니다. 더 남쪽에서는 가자의 왕 하누나 Hanuna 가 이집트의 지원을 받아 앗시리아에 대한 충성의 맹세를 배신하고 앗시리아에 도전했습니다. 사르곤은 틸 바르십에 있는 그의 전진기지로부터 남쪽으로 매우 빠른 작전을 펼쳤으며 먼저 아르파드를 점령한 후, 카르카르의 옛 전쟁터에서 하맛에 의해 규합된 연합군을 격파했습니다. 하맛을 공략한 후 이곳을 직할 속주에 편입시키면서 남쪽으로 진격해 다마스커스를 점령하고, 사마리아의 반란군을 소탕하면서, 마침내 사르곤은 그의 군대와 함께 가자의 성벽앞에 도착했습니다. 이집트의 원정군은 앗시리아 군대에 패배하여 후퇴했으며, 결국 하누나는 사로잡혔습니다. (사로잡힌 후 즉시 가죽이 벗겨졌습니다..) 기원전 712년에 이집트의 지원을 받은 아슈도드 Ashdod 의 봉기역시 당장에 진압되었으며, 따라서 사르곤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문제를 모두 해결했습니다.

 

기원전 717-716년의 2년동안, 사르곤은북 부 시리아로 주의를 돌렸으며, 이전엔 카르케미시 Carchemish 의 독립 도시국가를 속주에 편입시켰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우라르투의 왕과 우리에게는 "프리지아 Phrygia 의 마이다스" 로 더 잘 알려져 있는 무쉬키 Mushiki 의 미타 Mita 왕에게 실리시아와 아나톨리아의 무역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사라곤은 프리지아와 우라르투와 동맹을 맺으려는 증거가 포착된 타발 Tabal 왕국을 기원전 713년에 공격하여 합병시켰습니다. 프리지아의 압력에 대처하기 위해여 사르곤은 쿠에 Que 속주의 환관총독인 아슈르-샤르라-유수르 Ashur-sharra-usur 에게 마이다스에 대한 군사작전을 개시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러한 앗시리아의 압력과 아나톨리아 고지에 대한 키메리아인 Cimmerian 들의 침공을 보면서 마이다스왕은 어쩔 수 없이 기원전 709년에 사르곤과 협정을 맺었습니다. 우라르투를 효과적으로 무력화시킨 이 앗시리아와 프리지아간의 조약은 앗시리아로 하여금 북부 시리아의 통제권을 강화시키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북부 시리아와 남부 아나톨리아에 대한 앗시리아의 정책은 이 지역에 대한 우라르투의 정책에 반하는 것이었으며, 결국 이 두세력 중간에 놓인 메디아의 동부에서 이 두 세력은 충돌했습니다. 서부 이란의 우르미아 Urmia 호수 서쪽에 위치한 만네아 Mannea 지역은 이미 앗시리아에게 있어서 말산지로서 필수적인 지역이었습니다. 따라서 기원전 716년, 우라르투의 군주 루사스 1세 Rusas I 가 이 지역에 쳐들어와 이곳의 앗시리아인 통치자를 내쫓고 우라르투에 충성적인 괴뢰왕조를 들어앉히자 사라곤은 이에 즉시 반응했습니다. 그는당장 만네아로 쳐들어가 우라르투가 임명한 지도자를 내쫓고 자신의 부하 중 한사람을 그자리에 세웠습니다. 이제 우라르투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규모 군사작전이 필요하다는 것이 명백해졌습니다. 그는 자신의 후계자가 될 왕태자 센나케리브 Sennacherib 를 북부 국경으로 급파하며 우라르투에 대한 광범위한 정보를 수집하라는 임무를 맡겼습니다. 그의 스파이들은 루사스 Rusas 의 주력군대가 키메르 유목민들에 의해 재앙에 가까운 패배를 당했다는 중요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호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기원전 714년, 사르곤은 우라르투에 대한 대규모 원정을 개시했습니다.

 

우라르투 원정.

 

이 원정에 대한 자세한 과정은 아슈르신에게 올리는 전쟁 보고서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보고서에서 사르곤은 앗시리아 군대가 급류가 흐르는 강과 깊은 협곡이 반복되는 험난한 지형을 따라 행군했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공병들이 작업하여 간신히 전차대와 기병대가 지나갈 길이 만들어졌습니다. 우르미아 서쪽으로부터 우라르투에까지 연결된 유라르투인들의 요새선을 피하기 위해 원정군은 호수의 동쪽 기슭을 따라 진군했습니다. 비록 앗시리아 군대가 진격하면서 마을들을 황폐화시켰지만, 사르곤의 최우선 목표는 적군을 이러한 도발을 이용하여 전장으로 끌고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 내가 아직 우르사 Ursa (루사스) 와 아르메니아인들과, 그들의 거친 국경에 가본적이 없었으며, 또한 그들의 전사들을 전장에서 베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손을 모아 내가 그들에게 패배를 안겨줄 수 있도록 기도했다...." 그러는 동안 우라르투의 군대가 마침내 출정했으며, 그들은 두 높은 산 사이를 가로질러 정열하고 있었습니다. 우라르투인들은 그들이 아주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고 있다고 믿었으며 앗시리아 군대로 하여금 전투를 벌이도록 도발했습니다.

 

사르곤은 자신의 군대의 상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언급을 남기고 있습니다. : "너무나 먼 길을 행군해온 아슈르의 지친 군대들은 즉각적인 반응을 기대하기 힘들었으며... 헤아릴 수 없는 높은산을 오르락 내리락하면서 그들의 사기는 땅에 쳐박혔다. 나는 그들의 고통을 경감할 어떠한 방법도 가지지 못했다. 실로 그들의 갈증에 공급할 물조차 없었다. 나는 캠프나 여타 고정방어시설을 설치할 수 없었다." 그는 전투에 앞서 전열을 갖춤에 있어 전통적인 병력의 배치를 피하면서, 종대로 우라르투군대의 한쪽 날개로 돌격한 후에 행군대열을 덮치는 작전을 입안했습니다..

