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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부르의 도전-파니파트 전투

작성자hyhn217|작성시간06.06.03|조회수1,403 목록 댓글 1


 

 자히르 앗 딘 무함마드 바부르(Zahir-ud-Din Muhammad Babur) 는 티무르의 후예이자, 중앙아시아의 페르가나 지방의 왕이었다. 그는 11살에 왕위에 올라, 수많은 경쟁자들을 무찔러야만 했다. 이러한 전투 동안 그의 군사적 능력은 일취월장, 티무르 제국의 영광이 담겨진 도시이자 해골탑의 비극을 당하기도 했던 사마르칸트를 넘보기에 이른다. 당시 사마르칸트는 우즈벡 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티무르로부터 왕관을 받는 바부르와 그의 아들 후마윤>

 

  바부르는 1497년 사마르칸트를 탈환하는데 성공하나 우즈벡인들의 반격으로 얼마 안가 쫓겨나오게 되었다. 이 패배는 그가 사마르칸트에서 격을 패배의 시작이었다. 이후 다시 한번 점령했으나 우즈벡 인들에게 패해 도망쳐야만 했고, 그는 아프가니스탄으로 가 카불을 점령했다. 이후 카불은 그의 근거지가 된다.

 
 <병사들과 동굴 밖에서 밤을 지새우는 바부르. 눈이 오는 날, 그는 혼자 동굴에서 머무르기보다는 동굴 밖에서 병사들과 같이 눈을 맞는 것을 선택했다.>

 
 <페르시아의 사파비조의 샤 타흐마스프 1세. 어린 나이에 제위에 올라 반란자들을 무너뜨리고 샤 자리에 오른다. 서예와 미술 등 예술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예술가들과 서예가들을 후원했다. 그의 통치 시기의 페르시아 예술은 절정을 누렸다>

 

 바부르는 사마르칸트를 탈환하기 위해서라면 신앙도 포기할 수 있었다. 그는 페르시아의 샤이자 시아파 교도였던 타흐마스프 1세의 도움을 얻기 위해 수니 신앙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다시 한번 도시를 점령하는데 성공했으나, 페르시아의 군대가 떠나가자마자 우즈벡 인의 반격에 밀려 떠나고야 만다. 그에게 사마르칸트는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1514년 이후 그는 중앙아시아에 대한 정복 대신 인도로 관심을 돌린다.

 

 

<델리에 있는 쿠트브 미나르. 노예왕조의 건국자인 쿠트브 앗 딘 아이바크가 세웠다. 높이 72.5m>

 

 당시 북인도에는 노예 왕조를 시작, 힐지 왕조, 투글루크 왕조, 사이드 왕조등이 순서대로 세워졌다. 이 왕조들을 이은 로디 왕조는 아프간계의 왕조였으며, 술탄 이브라힘 로디가 통치하고 있었다. 그는 귀족 세력들의 힘을 꺾기 위해 귀족들을 암살하기 시작했다. 라호르 총독이자 그의 숙부였던 다울라트 칸은 술탄의 협박에 자신의 아들을 보냈으나, 로디는 그의 조카에게 반역자의 시신을 보여주며 위협한 뒤 그를 가두었다. 다울라트 칸과 귀족들은 위기를 느끼고 바부르에게 개입을 요청했다.

 

 
1523년, 바부르는 원정에 나선다. 1525년 펀잡을 장악한 그는 델리로 향했으며, 다음해 4월 1일 파니파트에 도달한다. 그의 병력은 1만 2000여명. 한편 바부르군에게 전해진 소문으로는, 그를 무찌르기 위해 이브라힘 로디가 동원한 병력은 코끼리 1000마리에 10만의 대군이라고 전해졌다. 그러나 바부르에게는 인도에는 알려지지 않은 전력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화기였다.

 

 바부르는 재빨리 방어대형을 갖추었다. 700대의 수레를 원형으로 배치하고 총병들과 대포를 수레 뒤에 배치했으며, 기병대가 빠르게 움직일 수 있도록 통로를 일정한 간격마다 배치했다. 4월 9일 이브라힘 로디는 기병대를 보냈는데, 이 기병대가 바부르의 이름난 기병대를 패퇴시켰다. 로디군은 의기양양해져 공격을 결의했다. 그러나 이는 바부르의 미끼에 불과했다.

 

 

 <파니파트 전투>

 

 1526년 4월 21일 아침, 이브라힘 로디의 군대는 바부르의 요새에 돌격했다. 350여미터쯤 되자 바부르의 포병대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 한번도 이런 포성을 들어보지 못한 로디군은 당황했고, 코끼리는 통제를 잃기 시작했다. 로디군은 규모는 컸으나 통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그 많은 병력 중 진짜 전투에서 싸운 병력은 6000여명에 불과했다.

  바부르는 재빨리 로디군의 측면을 공격, 몽골의 강한 활로 로디군을 공격했다. 로디군은 우익을 돌파하는데 성공했으나, 중앙과 측면의 대포와 화승총, 활과 바부르군의 강한 공격으로 인해 사기가 떨어지고 전열이 붕괴되어 버렸다.

 <바부르의 기병대와 북인도의 기병대, 그리고 바부르의 화승총병>

 

 4월 21일 정오, 이브라힘 로디가 전사함으로써 전투는 끝난다. 이브라힘 로디의 시체는 바부르에게로 끌려와서 참수되었다. 로디군은 2만의 전사자를 냈으며, 바부르군은 400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비록 바부르군의 피해가 컸다지만, 북인도의 패권은 이미 명실상부하게 바부르의 손 안에 들어와 있었다.

 

 승리한 바부르는 아들 후마윤을 보내 아그라를 점령하게 하고, 자신은 델리로 향한다. 후마윤은 바부르에게 코이누르(Koh-i-noor)라는 다이아몬드를 바친다. 이 다이아몬드의 가치는 '세계 모든 사람들이 이틀 반동안 지출하는 액수' 에 달한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바부르는 이 다이아몬드를 다시 후마윤에게 준다.

 

 <코이누르. 후에 무굴 제국이 약해졌을 때, 페르시아의 정복자 나디르 샤는 무굴 제국에 대한 공격을 개시한다. 그가 델리를 점령하고 무함마드 샤를 만났을때, 그는 샤에게 이 다이아몬드를 요구한다. 무함마드는 어쩔수 없이 이 다이아몬드를 내주었고, 나디르 샤는 이것을 보자 감탄해서 '이것이 정녕 빛의 산(Koh-i-noor)이로구나' 라고 외친다. 이 다이아몬드의 이름 코이누르는 거기서 유래되었다>


<영국 왕관의 코이누르>
 
  파니파트의 승리자, 바부르는 1526년 4월 24일 델리에 입성한다. 무슬림들의 오랜 관례에 따라 델리의 대모스크에서 그의 이름이 인도의 군주로 언급됨으로써 무굴 제국의 화려한 역사가 시작된다.  

 

 

 

ps : 어휴, 나는 이제는 디시 역갤은 안갈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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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한교 | 작성시간 06.06.03 오오~~ 재밌게 봤스빈다. 관심있는 부분이었는데... 감사..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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