 

사르곤 자신까지 직접 전차에 올라 "queubti sa sheppe" 즉 호위기병의 도움을 받으면서 돌격에 가담한 이 무시무시한 기습공격에 의해 우라르투의 전열은 붕괴되었습니다. 이 돌격뒤에 전개된 앗시리아 군대의 주력인 궁수들과 창병은 우라르투의 전열이 붕괴함에 따른 균열을 확대시켰습니다. 앗시리아의 기병대가 추격을 하자 마침내 적군은 퇴각을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무시한 전투에서 루사스는 230명에 달하는 왕실 구성원들과, 속국의 군주들, 주 자사들, 그리고 수많은 자신의 기병대와 보병대들을 포기하고 달아났습니다. 이러한 공포속에서 루사스는 사르곤이 추격해올 것이라는 잘못된 추측에 의해 이루 말할 수 없이 강력한 수도인 투루쉬파를 포기해 버렸습니다.

 

사르곤의 정확한 원정경로는 아직도 학문적 논쟁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앗시리아 군대가 귀향에 들어가면서 거친 모든 우라르투의 도시들를 옛 전쟁의 관습에 따라 완전히 황폐화시켰다는 겁니다. 그와 동시에 사르곤은 그의 주력군이 앗시리아로 돌아간 뒤 천명의 기병대로 구성된 부대를 이끌고 무사이르 Musair 시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높은산이라는 천혜의 방어환경에 둘러쌓여 마음을 놓고있던 방어자들에게 앗시리아의 공격은 전혀 기대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우라르투인들의 신 할디 Haldi 의 고향이자 우라르투의 왕들이 전통적으로 대관식을 올렸던 이 도시는 철저히 파괴되었으며, 사르곤은 엄청난 약탈품을 가지고 앗시리아로 돌아갔습니다. 비록 사르곤의 비문은 이번 우라르투 원정이 완전히 완수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이 왕국은 아르메니아인들의 침입에 의해 멸망하기까지 한 세기를 더 연명합니다. 그렇긴 하지만 사르곤이 그들에게 가한 일격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우라르투와 앗시리아간의 전쟁은 벌어지지 않았으니 사실상 사르곤이 완전한 승리를 거둔 셈이었으며 이제 근동에는 더 이상 앗시리아의 헤게모니에 대항할 세력이 없었습니다.

 

우라르투에 대한 승리로 한숨 돌리게 된 사르곤은 이제 남쪽으로 시선을 돌려 바빌론의 므로닥 발라단 문제를 처리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의 제국의 모든 자원과 인력을 동원했지만, 칼데아인들을 정복하는 데에는 기원전 710년부터 707년에 이르는 3년의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북부 바빌로니아의 도시들과 수도에서는 앗시리아인들을 해방자로서 환영했는데, 이는 칼데아인들의 오만방자함에 대부분의 바빌로니아인들의 마음이 돌아섰기 때문이었습니다. 기실 북부바빌로니아인의 지원은 앗시리아가 멸망할때까지 계속되었는데,이곳의 바빌로니아인들은 강력하고 안정적인 앗시리아의 지원을 칼데아인들의 무질서보다 선호했습니다. 기원전 707년, 앗시리아 군대는 므로닥 발라단의 고향부족을 침공했으며 그는 다른날에 싸울것을 기약하며 엘람지역으로 도망갔습니다. 사르곤은 혼란을 진압하기 위해 108,000명이 넘는 칼데아인과 바빌로니아인을 다른 곳으로 강제이주시켰습니다.

 

사르곤의 재위기간에 벌어진 마지막이자, 그의 죽음을 초래한 군사작전은 아나톨리아로 들어오는 유목민족 키메르인들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아마 이들민족들이 앗시리아로 침입을 했기에 이에 맞선 것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키메르인들이 만든 세공품 등의 고고학적인 증거물들은 칼루 지역이 8세기 후반에 심각한 파괴를 당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미 심각하기 쇠약해진 우라르투는 그들의 진격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키메르인들의 이동이 티발 Tibal 지역에서의 앗시리아의 이익을 위협한다는 판단에 따라 사르곤은 그들에 맞서기 위해 기원전 705년에 북쪽을 향한 원정을 떠났습니다. 이 원정에서, 그는 아마도 그들에 맞선 전투와중에 죽었습니다. 그의 시신은 묻히지 않고 조鳥장에 처해졌습니다. 살아생전 그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후계자인 센나케리브 Sennacherib는 아슈르의 고위사제가 제시한 그러한 불명예스러운 장례가 신의 처벌로서 치뤄졌다는 데에 동의했습니다.

 

센나케리브 Sennacherib 의 원정들.

 

사르곤의 뒤를이어 앗시리아의 옥좌를 차지한 그의 아들은 이미 탁월한 군사적, 행정적 재능을 보여준 바 있었습니다. 그의 치세기간 중의 주된 프로젝트는 앞으로 앗시리아의 수도가 될 니네베를 재건하는 것이었습니다. 대외적으로 센나케리브는 이제는 앗시리아의 골치거리로 자리잡은 바빌로니아 문제를 해결하는데 상당한 두통을 겪었습니다.

 

초기의 앗시리아 왕들의 응징의 성격이 강한 원정 후, 앗시리아는 칼데아 부족들과 거칠고 간략한 평화조약을 맺었지만 그들은 므로닥 발라단이 타향에서 돌아온 기원전 703년에 다시 한번 반란을 터뜨렸습니다. 실상 "부족" 이라는 단어는 아주 부유하고 잘 단합되었으며, 그들의 리더쉽을 발휘해 메소포타미아의 남부 바빌로니아와 그 외 지역에서 바빌로니아의 지도력을 부활시키려는 세력의 본질을 은폐하지 못합니다. 앗시리아로서는 이러한 앗시리아에 대한 도전, 즉 바빌로니아 왕국에 개입하려는 그들의 시도를 막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엘람의 강력한 지원하에 므로닥 발라단은 재빨리 바빌로니아의 아람인들에게 앗시리아의 군대를 공격하라는 선동을 개시했습니다. 앗시리아 군대는 바빌론에 진인합 후, 남쪽의 그들 부족의 본거지로 진격해서 그 지역을 유린했습니다. "나의 작전기간 동안, 나는 포위하고...Bit Dakkuri...Bie-Sa1alli...Bir Amukkanni...Bit Yakin 부족의 흙을 완전히 갈아엎어버렸다. 나는 내 부하들에게 곡식과 야자열매, 그리고 그들의 경작지에서 추수한 수확을 먹였다. 나는 그들의 마을을 갈기갈기 찢어서 파괴해버렸다. 그것들은 이제 잊혀진 폐허가 되었다."

 

앗시리아인들은 208,000명의 피정복민을 강제이주시켰습니다. 이는 의심할 바 없는 효과적인 교훈이 되었으며 센나케리브는 앗시리아 관리들에게 칼데아인들과 바빌로니아 괴뢰왕실을 철저히 감시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이것은 적어도 외형적인 바빌로니아의 독립을 유지시켜주는 것이었으며 동시에 센나케리브가 적어도 이 단계에서는 바빌로니아인들을 신중하게 대하였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이제 다른 문제가 왕의 주의를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기원전 701년에 벌어진 센나케리브에 의한 라키시에대한 공성전.

 

블레셋 Philistia 왕국에서 유다의 히스키야 Hezekiah of Judas 가 주모자가 되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놀랄것도 없이 이 음모는 이집트의 지원을 받고 있었습니다. 히스키야는 기원전 712년, 사르곤의 마지막 원정 즈음부터 마련한 준비에 힘입어 이들 반란군을 얼마간 지휘할 수 있었습니다. 성서는 실로암 연못에서부터 예루살렘으로 물을 공급하는 터널을 건설하면서 보여준 그의 능력의 스케일과 범위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남기고 있습니다. 남아있는 증거에 의하면, 예루살렘이 포위당했을 때를 가정하여 유다지역을 무장시키고 전쟁에 대비하자는 확신에 찬 결정이 내려졌던 것 같습니다.


센나케리브는 기원전 701년에 재빨리 남쪽으로 군대를 이끌고 지중해 해안에 도착하여 적대적인 도시로 하여금 "그의 발을 껴안도록" 위협하는 군사 퍼레이드를 벌였습니다. 블레셋에서는 아스켈론과 에크론 Ekron  만이 저항을 계속했습니다. 아스켈론은 이집트군대가 진입하여 반란군을 지원하기 전에 항복해 버렸습니다. 엘테케 Eltekeh 에서 에크론과 이집트의 연합군은 패배를 당했고 그 이후 에크론도 항복해 버렸습니다. 이제 유다는 고립되었습니다. 유다의 내부로 진입하면서 센나케리브는 전지역에 계획적인 파괴를 수행하면서 우리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라키시 Lachish 를 포함한 46개의 "성벽을 가진 도시들" 에 대한 공성작전을 명령했습니다. (이것과 똑같은 전략을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약 1세기후에 사용했습니다.) 부대들 중 하나는 예루살렘을 공격하고 있었으며 이로써 센나케리브 자신이 이 도시에 주의를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성벽에 대한 토목공사가 시작되었지만, 포위망이 완성되기 전까지 공성전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왕의 술잔관리자인 라브쉬카 Rabshekah (그는 아마도 센나케리브의 동생인 "야전지휘관 turtan" 신-아-유수르 Sin-ah-user 일지도 모릅니다.) 는 예루살렘의 사람들에게 왜 히스키야와 도시가 항복해야 하는지를 간절히 설명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 Isaiah 로부터 용기를 얻은 히스키야는 이 제안을 거부했으나 결국 앗시리아인들과 협정을 맺고 말았습니다. 센나케리브의 "발을 껴안으면서" 히스키야는 복종의 의미로서 공물을 바쳤습니다. 앗시리아 군대가 물러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성경에 따르자면 "약속된 해방" 은 바빌론에서 반란이 다시터져, 앗시리아 왕의 군대의 주의가 온통 그쪽으로 가 있다는 소식을 통해 좀더 합리적인 것으로 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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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에 있었던 바빌론에 대한 작전이 다시 재개되었으며 칼데아인들의 땅은 다시 황폐화되었습니다. 므로닥 발라단은 엘람으로 도주하여, 그곳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습니다. 이제 센나케리브는 바빌론을 완전히 앗시리아의 통제를 받는 도시로 두기로 결심하고는 그 통치자로서 자신의 장자이자 왕세자인 아슈르-나딤-슘 Ashur-nadim-shum 을 임명했습니다. 이러한 심경의 변화는 당시 많은 앗시리아인들이 바빌론에 대해 느꼈던 모순된 감정을 대변하는 것이었으며 이제 그 남쪽이웃 (바빌론) 을 다스리는 북쪽의 권력 (앗시리아) 의 중심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제 제국의 두번째 도시로서 바빌론은 종교, 문화의 중심지로서 존경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격렬한 논쟁을 몰고 왔으며, 이제 앗시리아 궁정에는 친,반 바빌론파가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인정많은 정책이 펼쳐졌지만, 점점 늘어만가는 여러 문제들에 대처하기 위해 앗시리아왕의 이 지역에 대한 정책은 점점 적대적으로 변해 갔습니다.

 

엘람인들은 바빌로니아에 대해 음모를 꾸미는 칼데아인들의 지도자들과 그 부족들에게 성역이 되어 주는 등, 여러 방면에서 그들을 도왔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칼데아인들이 바빌로니아의 일에 끼여드는데 도움이 되었으며 결국 센나케리브는 기원전 694년에 엘람으로 곧장 쳐들어갔습니다. 페니키아의 가신국들에게서 배의 건조와 그 승무원들의 지원을 받은 그의 육해양면에서 이루어진 공격은 페르시아만의 석호와 엘람의 해안선지역을 따라 얼마간의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에 대해 엘람의 왕은 완전히 예상밖의 대응으로 나왔습니다. 바빌로니아의 앗시리아군의 부재를 틈타 그는 데르 Der 속주를 통하여 강력한 반격을 시도했습니다. 바빌론을 점령한 그들은 센나케리브의 장자를 사로잡고 (그는 아마도 후에 수사의 지하감옥에서 활줄에 목이 졸려 살해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왕좌에 자신들이 지지하는 인물을 앉혔습니다. 이제 앗시리아와 엘람 사이에는 미증유의 증오가 자리잡았습니다. 기원전 693년에 센나케리브는 그의 군대를 이끌고 데르 속주를 통과하여 엘람을 공격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바빌로니아에서 터진 칼데아인들의 반란에 직면했습니다. 2년 후, 엘람인들과 칼데아인, 그리고 아랍인으로 구성된 연합군은 티그리스강가의 Halulue 남쪽에서 앗시리아군대의 진공에 맞섰습니다. 뒤이어 터진 전투는 아마 고대시대에 벌어진 전투 중 가장 잔인한 것이었을 겁니다. 센나케리브는 이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

 

"아슈르 신이 지시하신 대로 위대한 군주인 나는 마치 허리케인과 같이 적군 대열로 돌격했다... 나는 그들을 도주하고, 후퇴하게 만들었다. 나는 화살과 투창을 이용하여 적 병사들을 꿰뚫었다. 엘람인들의 왕의 총사령관인 훔반 운다샤 Humban-undasha 와 그들의 귀족들을... 나는 마치 양처럼 그들의 목을 땄다... 나의 위풍당당한 기병대는 강처럼 흐르는 그들의 피바다속으로 진격했다. 나의 전차대의 바퀴역시 그들의 피와 기타 신체부분을 튀겨냈다. 나는 그 평원을 마치 추수를 하는 것처럼 베어진 그들의 전사들로 채웠다..." 비록 센나케리브가 승리를 주장하긴 했으나 이것은 피투성이의 승리였으며, 때문에 그의 군대는 심한 손실을 입어 다음해까지 전장에 투입할 수 없었습니다.

 

어쨋든 이제 엘람인들이 왕국 내부의 문젯거리인 칼데아인들을 지원할 수 없게 되자, 센나케리브는 대규모 작전을 실행하여, 바빌론의 공성전을 시작했습니다. 도시는 기아와 병마를 견디면서 9개월 간이나 앗시리아에 대항했습니다. 10년간이나 간헐적으로 계속되었으며, 자신의 후계자이자 장자까지 잃은 이 전쟁에서 마침내 승리한 센나케리브의 마음속에 동정심은 끼여들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는 그 위대한 도시전체를 약탈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마치 허리케인과도 같이 나는 그 도시를 폭풍처럼 공격해서 마침내 점령했다...그 주민들을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죽여, 그 시체를 도시전체에 채웠다... 도시의 건물이란 건물은 모두 기초부터 지붕까지 모두 파괴되었다... 나는 불로써 점령된 도시를 파괴하였다... 그들 사원의 토양조차 내가 흘려보낸 강물에 의해 씻겨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곳을 완전히 목장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러한 징벌에 간담이 서늘해진 바빌로니아는 그의 치세기간에는 물론이요,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거의 반란을 일으키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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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681년에 센나케리브는 그의 죽음을 맞았는데, 이는 오리엔트에서는 결코 드물지 않은 "암살" 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를 죽이고, 뻔뻔스럽게 그의 장례식에 참석한 암살자는 다름아닌 그의 두 아들들이었습니다.

 

에사르하돈 Esarhaddon 의 원정들.

 

그의 아버지가 암살됨으로서, 왕세자였던 에사르하돈은 스스로 군사지휘권을 확보하여 자신의 계승권을 보장시켜야만 했습니다. 국왕을 살해하고, 그들의 막내동생의 즉위에 반대하여 왕국의 옥좌를 차지하려는 두 아들들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으며, 이에 그들은 우라르투로 도주했습니다. 그의 군대의 선두에 서서 니네베에 입성하면서, 에사르하돈은 "그의 아버지가 물려준 옥좌에 기쁘게 앉았" 습니다. (기원전 680년 3월의 일.)

 

친 바빌로니아 파에 속해있었던 에사르하돈은 더 이상 임시방편적인 정책대신, 그 위대한 도시를 재건하는 주도면밀한 임무를 맡았습니다. 진지한 맥락에서 나온 영리한 지시는 센나케리브의 복수에 찬, 바빌론을 70년간 폐허로 두라는 명령을 뒤집었습니다. 파괴의 정도가 너무나 심각했기에 도시의 복구는 그의 치세동안 계속되었으나 에사르하돈은 살아생전에 바빌로니아의 수호신인 마르두크 Marduk 의 복귀를 보지 못했으며, 이제 바빌론의 마르두크에게 버쳐진 사원은 앗시리아에서 온 이방의 신을 위한 곳으로 바뀌었습니다. 그가 이집트원정에서 얻은 무수한 약탈품들은 이 재건을 위해 쓰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보상받지 못하였으니, 기원전 680년에 칼데아인들은 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결국 실패했습니다. 그 이후 바빌론은 그의 치세기간동안 잠잠했습니다.

 

미신에 의존하는 습관이 있었던 에사르하돈은 앗시리아의 서쪽과 북서쪽에서 터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거듭거듭 신의 계시를 모색하며 신의 자비를 탄원했습니다. 이제 키메리아인들의 압력은 아나톨리아에서 이란에 이르는 호를 따라 가해졌으며, 이들의 위협은 앗시리아에 새롭게 알려진 유목민족인 스키티아인 (멘엣암즈 제 137권을 "돈주고 사서" 보셈 - 본문에 이리 적혀있음..) 들과 얽혀 복잡한 양상을 띄게 되었습니다. 기원전 679년에 있었던, 타발 Tabal 에 대한 이 유목민족들의 합동공격은 에사르하돈에 의해 금방 패배로 돌아갔으나, 이들은 서쪽으로 이동하여 프리지아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란 북서쪽에서는 키메리아인들 대신 스키티아인들이 출현하여 우르미아 Urmia 호수 남동쪽에 만나이 Mannai 라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나라를 세웠습니다. 마필의 공급은 이외에도 남동쪽에서 광대한 이란고원에서도 곤란해졌는데, 이곳에서 예전에는 서로 다투던 메디아인들이 일종의 정치적 통일을 이루었기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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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움직임은 물론 앗시리아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기원전 676년에 벌어진 대규모 공격은 잔여 부족들의 경쟁을 이용해 아직 초기단계에 있었던 이들 민족들의 정치적 통합의 움직임을 질식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메디아인들의 미래가 매우 유망한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에사르하돈은 자신의 아들인 아슈르바니팔 Ashurbanipal 과 샤마쉬-슘-우킨 Shamash-shum-ukin 의 왕위계승을 보장하는 협정을 그들과 맺었습니다. 또한 에사르하돈의 딸과 스키티아의 지도자였던 바르타투아 Bartatua 와의 혼인은 스키타이 인과의 평화를 유지해,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던 메디아인들사이에 어렵게 유지하고 있던 균형을 깨지 않으려는 시도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전장에서 이름을 떨쳤던 지역은 서방이었습니다. 그가 옥좌에 무사히 앉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지중해 연안의 해상, 육상 무역을 보호하겠다고 주장한 덕분이었습니다. 이러한 지역에서 이집트의 세력을 영구히 근절하기 위해서는, 이집트 그 자체를 침공하는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이집트인들은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의 문제에 간섭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으며 특히 여태껏 앗시리아의 충성스러운 속주였던 티레에서 터진 대규모 반란은 이러한 의심을 증폭시켰습니다. 기원전 679년 초, 앗시리아 군대는 이집트 본토 밖에 위치하고 잇던 마지막 지역인 아르자니 Arzani 를 공격하여 점령했습니다. 이는, 지금까지는 이집트 국경내로의 진입을 보류했던 기존의 앗시리아 정책을 완전히 뒤집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스스로를 "이집트의 왕" 으로 선포한 에사르하돈은 이 지역을 영구히 차지할 의도가 없어 보였습니다. 이집트에 대한 공격은, 당시 이집트를 다스리고 있던 에디오피아 왕가가 민중들에게서 인기가 없다는 첩보를 받고 이루어졌습니다. 그 나라 전체에 퍼진 일관성없는 정책과 땅에 떨어진 충성심은 앗시리아로 하여금 군사작전을 통해 타하르 Taharqa (디르하가 Tirhakah) 를 대신하여 앗시리아의 입맛에 맞는 이집트 고유왕조를 앉힐 수 있는 기회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막상 작전을 시작하기 위해서 엄청난 규모의 앗시리아 군대를 유지하고 1천마일이 넘는 수송, 교통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물자가 필요했습니다. 비록 앗시리아 왕조의 비문에는 이러한 원정에 필요한 인력 등등의 자세한 사항이 나와있지 않지만, 아마 분명히 당시 최대규모로 확대되어 있던 "kisir sharutti" 의 모든 전력을 투입해야 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이미 앗시리아는 1,200마일에 달하는 북부와 동부 국경을 가지고 있었기에 많은 병력을 필요로 하는 이러한 새로운 원정은 거의 국운을 거는 시도였습니다. 필기년도가 기원전 670년으로 되어있는 출처가 불확실한 문헌에 따르자면, 에사르하돈은 "그의 귀족들을 대규모로 참수하였다" 고 합니다. 이는 아마도 그의 이집트 정책에 찬성하지 않는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사실 그의 죽음은 이러한 반대세력의 독살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타고난 나쁜 건강에 의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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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675/674년에 벌어진 첫번째 이집트 침공에 대해 기록은 침묵을 지키고 있는데, 이는 그가 이집트 국경지대인 실레 Sile 에서 패배를 당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3년후, 에사르하돈은 대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아랍 속주국들의 지원을 받으면서 시나이를 통과한 앗시리아군대는 이집트로 진입하여 많은 전투끝에 타하르를 축출하고 기우너전 671년 7월 11에 멤피스를 점령했습니다. 이 사건을, 그의 치세를 기록한 연대기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는 모든 신들의 저주를 받은 이집트와 에디오피아의 왕, 타하르에 맞써 매일 전투를 치루었다. 나는 내 화살로 그를 다섯번을 명중시켜 회복되지 않을 부상을 입힌 후, 멤피스를 포위하여 갱도와, 파성퇴와 사다리를 사용한 공성전 끝에 한나절만에 그 도시를 점령했다."   파라오 타하르는 도망치면서 그의 아들과, 하렘과 보물들을 앗시리아에 빼앗겼습니다. 에사르하돈은 남부 이집트에 앗시리아식의 행정체계를 확립하고 원주민 관리들을 통해 다스렸습니다.

 

왕은 앗시리아로 돌아왔으나 2년 후, 타하르의 귀환에 관한 첩보를 입수하고 곧바로 군대를 이끌고 삼각주지역으로 되올아왔습니다. 그 대군의 대열에 앞장서서 이집트로 돌아오는 도중에 그는 명확한 원인이 전해지지 않은 죽음을 맞았습니다.

 

아슈르바니팔 Ashurbanipal 의 원정.

 

에사르하돈이 고심하여 결정한 왕위계승방법에 따라 앗시리아 왕으로는 아슈르바니팔이, 바빌로니아 왕으로는 샴시 -슘-우킨 Shamash-shum-ukin 이 평화롭게 왕권을 물려받았습니다. 아슈르바니팔의 치세때 앗시리아의 힘은 절정에 달했으나, 그의 치세 말년에 결국 왕국의 쇠락으로 이어진 운명의 반전과 대규모 침공을 또한 겪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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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슈르바니팔.

 

그의 첫번째 군사문제에 대한 결정은 에사르하돈이 이집트에 파견한 군대의 행군을 계속하라는, 즉 아버지의 계획을 굳힌 것이었습니다. 이로서 남부 이집트에서 벌어지고 있던 타하르의 계획은 금방 진압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좀더 외진 곳에 앗시리아 수비대의 지원을 받는 지방군주가 옹립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수비대가 옛 파라오와 결탁했다는 증거가 발견되자 그들 수비대 모두는 니네베로 압송되었으며 이 덕분에 위기를 모면한 지방군주는 삼각주지역의 통치권을 굳히면서 네코 1세 Necho I 로 등극했습니다. 한편 강력한 새 파라오는 북쪽의 이집트 군대를 몰고 남쪽으로 진격하면서 멤피스의 앗시리아 수비대에 대한 공성전을 시작했습니다. 아슈르바니시팔은 기원전 663년에 직접 군대를 이끌고 멤피스를 구원한 후, 남쪽으로 이동하여 "폭풍우" 와 같이 테베를 공격하여 약탈했습니다. 하지만 이집트인들이 저항을 시작했다는 소식에 고무되어 티레와 아르밧 Arvad 에서도 반란이 터지자 그 군대의 큰 부분을 그들을 포위하기 위하여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메디아에 대한 대규모 공격은 기원전 665년에서 655년 사이의 어느 시점에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아슈르바니팔은 파르수아 Parsua 를 가신국으로 삼은 그 통일왕국과 대적하게 되었습니다. 실패로 끝난 기원전 653년에 있었던 메디아 왕 크샤트리타 Khshathrita 의 니네베에 대한 공격은 메디아 군대의 후방을 공격한 앗시리아의 동맹인 스키타이인들에 의해 패배로 끝났습니다. 적군과 그 국왕이 제거되자 스키타이인들은 메디아 본토로 이동하여 28년간 그 지역을 통치하게 됩니다. 메디아가 무력화되고 스키타이인들이 계속 동맹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아슈르바니팔은 그의 군사력을 엘람과 비빌론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집중시킬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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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시리아군대가 이집트에 머무르고 있던 기원전 665년 당시, 엘람인들은 센나케리브 시절때부터 계속 바빌론을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이 공격은 금방 격퇴되었지만, 두 왕국간의 관계는 더욱 나빠졌습니다. 10년후 이집트에서 앗시리아인들을 몰아내기 위한 봉기가 터지자, 기회를 노리고 있는 엘람인들은 기원전 655년에 바빌론으로 쳐들어왔으며 이는 앗시리아의 군사적 자원이 얼마나 넓은 지역에 흩어져 있었는지 시사해 줍니다. 이집트에 주둔하고 있었던 앗시리아의 세력은 하루살이와도 같았으며 강력한 군대의 지원 없이는 존속할 수 없었습니다. 이 공격에 대한 전략적인 어려움과 앗시리아 군대의 현실적인 한계에 대한 자각은 아슈르바니팔로 하여금 과감한 결단을 촉구했습니다. 그는 기원전 651년에 터진 이집트의 반란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주력부대를 보낼 수 없었으며, 이는 엘람인들에 대한 공격과, 바빌론의 내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제 아슈르바니시팔은 "두 대륙" 에 걸친 왕국을 포기해 버렸습니다.

 

전술한 기원전 655년의 엘람인들의 공격은 바빌로니아를 향한 것이었으며, 이들은 감불루 Gambulu 의 아르메니아 부족의 지원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이 공격은 아슈르바니팔이 대군을 끌고 남쪽으로 내려와 데르 Der 속주로 이들을 몰아넣음으로서 중지되었습니다. 앗시리아 군대는 엘람인들을 후퇴시켰으며 아슈르나시팔의 군대는 엘람인들의 왕인 테우만 Teumann 의 뒤를 추격하여 그로 하여금 수사 Susa 의 평원의 을래 Ulai 강에서 버틴다는 결심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곧 대전투가 앗시리아 군대가 엘람인들의 방어대열로 돌격하면서 벌어졌습니다. 매우 치열한 전투끝에 엘람인들은 앗시리아의 보병과 기병대에 의해 강 반대편으로의 퇴각을 강요당했으며 을래강을 건너면서 그들 중 수천명이 익사했습니다. 테우만은 전차를 타고 도망치던 중에 사로잡혀서 참수되었습니다. 이러한 승리에도 불구하고 아슈르바니시팔은 이 지역을 완전히 합병할 수 없었고, 단지 두명의 엘람인 가신국 지도자들에게 통치를 맡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후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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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래강에서 앗시리아군에 의해 쫓겨 강에 뛰어드는 엘람 병사들.

 

기원전 652년에 엘람인들과의 공모끝에 샴시-슘-우킨이 바빌론에서 도전의 기치를 내걸면서 지독한 내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빌론 왕에 의해 고안된, 이집트와 엘람인들의 국가등을 포함한 가신국들을 끌여들이려는 음모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다시 한번 앗시리아군대는 수세기동안 그들의 선조들이 걸었던 길과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즉.. 바빌론과 보르시파에 대한 공성전이 시작된 후, 아슈르의 군대는 삼각주의 소택지를 통과하여 칼데아인들의 땅을 마지막으로 황폐화시켰습니다. 엘람인로부터 지원이 있을거라는 희망은 그곳에서도 내전이 터졌다는 소식이 반란군들에게 전해지면서 사그라들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완전히 고립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계속되었으며 전투는 끝이 없었" 습니다. 마침내 기원전 648년 바빌론의 인구는 식인食人행위에 의해 감소되었으며, 샴시-슘-우킨은 항복했으나, 그 자신은 불타는 왕궁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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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듬해, 아슈르바니팔은 군대를 이끌고 자신의 형제를 지원한 세력을 응징하러 떠났습니다. 아랍 부족에 대한 몇몇 사막에서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기는 했으나, 기원전 639년에 이르러서야 아슈르바니팔은 엘람 문제네 대한 "최종적 해결-_-" 을 시작하기로 결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엘람인들은 막장스런 쇠락의 시기로 접어들고 있었으며 내전과, 왕실의 투쟁등등의 홍역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북쪽 국경은 이미 페르시아인들의 침범을 당했는데, 이제 그들은 이 지역을 자신들의 최종적인 고향으로 삼았습니다. 마침내 최종적인 대규모 공격이 엘람인들에게 내려졌으며, 앗시리아에 맞서는 세력은 뭐든지 박살내는 공격에 의해 엘람은 체계적으로 황폐화되었습니다. 이에대한 승리에 찬 아슈르바니팔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

 

"...한달하고도 25일 걸리는 행군을 통해 나는 엘람지역을 완전히 파괴하였다. 그 위에는 소금과 sihlu(?) 가 뿌려졌다... 나는 수사와 마다크투 Madaktu, 하맛 Hamath, 그리고 많은 도시들의 보화를 가지고 앗시리아로 돌아왔다... 사람들과 소와 양들의 이동에서 나는 소음, 헤여졌다가 다시 만나는 사람들의 반가운 외침... 나는 그 모든 것들을 자신들의 고향에서 추방시켰다. 대신 야생 당나귀, 가젤등등의 짐승들을 그곳에 풀어 마치 그것들의 집처럼 만들었다."

 

이로써 비록 앗시리아의 성공이 정점에 달한 것처럼 보였지만, 앗슈르바니팔의 나머지 치세에 대한 기록은 비문에 나와있지 않습니다. 앗시리아 제국의 운명에 대한 나머지 치세에 대한 상세한 문자기록은 아직도 침묵속에 잠들어 있습니다.

 

"니네베가 폐허속에 묻혔도다."

 

감질나는 단서들만이 아슈르바니팔의 마지막 12년동안의 치세에 대한 정보를 우리에게 남겨주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대규모 군사작전의 실패나 앗시리아 자체의 내분등등에 대한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이야기는 이러한 매우급격한앗시리아군대의 쇠락이 서방의 제국을 덮친 스키타이인들의 잔인한 내습에 기인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후대의 기독교 문필가였던 에우세비우스 Eusebius 는 이들 (스키타이인) 에 관해 언급하기를, 이들이 기원전 633년에 이미 팔레스타인에 당도했으며, 이집트의 파라오가 이들에게 뇌물을 안겨 이들의 더 이상의 진격을 막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언급은 이미 이 시기에 앗시리아인들이 이집트지역에서 철수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헤로도토스는 주장하기를, 아슈도드 Ashdod 가 이집트인들의 공격에 의해 대략 기원전 635년경에 함락되었다고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집트인과 앗시리아인들간의 적개심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여러 정황들을 미루어 볼 때, 이 두세력간에 맺어진 친선으로 인해, 이집트 토착세력이 앗시리아세력을 평화로운 방법으로 대체한 것으로 보이는데, 아마도 앗시리아 군대는 훨씬 더 중요한 본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집트의 군수물자들을 철수시키고 이지역의 군사적인 행동을 자제한 것으로 보입니다. 비록 아슈르바니시팔의 후계자 중 한명이 (아슈르바니시팔이 죽은 기원전 627년경에 시작되어) 기원전 622년경까지 서 유프라테스지역에 대한 군사작전을 전개한 것으로 보이지만, 앗시리아는 더 이상 동지중해 해안에 대한 작전을 수행할 능력은 없었습니다.

 

아슈르바니시팔이 죽고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그의 두 아들, Ashur-etil-ilani 와 Sin-shar-ishkun 은 서로간에 전쟁을 벌였습니다. 새로운 왕이 그의 형인 Ashur-etil-ilani 에 대항하여 얻은 승리는 바빌론의 왕좌를 주장하기 위해 칼레도니아인들이 마지막으로 벌인 성공적인 침공에 의해 흐려졌습니다. 기원전 626년에 "그 누구의 아들도 아닌" 나보폴라사르 Nabopolassar 는 바빌론의 왕좌를 점령하고는 그곳에서 대관식을 올렸습니다. 앗시리아는 아직도 북부지역의 도시들을 차지하면서, 군사적, 정치적으로 유효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보폴라사르를 몰아낼 능력을 가진 지도자의 부재는, 앗시리아 군대의 명성에 창백한 그림자가 지게 만들었습니다. 간헐적인 전쟁이 기원전 616년까지 계속되었으며, 그 시대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바빌로니아의 연대기에 의하면, 이제 나보폴라사르는 앗시리아에 대해 공격을 가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고 합니다. 강력해지는 바빌론의 힘을  생각해 볼때 이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기는 하지만, 결국 이러한 대치상태는 해결을 보지 못한 채 상당한 시간을 끌었습니다. 결국 나보폴라사르와는 상관없이 거의 독자적으로 벌어진 것으로 보이는 메디아인들의 침공이 최종적으로 앗시리아의 운명을 결정지었습니다.

 

스키타이인들의 멍에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킨 메디아인들은 그들의 왕 키아크사레스 Cyaxares 밑에서 그들의 전통적인 "모든 병과가 혼합된" 군대를 앗시리아 군대의 스타일로 재편했습니다. 기원전 615년, 메디아인들은 앗시리아를 기습해, 동부의 도시인 아라파 Arrapha 를 포위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듬해에 앗시리아의 수도를 향해 곧장 진격했습니다. 니네베의 강력한 방어시설에 위축된 그들은 그 대신 남쪽으로 진격하여 다름아닌 아슈르를 공격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그 성을 파괴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민의 상당수가 학살의 제물이 되었고, 도시는 약탈되었으며 살아남은 주민들은 끌려나왔다." 파괴된 도시의 성벽 아래에서 바빌론과 메디아 사이의 동맹이 체결되었으며, 이에따라 키아크사레스의 딸인 아미티스 Amitis 는 나보폴라사르의 아들인 네부카드네자르와 혼인을 맺었습니다. 2년 후, (이제는 이집트가 앗시리아의 편에 서 있었지만,) 두 동맹국은 이제 니네베 자체에 대한 공성전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최근에 밝혀진 고고학적 연구에 의하면, 성경의 "나훔" 장에 묘사된 메디아인들과 바빌로니아인들의 전략은 정확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여러작전들이 복합적으로 수행되었는데, 코스르 Khosr 의 강물을 돌려 성벽을 쓸려나가게 한 후, 니네베의 북쪽과 남쪽성벽에 대해 광범위한 공격이 벌어졌습니다. 남서쪽의 할지 Halzi 문과 북쪽의 아닷 Adad 문에 대한 굴착작업은 처음에는 7미터 폭을 견지하며 이루어졌으나, 방호를 위해 점차 좁아져 나중에는 결국 2미터 폭으로 줄어들었습니다. 한 유골에 대한 조사에서 발견된, 팔뚝에 대한부상을 피하기 위해 대신 가슴에 찔린 상처의 증거가 마침내 다가온 마지막 일전의 잔인함을 웅변하고 있습니다.

 

나보폴라사르의 말이 담긴 점토판의 글을 옮긴 바빌로니아출신의 작자불명의 갈대 "qan tuppi" 에 남은 기록이 근동지방에서 3세기 동안 영화를 누린 제국의 그림자를 기리는 비문으로서 현재까지 남아 있습니다.

 

"...나는 Subatum (앗시리아) 를 도살했으며, 그 적대적인 땅을 폐허와 시체로 가득 채웠다... 앗시리아인들은 지난날 모든 사람들을 지배하고, 그들에게 멍에를 지우고 모욕을주었다. 그러나 나는 돌아와서, 그 멍에를 뒤엎었다."

 

비록 메디아와 바빌로니아의 군대가 약탈품과, 시장에 노예로 팔 포로들을 데리고 돌아갔지만, 황량한 거리에는 먼지만이 흩날렸고, 텅빈 왕궁과 사원들은 어둠에 휩싸였습니다. 2백년 후에 이곳을 지난 크세노폰 역시 이제는 잊혀진 니네베의 유적을 보았습니다. 앗시리아의 폐허위에서 어떠한 사람도 앗시리아의 멸망을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출처 : 오스프리 출판사의 엘리트 시리즈 중 "The Ancient Assyrians" 의 불법날림번역입니다...

 

부디 리플 좀...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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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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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Τιταυιζ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7.11.02 쑤레빠님// 기대에 많이 모자라겠지만, 연표랍시고 한번 만들어 덧글로 달아놓았습니다. 다른 오스프리 책들과는 다르게 이 책에는 본문에 연표가 없군욥... 고기님// 헥헥헥 ㅠㅠ 캄사합니다;;; 성격파탄님// 저도 지금처지가 처지라 새벽마다 번역하는게 일입니다. 근데도 영어실력이 전혀 늘지가 않으니...
  • 작성자creios | 작성시간 07.11.02 정말 재밋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평소에 오리엔트를 최초로 통일했다던 앗시리아 제국에 대해 알고 싶었거든요.
  • 작성자Τιταυιζ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7.11.03 creios님// 저걸 재밌게(...) 읽으셨다니 진정 용자시군요^^;; 통일은 통일인데... 아주 불안정한 통일이었죠. 주위에 워낙 본좌들이 많으니...
  • 작성자안세 | 작성시간 07.11.08 풉..대단하시군요. 지대 근성본좌이십니다.
  • 작성자타메를랑 | 작성시간 10.11.26 훌륭한 게시물 잘 읽었습니다. 아시리아에 대해서 자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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